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숙의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
5.2. 전문가들의 지위와 전문성에 대한 의존
신고리 공론화의 특징 중 하나는 전문가들과 이해관계자의 구분이 분 명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신고리 5·6호기 건설 여부와 관련된 전문가들이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고리 5·6호기에 건설 재개를 주장하는 원자력계 전문가들인 대학교수와 연구원들은 원자력 산 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원자력 관련 산업이 성장하면 동시에 원자력과 관련된 연구가 활성화되기 때문에 연구를 수행하는 전문가들에 게 이익이 발생한다. 실제로 한국수력원자력에 경우 원자력 산업계는 여 러 대학의 원자력과 관련된 연구소를 후원하고, 대형 연구 과제의 주관 기관으로써 연구자들에게 연구비를 지원한다. 한편 신고리 공론위는 신 고리 5·6호기 건설 중단을 주장하는 시민단체들 역시 이해관계당사자로 분류했다. 신고리 5·6호기의 건설 여부는 탈핵 정책의 일부로서 ‘전국적 이해관계를 가지는 갈등’으로 취급되었다.17 이와 같은 ‘전국적인 이해관
17 전국적인 이해관계를 갖는 갈등은 이해관계인의 범위에 따른 갈등유형의 분 류에서 공공정책이나 사업이 특정한 개인이나 지역에 특별히 중한 영향을 미치
계를 갖는 갈등’의 경우 일반 시민들이 모두 동일한 정도의 관심과 우려 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환경단체와 같은 시민단체가 일부 활동적인 국민들의 이해관계를 대표해서 행동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지속위,
2005: 310). 또한 정책결정을 둘러싼 갈등은 자신들의 해석을 정당화시
키고 상대방의 해석을 부정하려는 해석들 간의 경쟁과정 또는 헤게모니 쟁탈전의 양상을 보이기도 하는데, 이때 시민단체 역시 자신들의 ‘가치 관적 압력단체’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강상규, 2005; 지속위, 2005:
248).18 신고리 공론위는 원자력계 전문가들과 시민단체들은 모두 이해
관계자로 분류했으며, 이들은 전문가와 이해관계자의 역할을 모두 수행 했다.
전문가들과 이해관계자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전문가들은 신고리 공 론화에서 더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참여적 거버넌스에서는 시민들이 정책결정의 주체가 되면서 기술관료적 거버넌스에서 정책결정 을 담당했던 전문가들은 다른 역할을 맡게 된다. 일반적으로 전문가들은 시민들의 조력자의 위치에서 시민들의 숙의 과정을 돕기 위해 정보를 제 공한다. 구체적으로 숙의 과정에 사용되는 자료집을 만들거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질의응답을 담당한다. 시민참여 내에서 전문가들은 직접적 으로 정책결정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그 역할이 축소된 것 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전문가들은 정책결정에서 어떠한 방식 으로 어떠한 내용을 논의할지 등을 정하는 과정에 깊이 관여할 수 있기 때문에 참여적 거버넌스 내에서의 전문가들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는 유 지된다. 신고리 공론화의 경우 전문가들이 이해관계자의 위치를 겸하게 되면서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전문가들이 이해당사자가 되면서 전문가들이 합의의 당사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신고리 공론화가 사 회적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이해당사자인 전문가들의 참여가 필수 조건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신고리 공론화에서 전문가들은 신고리 공론 화의 설계에 깊이 관여할 수 있었으며, 사회적 합의의 필수 조건이 되며 지 않고 전국의 국민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유형의 갈등을 의미한다(지속위, 2005: 309-310).
18 1990년대 초반 유입된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새로운 인식론적 태도는 환
경문제를 가치관의 문제로 인식하게 했다. 이러한 인식에서 환경운동은 기존의 자원이용행태를 지탱하는 가치관을 변화시켜 지속가능한 사회의 구현을 위한 새로운 가치관을 정부의 정책, 산업계의 활동, 그리고 시민의 삶의 방식에 확립 시키기 위한 가치관적 시민운동을 지향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환경단체들 은 가치관적 시민운동을 이끄는 ‘가치관적 압력단체’의 역할을 수행한다(지속위, 2005: 247-251).
신고리 공론화 내에서 높은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신고리 공론위는 이해당사자들과의 소통을 공론화의 공정성과 수용성 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적인 절차로 보고, 제 5차 정기회의에서 ‘이해관 계자 소통협의회’를 운영하여 원자력 계 전문가들과 환경운동단체와 같 은 이해관계자들을 공식적으로 공론화에 참여시키기로 결정했다(신고리 공론위, 2017a: 86). 신고리 5,6호기 건설에 대한 재개 측에서는 한국원 자력산업회의, 한국원자력학회 등(이하 재개 측)이 대표로 참여했으며, 중단 측에서는 ‘안전한 세상을 위한 신고리 5,6호기 백지화 시민행동’(이 하 중단 측) 이 대표로 참여했다. 19 이해관계자 소통협의회는 공론화 이 슈에 대한 상호 조율과 합의, 합리적인 공론화 방식 설계의 근거를 마련 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공론화 과정 설계 및 운영에 관한 주요 사항들 중 설문조사 문항과 자료집 제작, 이러닝 동영상 제작, 참관인단 구성, 토론회 전문가 섭외 등에 대해 논의했다(신고리 공론위, 2017a: 597).
