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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이중구연토기 출토 유적 분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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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_ 신석기시대토기의변천- 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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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구연토기 출토 유적 분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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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_ 신석기시대토기의변천- 남부

1932 及川民次郞+부산고고회 及川民次郞 1933 「南朝鮮牧ノ島東三洞貝塚」『考古學』4-5 1962~1964 연세대학교+위스콘신대 L. L. Sample 1974 「Tongsamdong : A Contribution to

Korea Neolithic Culture History」『Arctic Anthropology』ⅩⅠ-2 1963 서울대학교 金元龍 1969 「韓國考古學에서의放射性炭素年代」『考古學』2 1969~1971 서울대학교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2002 『東三洞貝塚』

1999 부산시립박물관복천분관(현 복천박물관)1999 『동삼동패총 유적발굴조사 설명회 자료집』

5 부산 암남동 패총 1923 鳥居龍藏 有光敎一 1965 「釜山岩南洞貝塚土器」『朝鮮學報』36 6 부산 범방 패총 1991 부산광역시립박물관 1993 『凡方貝塚Ⅰ』, 1996 『凡方貝塚Ⅱ』

7 김해 수가리 패총 1978·1979 부산대학교박물관 1980 『金海 水佳里貝塚』

9 김해 화목동 포함층 1995 경성대학교박물관 2000 『金海花木洞遺蹟』

10 김해 농소리 패총 1964 부산대학교박물관 1965 『농소리패총발굴조사보고서』

11 진해 안골동 패총(교란) 1998 창원대학교박물관 1999 『新港灣敷地 安骨一帶 遺蹟 試掘調査 報告』

2000~2001 경남문화재연구원 2003 『鎭海 安骨洞 遺蹟』

12 사천 구평리 패총 1967 단국대학교박물관 1993 『사천 구평리유적』

13 여천 돌산송도 패총 1989·1990 국립광주박물관 1989 『突山松島』, 1990 『突山松島』

14 여천 대경도 지표 1992·1993 국립광주박물관 1994 『突山 世救地 遺蹟』

15 여천 화태도 지표 1992·1993 국립광주박물관 1994 『突山 世救地 遺蹟』

16 여천 월호도 지표 1992·1993 국립광주박물관 1994 『突山 世救地 遺蹟』

17 여천 안도 지표 1992·1993 국립광주박물관 1994 『突山 世救地 遺蹟』

18 산청 사평리 수습 1986 장명수 1989 「鏡湖江流域出土 先史遺物 新例에 대한 小考」『博物館紀要』5 19 밀양 금천리 주거지·노지 2001~2003 경남대학교박물관 이상길 외 2003 「밀양 금천리유적」『고구려고고학의 제문제』(제27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 발표요지) 20 거제 산달도 패총 1964 부산대학교박물관 정징원 1978 「山達島貝塚 遺物에 대한 一考察」『釜山大學校文理科大學論文集』17 21 통영 상노대도 패총 1978 동아대학교박물관 1984 『上老大島』

연세대학교박물관 손보기 1982 『상노대도의 선사시대 살림』

22 승주 대곡리 시굴갱 1987 1989 「대곡리 도롱·한실 주거지」『주암댐 수몰지구 문화유적발굴조사보고서』

23 산청 강루리 포함층 1981 국립문화재연구소 안춘배 1982 「산청강루리 선사유적」『부산시립박물관연보』4 24 합천 봉계리 주거지 1987·1988 동아대학교박물관 1989 『陜川 鳳溪里 遺蹟』

25 거창 임불리 주거지 1988 부산여자대학교박물관 안춘배 1989 「거창임불리선사주거지 조사개보(1)」『嶺南考古學』6 26 남원 대곡리 포함층 2001 전북대학교박물관 이민석 2002 「남원대곡리 신석기시대 유적과 유물」『韓國新石器硏究』4 27 장수 남양리 포함층 1997 전북대학교박물관 2000 『南陽里』

28 진안 갈머리 주거지 2000~2001 호남문화재연구원 2003 『갈머리유적』

29 진안 진그늘 포함층 2000 조선대학교박물관 김은정·김선주 2001 「진안 진그늘 신석기유적」『호남의 구석기문화』(제9회 호남고고학회 학술회의 발표요지) 30 김천 송죽리 주거지 1991~1992 계명대학교박물관 배성혁 2001 「경북 김천 송죽리 신석기유적』『新石器時代의 貝塚과 動物遺體』(제4회 한일 신석기문화 학술세미나 발표자료집)

