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문헌에서 완물의 흔적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 遺事)』에서도 발견되며, 『고려사(高麗史)』에서도 충분히 확인된다. 특히 문헌 기록에서 ‘진완(珍玩)’, ‘기완(奇玩)’, ‘보완(寶玩)’, ‘비완(秘玩)’ 등으로 지칭된 것 은 모두 지배계층의 완물에 소용되던 것들이라 볼 수 있다. 이들 물건은 관혼상 제의 의례에 소용되는 물품 외에도 국가 간의 교류 및 왕실에 바쳐진 진상품을 비롯해 궁궐과 원림, 연회에서 향유되는 진귀한 물건들까지 포괄되며 놀이와 감 상을 위해 완호되기도 했다.
그 가운데는 국신물(國信物)이라 일컬어지는 외교적 선물도 포함되는데, 고려 시대에는 이를 통해 송나라 최신의 문물이 전래되었다. 1117년에 예종(睿宗, 재
위 1105∼1122)은 송나라에 들어갔던 진공사(進貢使) 자량(資諒)이 계향(桂香)·
어주(御酒)·용봉차(龍鳳茶)·명단차(茗團茶) 및 진기한 과일들과 보배로운 그릇들 을 받아 온 것을 계기로 청연각(淸燕閣)에 신하들을 불러 중국에서 들여온 유리 [玻璃]·마노(馬瑙)·비취(翡翠)·무소 뿔[犀兕] 등 진기한 완상용품[瑰奇玩用之物]
을 진열하고 연회를 벌인 기록이 등장한다.148) 이러한 물건이 당시 이목을 끌 던 완물의 대상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또한 1123년(인종 1)에 북송 사절단으로 개성에 온 서긍(徐兢, 1091~1153) 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는 사신을 맞이하는 연회 자리 에 송나라에서 가져온 보완(寶玩)·고기(古器)·법서(法書)·명화(名畵)·기이한 향 [異香]·진기한 차[奇茗]를 늘여 놓았다고 하며, 술자리가 끝나갈 무렵 좋아하는 대로 갖고 싶은 것을 주었다고 한다. 이들 물건은 중국에서 건너온 최신의 명품 들로 당시 지배계층의 완호품이 되었을 것이다.149) 그런가 하면, 의종(毅宗) 17 년인 1163년에는 송나라 상인 서덕영(徐德榮) 등이 와서 공작새와 진귀한 애완 물(珍翫之物)을 바치고 송 황제가 내린 금합(金盒)·은합(銀盒) 2개에 침향(沈香) 을 담아 헌상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150) 보통 송 상인이 내항하게 되면 임금 에게 ‘예물(禮物)’을 진상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공작새와 같은 희귀한 동물은 왕실에서 애완용으로 키우게 되며 금은합이나 침향, 서화, 준마 등은 어용품으 로 쓰이면서 감상과 놀이의 용도로 완호되었다.
이 외에도 고려시대 문헌에는 궁궐과 이궁(離宮)의 전각 및 정자 주변에 각종 기이한 화훼와 괴석 등을 심어 진귀한 완상거리로 삼았다는 내용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의종 20년(1166) 11월에 청녕재(淸寧齋)에서 야연(夜宴)을 벌이면서, 수놓은 비단과 금은으로 만든 꽃, 무소뿔, 말과 노새 등 진기한 애완물(奇玩之 物)을 모아 좌우에 진열하고서 임금의 수레를 맞이하였다는 기록은 그 중 하나 의 예가 될 것이다.151) 여기에 소개된 것 외에도 『고려사』에 등장하는 백학
148) 徐兢,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6, 「宮殿」2, ‘延英殿閣’, “王趣令就坐, 温顔以待之, 備物以享之. 其供張之設, 器皿之列, 觴豆之實, 菓核之品, 則六尙之名珍, 四方之美味, 無一不具. 復有上國玻梨馬腦翡翠犀兕瑰奇玩用之物, 交錯於案上, 塤篪椌楬琴瑟鐘磬安 樂雅正之聲, 合奏於堂下.”
149) 徐兢,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26, 「燕禮」, ‘館會’, “四筵, 列寶玩古器法書名畫異 香奇茗, 瑰瑋萬狀, 精采奪目, 麗人莫不驚歎. 酒闌, 隨所好, 恣其所欲.”
150) 『高麗史』卷18,「世家」卷第18, 毅宗 17年(1163) 7月, “乙巳. 宋都綱徐德榮等來, 獻孔雀, 及珍翫之物. 德榮又以宋帝密旨, 獻金銀合二副, 盛以沈香.”
151) 『高麗史』卷18,「世家」卷第18, 毅宗20년(1166), “夜宴淸寧齋. 寵宦李榮鳩聚錦繡、
金銀花、眞香、犀角、馬騾、羔羊、鳧鴈等奇玩之物, 陳列左右, 以迎大駕.”
