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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사령부 해체 논의의 역사적 경과

남북 정상이 「4‧27 판문점선언」에서 종전선언 및 평화협정 체결 추진에 합의하면서, 유엔군사령부의 존폐 여부에 대해서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탈북자인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공 사는 남북 평화체제 구축과정에서 유엔군사령부 해체 문제가 “반드 시 통과해야 할 관문”이라고까지 언급하기도 하였다.123) 평화협정 이 체결되면 유엔군사령부가 반드시 해체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법적인 논란이 적지 않으나, 평화체제 구축과정에서 유엔군사령부 의 존속이나 지위 및 역할 조정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재검토가 요구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같은 유엔군사령부 존속에 관한 논 의는 평화협정의 체결 추진을 계기로 부각된 것이나, 역사적으로 유 엔군사령부 해체 논의가 반드시 평화협정 체결과 결부되어 이루어 진 것은 아니었다.

평화협정의 체결은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실현을 위한 수단 가운 데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북한에 의한 평화협정 체결 제안의 최종 목표는 주한미군 철수였으며 그 결과 유엔군사령부 해체는 북 한이 역사적으로 시종일관 주장해 왔던 ‘전술’이었다. 북한의 주한 외국군 철수 주장 역시 북한 정권 수립 이전부터 제기된 바 있었다.

소련은 1947년 미‧소 공동위 제61차 본회의에서 이미 미‧소 양국 군의 동시 철수를 제의한 바 있으며, 김일성은 1948년 북조선민전 중앙위원회 제25차 회의에서 미국이 이를 거부한 것을 비난하면서 선거의 조건으로 또 다시 외국군 동시 철수를 주장하였다.124) 정권 수립 직후인 1948년 9월 10일에도 북한은 ‘소련정부와 미합중국에

123) “태영호, 국민들 잘 모르지만, 유엔사 해체 이미 시작됐다,” 문화일보, 2018.9.14.

124) 김일성, 김일성저작집: 1992.12-1994.7 (44권)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96), pp. 174~175.

보내는 요청서’를 통해 주한미군의 동시 철수를 강력히 주장하고 나 섰다.125)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의 행위가 ‘평화의 파괴(breach of the peace)’를 구성한다고 결정하고,126) 동년 6월 27일에는 그 회원국들에게 무력공격을 격 퇴하고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원조를 제공할 것 을 권고하였다.127) 이어 7월 7일에는 미국 주도하에 ‘통합사령부 (unified command)’를 구성하고 작전 수행 간 유엔기를 사용하도 록 승인함으로써,128) 주한유엔군사령부가 창설되었다. 당초 유엔 헌장의 입안자들은 회원국과 안전보장이사회가 사전에 특별협정을 체결하여 병력을 구성하고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대표로 구성 된 군사참모위원회가 이를 지휘할 것을 상정하고 있었으나(헌장 제 43조, 제47조), 그 당시는 물론 현재까지도 그와 같은 특별협정은 단 한 건도 체결되지 않았다. 즉, 유엔군사령부는 당시 유엔 헌장이 예정하지 않고 있었던 특수한 성격의 군대였던 만큼, 그 창설은 헌 장상의 근거가 없는 것이라거나 심지어 헌장 위반에 해당할 수 있다 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었다.129) 이에 공산군 측에서도 유엔군사령 부가 창설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부터 유엔군 철수 문제를 거론하 고 나섰다. 1950년 10월 2일, 비신스키 소련 유엔대표는 유엔의 결 의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미국 및 각국의 군대가 즉시 한국으로부터 철수해야 한다는 내용의 5개국 공동결의안을 유엔 정치위원회에 제

125) 국토통일원, 북한 최고인민회의 자료집 (제1집) (서울: 국토통일원, 1988), pp.

97~101.

126) UN Doc. S/RES/82 (1950).

127) UN Doc. S/RES/83 (1950).

128) UN Doc. S/RES/84 (1950).

129) Julius Stone, Legal Controls of International Conflict, p. 232.

