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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夫之 宋論의 王安石 개혁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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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夫之 宋論 의 王安石 개혁에 대한 평가 *

1)

李 瑾 明 (韓國外國語大)

Ⅰ. 머리말

Ⅱ. 王安石에 대한 강렬한 反感

Ⅲ. 神宗과 新法에 대한 논평

Ⅳ. 元祐更化에 대한 이해

Ⅴ. 맺음말

Ⅰ. 머리말

北宋의 정치사는 11세기 후반 王安石이 집권하여 대대적인 개혁을 실시하면서 중대한 변화를 맞이한다. 이전까지 중앙의 발탁을 고사하 며 권력과 지위에 대해 초연함을 보이던 왕안석은, 神宗의 부름을 받 자마자 즉시 上京하여 황제에게 대대적인 개혁과 국면 전환을 권유하 였다. 이렇게 하여 시작되는 대개혁은 이른바 ‘新法’, 혹은 ‘變法’이라 불린다. 왕안석이 중심이 된 대개혁과 더불어 중앙 정계는 확연히 두 갈래로 나뉘었다. 그리고 韓琦·富弼·歐陽脩·文彦博·司馬光·呂公著·蘇軾·

程顥 등 朝野의 명망을 받는 인사들은 거의 빠짐없이 개혁의 반대편에 는 포진했다. 왕안석 주변에는 극소수의 중견 관료를 제외하면 대부분 신진 인사들 뿐이었다.

이러한 왕안석 내지 王安石 개혁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렸

* 이 논문은 2013학년도 한국외국어대학교 학술연구비 지원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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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왕안석에 대한 정치적 후견인이자 지지 자였던 神宗은 熙寧 6년(1073) 그에게 자신의 玉帶를 하사하며, “이 玉 帶를 卿의 자손에게 전함으로써 朕과 卿이 한 시대를 같이 살며 서로 만날 수 있었던 아름다움을 상징토록 하라.”1)고 말하고 있을 정도이 다. 또 왕안석의 정치적 계승자라 할 수 있는 蔡京은 왕안석을 孔子廟 에 配享하고 있다.

반면 반대자들에게 있어 왕안석은 거의 惡의 화신과 같이 묘사되었 다. 蘇洵이 辨姦論 에서, ‘왕안석은 人之常情을 거스르는 大姦으로서 奸人의 대명사라 칭해지는 西晉 王衍과 唐代의 盧杞를 합한 것보다 세상에 더 큰 해악을 미칠 인물’이라고 말했던 사실2)은 유명하다.

신종 희녕 2년(1069) 왕안석이 집정으로 발탁된 직후 呂誨는, “충성 스러워 보이나 대단히 간사하고 진실되어 보이나 몹시 바르지 못하다.

왕안석은 바깥으로는 質朴해 보이나 안으로 간교함과 사악함을 감추고 있다.…… 이 자는 필시 천하의 蒼生을 잘못되게 할 사람이다.”3) 라고 말하고 있다. 심지어 근엄한 도학자인 司馬光조차 한때는 왕안석과 德談을 주고받는 점잖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熙寧 3년(1070) 2월 및 3월의 서신왕래를 통해 절교한 후에는, “잘못된 공부를 하여 거짓을 말하니 誅殺되어야만 한다. 결코 良臣이 아니라 실로 백성의 賊이 다.”4)고 말하고 있다.

전통시대 왕안석에 대한 평가는 구법당 라인의 남송정권이 출범 하며 일단락되었다. 이후 왕안석은 朝政을 그르치고 國論을 양분시 켜 북송을 멸망으로 이끈 장본인이라고 규정되었다. 그가 기획하여 시행했던 新法 제조항도 기본적으로 백성들에게 해악을 끼친 악법 1) 續資治通鑑長編권247, 神宗 熙寧 6년 10월 辛巳, “賜卿帯以傳遺子孫 表朕與

卿君臣一時相遇之美也.”

2) 蘇洵, 嘉祐集 권9,

3) 송사권321, 呂誨傳 . 大姦似忠, 大佞似信, 安石外示朴野, 中藏巧詐··· 誤 天下蒼生, 必斯人也.

4) 司馬溫公傳家集권17, 奏彈王安石表 . “安石首倡邪術, 欲生亂階, 違法易常, 輕革朝典, 學非言偽, 王制所誅, 非曰良臣, 是為民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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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악평은 20세기에 들어 청조가 멸망할 때까 지 기본적으로 답습되었다. 왕안석과 동향의 인물인 陸象山5)이라든 가 혹은 淸代에 이례적으로 왕안석의 연보6)를 편찬하였던 蔡上翔 등과 같은 인물이 일부 등장하기도 했으나, 이러한 목소리는 압도적 매도에 묻혀버렸다.

그러다가 왕안석에 대한 평가가 극적으로 전환되는 것은 20세기 이후의 일이다. 중국이 제국주의 열강의 압박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강력한 추진력으로 국정을 지휘하며 국가적 난제에 대처하고자 하 는 왕안석의 모습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가 제안했던 신 법 조항들에 대한 평가도 이전과는 판이해져서, 약자인 중소농민과 상인들을 배려하는 것이었다고 이해되었다. 왕안석에 대한 총체적 상찬이 지배적인 흐름을 구성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梁啓超와 같은 인물은, 왕안석이 출현했던 것이 중국사의 영광이었다고 말하고 있 다.7) 이러한 왕안석에 대한 호의적 평가는 기본적으로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8)

이상과 같은 왕안석에 대한 평가의 굴절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 는 것이 王夫之의

宋論

이다. 왕부지의 평가는 전통시대 왕안석에 대한 惡評의 집대성판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이다. 그는 神宗 治世라는 시대의 성격, 왕안석의 人品과 學問, 왕안석 개혁의 제조 항, 그리고 元祐 구법당 시대 및 이후의 신법당 정권에 이르기까지 명쾌하게 논단을 가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왕부지

宋論

9)에 등장 5) 陸象山의 왕안석 평가는 荊國王文公祠堂記 (陸九淵集권19)에 집약되어

있다.

6) 蔡上翔, 王荊公年譜考略. 7) 梁啓超, 王安石傳 敍論 .

8) 오늘날 대륙학계에 왕안석에 대한 비판적 평가가 전연 없는 것은 아니다. 절 대 다수는 물론 왕안석의 정책 내지 왕안석에 대해 상찬하는 입장에 서 있지 만, 여전히 왕안석 내지 新法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견해도 소수이나마 존재 한다. 그러한 비판적 평가 가운에 가장 대표적인 논술이, 王曾瑜, 王安石變法 簡論 (輜銖編, 河北大學出版社, 2006 및 凝意齋集, 蘭州大學出版社, 2003 등에 수록)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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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왕안석 평가가 어떠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고, 그것이 어떠한 전후 맥락에 위치하고 있는지에 대해 논급하고자 한다.

Ⅱ. 王安石에 대한 강렬한 反感

王夫之의

宋論

은 왕안석에 대한 전통시대의 평가 가운데 가장 극 렬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왕부지가 명말청초의 시기를 살았던 강렬 한 華夷論者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거니와, 그의 왕안석 평가는 철저히 春秋學的 명분론에 입각해 있다.

宋論

은 도처에서 왕안석에 대한 강렬한 반감을 표출하고 있지만, 특히 神宗篇 은 가위 왕안석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비판 내지 공격으로 채워져 있다 해도 과언 이 아닐 정도이다.