31 영동 금정리 이융조·신숙정 1988 「중원지방의 빗살무늬토기 고찰-금정리유적의 빗살무늬토기를 중심으로」

『손보기박사정년기념 고고인류학논총』

32 군산 노래섬 패총 1994·96·97 원광대학교박물관 2002 『노래섬』

33 군산 가도 야영지·노지·패총 1993·1994 충남대학교박물관 2001 『駕島貝塚』

34 부안 계화도 지표 1998 국립전주박물관 1999 『扶安 海岸一帶 遺蹟地表調査報告』

35 신안 대흑산도 지표 1967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 김원룡·임효재 1968 『南海島嶼考古學』

36 제주 북촌리 암음 1986 제주대학교박물관 1988 『北村里遺蹟』

37 제주 삼양동 포함층 제주대학교박물관 2001 『제주 삼양동유적 Ⅱ·Ⅲ지구』, 2002 『제주 삼양동유적 Ⅰ·Ⅳ지구』

38 제주 사계리 지표 제주대학교박물관 1996 『남제주군의 문화유적』

39 제주 하모리 노지 2004 제주문화예술재단 2004 『하모~산이수동간 군도 확포장공사구간내 문화재 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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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신석기시대토기의변천- 남부

이중구연토기/ 부산 율리 / 높이 33.8 cm / 국립김해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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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신석기시대토기의변천- 남부 이중구연토기/ 제주 북촌리 / 왼쪽위 높이 8.8cm / 국립제주박물관

이중구연토기/ 부산 율리 / 높이 20.0cm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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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신석기시대토기의변천- 남부

* 파수부발형토기/ 부산 동삼동 / 높이 30.0 cm / 부산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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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신석기시대토기의변천- 남부

* 이중구연토기/ 진안 갈머리 / 오른쪽 잔존 높이 16.7cm / 국립전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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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서부지역은 크게 보아 대동강유역과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 기 때문에, 편년골격을 세우는데 있어서도 대동강유역의 연구성과가 크게 영향을 끼쳤다. 북한에서는 궁산과 지탑리, 금탄리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1960년대에 대동강유역의 편년골격이 짜여지고 이후 79~81년에 이루 어진 평양 남경유적의 발굴조사 성과를 토대로‘궁산문화지역’의 4기 구분 이라는 편년이 완성된다. 궁산 1~4기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궁산1기는 전 형적인 3부위구분시문토기三部位區分施文土器단계이며 신석기시대 전기에 해당 한다

.

궁산2기는 파상점열문波狀點列文과 종속구연문從屬口緣文을 특징으로 하는 시기로 신석기시대 중기 전반에 해당하며, 궁산3기는 W대문, X대문, 금탄 리1식토기를 지표로 하며 신석기시대 중기 후반에 해당한다. 궁산 4기는 전 면횡주어골문全面橫走魚骨文과 덧무늬, 점선띠무늬를 특징으로 하고 신석기시대 후기에 해당한다.

1970년대까지 남한에서는 전면시문의 횡주어골문토기가 중서부지역에 서 가장 빠른 형식으로 보았으며, 3부위구분의 암사동식토기는 비교적 후기 단계로 간주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남한학계의 견해를 완전히 뒤집은 것이 북한학계의 대동강을 중심으로 한 중서부지역 연구성과와 남한에서의 시도 패총과 암사동유적 발굴성과에 기초한 한영희의 편년이었다. 한영희는 암사 동식의 3부위구분계토기를 이른 시기에, 시도식의 동일계同一系다치횡주어 골문토기를 늦은 시기에 위치 지움으로써 중서부 신석기시대의 유적간 편년 을 시도하였다(한영희 1978)

한편, 임효재는 중서부지역 토기를 암사동식과 서해안식으로 양분하여 구분문계區分文系와 동일문계同一文系로 설정한 후 당시 시점에서 이용가능하였 던 몇몇 방사성탄소연대 결과와 비교검토하여 전면시문 단계를 전기 (BC5,000~BC3,500), 저부문양이 생략된 단계를 중기(BC3,500~

