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절 도시계획과 도심부재개발의 전개
2.1.1. 도시계획의 전개
최근 서울시와 각종 지자체에서 시행하는 보행자, 가로환경개선 및 각 종 도시재생 사업에서 읽을 수 있듯, 우리나라에서 도시에 대한 본격적 이고 근본적인 고민과 실천은 일제강점기와 급속한 경제팽창에 따른 근·
현대국가 설립의 과정에서 많은 부분 누락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광기 어린 제국주의가 뒤덮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전쟁 물자를 공 급하기 위한 보급지로서의 역할을, 해방 이후에는 본격적인 도시계획을 위한 박차를 가하는 듯했지만16), 갑작스레 발발한 6.25전쟁으로 이마저 도 무산되었다. 이로써 그나마 가지고 있던 도시적 건축물이 폐허가 돼 버린 것이다. 우리나라는 서울 수복이후에야 도시를 재건하기 위한 움직 임에 박차를 가한다. 1961년 5.16쿠데타 이후 제3공화국은 국토개발계획 을 통해 도시를 잇는 도로나 다리, 터널 등의 인프라를 갖추는데 주력하 는 모습을 보이는 동시에,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대한주택공사에서 주 택건설 사업에 뛰어들기도 하였다17).
16)“해방공간에서는 정부가 수립되어 내무부 건설국 안에 도시과가 설치되어 비로소 도 시계획 작업이 이루어지고, 1950년 1월에 한미군사원조협정에 따라 미군 건축시설도 본 격화되려 하는 등 조직적인 움직임이 보이지만, 갑작스레 발발한 6·25전쟁으로 모든 것 이 중지되는 바람에 그나마 가지고 있던 도시적 건축물이 폐허가 되어버렸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건축분야는 어떤 활동도 하지 않고 모두 중단되었으 며, 1954년 4월, 조선건축기술단을 전신으로 하는 대한건축학회가 전쟁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재발족하였다.” 서울특별시 1999, 서울建築史, 서울역사총서(2) , p.776 참고 및 직 접인용.
17)“1960년대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이 공포되며, 동시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기관으 로서 재건국민운동이 시작되었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성안되고, 국내의 일부 반대 여론 속에 1965년 한일협정이 동경에서 조인되었다. 1965년부터 월남파병이 시작되어 1973년 휴전이 이루어지기까지 한국은 차관의 제공, 한국 군사력 증강, 그리고 월남 전쟁경기와 함께 군수산업의 특수를 기대할 수 있었다. 건설계의 진흥도 이 시기 동안에 기대되었다. 1965년 건설기술자가 월남에 파견되고, 1966년 이들 해외건설업자의 지원방안을 건설부 주관으로 협의하였다.” 상게서, p.788 직접인용.
그림 2-1.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소공동, 명동 일대 이미지 출처: 서울특별시 1999, 서울역사총서(2)-서울건축史, p.777.
18)이후 71년에는 <도시계획법>을 개정19)하여 지역지구에 고도·업무지 구 등 6개 지구를 추가하고, 최초의 개발제한구역이 설치되었으며, 여러 공공건축에 관한 대규모 건축설계경기가 진행되었다. 이로써 본격 현대 수도서울의 모습의 기본 틀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 외국 건축 가의 대형 프로젝트(업무·호텔 건축) 참여가 늘어, 국내 건축가들의 역할 을 부분적으로 대신하였으나, 80년대에는 외국의 건축사무소와 함께 종 합건축사사무소20)를 중심으로 다양한 영역의 대형 건축설계 프로젝트에
18) 전게서, pp.796-799 참고 및 인용.