왕부지는 왕안석에 대해 실로 쾌도난마와 같이 엄히 분석하여 ‘小人’

이며 ‘姦人’이라 규정한다. 그는 “君子의 道에는 반드시 안 할 일(必不 爲)이 있는 반면 반드시 할 일(必爲)은 없다. 小人의 道에는 반드시 할 일이 있는 반면 반드시 안 할 일이란 없다.”10)고 말한다. 그런데 왕안 석은 하루 아침에 정권을 잡자 천하를 협박하며 어떠한 일에도 구애되 지 않고 스스로 깨달았다고 여기는 바를 집행해 나갔다. 그러한 왕안 석에게는, 반드시 할 일(必爲)과 반드시 안 할 일(必不爲)의 구별이 없 었다. 따라서 “따라서 王安石이 진실로 小人인 것은 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다.”11)고 말한다. 누구든 자신의 정책이 위로 군주의 동의를 얻지 못하든가 혹은 朋友들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든가 나아가 백성

9) 이 글에서 이용한 王夫之 宋論의 논설은, 이근명, 王夫之 宋論 哲宗篇의 譯 註 (송요금원사연구9, 2004) 및 王夫之 宋論 神宗篇의 譯註 (역사교육 논집41, 2008)를 이용하였다.

10) 宋論권6-2. 神宗 , “君子之道, 有必不爲, 無必爲. 小人之道, 有必爲, 無必 不爲.”

11) 위와 같음, “故王安石之允爲小人, 無可辭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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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따르지 아니하면, 모두 버리고 물러나는 것이 군자된 도리이다.

그런데 왕안석은 자신이 공부한 것만 옳다 여기며 급기야 이단으로 함 몰해 갔다. 그러므로 왕안석을 소인이라 규정하는 것은 결코 지나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왕부지에 의하면 군자와 소인을 가장 두드러지게 구별짓는 요인은, 자신에게 요구하는가 혹은 남에게 요구하는가에 달려있다고 한다. 군 자는 모든 도덕 기준을 자신에게 향하여 자신에게만 엄격히 구한다.

반면 소인은 남을 윽박질러 나를 따르도록 강요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왕안석은 전형적인 소인형 인물으로서 자기 편을 들면 옳다고 하고, 반대로 자기를 공격하여 나쁘다고 말하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왕안석이 지니고 있었던 學問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이에 대한 왕부지의 평가는 약간 불분명하면서도 전후가 맞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왕안석이 결코 전통적인 儒家가 아니었으 며 이단이었다고 한다. ‘왕안석은 申不害·商鞅을 본받은 法家類였다.’12) 고 규정한다.13) 이렇듯 왕안석이 法家라는 논단은

宋論

의 여기저기 에서 등장한다. 때로 “그가 桑弘羊과 劉晏을 자임했다.”14)고 말하기도 하고, 때로는 ‘후일 본색을 보이며 法術 숭상이 드러났다.’15)고 말하기 도 한다. 堯舜을 들고 仁義를 말했던 것은 그러한 邪慝함을 감추기 위 12) 宋論권6-1, “安石以申·商之名法, 無不可曰堯·舜.”

13) 왕안석을 두고 法家流라 공박하는 논설은 이미 송대에도 적지 않았다. 楊時 가 欽宗에게 올리는 상주문에서, “謹按安石挾管·商之術, 飾六藝之文姦言 變亂 祖宗法度.”(송사권428, 楊時傳 )라 단언했던 것은 유명하다. 이밖에 張九成 은, “介甫所學者申·韓, 而文之以六經, 温公所學者周·孔, 亦文之以六經. 故介甫之 門多小人, 而温公之門多君子. 温公一傳而得劉器之, 再傳而得陳瑩中, 介甫一傳而 得吕太尉, 再傳而得蔡新州, 三傳而得章丞相, 四傳而得蔡太師, 五傳而得王太傅.

介甫學行, 使二聖北狩, 夷狄亂華.”(橫浦先生文集권16, 盡言集序 )라고 말한 바 있으며, 范純仁은 神宗 熙寧 2년 8월에 올리는 상주문에서 더 직설적으로,

“安石議桑羊之術, 不恭甚矣.”(范忠宣公奏議 권上, 論劉琦等不當責降 )라고 말하고 있다.

14) 宋論권6-2, 神宗 “安石……以桑弘羊·劉晏自任.”

15) 宋論권6-4, “當其崇異端·尙權術也, 則弁髦聖人以恣其云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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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술수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왕안석이 지녔던 ‘貪功謀利의 邪說’은

‘유가적 聖王이 세상을 다스렸던 원칙’과는 분명히 달랐다.

하지만 군데군데 이러한 논단과는 약간 뉘앙스가 다른 언급이 등장 하기도 한다. 왕안석의 과거제 개혁16)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부분이 그 단적이 예이다. 詩文을 폐지하고 經義를 중시하는 것이야말 로 올바른 인재 선발 방식이었다고 말한다. ‘詩文을 지으며 미사여구를 쓰는 것이라든가 혹은 마음을 허탄한 문장 장식에 쏟는 것에 비하면, 經義가 비교할 수 없게 올바른 학업’17)이라는 것이다. 經義의 중시로 말미암아 비로소 진정한 학문을 권유하고 선비들로 하여금 卑俗한 마 음을 갖지 않도록 하였다.

왕부지에게 있어 왕안석은 극히 경계해야 될 惡이었다. 심지어 ‘妖言 을 안으로 감추고 있어 유희나 邪術을 일삼는 무리보다 더 나쁘다.’18) 고 말한다. 왕부지는

송론

에서 자못 유연하고 관대한 자세를 보이는 듯한 모습도 보인다. 후술할 章惇에 대한 평가가 그러한 사례이다. “바 른 사람은 대개 옳기는 하지만 때로 틀린 경우도 있고, 사악한 사람은 그 말이 대부분 틀리지만 마찬가지로 때로 옳은 경우도 있다. 따라서 사람의 말을 무조건 무시할 수 없다.”19)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왕안

16) 송대 科擧 과목은 進士科와 諸科(九經․五經․通禮․三禮․三史․三傳․學 究․一經․明經 등)로 구성되었고, 進士科의 解試 및 省試에서는 최초 詩․

賦․雜文(箴․銘․論․表 등)․策五題․論語 十帖․左傳 혹은 禮記 墨義를 부과하였으나 唐 이래의 전통을 이어 詩賦가 중시되었다. 進士科의 殿 試에서는 詩․賦․論(합하여 三題라 칭함)을 시험보았다. 그런데 神宗 熙寧 2 년(1069) 왕안석의 주장에 따라 대개혁이 단행되어 進士科의 解試 및 省試에 서 試․賦․墨義 등을 정지하고 經義․論․策만을 시험하게 되었다. 이밖에 諸 科도 점차 합격 인원을 감축하여 폐지시켜 가기로 결정하였다. 이로써 經義 중 시의 방향이 확정되어 후세로 계승되기에 이르렀다.

17) 宋論권6-5, 神宗 , “以視取靑妃白, 役心於浮華蕩冶之中者, 貞淫之相去遠 矣.”

18) 宋論권6-4, “實則繇言之隱, 與聖人傳心之大義微言相背而馳, 尤甚於戱豫詭 遇之徒.”

19) 宋論권6-8, “正者其言恒是, 而亦有非, 邪者其言恒非, 而亦有是, 故人不可以 廢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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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에 대해서만은 이러한 유연한 태도가 통용되지 않는다. 왕안석은 철 저히 唾棄하고 단죄해야만 하는 대상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왕안석이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공적이 있었다. 經義의 중시나 募役法의 실시 등이 그러했다.