BC2,000), 동체부 문양까지 생략된 단계를 후기(BC2,000~BC1,000)로 비 정하였다(임효재 1983). 한영희와 임효재의 편년에서 가장 큰 차이점은 횡 주어골문토기의 위치이다. 한영희는 금탄리유적의 상대편년에 근거하여 횡 주어골문토기를 후기에 위치시켰으나, 임효재는 횡주어골문토기를 시문부 위의 축소과정이라는 형식학적, 문양론적 입장에서 전기까지 끌어올리고 있 다. 하지만, 암사동, 미사리유적을 중심으로 한 내륙의 토기양식이 시도패총 등 서해안 패총일대에서 발견되는 양식보다 시간적으로 선행한다고 보는 데 서는 입장을 같이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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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신석기시대토기의변천- 중서부

중 서 부 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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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산4기 : 금탄리유적 제2문화층 궁산1기 :지탑리유적 Ⅰ지구 1호주거지

궁산2기 :지탑리유적 Ⅱ지구 2, 3호 주거지

궁산3기 : 금탄리유적 제1문화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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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宮本一夫 1986, 小原哲 1986), 위 두 연구자의 편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 는 범위여서 그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점증한 서해안지역 패총발굴의 성과를 바탕으 로 1990년대 말 이후 중서부지역 신석기시대 편년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 지고, 방사성탄소연대에 의한 새로운 자료들이 누적되면서 중서부지역 토기 연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구체적으로 문제가 된 점은 서해안 각종 패총의 방사성탄소연대결과가 기원전 3,000년보다 이르게 상향조정 됨으로써 후기를 대표한다고 여겨지던 서해안식토기가 중기단계까지 소급 되기 시작하고, 암사동식 구분계문양이 서해안식 전면횡주어골문과 공반하 는 사례가 증가한 점에 대해 기존편년은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 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기존의 연구성과에 새로운 자료를 추가하 여 토기편년을 보다 세분화하려는 경향과 각기 다른 형식을 시기차가 아닌 지역차로 보고 세분된 편년을 다시 통합하려는 경향으로 크게 나뉘어 있다.

한영희는 이후 다시 구연부, 동체부, 저부에 서로 다른 문양이 시문된 전 형적인 3부위구분계토기를 암사동Ⅰ식

,

단사선문계의 구연부문양 밑에 파 상점열문波狀點列文·중호문重弧文·격자문格子文·거치문鋸齒文·삼각문三角文등 종속문이 추가되고 동부에 점열타래문이 시문되는 등 문양이 복잡해지는 토 기를 암사동Ⅱ식이라 하고 Ⅰ식과 Ⅱ식을 전기전반과 전기후반에 위치지웠 다. 중기에는 암사동Ⅱ식이 계속되면서 후반기에 금탄리Ⅰ식, 저부를 제외 한 전면에 어골문이 거칠게 시문된 시도식 등 지역마다 새로운 양식의 토기 가 성립된다. 후기는 전면횡주어골문토기인 금탄리Ⅱ식, 시도식, 구연부 문 양만 남은 암사동Ⅲ식으로 대표된다. 한편 암사동Ⅰ식 토기가 완성되기 이 전 구연부 문양만을 갖는 초기형식의 토기가 유입루트 어딘가에 존재할 것 으로 가정하여 가설단계인 초창기를 설정하기도 하였다(한영희 1996).

_ 신석기시대토기의변천- 중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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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달리, 지금까지 출토된 자료로 볼 때 중서부지역의 가장 이른 시기 토기는 구연부에 단사선문 또는 자돌점열문이 시문되고 동부에 정형화되지 않은 횡주어골문이 기본이 되는 것으로, 이에 해당되는 자료는 대동강유역 에서만 확인된다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그 다음 단계에 대동강과 한강유역 에 3부위구분계의 전형적인 암사동식토기가 출현하게 되고, 자돌점열문·