19) 본격적으로 조직적인 근대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한 자발적인 고민과 실천의 시점은 정전협정 이후이고, 좀 더 체계적인 계획 하에 도시를 다루고자 한 시점은 71년 <도시계 획법> 개정으로 볼 수 있다. 물론 50·60년대에도 한국전쟁 이후, 해외로부터의 귀국 및 남북 분단에 따른 월남자의 대거유입에 따라 주택난이 발생하였고, 이러한 배경으로 좁 게는 주택사업부터 넓게는 위성도시계획(당시 경기도 광주군에 철거민을 집단이주한 사 례)까지 여러 사업들이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이 시기는 전국토의 도로와 터널, 항구 건 설과 같은 사회기반시설을 갖추는 토목사업의 시대라고 판단하여, 본 연구에서는 71년
<도시계획법>의 개정을 도시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과 실천이 시작한 시점이라고 하겠 다.
20) 3인 이상의 건축사가 합동으로 사무소를 개설하여 작업의 연대적 효율을 기하기 위
있어서 전문성을 기하였다. 한편 도시가구 규모의 개발사업이 을지로2가 (제16·17지구)에서 대한주택공사의 주관으로 중구 을지로2가동·장교동·수 하동 일원 대지에 업무와 상업기능을 해결하는 사업으로 진행되기도 하 였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지구의 지정에 따른 도시계획 혹은 재개발방 식은 다차원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도시를 주거, 업무, 상업 등과 같은 단 일 용도로 적용함으로서 단순화, 파편화 시켰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또한 본격적으로 도입된 차량중심의 가로체계는 점점 더 도시민의 보행문화 퇴화를 가져왔다.
서울시는 70~80년대까지 전면철거형 방식을 유일무이한 방식으로 채택 하여 도시계획을 진행해왔다. 그러나 1990년 7월 도시재개발법을 수정하 면서, ‘수복형 재개발수법’을 명문화 하고, 2005년에는 도심부의 특성을 고려한 정비사업이 가능하도록 수복형 정비수법을 광범위하게 지정하는 등21) 기존 도시조직을 존중하는 형태의 재개발수법을 적용하고자 하였 다22). 하지만, 현재까지 수복형 사업은 전무한 상황이다. 이에 서울시는 2025 서울특별시 도시·주거환경정비기본계획 에서 기존 전면철거 중심 의 ‘개발유도지침’을 ‘재생관리지침’으로 변경하고, 도시환경정비사업이 보다 도시환경개선에 기여하도록 하였다23).
한 운영 형식.
21) 2020 도시환경정비 기본계획에서 수복형(소단위 맞춤형) 정비모델을 마련하였다. 지 정된 정비구역은 도심부 내 3구역(총98지구)으로 수송구역(18개 지구), 내자필운 구역(11 개 지구), 공평구역(69개 지구)이다. 서울특별시 2016, 2025년 목표, 서울특별시 도시·주 거 환경정비기본계획 , pp.8-10.
22) 하지만 1996년 도시재개발법 개정 시 수복재개발관련조항(시행령 제3조 제2항)이 삭 제되면서 수복형 정비수의 법적근거를 상실하게 되기도 하였다. 상게서, p.8.
23) 한편 기존 구역별 지침을 통해 제시된 건축선이나 오픈스페이스 위치 등의 규정들은 비슷한 형태의 공개공지가 확보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는 도심 내 가로변의 오픈스 페이스 확보와 보행공간의 물리적 증가 등의 이점은 있었으나, 신축된 건축물의 건축선 이 기존 건축물의 건축선과 연속되지 않거나, 오픈스페이스가 오히려 가로활성화를 저해 하기도 하는 등 효용성 없는 도시공간을 양산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상게서, p.153.
위의 내용을 바탕으로,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의 도시계획 흐름을 개략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70년대에는 전면철거재개발을 통해 도로, 주차장, 공원 등 기반시설 을 확보하는 동시에 현대식 고층건물을 건설.
②80년대에는 ‘86아시아경기대회’와 ‘88서울올림픽’을 대비하여, 주요 간선도로 정비와 재개발을 통한 도시미관의 개선을 도모.
③90년대에는 도심공동화 방지대책을 마련하는 등 도심재개발 기본계 획을 보완.
④2000년대에는 본격적으로 사대문안 도심부의 역사·문화적 특성을 보존하면서 재개발을 추진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방향으로 전개.