왕부지는 왕안석의 학문에 대해 ‘異端’ ‘法家類’라 단언하면서도, 과거 제 개혁을 통해 士風을 바로잡고 학문을 올바른 길로 인도한 것을 부 정하지 못한다. 왕안석의 학문에 대한 성격 규정와 그것을 둘러싼 미 묘한 굴곡은 왕부지

송론

의 명쾌한 논단이 지닐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논리적 결함과 자기모순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왕부지의 왕안석에 대한 부정과 비판은, 이렇게 인격에 대한 폄훼 (小人)와 학문에 대한 부정(異端)으로 그치지 않는다. 나아가 그는 왕 안석의 식견이나 性情 자체 비루하기 그지없었으며, 왕안석의 행동은 온갖 小人的 술수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왕안석을 총체적으로 부 정하고 능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왕안석은 神宗을 만나 堯舜을 들먹이면서 신종의 판단을 뒤흔들었으며, 또 堯舜의 정책이라 말하며 조정의 신료들의 반대를 막아 공박할 수 없게 하였다. 왕안석 이야말로 ‘말이 거창할수록 그 뜻이 비천하며 속내가 텅 비어 있을수 록 의기는 교만해지는’20) 세상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이 러한 왕안석의 행태에 대해 왕부지는, “왕안석 같은 소인은 거리끼는 바가 없다. 무엇인들 못하겠는가?”21)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왕부지는 왕안석의 소행으로서 잘못된 것을 일일이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모두 군자라면 반드시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었다. 자신의 거 취를 가지고 군주를 압박하는 것,22) 대탄압 사건을 일으켜 원한을 갚 은 것,23) 나이 지긋한 사람을 욕보이고 뜨내기 선비를 부추기는 것, 아 20) 宋論권6-1, “言愈高者志愈下, 情愈虛者氣愈驕.”

21) 위와 같음, “小人而無忌憚, 夫亦何所不可哉?”

22) 神宗 熙寧 3년(1070) 2월 靑苗法에 대해 반대하는 韓琦의 상주문을 보고 神 宗이 동요하자, 왕안석이 파직과 낙향을 요청하며 칩거했던 일을 가리킨다.

23) 神宗 熙寧 3년(1070) 이래 新法에 반대했던 인사들을 줄줄이 좌천시킨 일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는 呂公著․韓維․歐陽修․文彦博․富弼․韓琦 등과 같이

(8)

첨하는 무리를 좋아하고 수하의 심복을 부리는 것, 밀정을 배치하여 반대파를 검속하는 것, 옛 성인들의 서적을 헐뜯고24) 도교나 불교를 숭상하는 것,25) 아들이 죽자 낙담하여 자신이 거처하는 집을 사찰에 헌납하고 불교에서 福을 비는 것26)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군 자라면 죽기 직전에 이를 정도로 곤궁해질 지라도 반드시 안 하는 일 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왕안석은 모두 다 하였다. “그러니 어찌 그가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잘못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그 악행을 행한 것이 겠는가?”27) 라고 반문한다. 반드시 하려는 바가 있었기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고 몸이 굳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악행은 필경 후환을 불 러 일으켰다. 수하의 심복들 가운데 자신을 향한 가시28)가 생겨나고 평소 왕안석에게 상당한 은혜를 주었던 인물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정황에 대 宋史에서는, “於是, 吕公著·韓維, 安石藉以立聲譽者也, 歐陽脩·文彦博薦已 者也, 富弼·韓琦用為侍從者也, 司馬光·范鎮交友之善者也, 悉排斥不遺力.”(권327,

王安石傳 )이라 전하고 있다.

24) 이를테면 春秋를 學官에서 제외시키고 나아가 ‘斷爛朝報’라 폄하했던 것이 그 단적인 사례이다.

25) 王安石의 老子 惑愛에 대해 사마광은, “光昔者從介甫遊, 介甫於諸書無不觀, 而特好孟子與老子之言.”(司馬公文集권40, 與王介甫書 )이라 전하고 있다.

26) 왕안석은 만년 불교에 심취하여 자신의 소유한 전택을 거의 전부 佛寺에 기 증한다. 특히 元豊 7년(1084) 64세이 되던 해 그는 이틀 동안 말도 하지 못할 정도의 중병을 앓았다. 이에 神宗은 이해 5월 蔡卞을 江寧府에 파견하여 문병 토록 하였다. 6월 병에서 회복된 왕안석은 神宗에게 상주하여 자신이 거주하는 半山園을 佛寺에 기증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하였다. 신종은 이를 윤허하고

‘報寧禪寺’라는 寺名을 하사하였다. 이와 동시에 왕안석은 자신의 아들인 王雱 및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상당 규모의 전답을 蔣山의 太平興國寺에 기증하 였다. 半山園의 기증에 대해 漁隱叢話에서는, “半山報寧禪寺, 荆公故宅也. 其 地名白塘, 舊以地卑積水為患, 自荆公卜居, 乃鑿渠决水以通城河. 元豐七年, 公病 愈, 乃請以宅為寺, 因賜寺額. 由城東門至蔣山, 此半道也, 故今亦名半山寺.”(後集 권25)라 전하고 있다.

27) 宋論권6-2, “抑豈不知其爲惡而冥行以蹈汚塗哉?”

28) 新法의 실행시기를 통해 왕안석의 절대적 신임을 받으며 사실상 2인자 역할 을 했던 呂惠卿의 배반을 일컫는다. 宋史에서는 이러한 왕안석의 呂惠卿에 대한 신임을, “安石言於帝曰, ‘惠卿之賢, 豈特今人? 雖前世儒者, 未易比也. 學先 王之道而能用者, 獨惠卿而已.’ 及設制置三司條例司, 以為檢詳文字事, 無大小, 必 謀之, 凡所建請章奏, 皆其筆.”(권471, 呂惠卿傳 )이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여혜경은 이후 왕안석을 배반하여, “惠卿既叛安石, 凡可以害王氏者, 無不為.”(

(9)

원망과 해독이 가족에 미치게 되었다29)는 것이다.

왕부지

송론

의 신종편 은 사실상 왕안석 및 신법에 대한 전면적 비판이라 해도 좋을 정도이다.

송론

의 다른 부분은 당해 시기의 주 요 현안에 대해 비교적 고르게 논급하며 그 當否의 贊論를 가한다. 하 지만 신종편 은 거의 철저히 왕안석을 비판하고 폄훼하는 것에 집중 하고 있다. 왕부지에게 있어 왕안석이란 인물은 조금도 용납할 수 없 는 존재였다. 비루한 소인이었으며 그가 지닌 학문도 정통 유가가 아 닌 이단이었다. 그의 성정도 비루하고 야비하였다. 그렇기에 말년에 온 갖 해독이 교차해 발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비루하고 사악한 인물이었던 왕안석이 어떻게 득세 하여 한 시대를 횡행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가 편 실제의 정 책, 즉 신법의 제조항은 어떠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일까? 이에 대한 왕부지의 논평은 다음 章에서 논급해 보기로 한다.

Ⅲ. 神宗과 新法에 대한 논평

왕부지에 의하면 왕안석은 희대의 惡人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정권 을 장악하고 한동안 국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왕부지 는 11세기 중엽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神宗을 위시한 당시의 주요 인물 들의 역량 부족 때문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이치는 事勢의 필연적 추이에 따라 변화한다고 한다. “크게 宋史권471, 呂惠卿傳 )이라 할 정도가 되었다. 이러한 여혜경의 배반은 왕 안석에게 심대한 충격을 주어서 심지어 江寧府로 은퇴한 晩年에 이르기까지,

“王荆公晩年, 於鍾山書院多寫‘福建子’三字, 蓋悔恨於吕惠卿者, 恨為惠卿所陷, 悔 為惠卿所誤也. 每山行多恍惚, 獨言若狂者.”(邵伯溫, 邵氏聞見錄권12)라 할 지 경이었다고 한다.

29) 神宗 熙寧 9년(1076) 맏아들인 王雱(1044∼1076)이 33살의 나이로 요절한 것 을 말한다. 이로 인해 왕안석은, “及子雱死, 尤悲傷不堪, 力請解幾務.”(宋史 권327, 王安石傳 )라 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10)

떨쳐진(大張) 다음에는 반드시 그로 말미암아 느슨(弛)해 지며, 크게 느슨해진 다음에는 반드시 그로 말미암아 떨쳐지게 된다.”30)는 것이다.

그런데 신종이 즉위하던 시점은 크게 느슨해진 뒤를 이어 추세가 점차 떨쳐지려 하던 때였다고 한다.