(白鶴), 코끼리, 거위, 산양, 비둘기, 매와 같은 동물과 온갖 기이한 괴석과 이국 에서 들여온 식물류 및 금은합(金銀合)·백동(白銅)·나전기(螺鈿器)·비단·향과 같 은 사치품, 서화와 법첩, 문방용품 등과 같은 물품들과 진귀한 노리개와 장신구 를 포함한 장식품 등 이국적이고 희귀한 물건들이 다 ‘진완’, ‘기완’, ‘보완’으로 취급되면서 애호되던 것들이다. 왕들을 비롯한 권문세족들이 향유한 완물에는 여색을 탐하고, 사냥이나 말 타기, 음주와 가무, 잡희 등 연희를 즐기는 것부터 서화 법첩이나 문방용품 등의 진귀한 사치품들을 완호하고, 궁궐이나 원림을 조 영하고 화훼를 완상하며, 진기한 동물들을 기르는 것까지 다채로웠다. 그리고 이들의 사치스러운 향락에 대해 문헌에서는 종종 ‘완물상지’의 시각으로 기록하 기도 하였다. 권력층이 향유한 완물의 폐단을 겨냥해 ‘완물상지’와 연관된 시선 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완물의 역사에서 ‘완물상지’의 존재감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시기 가 조선시대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완물상지’에 대한 다채로운 논의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조선시대 사상계를 주도했던 성리학의 관점에서 완물은
‘완호의 해로움’으로 쟁점화 되었는데, 바로 이러한 점이 지금부터 다룰 내용이 다. 다음에서는 조선시대 완물의 노선에서 ‘완물상지’의 논점이 완호의 문제와 연결되고 있음을 검토하게 될 것이며,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완호의 일이 ‘상지’
가 되는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완물상지’를 특징짓는 키워드를 추출하여 그 이 해를 돕고자 한다. 마지막으로는 완물에 대해 “마음은 두 가지 쓰임이 없다”는 명제로 설명하는 내용을 살펴보면서 좋아하는 것에 마음을 쓰는 것이 ‘상지’로 거론되는 이유가 어디에 근거하는지 설명해보고자 한다.
1.1. ‘완물상지’의 쟁점, 완호(玩好)의 해로움
조선시대에 ‘완물상지’는 외물에 대한 완호의 문제로 부각된다. 이는 송대의 도학자들이 완호에 의한 탐닉으로 ‘상지’에 귀결된다고 보았던 것과 상통되는 맥락이다. 이렇게 완물에 대해 좋아함의 문제로 쟁점을 이동시켜 ‘완물상지’를 다룬 것은 문헌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이 남 긴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빛나는 업적으로 손꼽히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 역시 이러한 측면에서 ‘완물상지’라는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선유(先儒)가 이르시길, “온갖 완호하는 것들은 모두 (도를 구하는) 뜻을 빼앗는 것이다. 글씨와 서찰의 경우는 유자(儒者)의 일에 가장 가까운 것이지만, 줄곧 그 것만을 좋아하여 집착하면 또한 저절로 뜻을 잃게 된다.” 하였습니다. 지금 동궁 (東宮)이 비록 덕성이 성취되셨다 하더라도 아직은 성학(聖學)에 잠심하여 지극하 지 못한 것을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언문이 비록 유익하다 해도 다만 문사(文 士)의 육예(六藝) 중 하나일 뿐이며 하물며 다스리는 도에 조금도 이로움이 없는 데, 도리어 정밀히 연마하고 생각을 소모하여 온종일 시간을 보내시니, 실로 제때 에 민첩하게 힘써야 할 학문에 손실이 있사옵니다.152)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은 1443년(세종 25) 12월이었다. 이후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에게 훈민정음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게 하는 등 여러 시험 과정을 거치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시 집현전 수장을 도맡았던 최만리(崔 萬理) 등은 새 문자의 창제에 강하게 반대하였고, 이들은 중화의 제도에 반하는 새로운 글자를 만들 이유가 없다는 내용을 포함해 총 여섯 가지 항목으로 이루 어진 상소를 1444년에 올리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위의 내용이다.
이 글에는 북송대 정호의 완호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전면에 내세워 훈민정 음을 ‘완물상지’의 입장으로 반대하고 있다. 특히 성학에 잠심해야 할 세자가 훈 민정음 창제에 깊게 관여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거기에 매진하도록 한 것에 문제를 삼았다. 언문을 육예 중 하나로 보고 그 근본이 되는 성학에 소홀할 수 있음을 내비친 것인데, 이런 입장은 언문이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예에 불과 할 뿐이어서 학문에 손실이 있고 정치에 유익함이 없다는 내용에서도 잘 드러 난다.153) 이에 대해 세종은 조목조목 신랄하게 반박하며 훈민정음의 창제가 백 성을 편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입장으로 1446년(세종 28) 9월 29일에 훈민 정음의 완성을 공식 반포하였다.
