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기 만주국에서의 문화통제
-작가동원을 중심으로-
全 京 先 (釜山大)
Ⅰ. 머리말
Ⅱ. 藝文指導要綱 과 문화통제
Ⅲ. ‘藝文報國’의 잡지 -藝文과
藝文志
Ⅳ. ‘決戰’, ‘開拓’과 ‘增産’의 제창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일본이 중일전쟁을 시작한 이래, 만주국 정부는 ‘日滿一德一心’의 불 가분의 관계를 내세우며 일본의 침략전쟁을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 만 주국에서는 일본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를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 해 전시통제경제를 강화하는 것은 물론, 일본이 침략전쟁을 합리화하 기 위해 제시했던 ‘동아신질서의 건설’,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의 논리 를 적극 수용하고 선전하는 데에도 총력을 기울였다. 특히 태평양전쟁 은 만주국에서도 ‘大東亞전쟁’으로 불리며 중일전쟁 못지않은 聖戰으로 미화되었다. 일본은 중일전쟁을 서구 열강과 연합해서 抗日을 견지하 고 이로써 동양의 평화를 파괴하는 蔣介石의 南京政府를 상대로 한
‘아시아 건설의 전쟁’으로 선전하였다면, 태평양전쟁은 아시아인을 멸 시하고 착취하는 미국과 영국을 대상으로 한 ‘아시아인 공동방위의 전 쟁’이자 ‘대동아 10억의 해방전’으로 선전하였다.1)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만주국은 盟邦 일본의 ‘聖戰’ 완수를 돕기 위해 대동아신질서 건설의 거점으로서 역할을 자임하였다. 즉 우선 南 進하는 일본군을 위해 北邊을 지키고, 다음으로 병참기지로서 역할을 다한다는 것이었다. 만주국 정부는 곡물을 비롯한 농산물의 增産과 蒐 荷뿐만 아니라, 철, 석탄 등 지하자원을 개발하여 일본의 군수물자 요 청에 적극 대응하려 하였다. 특히 농산물의 증산과 수하는 일본의 전 쟁에 기여하는 가장 중요한 일의 하나로써 만주국 “국민에게 부여된 지상명령으로”까지 간주되었다.
만주국 정부는 전쟁 완수를 위한 이러한 사명을 대중들에게 인식시 키고 그들의 암묵적 동의와 협력을 끌어내기 위해 문예가를 동원하려 하였다. 1941년 3월 홍보처에서 발표한 藝文指導要綱 이 바로 그 신 호탄이었다. 요강 발표 후, 만주국의 문학, 예술은 이른바 ‘藝文’으로 불리며 만주국 정부에 의해 그 내용과 사명이 규정되었다.2) 이제 만주 국의 예문은 단순한 위안과 오락이 아니었고, 국책을 선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어 갔다. 전황이 악화될수록 만주국 정부에서는 문예 가들의 자유로운 창작활동의 결과물로서의 작품은 그 존재가치를 부정 하고 전쟁의 동력(戰力)이 될 수 있는 작품의 양산을 강제하였다.
藝文指導要綱 에서 언급한 ‘藝文’의 범위에는 문학, 영화, 연극, 미 술, 사진 등의 여러 분야가 포함되는데, 본 논문에서는 문학을 주 분석 의 대상으로 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 시기 만주국의 문학에 대해서는 작품의 소재, 내용, 표현 등 문학 자체의 양상을 규정하고자 하는 문학 연구자들의 적지 않은 연구 성과들이 있다.3) 따라서 본문에서는 만주 1) 決戰宣傳の指針 (宣撫月報 1945年 1月).
2) 文化政策の大本 藝文指導要綱 發表さる (宣撫月報 1941年 2月).
