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지식인들이 완물의 긍정적 가치를 내세우며 문화적으로 그 의미를 만들 어가는 흐름에는 여가 활용에 대한 쟁점이 담겨 있으며, 이는 『논어』에서 공 자가 ‘무소용심’을 말한 것이 주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조선 내에서 공자의 ‘무 소용심’은 바람직한 여가 활용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논의를 이끌어내면서 여가
에 마음을 쓰는 일로 완물에 대한 가치를 확보하게 된다. 다음에서는 공자의
‘무소용심’을 출발점으로 하여 조선 사회에 여가 선용에 대한 공론화가 완물에 마음을 쓰는 일로 추진되는 전체 흐름을 살펴보고자 한다.
1.1. 여가 선용의 관점에서 본 공자의 ‘무소용심(無所用心)’
성리학의 본말·대소·경중의 구도 속에서 자질구레한 완물에 마음을 쏟는 것이
‘상지’로 거론된 데에는 마음이 지향하고 힘써야 할 곳을 보다 근본이 되는 큰 것에 두어야 한다는 논점이 그 안에 내포되어 있다. 이는 조선 내에서 “마음은 두 가지 쓰임이 없다”는 명제와 함께 완물에 마음을 쓰는 것을 ‘상지’로 규정하 는 중심축으로 작용한다.344)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공자가 ‘무소용심’을 말한 것과 긴밀히 호응하여 마음 쓰는 데가 없는 것 보다는 마음을 어디에라도 써야 한다며 완물의 필요성을 거론하는 흐름으로 이어지게 된다.
일찍이 공자는 “배불리 먹고 하루를 마치면서도 마음 쓰는 곳이 없다면 어렵 다. 장기와 바둑이라도 있지 않은가. 그것이라도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345) 이 말은 장기와 바둑을 두라고 권장한 것이 아니라 마음 쓰는 곳이 없어서 일어나는 폐단을 경계한 데에서 나왔다. 이 구절은 후한대 마융(馬 融)이 선(善)을 좋아하는 데 의거함이 없다면 음욕(淫慾)이 생긴다고 해석한 이 래, 양나라 황간은 “무릇 사람이 만약에 배고픔과 추위로 만족하지 못하면 마음 은 옷과 음식을 바라고, 옷과 음식을 바라면 한가로이 다른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만약 아무 일 없이 종일토록 배불리 먹고 산다면, 반드시 법도가 아닌 일 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라고 풀이하여 그 의미를 이해하도록 도와주고 있 다.346)
송대부터는 아무 하는 일 없이 먹고 놀면서 마음 쓰는 일이 없다면 마음이 그릇된 데로 흐르거나 방일한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문제를 그 속에 담게 되면
344) Ⅲ장의 ‘완물상지’와 “마음은 두 가지 쓰임이 없다”는 명제를 다룬 80-90쪽에서 살 펴본 내용이다.
345) 『論語』, 「陽貨」, “飽食終日, 無所用心, 難矣哉, 不有博奕者乎, 爲之猶賢乎已.”
346) 魏 何晏 集解, 梁 皇侃 義疏, 『論語集解義疏』卷9, 「論語陽貨」第17, “飽食終日, 無所用心, 難矣哉, 不有博奕者乎, 爲之猶賢乎已.【註】馬融曰, 爲其無所據樂善生淫慾 也. 【疏】子曰云云者, 夫人若飢寒不足, 則心情所期於衣食, 所期於衣食, 則無暇思慮他 事. 若無事而飽衣食終日, 則必思計爲非法之事…”
서,347) 범조우(范祖禹, 1041~1098)와 같은 학자는 맹자가 말한 “사람에게는 도리가 있거늘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옷을 입고서 편안히 지내기만 하고 가르 침을 받지 않으면 금수에 가까워지게 될 것이다”라고 한 내용을 ‘무소용심’과 연결시켜 이해를 돕기도 하였다. 따라서 배우는 자가 하루 종일 배불리 먹고 지 내면서도 하는 일이 없다면 그것은 짐승에 가깝다고 보고는 먹고 노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싣기도 하였다.348) 그래서 이런 내용 은 바람직한 여가 활용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논의의 단초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이런 흐름에서 공자의 ‘무소용심’에 대한 지침은 ‘유예’의 맥락과 연결되는데, 다음에 소개하는 것은 정호·정이 형제의 문인이었던 유초(游酢, 1053~1123)가
『논어』의 ‘유어예’를 설명한 글이다.
대개 선비가 도에 뜻을 두어도 진실로 마음에 하고 싶은 대로 따를 수 있는 경지 에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면 반드시 식유(息遊)의 학문을 두어야 한다. 전(傳) 에 이르길, “활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기만 하고 느슨하게 풀어 주지 않으면 문 왕이나 무왕이라도 어떤 일을 제대로 행할 수가 없다.” 하였고 “장기나 바둑이라 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 하는 것이 그냥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라 고 하였다. 장기나 바둑은 진실로 나쁜 것이나 그 나쁜 것이 장기나 바둑에만 그 치는 것이거늘 배부르게 먹고는 하루가 다 지나도록 마음 쓰는 곳이 없다면 마음 의 방일함이 불처럼 타올라 다 태워 버리고 얼음처럼 차가워져 꽁꽁 얼어붙게 되 니 무엇인들 하지 않는 것과 같겠는가? 이 때문에 성인은 차라리 장기나 바둑을 취하였으니 하물며 육예의 바름에 있어서랴. 그러므로 예(禮)에 노님은 그것으로 조급함을 방지하고 악(樂)에 노님은 그것으로 그 화(和)를 준행하며 사(射)에 노 님은 그것으로 안의 뜻을 바르게 하고 바깥의 몸을 곧게 하며 어(御)·서(書)·수 (數) 또한 이와 같을 따름이니 이것이 모두 마음을 다잡는 방법이다.349)
347) 朱子,『論語精義』卷9上, 「陽貨」第17, “謝曰, 博奕之害則止於博奕而已. 蓋放僻邪侈, 皆生於無所用心, 心有所用, 則止, 止則不可謂之闕.” ; “楊曰, 博奕, 非君子之所宜爲, 然飽食逸居, 無所用心, 則放僻邪侈, 將無不爲已. 故以是而係其心, 豈不猶賢於己乎.” ;
“尹曰, 學者, 無所用心, 則非僻之心入之矣. 故博奕藝之賤者, 猶愈於無所用心, 苟用心 於仁義者, 則爲賢可知矣.”
