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는 적지 않은 시각 차이를 보이는데, 양자의 비교연구를 통해 학 문발전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하므로 학생들의 혼란을 조성할 것이다.78)
리칭화에 따르면, 인식대만의 문제점으로 첫째, 왜 대만광복 후 역사를 서술한 9장과 10장의 편명을 ‘제2차 세계대전 후’라고 하여
‘중화민국시기’를 사용하지 않았는가? 둘째, 왜 책 중에 여러 곳에서 의도적으로 ‘광복’이란 두 글자를 피하고, ‘전후’라는 말로 대신하려 하 는가? 셋째, 왜 인식대만교과서는 현행 역사교과서의 嚴家淦총통에 관한 부분을 삭제하였는가? 넷째, 마지막 한 장인 ‘미래발전’에서 왜
‘신대만’건설을 제기하면서 미래의 ‘통일’이란 글자는 언급하지 않았는 가? 「지리편」 역시 마찬가지이다.79)
95잠강에서는 ‘현대대만과 세계’→ 98과강에서는 ‘현대대만’→ 101 과강에서는 ‘중화민국시기: 현대대만’→ 과강미조에서는 ‘중화민국시기:
현대대만’80)으로 일부 제목에 변화가 있었다. 95잠강에서 ‘대만지위미 정론’이 처음으로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 들어갔는데,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의 법률상의 지위를 낮추었으며, 일본이 대만 등의 포기를 선언하였지 중국으로의 귀속은 말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국민당통치시 기의 평가에 대해서도 국민당이 대만을 접수하는 과정에서의 악정이나 2·28사건을 논쟁점으로 언급했으며, 국민당통치 중 헌정과 민권 침해 사실 등을 기술하였다. 이런 논조에 대해 통일파는 대만 독립파의 전 형적인 논리로 교육을 통한 대만독립의 시도라고 비난하였다.
95잠강 교과서에서는 쑨원에 의한 중화민국 창건에 관한 내용을 첨 가함으로써, 중화민국이 대만사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는 비난을 피하 고자 했다. 그리고 국민당과의 정치 논쟁을 피하기 위해 장개석 독재 체제를 지칭하는 권위체제(强人威權體制) 등의 명칭도 삭제하였다. 하 지만 당시 타이베이 시장이었던 국민당의 마잉주는 과강초안에 포함된
78) 王仲孚 編, 爲歷史留下見證:《‘認識臺灣’敎科書參考文件》新編, pp.66-67.
79) 李慶華, 「我對國中認識臺灣敎科書的質疑」 (王仲孚 編, 爲歷史留下見證:
《‘認識臺灣’敎科書參考文件》新編), pp.134-136.
80) 南一書局, 翰林出版, 康喜文化, 龍騰文化 고등학교 역사교과서(104年版)의 경우 기본적으로 ‘中華民國時期: 當代臺灣’으로 제목을 정했으나, 三民書局의 역사교과서는 ‘中華民國統治下的臺灣’이라고 했다.
대만지위미정론에 이의를 제기하여 두정성을 비롯한 각료들과 논쟁을 벌였다. 그에 따르면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대만의 지위는 이미 중국으로 (귀속된다고) 정해졌고”, 1972년 미국과 중국이 외교관계를 회복하면서 대만지위미정론 문제는 없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카이로 선언을 포함한 11개의 역사문건은 모두 고등학교 역사교재에 넣어야 한다고 했다.81) 95잠강에서는 대만현대사의 아킬레스근인 2·28사건이 주요 역사논쟁의 하나였다. 비록 국민당 측 역사가들은 리덩후이총통 이 직접 사과했으나 여전히 불씨가 남아있는 이 비극적인 사건을 교과 서에 포함시키는 것을 주저하였다. 하지만 민진당 측 역사가들은 대만 사에서 2·28사건은 절대로 뺄 수 없는 역사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왜냐 하면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진정한 대만의식을 각성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후대만의 정치변천에 대한 연구는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금기시되 어 사회과학분야에서는 198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연구가 시작되었 다. 비록 백색공포 등에 대한 연구가 여전히 관련 정부문서의 미공개 로 새로운 성과가 많지 않지만 권위주의체제와 백색공포의 형성과정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은 가능해졌다. 95잠강에서는 역사학자의 논저는 많지 않아 국민당의 통치형태를 언급하거나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방향에 대한 당위적인 언급은 한계가 있다. 이 시기의 각 역사교과서 는 국민당이 특별입법을 통해 권위주의체제의 기초를 세운 사실을 언 급하고 개별사건을 통해 백색공포의 내용을 소개하는 방식을 취하지만 독재체제의 유지와 인권침해에 대한 묘사는 다소 모호하게 넘어간다.
