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평화협정 논의의 주체
「4‧27 판문점선언」은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 로 전환하며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 3 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한다고 함으로써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다자협상의 틀을 제시하였다. 이후에 도 남북 정상은 다자협상을 통한 평화체제를 거론하였다. 김정은 위원장은 2019년 신년사에서 “[한국]정전협정 당사자들과의 긴밀한 연계 밑에 조선반도의 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다 자협상도 적극 추진하여 항구적인 평화보장토대를 실질적으로 마련 해야” 한다고 밝혔다.46) 문재인 대통령도 2019년 신년기자회견에
미국도 공약한 새로운 조미관계수립과 조선반도의 평화체제수립을 위한 가장 기초적 이고 선차적인 공정이다. … 조미쌍방뿐 아니라 조선반도의 평화를 원하는 동북아시 아지역 나라들의 이해관계에 다 부합되는 종전은 결코 누가 누구에게 주는 선사품이 아니며 우리의 비핵화조치와 바꾸어 먹을 수 있는 흥정물은 더더욱 아니다. 조미가 6.12 공동성명에 따라 새로운 관계수립을 지향해나가는 때에 조미 사이의 교전관계 에 종지부를 찍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미국이 종전을 바라지 않는다면 우리도 구태 여 이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
서 평화협정에는 그 전쟁에 관련됐던 나라들이 함께 참여할 필요가 있으며, 평화협정 이후에 평화를 담보해내는 일을 위해서도 다자체 제가 필요하다고 밝혔다.47) 이러한 점들에 비추어 본다면, 남북 간 에는 한국전쟁 혹은 「한국정전협정」과 관련성을 가지는 국가들이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의 주체라는 점, 그리고 남‧북‧미 3자가 여기 에 포함된다는 점에 대해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자 평화협상의 참여범위를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정전협 정」의 당사자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한국정전협정」의 당사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제시되어 왔는데, 이러한 견해들 은 크게 미국과 북한이 당사자라는 입장, 한국과 참전 16개국들과 북한 및 중국이 당사자라는 입장, 유엔과 북한 및 중국이 당사자라는 입장, 한국과 유엔과 북한 및 중국이 당사자라는 입장으로 구분될 수 있다.48)
첫 번째로, 「한국정전협정」의 당사자를 미국과 북한이라고 보는 입장은 북한이 오랫동안 견지해 왔던 입장으로, 북한은 「한국정전협 정」의 서명자인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이 미국 군인이었을 뿐 아니 라 대부분의 유엔군은 유엔군의 모자를 쓴 미군이었으므로 미국이 정전협정의 당사자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중국은 1958년에 북한 에서 완전히 철수하였기 때문에 결국 미국과 북한이 「한국정전협정」
의 당사자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 「한국정전협정」의 당사자를 한국 및 참전 16개국들과 북한 및 중국이라고 보는 입장은 국내 국제법학계의 다수설로, 2차
46) “신년사,” 노동신문, 2019.1.1.
47) “2019년 문재인 대통령 신년기자회견(질의응답),”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2019.1.10.
48) 이에 대한 자세한 검토는 제성호, 한반도 안보와 국제법 (서울: 한국국방연구원, 2010), pp. 76~87.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최고사령관이 연합군에 소속한 전 교전당 사국 군대를 대표하여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이것이 모든 교전당사 국에 적용된 것에 비추어 한국전쟁의 경우에도 유엔군 총사령관은 한국 및 참전 16개국들을 대표하여 「한국정전협정」에 서명한 것이 고, 따라서 한국 및 참전 16개국들이 「한국정전협정」의 당사자라는 것이다. 이 입장은 한국이 1950년 7월 14일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이 양한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operational command authority) 에 정전협정 체결권이 포함된다고 본다.
세 번째로, 「한국정전협정」의 당사자를 유엔과 북한 및 중국이라 고 보는 입장은 유엔군 총사령관은 어디까지나 서명자일 뿐이며 법 인격을 갖는 국제법 주체인 유엔만이 「한국정전협정」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입장은 한국이 협정 체결에 반대하여 협정 에 서명하지 않았으며 유엔군 총사령관이 협정에 서명하면서 대한 민국을 위한 서명임을 밝히지도 않았기 때문에 한국은 「한국정전협 정」의 당사자가 아니라고 본다.