348) 『孟子』, 「滕文公」上, “人之有道也, 飽食煖衣, 逸居而無敎, 則近於禽獸.” ; 『論語 精義』卷9上, 「陽貨」第17, “范曰, 孟子曰, 飽食煖衣, 逸居而無敎, 則近於禽獸. 故聖 人憂之, 博奕, 藝之至賤者也. 爲之猶賢乎無所用心, 則夫爲仁義, 有愈於博奕者, 其賢可 知也.”
349) 朱子, 『論語精義』卷4上, 「述而」第7, “游曰, … 葢士志於道苟未至於從心, 則必有息 遊之學焉. 傳曰, 張而不弛文武不能也, 不有博奕者乎, 爲之猶賢乎已. 夫博奕固惡矣, 而 其惡止於博奕, 若飽食終日, 無所用心, 則心之放逸, 熱焦火而寒凝氷, 何所不至哉? 是以 聖人寧取於博奕也, 况六藝之正乎. 故游於禮, 所以防其躁也, 游於樂, 所以遵其和也, 游 於射, 所以正內志而直外體也, 御也書也數也亦若是而已, 是皆操心之術也.”
유초는 공자가 “일흔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 었다(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고 하는 ‘종심(從心)’의 경지를 학문의 최종적 단 계로 보았는데, 이는 유가에서 일컫는 최상의 경지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러한 단계에 도달하기 전이라면 배움의 과정에서 쉬면서 기르는 ‘식유(息遊)’의 학문 을 두어야 한다고 보고는 『예기』에 나오는 ‘일장일이’의 도를 인용하여 학문 의 긴장과 휴식의 이완을 적절히 조절하는 측면으로 ‘유예’를 설명하고 있다. 그 리고는 『논어』에서 공자가 장기와 바둑을 들어 말한 것을 인용하면서 장기나 바둑이 무익한 것이긴 하나 마음 쓰는 곳이 없어 마음의 방일함이 생겨나는 것 보다 나으며, 더욱이 ‘육예’에서 노님은 마음을 다잡는 방편이 된다고 강조하였 다. 즉, 마음을 둘 곳이 없어 여러 갈래로 흩어지고 어지러운 것을 다잡는 방편 으로 ‘유예’를 제시하면서 이를 쉬면서 기르는 ‘유식’의 학문으로 연결시켰다.
이런 내용은 양시(楊時, 1053~1135)가 공자의 ‘무소용심’에 대해 풀어진 마 음을 거두어들이고 나태하고 사벽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마음을 다잡는 의미로 보면서, 이를 ‘유예’와 연결시킨 내용과 상통한다. 양시는 “사람들이 노 님에 있어서는 제멋대로 하여 방일함에 이르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군자의 노님은 반드시 예에서 노님이니 이로써 그 안을 외물로부터 막는 것이다.”라고 한 것처럼 ‘유예’에 대해 마음을 보존하는 방편으로 설명하였다.350)
주희의 경우는 공자의 ‘무소용심’에 대해 이씨(李氏 ; 이욱)의 말을 인용하여
“성인이 사람들에게 장기나 바둑을 하도록 가르치신 것은 아니고, 마음 쓰는 데 가 없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심하게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설명한 바 있는 데, 이는 마음 쓰는 데가 없어서 이리 저리 휩쓸리게 되면 삿되고 편벽된 것에 빠지게 되는 문제로 지적되기도 하였다.351) 그리고 정이가 경(敬)을 말하면서 내세운 ‘주일무적(主一無適)’에 대해 주희는 마음이 한 가지에 전일하여 다른 데
350) 朱子, 『孟子精義』卷11, 「告子章句」上, ‘孟子曰牛山之木嘗美矣章’, “楊曰, … 至于 無故不徹琴瑟, 行則聞珮玉, 登車則聞和鸞, 盖皆欲收其放心, 不使惰慢邪僻之氣得而入 焉. 故曰, 不有博奕者乎, 爲之猶賢乎已. 夫博奕, 非君子所爲, 而云爾者以是可以收其放 心爾.” ; 朱子, 『論語精義』卷4上, 「述而」第7, “楊曰, … 人之於游則縱而至於放者 有矣. 故君子之游, 必於藝焉, 所以閑其内也. 夫道之不可須臾離也, 葢如是.”
351) 『論語集註』卷9, 「陽貨」第17, “子曰, 飽食終日, 無所用心, 難矣哉. 不有博弈者乎, 爲之猶賢乎已. 【集註】李氏曰, 聖人非敎人博弈也, 所以甚言無所用心之不可爾.” ;
『朱子語類』卷47, 「論語」29, ‘陽貨篇·飽食終日章’, “問飽食終日, 無所用心, 難矣哉.
心體本是運動不息. 若頃刻間無所用之, 則邪僻之念便生. 聖人以爲難矣哉. 言其至危而 難安也. 曰心若有用, 則心有所主. 只㸔如今纔讀書, 心便主於讀書, 纔寫字, 心便主於寫 字. 若是悠悠蕩蕩, 未有不入於邪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