그럼 신종 이전의 시기, 즉 仁宗과 英宗 시기에 대해 왕부지는 왜 크게 느슨했던 시기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仁宗이 재위 41년 동 안 천하를 풀어서 휴식시켰기 때문이었다. 휴식 자체는 나쁘지 않았으 나 그 정도가 지나쳐 풀어진 事勢가 극한에 달하였다. 이러한 인식에 는 인종시기 유화적 이민족 정책에 대한 반감과 비판이 담겨져 있으 며, 왕부지의 강렬한 名分論과 華夷思想이 잘 드러난다. 그는 인종 시 기의 외교 정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매년 50만 씩을 거란에 보내주면서도 머리를 조아리며 스스로 ‘바친다 (納)’고 말했다. 우방의 禮로써 李元昊 父子를 대하면서도 매년 비단을 보 내주며 구차한 평화를 구걸하였다. 하지만 仁宗은 이러한 것들에 괘념치 않았다.31)

위에서 ‘매년 50만의 세폐를 바쳤다.’는 것은 인종 慶曆 2년(1042) 송 과 거란 사이의 절충에 따라 결정된 것을 가리킨다. 다시 서하의 침공 으로 송이 궁박해진 상황을 이용하여 거란은 종래 화약인 澶淵之盟의 개정을 요구하였다. 거란은 애초 燕雲 16주 가운데 後周 世宗이 수복 한 關南 2주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이에 송은 세폐 액수의 증액(은과 비단 공히 10만)을 제안하여 그대로 결정되었다. 또 거란은 송에게 세 폐를 보낼 때 ‘獻’이란 글자를 사용하라고 윽박질렀지만, ‘納’이라 칭하 는 선에서 타합되었다.32) 왕부지는 이러한 송의 저자세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서하와 막심한 물자의 제공을 댓가로 30) 宋論권6-3, “大張之餘, 必仍之以弛, 大弛之餘, 必仍之以張.”

31) 위와 같음, “歲輸五十萬於契丹, 而頫首自名曰納. 而友邦之禮禮元昊父子, 而輸 緡帛以乞苟安, 仁宗不念也.”

32) 이러한 송-거란 사이 맹약 개정의 경과에 대해서는, 宋史紀事本末권21, 契丹盟好 를 참조.

(11)

화약을 체결한 것에 대해서도 그는 ‘구차하게 구걸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인종 慶曆 2년(1042) 거란과의 맹약 개정, 경력 4년(1044) 서하와의 和約 체결은 송조로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송은 서방의 소 국 서하에 대해 막심한 재원과 군사력을 쏟아부으며 강경책을 견지하 였지만 康定 元年(1040)과 경력 원년(1041), 각각 三川口와 好水川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하였다. 왕부지는

송론

에서 이러한 사정에 대해서 도 논평을 가하고 있다.33) 이렇듯 전후 사정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으 면서도, ‘夷狄’에 대한 굴욕적 강화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종의 시대가 지나 神宗이 즉위하였다. 왕부지에 의하면 신 종은 당시 송조가 처한 정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욕과 자세를 지니 고 있었다.

神宗은 나약한 가시울타리 속에 있는 듯 여기며 나약하게 마음만 아파 하지 않았다. 강하게 일어나 국세를 떨치려 했다. 진실로 인종 시기 크게 느슨해진 것의 반작용이자 동시에 그것을 끝맺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 었다.34)

신종은 徽宗이나 度宗과 같은 昏庸의 군주가 아니었다. ‘英明한 군 주’, ‘英察의 군주’였다.35) 북송 중엽의 굴욕적 대외 관계를 크게 뒤바 꾸고자 하는 의욕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북송의 조정에 神宗 의 웅대한 포부와 추진력을 뒷받침할 만한 인물이 없었다. 왕부지는,

“神宗에게는 밖으로 드러내어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었다.”36)고 한다.

바로 국력을 길러 서북변의 거란과 서하를 향해 국세를 떨치는 것이었 다. 하지만 당시의 조정에는 이러한 대외경략의 의지를 뒷받침할 만한 장수도 없었으며, 司馬光이나 韓琦·富弼과 같은 당시의 朝臣들도 여러 모로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었다고 논한다. 송은 신종 시기에 커다란 33) 송론권4-8.

34) 송론권6-3, “神宗若處栫棘之臺, 衋然不容已於傷心, 奮起而思有以張之. 固仁 宗大弛之反, 授之以決裂之資.”

35) 송론권6-2.

36) 송론권6-3, “神宗有不能暢言之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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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국에 직면하게 되었다. 인종시대의 안일함이 신종에게 큰 후유증을 안겼다. 따라서 왕안석을 등용하여 송은 피폐해졌지만, 왕안석을 등용 하지 않았을 지라도 송은 역시 피폐해졌을 것이라고 왕부지는 단정한 다. 송이 날로 피폐해져 멸망으로 치닫는 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대세였다는 것이다.

이어 왕부지는 왕안석이 도입하였던 제신법 조항에 대해 조목조목 분석해 간다. 新法 가운데 靑苗法·均輸法·市易法 등은 일고의 가치도 없을 만큼 해악이 컸던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들 신법 조항들은 폐해 가 지독하여 철종과 휘종 시대에 紹述이 행해질 때에도 그것을 지속시 킬 수 없었다.

다음으로 保甲法·免役法·과거제개혁·保馬法 등은 후대에 부분적으로 채택되기도 하는 등 상당한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保馬法은 명대에 답습되었으나 민간에 재앙만 끼친 악법이었고, 保甲 法은 일부에서 그 명분이 좋다 하나 기실 아무 효과 없이 민간에 부담 으로 작용한 것일 뿐이었다. 免役法은 差役에 비하면 분명 良法이라 할 수 있으나, 사실 兩稅法에 의해 免役 조치가 취해졌던 것을 다시 본질을 호도한 채 민간으로부터 면역전을 징수한 것이었다. 왕안석의 면역전 重徵은 이후 민중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선례가 되었을 뿐이다.

이에 비해 유독 과거제의 개혁은 적절한 것이었지만 이후 그 본질이 왜곡되었다고 말한다. 왕안석이 과거제를 개혁하여 經義로 인재를 선 발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는데, 詩文으로 取士하는 것에 비해 단연 올바 른 방식이었다. 왕부지의 經義 중시는 그의 春秋學的 華夷思想 내지 명분론에 의거하는 것이다. 그는 경서의 내용은, “작은 즉 먹고 숨 쉬 고 걷는 세세한 일들에 그 원리를 적용하여 편안함을 얻을 수 있으며 크게 확대한즉 나라를 경영하고 천하를 제압하는 법에 이르기까지 모 두 유추하여 적용할 수 있다.”37)고 말한다. 또한 經義의 공부를 통해 37) 송론권6-5, “極之於小, 而食息步趨之節, 推求之而各得其安也. 擴之於大, 經

邦制遠之猷, 引伸之而各盡其用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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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과의 차이를 분별하고 모든 聖王들에게 공통적이었던 점을 추출할 수 있다고 한다. 왕안석이 지향한 것은 비루한 詞賦를 개혁하는 것이 었다. 그런데 이후 그 비루한 詞賦의 격식이 經義를 가두게 되었다고 왕부지는 지적한다. 성인의 말을 모욕하여 白首가 되도록 공부하고 온 천하를 다 뒤져도 그 道를 전연 볼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 서 급기야 經義를 詞賦 속에 가두는 것이 몇 차례 더 진행되어, 마침 내 經義는 거의 다 사라지고 마치 거울 속에서 詞賦의 기교를 겨루는 식이 되었다. 하지만 이 폐해는 명대 중엽 이후 가속화된 것이니, 그 잘못을 왕안석에게 돌릴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신법에 대한 공격 내지 비판과 더불어 왕부지가 특별히 관심 을 기울이는 대상이 대외 전쟁이다. 우선 王韶가 중심이 된 熙河經略 에 대해서는 역시 혹독한 비판을 가한다. 正道가 아닌 邪術에 불과한 것이었던 만큼 실패로 귀결되는 것은 당연하였다. 王韶가 西羌을 공격 하고 河湟을 정복함으로써 서하를 압박하자고 청하자,38) 이에 대해 왕 안석은 기발한 생각이라 칭찬하며 받아들였지만, 사실 이러한 王韶의 책략은 正道가 아니었다. 왕부지는 熙河經略에 대해, “칼자루 구멍의 미미한 소리처럼 돌아볼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39)고 극언하고 있다.