네 번째로, 「한국정전협정」의 당사자를 한국 및 유엔과 북한 및 중국이라고 보는 입장은 한국군과 참전 16개국들 군대가 연합군을 형성하였다고 보는 두 번째 입장과는 달리 한국군과 유엔군이 연합 군을 형성하였다고 본다. 한국군과 참전 16개국들 군대가 연합군을 형성하였다고 보는 두 번째 입장은 2차 세계대전의 경우와 한국전쟁 의 경우를 동일시하고 있으나, 한국전쟁에서의 유엔군사령부는 유 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의하여 설치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보조기관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조약의 당사자(party)란 조약에 의하여 구속을 받게 되는 국제법 주체이며, 조약의 서명자(signatory)는 이러한 당사자 를 대표하여 조약에 서명을 하는 사람이므로, 두 개념은 구별되어야
한다. 「한국정전협정」에는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웨인 클라크, 조선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가 서 명을 하였는데, 이들이 각각 어떠한 국제법 주체를 대표하여 서명을 했는가가 문제의 핵심이다.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 군 사령원은 북한과 중국을 대표하여 서명한 것이고, 따라서 북한과
중국이 「한국정전협정」의 당사자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결국 유엔군 총사령관의 서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문제인 데,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은 한국군과 참전 16개국들 군대를 지휘 하였고, 그러한 직책에서 한국과 참전 16개국들을 대표하여 교섭 및 서명을 한 것이므로, 국내 국제법학계의 다수설처럼 「한국정전협정」 의 당사자는 한국과 참전 16개국들과 북한 및 중국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1954년 제네바 정치회담에 한국, 남 아공을 제외한 모든 참전국들(즉, 15개국들), 북한, 중국, 간접 당사 자인 소련 등 총 19개국이 참여한 사실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뒤 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유엔군사령부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의하여 설치되기는 하였지만 유엔 헌장 제29조에 따른 안전보장이 사회의 공식적인 보조기관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유엔 자체 가 「한국정전협정」의 당사자가 될 수는 없다고 본다.
「한국정전협정」은 제62항에서 “본 정전협정의 각 조항은 쌍방이 공동으로 접수하는 수정 및 증보 또는 쌍방의 정치적 수준에서의 평 화적 해결을 위한 적당한 협정 중의 규정에 의하여 명확히 교체될 때까지 계속 효력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에 따르면 「한 국정전협정」은 쌍방 당사자, 즉 한국 및 참전 16개국들과 북한 및 중국의 합의에 의하여 평화협정으로 대체될 수 있다. 참전 16개국은 미국, 캐나다, 콜롬비아,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남아공, 에티 오피아, 영국, 벨기에, 프랑스, 그리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터키
이다. 그런데 이 중 미국을 제외한 여타 참전국들은 정전 유지 역할 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전당사자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49) 무엇보다도 현 시점에서 본다면, 참전 16개국 들과 중국 간에는 각각 수교가 이루어졌고, 미국 및 프랑스를 제외 한 참전 14개국들과 북한 간에는 각각 수교가 이루어졌다는 점이 고 려되어야 할 것이다. 수교를 한 국가들 간에는 이미 법적으로 평시 관계가 수립된 것이라는 점에서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대체가 실질적인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이는 한반도 정전체제와 같이 여러 주체들이 관련되어 있으면서 정전체제가 장기간 지속되고 있는 경 우에는 다자 평화협상의 참여범위를 정함에 있어 정전협정과의 관 련성이라는 요소가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음 을 보여준다.
결국 평화체제 논의의 주체 문제는 정전협정과의 관련성, 즉 법리 적 타당성의 관점에서만 접근할 수는 없으며, 그 밖의 다른 요소들에 의하여 좌우되는 측면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평화체제 논의의 주체 또는 평화협정의 당사자에 관한 고려 요소로는 관련 주체들의 의사, 당사자 해결 원칙의 구현 및 외세의 과도한 개입 방지, 실현 가능성, 평화보장력의 확보, 평화가 파괴될 경우 개입 가능성, 효과 적인 국제협력 유도 등의 요소들이 제시된 바 있다.50) 이러한 요소 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면, 남‧북‧미‧중 4자가 평화체제 전환
49) Patrick M. Norton, “Ending the Korean Armistice,” NAPSNet Policy Forum (March 29, 1997), <https://nautilus.org/napsnet/napsnet-policy-forum/naps net-policy-forum-online-2-norton-ending-the-korean-armistice/> (검색일 2019.8.16.).
50) 예컨대, 백진현, “정전체제의 평화체제 전환문제,” p. 287; 제성호, “남북평화협정의 체결방향과 법적 문제,” 심지영‧김일영 편, 한미 동맹 50년: 법적 쟁점과 미래의 전망 (서울: 백산서당, 2004), p. 250; 백승주, “한반도평화협정의 쟁점: 주체, 절 차, 내용, 평화관리 방안,” 한국과 국제정치, 제22권 1호 (2006), p. 266; 이종석,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논의, 쟁점과 대안 모색,” 세종정책연구, 제4권 1호 (2008),
p. 18; 장용석, “한반도 평화체제와 평화협정-개념, 쟁점, 추진방향,” p. 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