4. 대표성을 가진 주체 만들기
4.3. 소외를 정당화하는 과학적 지식
새로운 과학기술 거버넌스에서 시민참여단이 대표성을 확보하며 의사 결정의 주체가 되었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특정 집단에 대한 소외도 발생했다. 신고리 공론화에서 원전 인근 지역 주민들과 한국수력원자력
노동조합(이하 한수원 노조)은 새로운 거버넌스에서 소외된 집단이었다.
신고리 공론화 이전 원자력 관련 시설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에서 지역 주민들은 이해당사자로서 정부와 직접 대치하거나 협상하는 중요한 역할 을 담당했다. 그러나 신고리 공론화에서 이들 지역 주민들은 정책결정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14 한편 한수원 노조는 신고리 5·6 호기 건설 중단으로 인한 직접적인 경제적 피해를 부담해야 했음에도 지 역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신고리 공론화에 참여할 수 없었다.
신고리 공론화에 참여할 수 없었던 지역 주민들과 한수원 노조는 신고 리 공론화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한수원 노조는 신고리 5·6호기의 공사 가 중단될 시 일자리를 잃거나 경제적인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입장이었 다. 신고리 공론화 방침이 발표된 후 신고리 5·6호기의 건설이 일시중단 이 결정되는 과정에서 신고리 공론화에 대한 한수원 노조의 불만이 표출 되었다. 신고리 공론화를 위해서는 진행 중이던 신고리 5·6호기의 건설 을 일시중단해야 했는데, 이는 한수원 이사회에서 결정해야 하는 사안이 었다. 7월 12일 국회에서 열린 ‘탈핵, 에너지 전화시대 원자력 안전 현안 과 과제’ 정책토론회에서 한수원 사장 이관섭은 “최근 원전 안전문제에 대해 송구하며, 신고리 5·6호기 건설중단은 공론위에서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도울 것”이라며 신고리 5·6호기 건설 일시중단을 시사하는 발언 을 했다(에너지경제, 2017). 실제로 7월 13일 한수원 이사회는 경주 본 사에서 공사 일시중단을 결정하기 위한 이사회를 개최할 예정이었다. 이 사회의 결과가 일시중단 쪽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한수원 노조는 경주 본사의 본관은 점거하고 출입문을 통제하며 이사회가 개최되는 것을 물 리적으로 방해했다(연합뉴스, 2017d). 결국 이날 한수원 이사회는 무산 되었으나, 다음날인 14일 한수원 이사회는 경주의 스위트 호텔에서 기습 적으로 이사회를 개최해 신고리 5·6호기 건설의 일시중단을 의결했다(한 겨레, 2017d). 이에 한수원 노조는 15일 신고리 5·6호기 건설 현장에서
100여명이 참석한 집회를 열어 이사회의 결정을 규탄하고 정부를 비판
하는 목소리를 냈다. 김병기 노조위원장은 “한수원에 건설 일시 중단을 요청한 산업통상자원부에 대한 항의 등 대정부 투쟁을 시작하겠다”고 밝
14 신고리 공론화 과정에서 지역 주민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신고리 공론위는 지역 간담회를 개최하고 시민참여단에게 지역 주민들의 의견 을 담은 영상을 상영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그러나 당사자성이 높은 지역 주민 에 대한 가중치를 부여했어야 했음에도 신고리 공론위가 ‘시민참여단’의 구성하 는 과정에서 기계적인 중립성을 고수했던 것은 부적절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 다(신준섭, 2017; 이광일, 2018; 이영희, 2018; 조희정, 2018; 채종헌, 2017).
혔으며,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기도 했다(연합뉴스, 2017e). 한수원 노조는 신고리 공론화를 저지하기 위한 법적 투쟁도 벌였다. 한수원 노 조는 8월 1일 ‘신고리 공론위의 활동정지 가처분 신청’과 8월 8일 ‘신고 리 공론위의 구성행위 및 훈령에 대한 취소소송과 집행정지 신청’을 제 기하기도 했으며, 한수원 이사회의 결의에 대한 무효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신고리 공론위, 2017a: 64). 이들은 신고리 공론화 밖에서 집회와 법적 투쟁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할 수 밖에 없었다.
지역 주민들 역시 한수원 노조와 같이 신고리 공론화에서 소외되었다.