宋이 西羌을 다 제압하여 河湟의 땅을 다 차지한다 해도, 종내에는 고 립되어 그곳을 지켜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를 두고 왕안석은 기발한 책략이라 평가하며 기뻐하였으니, “왕안석의 어리석음은 참으 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40)고 단언한다.

이상과 같은 왕안석 및 新法에 대한 논평에 이어, 왕부지는 신종 熙 寧 연간의 초기 왕안석이 집권하여 신법 정치를 폈던 데 있어 노신들 38) 神宗 熙寧 元年(1068) 平戎策 을 올려, “西夏를 공략하기 위해 먼저 河州와 湟州 일대의 蕃部를 제압하여야 한다. 그러면 서하는 앞뒤로 압박을 받게 되므 로 반드시 정복될 것이다.”라고 주장한 것을 가리킨다. 王韶는 또 平戎策 에 서 그 구체적인 方略과 조치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왕소의 주장은 神宗 시대 (熙寧 및 元豊 연간)를 통해 서하 공략의 대원칙으로 채용되기에 이른다.

39) 송론권6-6, “吹劍首者之一吷而已矣.”

40) 위와 같음, “安石之愚, 不可砭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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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당시 조정의 상황에 대해 왕부지는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다.

그 당시 社稷을 책임질 신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덕망이 무거워 족 히 군주를 바로잡고 국가를 바로 이끌 사람이 있었다. 韓琦와 富弼․文彦 博․呂公著 등이 그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군주를 보필할 지위에 있으 면서 굳게 지켜내지 못했으며 힘 있게 자르지 못했다.41)

위 인용문에 든 인물 중에서도 韓琦의 책임이 가장 컸다고 한다. 한 기는 仁宗과 英宗 양대에 걸친 定策42)의 공로가 있는 인물이었다. 母 后의 수렴청정을 종식43)시킨 바도 있었으며 환관의 음모를 막아내 기44)도 하였다. 그라면 신종 초기 왕안석의 사악함을 보고 그로 말미 암은 危害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이 다. 文彦博과 富弼 역시 과오를 범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문언박은 일신 의 무사안일만을 추구했을 뿐이며, 부필은 왕안석 반대의 뜻이 받아들

41) 송론권6-7, “乃其在當日也, 非無社稷之臣, 德重望隆, 足以匡主以倚國是, 若 韓·富·文·呂諸公者, 居輔弼之任, 而持之以不堅, 斷之以不力.”

42) 韓琦가 英宗과 神宗의 즉위과정에서 결정적 공을 세웠던 일을 가리킨다. 仁 宗은 晩年에 이르도록 親子의 출생을 기다리며 後嗣의 결정을 보류하고 있었 다. 이에 대해 朝臣들은 내심 근심만 할 뿐 감히 進言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한 기가 감연히 인종을 설득하여 영종이 후사로 결정되도록 하였다. 또한 그는 治 平 3년(1066)이래 英宗의 병세가 심각해졌을 때 神宗이 황태자로 책봉되는 과 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43) 英宗 治平 元年(1064) 5월 英宗의 병이 낫자 재상 韓琦가 그때까지 垂簾聽政 을 하고 있던 曹太后에게 간언하여 英宗에게 還政토록 한 것을 가리킨다.

44) 仁宗 시기 蘇舜欽 무리가 進奏院의 故紙를 팔아 술을 마신 사건이 발생하였 다. 이를 계기로 환관 세력이 부상할 우려가 있었던 것을 韓琦가 저지하였던 것을 가리킨다. 이 전후의 사정에 대해 三朝名臣言行錄에서는, “蘇子美 進奏院事發, 仁宗為讒者所惑, 夜遣中使散入大臣家捕同飲者. 公明日對曰. ‘夜来聞 遣官遶京城捕館職, 甚駭物聽. 此事但付有司, 自有行遣. 然陛下卽位來, 不曾做此 等事, 何故今日陡如此?’上色悔久之. 諸人欲以進奏院事傾正黨, 宰相章得象·晏殊 不可否, 賈昌朝參政陰主之 張方平·宋祁·王拱辰皆同力以排, 至列狀言, ‘王益柔作 傲歌, 罪當誅.’ 公時在右府, 因兩府同, 對言. ‘益柔狂語, 何足深計校? 方平等皆陛 下近臣, 今西用兵, 有何限大事不為論列, 而同狀攻一王益柔, 其情亦可見.’ 上 遂釋然.”(권1之1, 韓琦 )이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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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지 않자 ‘파직을 요청하여 더럽지 아니함을 자랑하듯 물러났다.’45) 고 한다.

그렇다면 통상 왕안석의 최대 라이벌이라 칭해지고 있는 司馬光에 대해서는 어떠한 평가를 하고 있을까? 왕부지는 사마광에 대해 놀라우 리 만치 가혹하고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사마광은 결코 왕안 석으로 말미암은 害惡을 막을만한 역량과 견식이 없었다고 한다. 사마 광은 왕안석의 잘못을 看取할 수 있는 안목도 없었으며 올바른 도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였다. 왕부지는 사마광에 대해,

司馬溫公은 한 번 크게 잃었다가 재차 다시 잃었다. 그리고 왕안석의 잘못이 뚜렷이 드러난 이후에야 후회했다. 그리고 또 蘇氏와 교유했다.

이는 다른 것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말을 분별하여 아는 문제 에 있었던 것이고 또 古今 先哲의 말을 알지 못한 데 있었다.46)

라고 말하고 있다. 사마광이 한 번 크게 잃었다는 것은 왕안석에 대한 오판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잘못을 깨닫고 난 다음에도, 蘇軾과 같은 인물과 교유한다는 과오를 다시 범하였다. 왕부지가 소식에 대해 이처 럼 극도로 폄훼하는 것은 대단히 흥미롭다. 淸初의 湖南이란 공간에 갇힌 채 春秋學的 명분론에 의거하여 세상을 살아가던 왕부지에게, 자 유롭고 호방한 영혼인 소식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라 여겨진 다.

마지막으로 왕부지는 章惇의 호북일대 소수민족 정복전에 대해 언급 한다. 이 부분이야말로 왕부지의 명분론 내지 화이사상이 유감없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철종시대 紹述을 주도했던 章惇이란 인물 자체는,

‘논할 가치도 없을 만큼 사악하다.’47)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호북지방 蠻夷 정벌은 결코 비판할 수 없는 훌륭한 업적이란 것이다. 蠻夷, 특히 중국 內地의 蠻夷는 궁극적으로 中華에 동화되어야만 하는 존재이고, 45) 송론권6-7, “乞身休老, 以自詡不汚.”

46) 송론권6-4, “溫公則一失已彰, 而又再失焉. 悔之於安石敗露之餘, 而又與蘇氏 爲緣. 無他, 在知其人之言, 而不知古今先哲之言也.”