출하였던 것이다.130) 소련은 한국을 지원하는 일련의 안전보장이사 회 결의들이 상임이사국인 자신의 참여 없이 채택되었으므로 국제 법상 무효라고 주장함으로써,131) 애당초 유엔군사령부의 유효성 자 체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 같은 공산군 측의 유엔군 철수 주장은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과 정에서도 지속되었다. 미국은 외국군 철수 문제는 정치적 문제이므 로 휴전회담에서는 군사적 휴전 문제만 토의되어야 한다는 입장이 었으나,132) 결국 공산군 측의 요구를 어느 정도 절충하여 휴전 이후 정치회담에서 협의하기로 하면서 다소 애매모호한 문구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외국군 철수문제를 의제 가운데 하나로 포함하는 데 동의 하였다.133) 유엔 총회가 1953년 8월 28일자 결의를 통해 「한국정전 협정」 제60항에 예정된 정치회담의 조속한 개최를 권고한 것을 계 기로,134) 동년 10월 26일부터 개최된 판문점 예비회담에서도 “한국 에서 모든 외국군대를 철수하는 문제”는 북‧중이 제시한 정치회담 의 주요 의제였다.135) 1955년 4월 27일부터 6월 15일까지 본격적으

130) UN Doc. A/C.1/567 (1950), 재인용; “Political and Security Questions,”

International Organization, vol. 5, no. 1 (1951), p. 66.

131) UN Doc. S/1517 (1950).

132) 전사편찬위원회 역, 미국 합동참모본부사: 한국전쟁(하) (서울: 국방부전사편찬위 원회, 1991), pp. 33~34.

133) 「한국정전협정」 제60항은 공산군 측의 요구대로 외국군 철수 문제를 반영하였으나, 정치회담의 의제 설정 문제는 유엔군측에서 ‘건의한다’라는 ‘의도적 모호성’을 갖는 문언을 추가하여 그 구속력을 약화시킴으로써 봉합되었다. 동 조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하여 쌍방 군사령관은 쌍방의 관계 각국 정부에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효력을 발생한 후 3개월 내에 각기 대표를 파견하여 쌍방의 한 급 높은 정치회의를 소집하고 한국으로부터의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및 한국문제 의 평화적 해결문제들을 협의할 것을 이에 건의한다.” (밑줄: 필자 추가) 134) UN Doc. A/RES/711(VII) (1953).

135)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 자료총서 18: 미 국무부 한국정치회담 문서―Records of the Korean Political Conference of the US State Department (서울: 국방군 사연구소, 1998), p. 115.

로 진행된 제네바 정치회담에서는 한반도 통일방안이 핵심 의제로 다루어졌고, 논의 과정에서 단연 외국군 철수 문제가 핵심 쟁점으로 부각되었다.136) 이와 관련하여 양측 모두 선거에 의한 평화통일 방 식에는 견해를 같이 하였으나,137) 공산군 측은 중공군과 유엔군을 비롯한 모든 외국군의 철수를 주장하였다.138) 공산군 측에서는 외 국군 철수 주장의 논거로 “외국군대의 한국 주둔이 필연적으로 한국 의 국내문제에 대한 외국의 간섭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내 세웠으나,139) 실제로는 미군 철수 시 남측에서 일정기간 정치운동 을 진행함으로써 적화통일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는 전략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140) 특히 공산군 측의 유엔군 철수 주장은 한국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유엔의 권능을 인정할 수 없다는 점을 기본적으로 전 제한 것이었다. 실제로 1954년 5월 11일 몰로토프 소련 대표는 한국 전쟁에서 유엔이 교전단체로 전환됨으로써 국제기구로서 공정하게 행동할 능력을 스스로 박탈하였으며, 그 결과 한국문제의 해결에 있

136) 1953년 12월 31일, 결국 판문점 예비회담은 아무런 성과 없이 결렬되었다. 그러나 1954년 1월 25일 독일 및 오스트리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베를린에서 개최된 소 4국 외상회의에서 4국 외상들은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정 치회담을 1954년 4월 26일 제네바에서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외무부, 한국통 일문제: 약사와 문헌(1943년~1960년) (서울: 외무부정무국, 1961), pp. 20~21.