3) 대표적으로 馮爲群․李春燕, 東北淪陷時期文學新論 (吉林大學出版社, 1991);
岡田英樹, 文學にみる‘滿洲國’の位相 (동경: 硏文出版, 2000; 오카다 히데키 저, 최정옥 역, 문학에서 본 ‘만주국’의 위상 (서울: 역락, 2008)); 최정옥, 滿 洲國文學의 硏究 (서울: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등이 있다. 특히 중 국에서의 연구 경향은 기존에는 만주국 문학을 동북윤함구문학 으로 지칭하 며 ‘漢奸文人’, ‘植民文學’, ‘愛國文學’ 등의 틀에서 연구하였으나, 1980년대 이후 에는 동북윤함구문학 은 5.4신문학의 영향, 일본, 구미, 러시아 등 외래 근대
국 문학 작품에 대한 분석을 논의의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문예 가들의 동원의 측면에 주목하고자 한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만주국 내의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방면은 전쟁 혹은 전쟁의 완수와 결부되지 않는 것이 없게 되었다. 국가의 총 력을 남김없이 전쟁 완수에 응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決戰’이라는 용어의 빈번한 사용은 당시의 시국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문화 방면도 이러한 시국을 피해서 존재할 수는 없었다. 만주국 정부는 문 화 전반을 통제하면서 문학, 예술인들에게 전쟁 협력을 요구하는 강도 를 계속적으로 높여갔다.
전시 일본의 작가동원에 관해서는 대표적으로 王向遠의 일련의 연 구가 있다.4) 그의 연구는 주로 일본 정부에 의한 내지 일본인 작가들 의 종군에 관한 것이다. 특히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 정부가 내지 일본인 작가, 일명 ‘펜부대(筆部隊)’를 중국 전선에 파견하고 귀국 후 이들은 종군기, 보고문학, 소설 등을 등재하여 전쟁을 미화하고 일본 국민들이 광적으로 전쟁을 지지하는 데 역할을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아울러 이들의 작품을 ‘侵華文學’으로 규정하였다. 이외에도 일본 군부 에 의한 중일전쟁기 일본인 작가동원에 관한 몇 편의 연구가 있다.5) 문학의 영향 등 다양한 요소를 받아들어 형성된 것으로 규정, 중국근현대 문학 사 상에서 독립된 지위를 부여하는 등 기존의 연구시각과는 다른 새로운 시각 에서 만주국 시기의 문학, 문인들에 대한 접근이 이루지고 있다. 대표 연구는 李仲明, 抗戰時期淪陷區文學硏究述略 (抗日戰爭硏究 1998年 第4期); 黃萬 華, 抗戰時期淪陷區文學及其硏究 (文學評論 2004年 第4期); 李彬, 抗戰背 景下東北淪陷區文學與外來文學關係硏究 (吉林大學 博士學位論文, 2008); 劉曉 麗, 異態時空中的精神世界 -偽滿洲國文學研究 (上海: 華東師範大學出版社, 2008) 등이 있다.
4) 王向遠 著, “筆部隊”和侵華戰爭 -對日本侵華文化的硏究與批判 (北京: 昆侖 出版社, 2005); 王向遠, “筆部隊”: 日本情報部門的侵華秘密武器 (文史博覽 2011年 9期); 王向遠, 日軍的“筆部隊” (當代軍事文摘 2005年 8期); 王向遠, 日本的“軍隊作家”及其侵華文學 (北京社會科學 1999年 1期); 王向遠, 日本 的“筆部隊”及其侵華文學 (北京社會科學 1998年 2期; 본 논문은 국내에서 왕 샹위엔, ‘펜부대’와 그들의 침화문학 (김재용․오오무라 마쓰오 편저, 제국 주의와 민족주의를 넘어서, 서울: 도서출판 역락, 2009)으로 번역).
5) 劉立軍, 筆征:作爲一種侵略 -日本侵華戰爭中的“筆部隊” (當代社科視野
또 중일전쟁기 국민당정부의 중국인작가 동원에 관한 연구도 보인다.6) 하지만 전시 일본의 만주국 작가의 동원에 관해서는 단편적인 언급 만 있을 뿐,7) 전문적인 연구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특히나 만주국 홍 보처에서는 태평양전쟁이 임박해 올 무렵 藝文指導要綱 을 발표하여 문화계 전반을 통제하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문예가들의 동원, 전쟁협 력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藝文指導要綱」발 표 이후 문학 부문에서의 통제는 주로 기존 작가협회 혹은 단체의 해 산과 어용 단체의 창단, 문예 잡지의 폐간과 창간 등의 방법을 통해 진행되었다. 특히 물자 부족이 극에 달하는 태평양전쟁 말기가 되면 신문지뿐만 아니라 잡지가 폐간되거나 전체 분량을 줄이게 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오히려 만주국 정부가 지면을 통해서 문예가들을 통제하는 것을 더욱 용이하게 하였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창간된 두 개의 잡지
藝 文
(일문)8)과
藝文志
(중문)9)의 구성과 내용에 주목하여 당시 작가들 의 전쟁협력 혹은 동원의 실상을 파악하고자 한다. 특히 창작물보다는 기고문, 논평, 현지보고 등을 통해서 만주국 정부의 문예인에 대한 기 본적 입장과 요구, 아울러 문예가들의 동향을 살펴볼 것이다.이로써 전시 만주국에서의 문예가, 문학방면에 대한 통제와 동원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게 된다면 만주국의 문화통제 혹은 문화정책 에 관한 연구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나아가 만주국 전 2009年 3期); 劉立軍, 日本侵華戰爭中的“筆部隊” (鍾山風雨 2008年 6期);
餘戈, 侵華戰爭中的日軍“筆部隊” (晚霞 2007年 20期) 등.