문재인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전면에 내세우며 신고리 5·6호기의 건설 중단이 거론되던 시점에서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주민들은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반대 범군민대책위원회’(이하 범군민대책위)를 구성
했다. 이후 신고리 공론화 방침이 발표되자 서생면 주민들은 이 방침에 반발했다. 신고리 공론화 방침 발표 후 서생면주민협의회 이상대 위원장 은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무슨 근거로 공사를 중단하는지, 법적 근거 를 가지는지, 왜 공론화 절차 기간에 공사를 멈춰야 하는지를 알아보는 등 정부의 이번 발표와 관련해 대책회의를 하고 있다”며 “건설이 중단되 면 천문학적인 매몰 비용이 발생하고, 경제 위축으로 주민 피해가 불가 피하다”고 주장했다(노컷뉴스, 2017a). 또한 6월 28일 범군민대책위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읍 남창옹기종기시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신고 리 5,6호기 건설 중단 반대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모든 지역 주민들이 탈핵 정책과 신고리 공론화 방침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울주군 서생면과 인접한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주민들은 신고리 5·6호기의 건설 중단을 환영했다. 조창국 장안읍 주민자치위원회 고문은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원전의 위험을 무릅쓰고 살아온 주민 들 입장에서 원전 추가 건설을 중단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라고 밝혔 다(매일경제, 2017). 부산과 울산 등 지역의 시민단체들은 문재인 대통 령의 대선 공약대로 신고리 5·6호기 건설의 전면 백지화되지 못한 것 에는 유감을 표하면서도 신고리 공론화 방침에 대해서는 지지를 표명했 다(경남매일, 2017; 노컷뉴스, 2017b).
지역 주민들은 신고리 5·6호기의 건설 여부에 따라 위험과 경제적 영 향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었고, 신고리 공론화와 관련된 갈등과 대립 을 직접적으로 겪는 집단이었다.그래서 시민참여단에 신고리 5·6호기에 인접한 부산·울산·경남 지역 주민들이 더 많이 선발되어야 한다는 주장
이 제기되었다. 신고리 5·6호기의 건설 중단을 주장하는 측은 지역 대표 성의 문제를 제기했으며, 건설 재개 측은 지역주민 150명을 포함하는 방안을 요구했다(신고리 공론위, 2017d : 65-66). 그러나 신고리 공론위 는 “국민 의견 수렴이라는 취지에 부합하지 않다는 점”과 특정 집단에게 가중치를 부여하는 것이 대표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우며 특정 집단에 대한 가중치를 두지 않았다(신고리 공론위, 2017d : 66-67). 또 한 오리엔테이션 직후 시민참여단 중 울산 지역 주민의 수(6명)가 대전
(19명)과 광주(15명)에 비해 훨씬 적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신고
리 공론위는 이 같은 비판에 특정 지역에 편중되지 않도록 시민참여단을 구성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대응했다(신고리 공론위, 2017a: 171).
정부에 의해 신고리 5·6호기의 문제가 국가적 차원의 문제로 규정된 상황에서 신고리 공론위는 통계적 대표성이 있는 시민참여단을 구성하고 자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정 집단에 가중치를 두어 시민참여단을 구 성할 경우, 표본인 시민참여단의 결론이 모집단인 국민 전체의 결론으로 통계적 측면에서 정당화 될 수 없었다. 신고리 공론위에게 ‘노조’나 ‘지 역 주민’이라는 정체성은 신고리 공론화의 대표성을 훼손할 수 있는 요 소였다. 결국 신고리 공론위는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인 한수원 노조와 지 역 주민들을 소외시킴으로써 시민참여단의 통계적 대표성을 확보했다.
그러나 공론화가 “특정한 공공정책 사안이 초래하는, 혹은 초래할 사회 적 갈등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일반 시민과 이해관계자 및 전문가들의 다양한 의견을 민주적으로 수렴함으로써 정책 결정에 대한 사회적 수용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일련의 절차”라는 점에서 지역 주민들 과 한수원 노조의 소외는 신고리 공론화의 정당성을 훼손할 가능성이 있 었다(사용후핵연료관리공론화TF, 2008; 이영희, 2018 재인용). 신고리 공론위는 통계적 대표성에 치중하여 이 부분을 간과했으며, 또다른 사회 적 갈등을 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