47) 송론권6-8, “章惇之邪, 灼然無待辨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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章惇의 정벌은 그것을 실현시킨 행위였기 때문이다. 왕부지는 蠻夷의 정복에 대해 ‘仁을 베푸는 것이다.’48)고 말하고 있다. 천하의 군주된 天 子가 마땅히 행해야할 天職이라고까지 말한다. 호북의 정벌에 나선 장 돈의 마음가짐은 애초 君主로부터 功을 노리는 것이었으니 진실로 夷 狄의 敎化란 美名을 갖다 댈 수는 없다. 하지만 일을 이뤄내자 功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리고 功이 생겨났으니 결국 罪라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장돈의 신법 시행이나 인격은 그 사악함이 너무도 확연하여 재론할 여지가 없고 그의 소수민족 정벌 또한 그 정벌의 의도도 불순 하지만 결과적으로 훌륭한 업적으로 평가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교화 의 바깥에 위치한 蠻夷를 중국적 질서로 끌어들여 그들에게 은혜를 베 풀었기 때문이다.

Ⅳ. 元祐更化에 대한 이해

元豊 8년(1085) 3월 神宗이 38살의 나이로 崩御하고 9살의 哲宗이 즉위하였다. 철종이 즉위한 직후 신종의 母后인 太皇太后 高氏, 즉 宣 仁太后가 垂簾聽政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宣仁太后는 이로부터 元祐 8 년(1093) 9월에 붕어하기까지 약 8년여에 걸쳐 집권하며 신종의 정책 을 차례차례 폐지하고 舊法으로 회귀하였다. 이를 일컬어 사서에서는

‘元祐의 更化’라 부른다. 元祐更化는 元豊 8년 5월 구법당의 상징적 인 물인 司馬光을 門下侍郞으로 발탁하며 시작되었다. 신종이 붕어한지 불과 2개월만이었다. 선인태후와 사마광을 필두로 하는 원우 연간의 집권세력들은 신종 시기의 신법에 대해 철저히 부정하고 모든 것을 이 전의 상태로 개변시킨다는 방침을 취하였다.

왕부지에 의하면 이러한 元祐의 更化는 사실 신종이 만년에 이미 작 심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新法의 害惡으로 백성들 사이에 원망이 48) 위와 같음, “然且不治, 則又奚貴乎君天下者哉? 君天下者, 仁天下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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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등하고, 신법당의 주도로 시작된 대외 전쟁49)도 참담한 실패로 귀결 되며 신종은 점차 마음을 바꾸고 있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왕안석도 퇴진한 상태에서 그 후임자들의 실착이 거듭되고 있었다.50) 이에 따라 신종은 말년에 신법 정책의 철회를 작정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러한 실태에 대해 왕부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手實․方田과 같이 王安石이 창시한 것도 모두 神宗에 의해 폐지되었 다. 만일 神宗이 漢武帝 만큼 오래 살아 그 崩御가 그처럼 빠르지 않았다 면 輪臺의 詔와 같은 것도 반드시 스스로 먼저 내렸을 것이요 廷臣들의 많은 諫言이 있기를 기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개 막힘이 極하여 변화 하는 것은 하늘의 뜻이요, 人間들이 나설 필요조차 없다. 신종의 말년이 되면 그러한 형세가 거의 이미 나타났으며 勢가 이미 변화한 상태였다.51) 위 인용문에서 말하는 ‘輪臺의 詔’란 한 무제가 그 治世 말년인 征和 4년(前 89) 輪臺의 땅을 포기하면서 내리는 罪己詔를 가리킨다. 이를 통해 漢武帝는 治世 전시기를 통해 內政과 民生을 돌보지 않고 外征에 만 전념한 것을 후회하고 향후 정책기조를 일변시켜 內治에 전념할 것 을 천명하였다. 왕부지에 의하면 송의 신종 역시 한무제와 동일한 전 철을 밟았다고 한다. 왕안석을 등용하여 신법 정책을 실시한 것도 外 征을 대비하여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신법의 실시와 함 께 재정이 충실해지자 바로 熙河 경략, 交趾 정벌 등의 외정에 나섰다.

그러나 만년이 되어 정책의 잘못을 깨닫고, 정책 전환에 나서려 했으 나 일찍 死去하는 바람에 실현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49) 왕부지는 송론권7-1에서 그 사례로 高遵裕의 패전을 들고, 그로 인해 “죽 은 시체가 들을 뒤덮고 버려진 갑옷이 산처럼 쌓였다.”고 말하고 있다. 高遵裕 의 패전이란 神宗 元豊 4년(1081) 11월 西夏의 政變을 이용하여 西邊 諸路의 군대를 대거 동원, 靈州를 포위하였다가 오히려 西夏側의 역습을 받아 대패한 것을 가리킨다.

50) 이러한 사례로 송론에서는 鄧綰과 呂嘉問에 대한 처벌을 들고 있다(권 7-1).

51) 송론권7-1, “手實·方田, 自安石創者, 皆自神宗而報罷矣. 使神宗有漢武之年, 其崩不速, 則輪臺之詔, 必自己先之, 弗待廷臣之亟諫. 蓋否極而傾, 天之所必動, 無待人也. 幾已見矣, 勢已移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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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부지가 신법 정책 실패의 사례 가운데 하나로 들고 있는 手實法이 란 熙寧 7년(1074), 呂惠卿의 주도로 도입된 정책이었다. 五等丁産簿가 부실하여 면역전 징수가 불공정하자, 백성들로 하여금 丁産의 실황을 스스로 보고토록 한 것이었다. 당시는 왕안석과 여혜경의 관계가 틀어 지기 전이었고, 여혜경이 주도했다고는 하나 신법 정치의 일환으로 도 입되었으니 만큼 ‘王安石이 창시했다.’고 말하는 것도 큰 잘못은 아니 다. 하지만 왕안석의 개혁이 制置三司條例司의 설치를 전후한 熙寧 연 간 초기에 대부분 단행되었다는 점, 그리고 후일 왕안석-여혜경 관계 가 결정적으로 변질된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왕부지가 신법 실패의 대표적 사례의 하나로서 手實法을 들고, 그것이 왕안석에 의해 창시되 었다고 말하는 것은 상당한 논란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나아가 神宗이 점차 정책 기조의 변화를 꾀하게 되었다고 말하며 들 고 있는 사례들 역시 전후 사실관계의 확인에 상당한 착오가 있다. 手 實法과 方田均稅法의 폐지라 하는 것이 그러한 문제점을 단적으로 보 여준다. 手實法은 熙寧 7년의 도입 이후 얼마 되지 않아 폐지되었다.

결코 수실법의 폐지는 신종 治世의 말년에 단행된 것이 아니었다. 방 전균세법의 폐지는 신종의 사후인 元豊 8년(1085) 10월 선인태후의 섭 정기에 취해진 조치였다.

高遵裕의 패전이 대외 정책 전환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 역시 상당한 잘못이다. 신종은 원풍 4년(1081) 高遵裕의 패전 이후 에도 서하에 대한 적극적 공격 정책을 지속했다. 그것이 최종적으로 포기되는 것은 이듬해인 원풍 5년(1082) 9월 永樂城 전투에서 대패를 당하고 난 다음의 일이다. 永樂城 전투 참패의 소식이 전해지자 신종 은 朝會에 임하여 통곡하고 식사까지 정지할 정도였다고 한다.52) 당시 의 史書에서는 영락성 전투의 패배를 계기로, ‘이후 外征에 염증을 느 껴 다시는 西夏의 공략에 뜻을 두지 않게 되었다.’53)고 적고 있다.

52) 이에 대해서는, 宋史紀事本末권40, 西夏用兵 참조.

53) 續資治通鑑長編권330, 神宗 元豊 5년 10월 乙丑, “自是之後, 上始知邊臣不 可信, 亦厭兵事, 無意西伐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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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부지는 신종이 치세의 후반에 다다라 신법에 대해 재검토하고 있 었다고 말한다. 신종이 일찍 붕어하여 그렇지 만일 조금만 더 살았다 면 그 스스로 신법 정책에 대한 대전환을 꾀했을 것이라 단언하고 있 다. 이러한 인식은 사실 왕부지의 創見은 아니다. 元祐 연간의 구법당 인사들이 更化를 추진할 때 제시하던 논리였다. 구법당 계열의 인사에 의해 저술되는 서적들54)에도 이러한 시각이 마찬가지로 적지 않게 나 타난다.