6) 吳永平, 五戰區“筆部隊”的三次“筆征” (湖北文史資料 1995年 1期).
7) 오카다 히데키 저, 최정옥 역, 문학에서 본 ‘만주국’의 위상 (서울: 도서출판 역락, 2008), p.58.
8) 滿洲藝文聯盟, 藝文 1944年 1月號-1945年 4月號 (復刊本藝文 1-7卷, 東京:
ゆまに書房, 2010). 본문에는 두 종류의 藝文이라는 동일 이름의 잡지가 등 장한다. 하나는 예문사판(1942년 간행), 다른 하나는 滿洲藝文聯盟版(1944년 간 행)이다. 본문에서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후자임을 밝혀 둔다.
9) 滿洲藝文聯盟, 藝文志 1943年 11月號-1944年 10月號 (復刊本藝文志 1-4 (僞滿洲國時期滙編 第2),北京: 線裝書局, 2009).
시 각계각층의 대중동원 중 한 부분을 드러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만주국 문학 연구자들의 분석 대상이 대부분
藝文志
라는 것을 고려 할 때, 잡지
藝文
의 소개도 그 자체로 다소 의미가 있다고 여겨진다.Ⅱ. 藝文指導要綱 과 문화통제
1941년 만주국 문화 관계자들에게 최대 사건은 弘報處에서 藝文指 導要綱 (이하 요강 )을 발표한 것이었다. 1941년 3월 홍보처 주최로 新京 주재 문화단체의 대표자와 문화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제1회 문화정책간담회가 열렸고 홍보처장 무토 도미오(武藤富男)에 의해 요 강 이 발표되었다.10) 1940년 12월의 행정개혁에 따라 문화행정에 관한 사무가 홍보처로 귀속됨으로써 문화정책은 홍보처장 이하 홍보처에서 주도하였다.11)
요강 의 내용은 본 요강의 취지, 만주국 예문의 특질, 예문단체조직 의 확립, 예문활동의 촉진, 예문교육 및 연구기관 등 5개 부분으로 구 성되었다.12) 이후 만주국의 문화정책은 이 요강 에 따라서 추진될 것 이었다. 그것은 곧 만주국의 문학, 예술인들에게는 정부가 제시하는 지 침, 즉 요강 의 범위 내에서 창작활동을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10) 文化政策の大本 藝文指導要綱 發表さる (宣撫月報 1941年 2月).
11) 이 무렵 홍보처는 治安部(영화, 신문, 출판물), 交通部(방송, 뉴스통신)의 검열 사무, 民生部의 문예․미술․음악․연극․영화․레코드 및 도서에 관한 문화행 정사무, 아울러 外務局의 대외선전에 관한 사무까지 접수하여 기구 자체가 확 대되었다. 이것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시 상황이 만주국에서 선전의 위상과 역할을 제고시켜 갔고, 이에 따라 만주국 선전정책의 중추를 맡 고 있던 홍보처의 업무와 이에 따른 위상도 부단히 확대 강화되었다. 그 결과 태평양전쟁 발발 무렵이 되면 홍보처는 단지 선전업무가 주였던 선전기구에서 문화행정의 일원적 관리기관이자 검열기관의 성격까지도 가지게 되었다. 全京 先, 太平洋戰爭期 滿洲國의 宣傳政策 (中國史硏究 82, 대구: 中國史學會, 2013.2) 참조.
