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의 배경
3.3. 시민참여형조사: 대표성과 숙의성사이에서
문재인 정부가 정권 초기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시민들이 정책을 직접 결정하는 파격적인 방식을 신속하게 도입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시민사회수석을 역임했던 참여정부에서 수행한 시민참여에 대 한 연구들이 있다. 참여정부는 대형국책사업과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해 가는 과정에서 이해당사자와 시민단체 등과 상당한 마찰을 겪었다. 대표 적인 사례로서 2003년 방사성폐기물처분장(이하 방폐장) 유치문제로 인 해 과격시위와 유혈사태까지 초래된 ‘부안사태’가 있다. 부안사태와 같은 사회적 갈등은 국책사업을 지연시키고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증 폭시켜 상당한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켰다. 이에 참여정부는 사회적 갈등 을 원만하게 해결할 필요성을 강하게 의식했으며, 그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노력했다. 참여정부는 대통령자문기구였던 지속가능발전위원회(이 하 지속위)의 기능을 강화하고 개편하기 위해 2003년 2차례 지속가능발 전위원회규정(대통령령)을 개정했으며, 지속위는 ‘공공기관의 갈등관리에 관한 법률’의 제정을 추진하는 등 갈등관리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 했다. 지속위의 노력은 2005년 출판한 『공공갈등관리의 이론과 기법』
(박재묵 외 저) 이라는 두 권의 책에 담겨있다. 이 책은 고위직 공무원 과 사회지도층을 대상으로 한 교육과 워크숍에서 교재로 사용될 목적으 로 만들어졌으며, ‘갈등의 예방과 해결’에 관한 이론적 설명, 국내외 제 도, 사회적 갈등 해결의 사례 등을 종합하고 있다(지속위, 2005: 4-8).
주목할 점은 지속위가 사회적 갈등의 해결 방안으로 ‘참여적 의사결 정’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이다. 『 공공갈등관리의 이론과 기법 』 에 따르면, 참여적 의사결정은 특정한 이해관계를 전제로 참여하는 청문 제도나 전문성에 기반한 각종 자문위원회제도와 다르게 이해관계 혹은 전문성의 유무에 상관없는 일반 시민을 공공의사결정에 참여시키는 것을 말한다(지속위, 2005: 232). 즉, 참여적 의사결정은 정책을 수립하는 참 여주체를 전문가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로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이 참여주체를 확장하고자 했던 이유는 지속위가 부안사태를 비롯 한 대규모 국책사업의 실패의 가장 큰 원인으로 전문가들에 의해 수행된 정책분석에서 생산된 지식들이 사회와의 ‘연관성’이나 일반 시민들의 ‘수 용성’ 측면에서 문제를 갖고 있었다고 진단했기 때문이다(지속위, 2005:
252). 따라서 지속위는 정책 수립 과정에서 일반 시민들의 다양한 가치
와 견해가 반영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함으로써 정책과 사회의 ‘연관성’
과 일반 시민들의 ‘수용성’을 높이고자 했다.