왕부지에 의하면 철종 시대에 접어들어 신법 정치가 변화되는 것은 필연의 勢였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그는 신종이 인종 치세의 느슨함 (弛)에 대한 반성으로 크게 떨치는 것(大張)을 추구했던 것도 필연적 추세였다고 말했다. 이러한 추세의 논리에 기반한 설명은 太虛一實의 氣 一元論에 근거하는 듯하여 매우 흥미롭다.

그렇다면 이렇게 필연적 추세에 의해 전개된 元祐更化의 실제에 대 해 왕부지는 어떠한 관점을 지니고 있을까? 元祐 연간의 정치에 대한 왕부지의 평가는 극히 냉엄하면서도 비판적이다. 그는 우선 宣仁太后 의 攝政이란 여성 주도의 정치에 대해 용납할 수 없었다. 강렬한 명분 론을 지니고 있었던 왕부지에게 男女의 준별과 여성의 正位는 반드시 지켜야하는 원칙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天下에는 불변의 貞固함이 셋 있다. 諸夏가 안에 처하고 夷狄이 바깥 으로 처하는 것, 君子가 나아가고 小人이 물러나는 것, 그리고 남자가 바 깥에 위치하고 여자가 안에 위치하는 것이 그것이다.55)

이 말에는 왕부지가 지닌 춘추학적 명분론, 그리고 그것과 결합된 강렬한 화이사상이 여실히 드러난다. 여기서 말하는 貞固함이란

周易

의 繫辭傳 에 등장56)하는 것으로서, 定과 常의 의미이다. 華夷, 君 54) 邵伯溫, 邵氏聞見錄권11; 蘇軾, 東坡全集권90, 司馬温公行狀 ; 朱熹,

三朝名臣言行錄권8-1, 丞相申國呂正獻公 등이 그러한 사례이다.

55) 송론권7-3. 天下有大貞三, “諸夏內而夷狄外也, 君子進而小人退也, 男位乎外 而女位乎內也.”

56) 周易 繫辭傳 下 . 원문은 “吉凶者, 貞勝者也. 天地之道, 貞觀者也, 日月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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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小人, 男女의 준별은 불변의 진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의 견지 필요성에 대해 왕부지는, “陰으로써 陽을 다스리고 여자로써 남자를 제어하는 것은, 夷狄으로 하여금 中國에 명령하게 하는 것이나 소인으 로 하여금 군자를 다스리게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57)라고 반문하 고 있다.

宣仁太后 개인은 매우 훌륭한 여성이었다. 그렇다 해도 여성인 까닭 에 ‘外’에 대해 ‘內’라는 正位를 지켜야 했다. 그것에 대해 왕부지는,

풀과 나무는 모두 식물이지만 芝蘭이 꽃다운 향기를 지녔다 해서 棟梁 으로 삼을 수는 없다. 새와 짐승은 모두 동물이지만 꿩이 아름답다 하여 兵車를 끌게 할 수는 없다. 天子와 太后는 다같이 존귀한 존재이나 현명 한 母后라 해서 道法을 통제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58)

라고 말하고 있다. 太后는 아무리 현명하다 해도 정국을 주도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芝蘭을 棟梁으로 삼을 수 없는 것, 그리고 꿩으로 兵車를 끌게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왕부지의 元祐更 化에 대한 평가는, 여성의 정치 주도라는 현상으로 말미암아 근본적으 로 불신과 비판의 논조를 띨 수밖에 없었다. 그는 “철종이 즉위하였을 때 불과 10대의 나이였으나 太后가 死去할 때까지 다시 7년을 기다려 야 했다.”59)고 말한다. 이러한 발언에도 사실 관계에 대한 오해가 적지 않다. 철종은 즉위 당시 전술했듯 9살이었으며 선인태후의 섭정은 8년 여에 걸쳤기 때문이다. 이 선인태후의 섭정기는 “달이 떠있는 밤이었 고 해가 비추는 낮이 아니었다.”60)고 한다. 그리고 낮이 아무리 어둡다 道, 貞明者也, 天下之動, 貞夫一者也.”로서, “吉凶은 貞固함이 우위를 점하는 것 에서 비롯된다. 天地의 道는 貞固함을 보여주는 것이요, 日月의 道 역시 貞固 함의 밝음이다. 天下의 움직임도 貞固함으로 일관하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의 미이다.

57) 송론권7-3. “以陰禦陽, 以女制男, 何殊乎以夷狄令中國, 以小人治君子乎?”

58) 송론권7-3, “草與木並植, 而芝蘭之芳, 不可以爲梁棟. 鳥與獸並育, 而翟雉之 美, 不可以駕戎車. 天子與后敵尊, 而母后之賢, 不可以制道法.”

59) 위와 같음, “哲宗之立, 雖僅十齡, 乃迨高后之殂, 又七年矣.”

60) 위와 같음, “此七年者, 月之朗於夜, 非日之昱於晝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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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 만물을 비추고 또 사람들로 하여금 물건을 식별하게 하는 데 달 빛보다는 훨씬 낫다고 한다. 아무리 暗愚한 군주라 해도 여성의 정치 보다는 명분상 우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선인태후를 보필하여 元祐更化를 담당하였던 이른바 ‘元祐諸公’들의 정치 역시 매우 졸렬한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女主인 太后를 받들며 자신들의 뜻을 펴고자 했다.”61)고 한다. 또 “붓을 든 어린아이 종 마냥 太后의 가르침대로 하였다.”62)고 한다. 이러한 見識을 지닌 元 祐 연간의 대신들이 적절하게 政事를 이끌어 갔을 리 만무하다.

그들은 事勢의 전환을 충분히 기다면서 哲宗으로 하여금 스스로 新 法의 불가함과 폐해를 느끼도록 했어야 했는데 너무도 성급하였다. 元 祐諸公의 대표자였던 司馬光부터 貞固함 그 자체를 결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무엇이든 서둘러 개혁하겠다는 조급함을 지녀서 차분하게 정 책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원우 연간의 정치에 대해 왕부지는 사줄만 한 것이 있다면, 劉器之가 乳婢를 구하는 것에 대해 간언했던 것63)이라든가 伊川이 崇政殿과 延和殿에서 講讀을 하며 덥 다는 핑계로 侍講을 그만두지 않았던 것, 그리고 范祖禹가 황제에게 好學을 권했던 것 정도일 뿐이었다고 한다. 이 외에는, “모두 이미 죽 은 왕안석과 더불어 어지러운 시비를 벌일 뿐 현실 정치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64)고까지 말하고 있다. 왜 그러한가?

그들이 원우 연간에 행한 정치라는 것은 고작, “밤낮으로 마치 잃은 자식을 찾아다니듯 한 사람을 발탁하고서는 ‘이는 熙寧 元豊 연간에 61) 위와 같음, “擁女主以行其志.”

62) 위와 같음, “如秉筆之內豎, 奉教而行.”

63) 劉安世(1048∼1125)가 元祐 연간 哲宗으로 하여금 女色을 가까이 하게 해서 는 안된다고 간언한 일을 가리킨다. 이 전후의 사정에 대해 宋史에서는, “民 間驩傳宮中求乳婢, 安世上疏諫曰. 陛下富於春秋, 未納后而親女色. 願太皇太后保 祐聖躬, 爲宗廟社稷大計, 淸閒之燕, 頻御經帷, 仍引近臣與論前古治亂之要, 以益 聖學, 無溺於所愛而忘其可戒. 哲宗俛首不語. 后曰 無此事, 卿誤聽矣.”(권345, 劉 安世傳 )라 기록하고 있다.