137) 제네바 정치회담 당시의 주요 쟁점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홍용표, “1954년 제네바회 의와 한국전쟁의 정치적 종결 모색,”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28권 1호 (2006), pp. 41~50 참조.

138)이와 달리 대한민국 정부와 유엔군 측은 중공군 철수에 대해서는 동의하면서도, 유 엔군은 “통일되고 독립된 민주한국정부를 수립하여 유엔이 그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한국에 계속 잔류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에 대하여 변영태 외무부장 관은 유엔군이 침략국들을 처벌하기 위한 경찰조치를 취하기 위해 파견된 만큼 그 경찰조치가 이행되기 전까지는 결코 철수할 수 없으며, 특히 중공군은 엄연히 침략 국이라는 점에서 중공군 철수를 유엔군 철수와 결부 짓는 것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위라고 주장하였다. 외무부, 한국통일문제: 약사와 문헌(1943년~1960년) (서 울: 외무부정무국, 1961), pp. 21, 125~130.

139) 위의 책, p. 138.

140) 이신철, “1954년 제네바 정치회담시기 남북의 통일론,” 사림, 제25권 (2006), p. 56.

어서도 공평한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면서 한국문제의 해결을 위한 유엔의 권능 자체를 전적으로 부정하였다.141)

1957년 제10차 유엔 총회부터 1975년 제30차 유엔 총회에 이르 기까지 거의 매년 반복된 유엔 총회에서의 한국문제 토의 과정에서 도 공산 측은 유엔군사령부 해체를 비롯한 외국군 철수 주장을 거듭 반복해 왔다. 대표적으로 1962년 제17차 유엔 총회에 제출한 보고 서에서 북한 측은 “한국의 통일문제는 외부의 간섭 없이 한국민 스 스로에 의해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는 국내문제”임을 강조하면 서, “만일 유엔이 헌장에 따른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고자 한다면, 무 엇보다 미국으로 하여금 남한에서 유엔군을 즉각 철수시키게 하고 유 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United Nations Commission for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 UNCURK)를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142) 다만 1960년대 중반까지는 유엔 총회에서 서방측이 다 수를 점하고 있었으므로, 공산 측의 외국군 철수 제안이 총회결의로 채택되는 일은 없었다.143)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공산측에 동 조하는 제3세계 신생동맹국들과 비동맹국가들이 유엔에 대거 유입 되면서, 1966년부터는 유엔군사령부의 철수조건으로 기존의 “항구

141) 외무부, 한국통일문제: 약사와 문헌(1943년~1960년) (서울: 외무부정무국, 1961), p. 22.

142) The United States of Public Information, “Questions Concerning Asia and the Far East,” The Yearbook of the United Nations,vol. 16 (1962), p. 119.

143) 이 시기 한국문제에 대한 유엔 총회 결의는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 이하 UNCURK)의 연차보고를 승인하면서 UNCURK의 존속과 유엔군의 한국 주둔을 인정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한국문제에 대한 유엔 총회 결의 중 친 대한민국 결의안은 UN Doc.

A/RES/1180(XII) (1957); UN Doc. A/RES/1264(XIII) (1958); UN Doc. A/RES/

1455(XIV) (1959); UN Doc. A/RES/1740(XVI) (1961); UN Doc. A/RES/1855 (XVII) (1962); UN Doc. A/RES/1964(XVIII) (1963); UN Doc. A/RES/2132(XX) (1965); UN Doc. A/RES/2224(XXI) (1966); UN Doc. A/RES/2269(XXII) (1967);

UN Doc. A/RES/2466(XXIII) (1968); UN Doc. A/RES/2516(XXIV) (1969); UN Doc. A/RES/2668(XXV) (1970); UN Doc. A/RES/3333(XXIX) (1974)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