이렇게 ‘완물상지’의 위력은 조선의 임금을 비롯한 사대부 집단의 완물 행위 를 제재하는 하나의 기본 명제로 작용하게 되지만, 상대적으로 느슨한 편이었던 여말 선초를 거쳐 완물에 대한 대립각이 첨예해지는 것은 15세기 후반 무렵부
152) 『世宗實錄』卷103, 世宗 26年(1444) 2月 20日 庚子 1번째 기사, “一, 先儒云, 凡百 玩好, 皆奪志, 至於書札, 於儒者事最近, 然一向好着, 亦自喪志. 今東宮雖德性成就, 猶 當潛心聖學, 益求其未至也. 諺文縱曰有益, 特文士六藝之一耳, 況萬萬無一利於治道, 而 乃硏精費思, 竟日移時, 實有損於時敏之學也.” 이하 실록의 경우는 국사편찬위원회 조 선왕조실록 번역본을 토대로 수정을 가한 뒤 인용.
153) 위와 같은 곳, “今此諺文不過新奇一藝耳, 於學有損, 於治無益, 反覆籌之, 未見其可 也.”
터이다. 특히 성종(成宗, 재위 1469~1494) 때에는 ‘완물상지’와 관련된 기록이 대다수 등장하면서 완물에 대한 논쟁이 완호의 폐단으로 상정되고 있음을 명확 히 볼 수 있다. 성종은 예술적 취향이 강했던 인물로 궁궐 내에 화원들을 모아 놓고 초목(草木)과 금수(禽獸) 등을 모사하게 하는 등 여러 사례에서 서화를 애 호한 흔적들이 보인다. 그러나 그의 서화 애호는 자신이 육성한 대간들에 의해 번번이 비판 받아야 했다. 성종 9년(1478)에 사헌부 지평(持平) 이세광(李世匡,
?∼1504)과 최반(崔潘) 등이 『서경』「여오」편을 인용해 ‘이목에 부림당하는 일’ 내지는 ‘완물상지’로 지목하며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 이다.154)
당시에 성종은 서화 애호에 대한 비판을 도화서(圖畵署) 폐지 문제로 상정하 여 불식시키고자 하였는데, 승정원(承政院)의 입장은 백공(百工)의 기예는 소홀 히 할 수 없다는 주장에 힘을 실었고, 대간들의 입장은 완호가 치우쳐지면 폐단 에 이를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155) 그런가 하면 대사헌(大司憲) 김유 (金紐, 1436∼1490)는 백공의 기예를 중시하는 의견을 보이면서 대간들이 그리 말한 것은 단지 애호하고 숭상함이 치우쳐질까 우려한 것이라 중재하였으며, 노 사신(盧思愼, 1427~1498)과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의 경우도 백공의 기 예는 하나라도 빠트려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대간들이 아뢴 바는 완 호의 애착으로 인한 ‘상지’를 우려한 것인데 다만 임금이 그림을 권장하는 일이 므로 폐단은 없을 것이라며 갈등을 중재하게 된다.156) 결국, 성종의 그림에 대 한 애호를 둘러싼 팽팽한 대립에서 서로간의 입장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 러면서도 이 문제의 쟁점은 그림에 대한 완호가 좋아하는 것에 치우쳐지는 ‘호 착(好着)’ 내지는 ‘편착(偏着)’의 폐단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고 있음을 알 수
154) 『成宗實錄』卷95, 成宗 9年(1478) 8月 4日 癸巳 1번째 기사, “且臣聞禁內會畫工, 摹寫草木禽獸. 書曰, 不役耳目, 百度惟貞. 又曰, 玩物喪志. … 崔潘、世匡等啓曰, 臣等 非欲廢圖畫也. 大抵人君當謹好尙, 好尙之極, 必有其弊.”
155) 『成宗實錄』卷95, 成宗 9年(1478) 8月 4日 癸巳 3번째 기사, “僉曰, 古云, 百工技 藝, 咸精其能, 闕一不可, 豈可以一人偏見而遽革乎? … 同僚等又曰, 大抵人主好尙, 不 可偏着, 好尙之偏, 必生其弊.” ; 『成宗實錄』卷95, 成宗 9年(1478) 8月 10日 己亥 1번째 기사, “持平安璿啓曰, 人主好尙不可偏着, 今者禁內摹畫, 慮有玩畫之漸, 故累次 論啓.”
156) 『成宗實錄』卷95, 成宗 9年(1478) 8月 4日 癸巳 3번째 기사, “大司憲金紐啓曰, … 世匡所啓之意, 但恐好尙之便耳, 豈欲革圖畫署乎?” ; 『成宗實錄』卷95, 成宗 9年 (1478) 8月 10日 己亥 1번째 기사, “領事盧思愼、知事姜希孟啓曰, 凡百工技藝, 不可 闕一, 畫亦不得已之事也. 但臺諫所啓, 慮其漸也. … 凡事一向好着, 必喪其所守. 如今 圖畫事, 非殿下自爲之, 特爲勸勵耳, 安有後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