64) 송론권7-4, “自是而外, 皆與王安石已死之灰爭是非, 寥寥焉無一實政之見於 設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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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천된 사람이다’ 라고 말했으며, 한 사람을 내쫓고서는 ‘이는 熙寧 元 豊 연간에 등용된 사람이다’ 라고 말했다. 또 법제 하나를 도입하고서 는 ‘이는 熙寧 元豊 연간에 폐지된 것이다’ 라고 말하고, 법제 하나를 폐지하고는 ‘이는 熙寧 元豊 연간에 신설된 것이다’ 라고 말했다.”65)는 것이다. 실로 원우의 정치에 대해 실랄하기 그지없는 평가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원우 연간의 新法에 대한 철저한 부정, 그리고 구법 및 구법 당 인사에 대한 무비판적 집착은 신법만큼이나 커다란 문제를 낳았다.

차분한 기다림과 냉정한 판단의 결여로 말미암아 女主의 정치 주도라 는 비정상적 행태를 야기했고, 女主 아래에서 元祐諸公들의 아무런 성 과 없이 시간만 낭비하였다. 紹聖 연간의 이른 바 ‘紹述’이란 것은 바 로 이러한 元祐 시기를 보고 거울 삼아 신종시대의 과거로 되돌린 것 이었다는 것이다. 그런즉, ‘元祐의 정치는 신종의 熙寧·元豊 연간을 바 로잡아 그로부터 거울을 삼은 것이면서, 동시에 紹聖 시대를 열어 거 울 삼게 한 대상이기도 했다.’66)고 한다. 원우의 경화는 소성 이후 정 치의 혼란을 이끈 장본인으로서, 宋朝에 왕안석의 신법 못지 아니한 폐해를 미쳤다고 말하는 것이다.

Ⅴ. 맺음말

왕부지는 왕안석에 대해 실로 쾌도난마와 같이 엄히 분석하여 ‘小人’

이며 ‘姦人’이라 규정한다. 왕안석의 식견이나 性情 자체 비루하기 그 지 없었으며, 게다가 온갖 小人的 술수를 부렸기 때문에 수하의 심복 으로부터 배반당하고 또 만년에 자식이 요절하는 업보를 당하게 되었 다고 한다. 하지만 왕안석과 같은 인물이 한 시대를 횡행하게 되었던 65) 위와 같음, “夜以繼日, 如追亡子. 進一人, 則曰此熙·豐之所退也, 退一人, 則曰 此熙·豐之所進也. 興一法, 則曰此熙·豐之所革也, 革一法 則曰此熙·豐之所興也.”

66) 위와 같음, “元祐之所為, 矯熙·豐而抑未嘗不效之 且啓紹聖而使可效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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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으니, 神宗의 웅대한 포부와 추진력을 뒷받 침할 만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외경략의 의지를 뒷받침할 만한 장수도 없었으며, 司馬光이나 韓琦·富弼과 같은 당시의 朝臣들도 여러 모로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었다고 논한다.

이어 왕안석의 도입하였던 제신법 조항에 대해 조목조목 분석해 간 다. 新法 가운데 靑苗法·均輸法·市易法 등은 일고의 가치도 없을 만큼 해악이 컸던 것이었으며, 保甲法·免役法·과거제개혁·保馬法 등은 후대 에 채택되기도 하는 등 논란이 많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保馬法은 명 대에 답습되었으나 민간에 재앙만 끼친 악법이었고, 保甲法은 일부에 서 그 명분이 좋다하나 기실 아무 효과 없이 민간에 부담으로 작용한 것일 뿐이었다. 免役法은 差役에 비하면 분명 良法이라 할 수 있으나, 사실 양세법에 의해 면역 조치가 취해졌던 것을 다시 본질을 호도한 채 민간으로부터 면역전을 징수한 것이었다. 왕안석의 면역전 重徵은 이후로 연결되는 선례가 되었을 뿐이다. 이에 비해 유독 과거제의 개 혁은 적절한 것이었지만 이후 그 본질이 왜곡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신법에 대한 공격 내지 비판과 더불어 왕부지가 특별히 관심 을 기울이는 대상이 대외 전쟁이다. 우선 王韶가 중심이 된 熙河經略 에 대해서는 역시 혹독한 비판을 가한다. 正道가 아닌 邪術에 불과한 것이었던 만큼 실패로 귀결되는 것은 당연하였다. 왕부지는 熙河經略 에 대해, ‘칼자루 구멍의 미미한 소리처럼 돌아볼 가치도 없는 것이었 다.’고 극언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왕부지는 章惇의 호북일대 소수민족 정복전에 대해 언급 한다. 이 부분이야말로 왕부지의 명분론이 유감없이 잘 드러나는 대목 이다. 章惇이란 인물 자체는, ‘논할 가치도 없을 만큼 사악하다.’고 말 한다. 하지만 그의 호북지방 蠻夷 정벌은 결코 비판할 수 없는 훌륭한 업적이란 것이다. 蠻夷, 특히 중국 內地의 蠻夷는 궁극적으로 中華에 동화되어야만 하는 존재이고, 章惇의 정벌은 그것을 실현시킨 행위였 기 때문이다.

왕부지의 논술은 기백에 차 있으며 명쾌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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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백이 지나쳐 전후 문맥에서 다소간 모순이 드러나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실 자체의 인식에서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점 등은 그가 청조의 지배에 대한 강렬한 반감을 포지한 채 살아갔다는 점이라든가, 혹은 그 자신 호남이란 제한된 공간에 갇혀 있었던 인물 이란 사실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바 로 이러한 점, 즉 그가 호남 일대의 바깥으로는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었다는 것과 또 그의 논조에 강렬한 기백이 담겨 있다는 점으로 인해, 청말 그의 저술이 유포되어 갈 때 강렬한 흡인력이 유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중국 대륙이나 일본 및 구미, 그리고 국내의 학계를 막 론하고, 신법의 사회정책적 측면이 일반적으로 긍정되고 또 왕안석의 역할에 대한 호의적 평가가 주류를 점하고 있다.

宋論

神宗篇 은 왕부지의 사상을 재구성하는 데 있어서는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왕안 석 인식과 전통시대의 평가 사이의 편차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 한 재료를 제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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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文摘要)

王夫之  宋論  之王安石評價

李 瑾 明

王夫之對王安在嚴格的分析之後, 將王安石定性爲“小人․奸人”, 他認爲 王安石的識見與性情是淺陋, 因爲王安石玩弄權術, 故而遭受了被手下背叛 和晚年喪子的業報. 王安石這樣的人物之所以能橫行哪個年代, 就是因爲無 人有能力支持神宗雄大的抱負, 世無英雄, 遂使豎子成名. 王夫之認爲司馬 光․韓琦․富弼等的當時名臣都有各自問題.

接著對王安石所實施的諸新法詳細的分析. 他認爲新法當中青苗法․均 輸法․市易法等有爲害較大, 而後代采擇保馬法․免役法․科舉制改革․

保甲法等.新法有上面的害, 可是後代人采用新法, 所以這兩點是有爭論的 問題. 明代沿襲保馬法, 其對民間危害也不小; 保甲法徒有形式, 而無實際 效果, 並加重了百姓的負擔; 免役法比差役法, 確有改良, 但兩稅法中實際 已收免役錢, 再征免役錢實是重複征收; 而科舉制改革比其他新法有實質改 良, 但亦被後代所歪曲.

王夫之在對新法有批判中尤其關注對外戰爭. 首先, 王夫之對以王韶爲中 心的熙河經略進行了批判, 他認爲, 不是正道的邪術應該失敗. 王夫之對熙 河經略斷言: “吹劍首者之一吷而已矣.”

最後, 王夫之言及章惇的湖北一帶少數民族征服戰. 這事情明顯的標出王 夫之的名分論. 他評價章惇爲, 盡管“章惇之邪, 卓然無待辨者.” 但是他征 伐湖北地區蠻夷卻是正確的.

王夫之的論述個性鮮明, 充滿氣魄. 但有時卻過於的氣魄, 從而使其文章 前後出現矛盾, 有時還會在事實認識上出現謬誤. 這些問題反映了他抱 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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