신고리 공론화에서 전문가들의 영향력은 숙의자료집 제작 과정에서 드 러났다. 신고리 공론위는 숙의 과정에서 시민참여단 개인이 학습할 수 있는 숙의자료집을 만들어 배포하고자 했다. 숙의자료집에는 신고리 공 론화와 의제에 대한 정보가 포함될 예정이었다. 신고리 공론위는 양측의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정보를 교차 검증하여 ‘시민참여단이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정확한 객관적 정보’를 수록하겠다는 목표를 가 지고 있었다. 그러나 양측의 전문가들이 상반된 정보를 제시하고, 중단 측이 자료집의 내용에 대한 검증을 거부하며 교차 검증을 통한 자료집 작성은 어려워졌다. 결국 신고리 공론위는 교차 검증 방식을 버리고 양 측 전문가들의 의견을 조율하는 방향으로 숙의자료집을 작성하려 했다.
그러나 양측이 첨예한 갈등을 양상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조율은 원활 하지 않았다. 특히 숙의자료집의 목차를 정하는 과정에서는 신고리 공론 화 자체가 파행될 수 있는 상황이 초래되기도 했다. 8월 11일 자료집 목 차 구성을 위해 열린 이해당사자 협의회의에서 신고리 공론위는 동일한 양식의 목차를 제시하며 제안된 목차에 따라 양측의 전문가들이 각자의 주장과 내용을 작성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그러나 중단 측은 신고리 공 론위가 제안한 목차가 재개 측의 논리 전개에 유리하다며 이를 거부했고, 각자의 방식대로 목차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반해 재개 측은 단
19 ‘안전한 세상을 위한 신고리 5,6호기 백지화 시민행동’은 2017년 7월 27일
탈핵 정책을 지지하는 전국 900여개 시민단체가 공동으로 발족한 단체다.
일한 목차를 정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9월 15일에 중단 측은 숙의자료집 목차와 내용에 대한 협의과정에서 신고리 공론위의 기준과 원칙이 편파 적이라는 것을 문제 삼아 공론화 참여를 전면 보이콧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연합뉴스, 2017g). 반면 재개 측 역시 신고리 공론위가 중단 측에 유리하게 숙의자료집의 제작 기준과 원칙을 번복했다며 공론화에 불참하겠다는 의사를 신고리 공론위에 전달했다(연합뉴스, 2017h). 숙의 자료집 목차를 둘러싼 갈등으로 신고리 공론화는 파행될 위기에 직면했 으나, 9월 21일 신고리 공론위가 제안한 단일한 목차를 활용하는 방향으 로 양측의 합의가 조율되었다. 본래 숙의자료집 배포는 오리엔테이션이 열리는 9월 16일에 배포될 예정이었으나, 양측 전문가들의 갈등으로 제 작이 지연되어 9월 28일에 우편을 통해 시민참여단에게 배포되었다(신 고리 공론위, 2017a: 408-410). 숙의자료집 목차를 둘러싼 양측 전문가 들의 대립은 토론회 발표를 할 전문가를 섭외하는 과정에서도 유사한 양 상으로 반복되었다. 신고리 공론화의 진행을 지연시키고 보이콧을 통해 신고리 공론화를 파행으로 이끌 수 있을 정도로 전문가들의 영향력은 강 력했는데, 전문가들의 참여가 신고리 공론화의 정당성을 확보해주고 있 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전문가들이 신고리 공론화에서 다룰 논의를 구성할 수 있게 되면서, 의제를 둘러싼 토론은 과학적 영역으로 한정되었다. 종합토론회에서 진 행된 논의의 내용들은 이 사실을 보여준다. 그 예로 원자력 발전소의 위 험에 대한 논의는 원전 중대사고와 저선량 방사선으로 인한 암발생률을 중심적으로 다루었다. 재개 측과 중단 측의 전문가들은 두 주제에 대해 완전히 상반되는 주장을 내세웠다. 먼저 원전 사고의 경우 전문가 발표 에서 원전을 둘러싸고 있는 격납건물의 안전성에 대한 부분에 있어 양측 의 주장이 엇갈렸다. 이 논의는 질의응답 시간에 격납건물의 안전성을 시험하는 ‘대형 민항기 충돌 실험’과 ‘국제적 규제 기준 및 현황’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이 논쟁은 재개 측의 김한곤 한수원 소장과 중단 측 의 박종운 동국대 교수에 의해 전개되었는데, 이 둘은 모두 원자력 발전 산업에 종사한 경력이 있는 전문가들이었다(신고리 공론위, 2017b:
784-805). 한편 저선량 방사선으로 인한 암 발생률은 원전 인근 지역
주민들의 암 발생률에 대한 역학조사를 해석하는 부분에서 양측의 의견 이 엇갈렸다. 중단 측 패널이었던 백도명 전 서울대 보건대학원 원장은
2011년 수행되었던 역학조사에 오류가 있음을 주장했으며, 재개 측 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