타래문, 중호문 등의 구연부종속문이 추가되는 단계로 나아간다고 하며, 이 시기까지는 대동강유역과 한강유역이 거의 동일한 토기양식권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한다. 중기에는 동부 종주어골문의 축소·간략화와 종주어골문계 집선문에 의한 구연부종속문양대가 등장하며, 이후에는 구연부종속문이 소 멸하여 2부위二部位문양구성이 성립하고 구연부단사선문 내지 자돌점열문, 동부에 횡주어골문이 기본이 된다. 후기가 되면 대동강유역은 전문시문 횡 주어골문과 단사선문이 기본이 되며, 한강유역은 구연부 내지 구연부에서 동체상부까지 단사선문이나 조잡한 횡주어골문이 중심이 된다. 중기 이후부 터 서서히 대동강과 한강유역 양지역에 지역성이 나타나는 양상이 보이지만 문양의 변천과정이 구분계문양에서 동일계문양으로의 변화, 문양시문의 조 잡·간략화라는 비슷한 방향성을 엿볼 수 있는 점에서 양 지역 사이에 어떤 정보의 왕래가 계속적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전체적으로 선행연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형식학적 문양변천과정을 출토상황으 로써 검증하여 각 시기에서의 토기조성과 변천과정의 계통성에 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한 연구였다(田中聰一 1999·2000).

한편, 급증한 서해안과 도서지역 유적 자료에 대한 분석을 통해 기존에 단순히 후기로만 간주되어 왔던 서해안일대 일부 유적이 중기까지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중기와 후기에 대한 편년을 보다 정교하게 하 는 성과를 낳았다. 이에 따르면 중서부지역 신석기시대 전기는 구연부단사 선문에 종주 또는 횡주어골문이 시문된 토기로 대표되며, 연대는 기원전 4,000년 이전으로 연천 삼거리, 서울 암사동 및 미사리유적의 이른 시기가 이에 해당된다. 중기에는 구연부단사선문에 단치의 종주·횡주어골문이나 다치횡주어골문이 시문된 것과 구연부에만 단사선문이 시문되어 있는 구연 한정단사선문, 대상단사선문, 구획반복문, 전면횡주어골문 중 일부가 포함 된다. 이 중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은 다치횡주어골문과 구연한정단사선문이 며, 연대는 기원전 4,000년에서 3,000년으로 암사동, 미사리, 시도Ⅱ지구, 가도, 노래섬, 는들 유적 등이 중기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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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신석기시대토기의변천- 중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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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신석기시대토기의변천- 중서부

설정한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 연구에 의하면, 기존 연구가 토기문양의 지역 성을 고려하지 않고 문양구분의 파괴, 단치에서 다치로의 변화를 중서부의 전지역에 모두 적용하였다는 점과 북한 고고학의 연구성과를 무비판적으로 답습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한다. 그리고는 서해안의 패총들은 한정행위장소 로서 동시기에 여러 집단에 의해 점유되었다는 점을 검증한 후, 방사성탄소 연대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패총출토 토기군의 구성이 시간성보다는 지역 성을 반영한다는 점을 주장하였다. 구체적으로 서해안지역 패총유적은 덕적 군도를 중심으로 이북은 단치시문의 비율이 높고 이남은 다치구에 의한 시 문이 상대적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데, 이는 이 패총유적을 이용한 집단 의 주거유적의 지리적 위치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문양의 가설적 시간 배열에 의거하여 중서부 신석기시대 를 전기·중기·후기로 삼분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기원전 3,500~3,000년 을 기점으로 그 이전은 암사동에서 지탑리와 유사한 문양이 존재했던 시기 인 중서부 1기로, 암사동에서의 구분계 다치횡주어골문의 등장, 패총의 점 유시작 및 동일계 단/다치어골문의 시작 및 공존을 중서부 2기로 설정하였 다(김장석·양성혁 2001).

이처럼 중서부지역의 토기편년과 관련해서는 구분계토기의 상한과 하한 을 둘러싼 암사동유적의 지속기간, 한강유역 후기신석기시대의 실재여부, 구분계의 종주어골문, 단치횡주어골문, 다치횡주어골문의 편년문제, 동일계 횡주어골문토기의 상한, 중서부지역의 중기를 설정할 수 있는지와 중기를 대표하는 토기는 어떠한 것인지, 문양의 공간적 분포양상을 어떻게 편년에 접목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직 산적해 있다.

Referen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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