참여주체를 확장함으로써 정책의 수용성은 높일 수 있지만, 정책을 도 출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정책을 결정하기 위해 참여 주체가 확장되면서 이 과정에서 표출된 다양한 가치와 견해들을 조율하 는 작업이 필요한데 이러한 일반 시민들의 다양한 가치와 견해들이 조율 되지 못하면 최종적인 정책 결정이 지연되고 비효율적일 수 있기 때문이 다. 이 때문에 지속위는 참여적 의사결정에서 합의형성(consensus
building)을 강조했다. 지속위는 각 참여주체들이 각자 가장 중요한 이해
관계를 지킬 수 있게 하면서도 각 참여주체들에게 덜 중요한 이해관계를 양보하게 하여 합의를 형성해 나가는 것을 기본적인 방법론으로 채택하 였다. 즉, 지속위의 참여적 의사결정의 목적은 설정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효율적인 방법을 모색하는 것보다 갈등을 예방하고 해결할 수 있는 합의를 형성하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지속위, 2005: 239-240). 고리 1 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한 사회적 합의는 지속 위가 강조한 합의형성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신고 리 5,6호기의 건설 문제로 인한 논쟁을 참여정부 시절 방폐장 문제와 같 은 유형의 사회적 갈등으로 보고 참여적 의사결정인 공론화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사회적 합의형성을 통해 신고리 5·6호 기 건설 문제를 둘러싼 정부의 부담을 줄이고 사회적 갈등을 예방하고 해소하여 정권 초기 정부에 대한 신뢰를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지속위의 시민참여에 대한 연구는 신고리 공론화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도 활용되었다(신고리 공론위, 2017a: 93-95). 지속위는 합의의회, 시민 배심원제, 시나리오워크숍, 규제협상, 공론조사 등 다양한 시민참여 기제 의 진행방식과 장단점 등을 종합하고 분석했다. 신고리 공론위는 신고리 공론화에 적합한 시민참여 기제를 모색하기 위해 이 기존의 시민참여 기 제들에 대한 지속위의 연구들을 검토했는데, 그 결과 기존의 시민참여 기제를 그대로 신고리 공론화에 적용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그 이유는 시민참여 기제들의 대표성과 숙의성에 대한 연구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04년 지속위가 발간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지역주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주민투표의 대표성이 가장 높고 다음으로는 전국적 혹은 지역적 대표성을 확보하기 용이한 공론조사를 꼽고 있었다. 그러나 지속 위는 공론조사가 300여 명에 달하는 참가자들이 본회의에서의 토론 과 정에 충분히 참여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숙의성이 낮다고 판단했다.
다시 말해, 참가자의 수가 많을수록 대표성은 올라가지만 숙의성은 떨어 지게 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지속위는 대표성은 공론조사, 시나리오 워크숍, 시민배심원, 합의의회 순서로, 숙의성은 이 반대의 순서로 높다 고 분석했다(지속위, 2004: 214-245).
지속위의 연구를 참고한 신고리 공론위는 시민참여 기제들의 대표성과 숙의성이 한쪽이 확보되면 다른 한쪽에 손실이 발생하는 관계인 트레이 드오프(trade off)의 배타적인 관계로 이해했다. 그러나 신고리 공론위는 대표성과 숙의성이라는 두 가지 규범을 모두 만족해야 했기 때문에, 상 충하는 대표성과 숙의성 사이의 균형을 맞춘 새로운 형태의 시민참여 기 제를 설계하고자 했다(신고리 공론위, 2017a: 95-96). 신고리 공론위는 다수의 시민들이 참여하는 공론조사 방식을 토대로 삼고 조사 과정과 숙 의 과정을 변형하여 시민참여형조사를 설계했다(최재혁 인터뷰).11 기존 공론조사는 1차 조사를 진행하여 의제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의견을 확
11 최재혁은 통계청 소속 연구원으로 신고리 공론화 당시 실무단에 파견되어 시 민참여형조사를 기획하고 설계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시민참여 형조사를 기획하고 설계할 당시 정보 보완을 명목으로 외부 기관의 도움을 받 지 않았으며, 추가적인 인력의 도움없이 혼자 업무를 담당했다고 밝혔다. 최재 혁과의 인터뷰는 2019년 3월 25일 대전 통계개발원에서 대면으로 진행되었다.
인한 뒤, 대표성을 갖는 표본을 추출한다. 이후 토론과 자료집을 제공하 고, 소그룹 토론과 패널 토론 등의 숙의 과정을 거친다. 이후 2차 조사 를 진행하여 최종 결론을 도출한다(김원용, 2003). 반면 시민참여형조사 는 1차 조사를 통해 표본을 추출한 뒤, 참여자들을 대상으로 2차 조사를 통해 일반 시민들의 의견을 확인하고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한다. 참여자 들의 자가 학습 이후 3차 조사를 실시하고 공론조사와 비슷한 숙의 과 정을 거친 뒤 4차 조사를 실시하여 최종 결론을 도출한다. 시민참여형조 사는 기존 공론조사와 비교하여 조사의 횟수가 증가한 것이 하나의 특징 이다. 또한 기존 공론조사에서는 전문가들이 자료집을 제공하고 참여자 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만 하는 수동적인 위치에 있지만, 시민참여형조사 에서는 전문가들이 참여자들을 대상으로 직접 발표를 하고, 서로 토론을 하는 등 보다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변형은 대표성과 숙의성을 모두 확보하고자 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