12) 藝文指導要綱 과 만주국 문화통제에 관해서는 全京先, 위의 논문, pp.393-400 참조.
여기서 요강 의 주요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문화의 개념 중 문예, 미술, 음악, 연극, 영화, 사진 등을 추출해서 ‘藝文’이라 지칭하였고, 산 업, 경제, 교통 등 물질 방면의 발전에 비해 수준이 낮은 상태에 머물 러 있는 예문, 즉 문화 방면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정부가 적극적인 육성, 지도에 나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만 주국 정부가 지도, 육성하고자 하는 예문은 작가의 자유로운 창작활동 의 결과물인 순수 문학이나 예술이 아니라, 정부에 의해 그 내용과 사 명이 규정된, 즉 정부의 의도를 담아내는 것이어야 했다. 요강 에서는 만주국의 예문이 담아내야 할 내용이자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 다.
우리나라 예문은 건국정신을 기조로 한다. 따라서 八紘一宇의 대정신 의 美的 顯現으로 한다. 그리고 이 국토에 이식된 일본 예문을 씨실(經) 로 하고 원래 거주했던 여러 민족 고유의 예문을 날실(緯)로 하여 세계 예문의 정수를 취해서 짜맞춘 渾然 獨自의 예문이어야 한다.
우리나라 예문은 국가의 건설을 행하기 위한 정신적 생산 및 생산물로 한다. 따라서 국민 대중에게 아름다움을, 즐거움을 주고, 그 情操를 맑고 높게 하여 그 생활에 환희와 힘을 줌과 동시에 그 발전 침투에 의거해서 국민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우수한 국민성을 창조하고 이로써 國礎를 튼 튼히 하고 국가의 생성 발전을 조성하여 동아신질서의 건설에 공헌하고 나아가 세계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으로 한다.13)
우선 요강 에서는 예문의 내용에는 건국정신이 담겨야 한다는 것 을 규정하였다. 즉, 일본의 대륙 진출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되었던 전 세계(八紘)를 한 집(一宇)과 같은 상태로 한다는 八紘一宇의 대정신 을 미적으로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이었다. 또한 만주국의 예문은 일본 과 재만 각 민족 고유의 예문, 아울러 세계 예문의 정수를 조합하는 방법으로 만들어진 ‘渾然 獨自의 예문’이어야 함을 명시하였다. 아울러 만주국 정부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담은 문학, 예술작품을 통해서 국민 13) 文化政策の大本 藝文指導要綱 發表さる (宣撫月報 1941年 2月).
대중에게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주고, 이것이 국민 단결, 국가 발전으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 동아신질서 건설에 기여하는 데까지 이르게 한다 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요강 에 의거한 문화정책 하에서 만주국의 문학과 예술은 정치적 선전의 수단으로 전락해가고, 작가, 예술가 및 그 단체들은 정부에서 규정하는 내용을 담은 예술 작품을 생산해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게 되었다.
곧이어 요강 에 따라서 예문가들의 창작활동과 후진의 지도 훈련 을 돕는다는 목적 하에 각 부문 별로 한 개의 단체가 조직되었다. 문 예가협회(문학), 만주극단협회(연극), 만주악단협회(음악), 만주미술가협 회(미술) 등의 단체가 성립되었고 작가, 예술가들은 자기 분야의 각 단 체에 반강제로 가입된 형태로 활동하게 되었다. 가령 문학 부문에서는 요강 발표 이전 滿洲文話會라는 회원 상호 간의 연락 친목을 주로 하는 자발적인 문화단체가 존재하였다. 그런데 1940년 6월 대폭적인 조직 개혁이 단행되면서 문화회 본부가 해산되고 기관지인
滿洲文話 會通信
도 정간되었다.14) 문화회의 가입은 회원 2명의 추천에 의한 자 발적인 참가로 가능하였다. 그러나 요강 발표 이후 조직된 滿洲藝文 聯盟 단계가 되면 임명제에 의해 반강제로 회원이 되게 하였다.각 부문의 협회가 성립된 후 이들 협회를 통합하기 위한 단체로 滿 洲藝文聯盟(8월 25일)이 조직되었다. 만주예문연맹은 물론 문화행정을 관할하게 된 홍보처와 연결되어 있었다. 결국 홍보처에서는 이 예문연 맹을 통해서 만주국의 전 문화계, 예술계를 장악하여 요강 에서 제시 한 바대로, 작가, 예술가들을 하나의 방향으로 움직여 가겠다는 것이었 다.