⑤2010년대는 2020년 목표, 서울특별시 도시·주거환경정비기본계획 을 수립하여, 기존 전면철거형 방식의 도시재개발에서 수복형(=소단위 정비형24))으로 전환하거나, 수복형 정비구역을 신규 지정하는 등 도심 부의 역사문화와 기능을 고려하는 방향으로 정비사업을 추진.
24) 수복형 정비사업도 기존 건축물이나 도시공간의 수복의 의미가 아닌 정비 단위를 소 규모로 하여 지역특성에 맞추어 정비해 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소단위 정비형(기존 의 수복형)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소단위 정비형은 기존의 필지 및 도로구조를 존중하 여 사업지구를 계획한다. 개발단위는 일반 정비형에 비해 사업지구의 단위가 상대적으로 소규모이고 개별적으로 건축이 가능한 경우는 필지합병을 추구하지 않는다. 기존의 중형 이상 건물은 그대로 존치하여 개별적인 개발이 가능하게 한다. 다만 필지 및 도로여건에 따라 최대개발규모 내의 소규모 공동개발을 허용한다. 개발단위를 작게 함으로써 도심부 의 특성을 유지하면서 기존의 기능과 형태가 시장상황에 따라 서서히 변화해 가도록 한 다. 기반시설 설치는 공공에서 지원하거나 일반 정비형과 혼합된 구역에서는 일반 정비 형 지구에서 설치하도록 한다. 전게서, p.54.
2.1.2. 도심부재개발
25)의 지정과 정책의 변화
서울시의 도시재개발사업은 1971년 <도시계획법>에 관련조항이 신설 된 후, 11차례 수정·보완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표2-1 참조). 도심 재개발사업을 포함하여, 도시환경정비사업의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크게
①1960~70년대 태동기, ②1980~90년대 추진기, ③2000~10년대 새로운 모 색기 등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26).
①1960~70년대: 태동기
1971년 <도시계획법> 속에 집단적인 정비사업을 시행할 수 있도록 도 시재개발사업에 관한 조항이 신설되었고, 1973년 최초로 도심부 내 소공, 장교, 다동 등 11개 지역이 도심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었다27). 1970년대 중반 도심재개발정책이 좀 더 본격적인 제도적 기반을 갖추게 되면서, 일본의 입체환지28) 개념을 도입한 도시재개발법이 1976년 최초로 제정 되었으며, 이 법을 바탕으로 서울시는 도심재개발사업을 적극적으로 전 개하기 시작하였다.
25) 도시환경정비사업은 도심 또는 부도심 등 중심지에 적용되는 정비사업으로 종전 도 시재개발법에서는 ‘도심재개발사업’이라고 일컬었으나, 2002년 <도시 및 주거환경정법>
이 제정되면서 ‘도시환경정비’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이해를 돕기 위 해, 기존 용어인 ‘도심재개발’ 혹은 ‘도심부재개발’ 용어를 사용하도록 하겠다. 전게서, p.7.
26) 상게서, pp.7-8 부분 및 직접인용.
27) 서울에서 도시환경정비(도심재개발) 사업의 필요성이 인식되기 시작한 시점이다. 당 시 서울의 중심부 및 도심부는 도로와 공원 등의 기반시설이 열악하고, 건축물의 노후도 심각하였다. 이는 조선시대부터 유지된 전통적 도시구조(영세한 필지, 협소한 도로, 불규 칙한 획지 등) 위에 진행된 난개발로 인한 것으로, 이로 인해 서울의 도심부는 안전, 위 생, 미관 등에 굉장히 취약하였다.
28) 일반적인 환지는 토지에 대한 환지로서 평면환지라고 한다면 입체환지는 건축물과 부지를 동시에 환지의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입체인 환지라고 할 수 있으며, 도시계획 사업을 원활하게 추진하면서 지지대상에 대한 다양한 요구를 수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서울시 도시계획용어사전, http://urban.seoul.go.kr/4DUPIS/wordsearch/main.do, 참고 및 부분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