그리고 101과강에서는 일부 연구 성과에 기초해 구체적으로 묘사된 부분이 없지 않으나 진상규명과 책임소재에 대한 부분은 여전히 회피 하고 있다.82) 101과강의 역사과 부분은 98과강과 비교하면 4장 중화 민국시기에서 당대대만의 내용이 상대적으로 줄었고, 중국사의 비중은
81) 김유리, 「대만사, 중국사, 세계사: 2004-2008년 대만의 고등학교 역사과정 개혁 분석」, pp.123-124, 121.
82) 林琮舜, 臺灣史硏究在高中敎科書中的落實與落差, pp.77-78.
이전에 비해 증가하였다.
과강미조의 4장은 중화민국통치시기이다. 전반부의 세 개 장이 ‘光 復에서 遷臺로’, 40년대부터 60년대, 60년대 후의 정치경제발전 등을 다루었으며, 마지막 단원은 사회변천과 문화발전으로 새롭게 구성되었 다. 이런 전후사 부분은 산업화 민주화와 관련해 몇 가지 강조점이 있 다. 첫째, 중화민국정부의 대만통치의 합법성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광복대만’에서 카이로선언 포츠담선언이나 대만대표의 중화민국 헌법 제정 참여 등이다. 둘째, 국민당의 권위통치에 대해 백색공포는 양안 대치와 반공정책 등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공민교과서에서는 백색공포 의 인권에 대한 위해를 삭제하였다. 셋째, 국민당통치 아래 경제성취 가 뚜렷한데 새롭게 토지개혁과정, 경제비약, 10대 건설 등을 추가하 고, 특별히 경제발전을 추진한 孫運璿 등을 소개하였다. 넷째, 국민당 정부가 추진한 민주화의 공헌을 제시하였다. 예를 들어, 지방자치의 민주발전에 대한 의의, 입법위원 선거의 조정, 黨禁報禁의 개방, 해엄, 국회의 전면 개선과 총통직선 등이다.83) 대만과 한국이 전후 산업화와 민주화에 모범적으로 성공한 나라라는 점에서 무척 닮아 있다. 하지만 양국의 산업화와 민주화에 대한 비교연구는 여전히 부족한데, 그나마 대만의 2·28사건과 제주의 4·3사건 등에 대한 비교연구 등이 이루어 지고 있다.
대만대학 역사학과의 ‘대만과 해양아시아(臺灣與海洋亞洲)’연구팀에 서 발표한 「高中臺灣史課綱微調敎育部說明vs.眞相版」과 「臺灣史課綱 變動表」에 따르면, 과강의 글자 수가 미조 후에 139.3% 수정되었다고 한다. 원래 과강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로 나누어 소개했는데, 개정 후에는 정치방면의 내용이 대폭 증가하고 사회문화를 합쳐 한 절로 만 들었으며, 문화발전 분야의 소개가 대폭 삭제되었다. ‘광복’이 ‘접수’를 대신하고, 정부 각 방면의 긍정적인 성취를 강조했으며, 경제발전의 성과와 정부정책을 연결시키고, 환경보호 방면의 영향을 삭제하였다.
83) 陳翠蓮, 「課綱‘微調’變黨綱」 (新新聞網站, 2014.5.20.; 吳俊瑩 等著, 我們 爲什麽反對課綱微調), pp.50-51.
대만지위와 양안관계 중에는 양국론 관련부분을 삭제하고, 중화인민공 화국의 존재를 언급하는 것을 피하며, ‘중국대륙’으로 고쳤고, 대만의 특색을 모호하게 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대만과 중국이 일체인 것으로 인식하도록 했다.84)
실제로 미조 후의 104과강은 101과강과 비교해서 역사과의 대만사 부분이 대폭 바뀌었다. 저우완야오의 통계에 따르면 104과강 역사과 의 내용을 101과강과 비교했을 때, 대만사과강은 미조 전에는 1,937 자였으며, 미조 후에는 2,404자인데, 1,169자를 고쳐(새로 증가한 글 자가 818자, 없앤 글자가 351자) 60.4%에 달하였다.85) 이에 대해 張 亞中은 미조과정 중에 많은 글자가 더해지고 빠진 것은 실은 문자위치 의 조정 때문이라고 반박하였다.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