만주예문연맹의 기관지로서
滿洲藝文通信
이 발행되었다.15) 이전 14) 文話會에 대해서는 座談會 雜誌 滿洲藝文通信の位置づけ (植民地文化硏究 2, 植民地文化硏究會, 2003) 참조.
15) 滿洲藝文通信에 관해서는 현재까지 복간본이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 고, 다만 필자는 滿洲藝文通信의 목차만 참고했음을 밝혀 둔다. 본 잡지의
만주문화회의 기관지였던
만주문화회통신
이 문학 관련 기사가 중심 이었던 것과 달리,
만주예문통신
에는 미술, 음악, 연극, 사진, 기타 다양한 장르의 정보가 담겨 있었다. 따라서 문학 이외에 당시까지 동 향을 알 수 없었던 여러 장르의 자세한 움직임을 살필 수가 있었다는 것이
滿洲藝文通信
이 가진 자료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16) 이렇듯
만주예문통신
은 주로 회의 방침이나 회원의 동향을 전하는 기사가 중 심이었기 때문에, 회원들이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였다.더욱이 1941년 8월 공포된 ‘弘報三法’ 중의 하나인 新聞社法에 의거하 여 1942년 1월 이후 신문사의 본격적으로 통폐합이 단행되었다.17) 이 에 따라 신문지 자체가 줄어들고 또한 신문의 문예란도 점차 축소되어 갔다. 재만 작가들이 글을 게재할 지면이 그 만큼 줄어든 것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1942년 1월 만주예문연맹의 준기관지적 성격을 가지 는 종합잡지
藝文
(藝文社版)이 창간되었다.
滿洲藝文通信
에는 수필 이외에는 거의 문예작품이 게재되지 않았고, 그 대신
예문
쪽에 소 설이나 시 등이 다수 발표되었다.18) 예문사판
예문
의 창간 시점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던 시기로, 지면은 단숨에 戰時色으로 칠해졌다.愛國詩輯 (1942년 3월호 특집), 關東軍報道隊特輯 (1943년 4월호) 등 의 특집란이 보인다.19) 예문사판
예문
이 간행된 1942년은 태평양전 쟁이 발발하는 한편 만주국이 건국10주년을 맞이하는 해였다. 작가들 은 이러저러한 국책 행사에 동원되었고, 예문사판
예문
도 작가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시국은 작가들이 책상머 목록은 植民地文化硏究 1-3에 걸쳐 실려 있다(谷本澄子 編, 滿洲藝文聯盟機 關志 滿洲藝文通信(全一二冊)細目(上) , 植民地文化硏究 1, 浦安: 植民地文 化硏究會, 2002), pp.106-116; 谷本澄子 編, 滿洲藝文聯盟機關志 滿洲藝文通信(全一二冊)細目(中) (植民地文化硏究 2, 浦安: 植民地文化硏究會, 2003), pp.75-88; 谷本澄子 編, 滿洲藝文聯盟機關志 滿洲藝文通信(全一二冊)細目 (下) (植民地文化硏究 3, 浦安: 植民地文化硏究會, 2004), pp.93-104.
16) 座談會雜誌滿洲藝文通信の位置づけ , pp.3-4 참조.
17) 태평양전쟁기 언론통제에 관해서는 全京先, 앞의 논문, pp.385-389 참조.
18) 座談會 雜誌 滿洲藝文通信の位置づけ , p.4.
19) 座談會 二つの藝文 (植民地文化硏究 3, 植民地文化硏究會, 2004), p.5.
리에 앉아서 창작활동을 하는 것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았다.
특히 만주예문연맹 체제 하의 문학, 예술가들의 동원 양상은
만주 예문통신
의 지면을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난다.20) 문학 작가는 물론 미술가, 사진가 등도 상당한 횟수로 동원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들은 關東軍報隊道演習을 비롯해, 東亞厚生大會, 開拓勤勞奉仕隊視察, 鑛工 증산의 현지시찰, 산업5개년계획의 실적을 소개하는 산업보도대 등에 동원되었다. 각종 행사에 동원된 참가자들은 대회 참가나 현지시 찰 후에는 좌담회나 보고회를 갖거나 그 결과물을 작품으로 제출하였 다. 예컨대, 관동군보도대연습에 참가한 현지 작가 11명의 체험은 소 설, 시, 보고감상으로 구성된 작품집,
북의 지킴(北の護り)
으로 출간 되었다.21) 재만 작가들의 현지 시찰과 동원은 패전까지 계속 되는 현 상이었다.이러한 문학, 예술가들의 동원의 중심에는 정부 측의 익찬단체였던 만주예문연맹이 있었고, 더욱이 요강 발표 이후 문학과 예술을 정치 와 時局을 선전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홍보처의 존재가 있었 다. 관동군 보도부장 하세가와 우이치(長谷川宇一)의 “예문가는 위안과 오락의 제공자가 아니라, 대동아전쟁 수행을 위한 사상적 리더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22)라는 발언은 당시 만주국에서 지향했던 문화정책의 지향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주국 정부와 관동군의 뜻대로 문화계가 단번에 움직였던 것은 아닌 듯하다. 가령,
滿日
藝文時言 란의 예문연맹을 재편성하 자 23)라는 글을 통해서도 여전히 회원 가운데서도 예문이 선전의 도 20) 谷本澄子 編, 滿洲藝文聯盟機關誌 滿洲藝文通信(全一二冊)細目(上) , pp.106 -116; 谷本澄子 編, 滿洲藝文聯盟機關誌 滿洲藝文通信(全一二冊)細目 (中) , pp.75-88; 谷本澄子 編, 滿洲藝文聯盟機關誌 滿洲藝文通信(全一二冊) 細目(下) , pp.93-104 참조.21) 관동군보도대작품집 北の護り에 대해 “關東軍報道隊演習에 참가했던 현지 작가 11명에 의한 작품집으로 소설, 시, 보고감상으로 이루어지고 관동군장병 에 의한 엄연한 북의 지킴 의 실정을 상세하게 묘사한 것”으로 藝文 創刊 號(1944.1)의 광고란에서 소개.
22) 座談會 雜誌 滿洲藝文通信の位置づけ , pp.14-15.
구로 제공되는 것에 반대하며 ‘예술지상주의’를 고집하는, 즉 정부의 문화정책에 역행하는 일군의 예문가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더욱이 전황이 날로 악화되는 상황에서 다급해진 만주국 정부는 전쟁 협력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던 이들 예문가들의 자발적 인 움직임을 끌어내어야 했고, 그 목적을 위해서는 문학, 예술가의 동 원체제를 새로이 정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943년 10월 13일
滿洲 藝文通信
은 65호에서 종간되었다. 그리고 1943년 11월에는
藝文志
(중문)가, 1944년 1월에는
藝文
(일문)이 창간되었다. 아무래도 홍보처 가 개입했던 것 같다.24)Ⅲ. ‘藝文報國’의 잡지
-
藝文
과
藝文志
1941년 12월 8일 시작된 태평양전쟁의 전황은 1943년 봄부터 급전하 였다. 일본은 전쟁 초기의 승전 기세가 점차 꺾이기 시작하면서 패전 을 거듭하였다. 과달카날 섬 철퇴, 애투 섬수비대의 전멸, 사이판 섬 함락, 연이은 수비대의 玉碎 소식이 보도되고 일본의 패색이 날로 짙 어져 갔다. 1944년 7월 이후가 되면 후방기지였던 만주국도 미군의 공 습을 받게 되고 패전에 대한 극도의 위기감, 긴장감이 감도는 한편, 시 국은 모든 것을 ‘전쟁의 완수’로 귀결시키면서 ‘決戰’을 부르짖게 만들 었다. 이렇듯 만주국 대중들의 결전 의지가 절실히 요구되는 이 시점 에서 아래에서 언급할 두 개의 잡지가 출현하였다.
23) 藝文聯盟を再編成せよ(藝文時言)] (滿日 1942.5.6 → 오카다 히데키 저, 최 정옥 역, 문학에서 본 ‘만주국’의 위상, 역락, 2008), pp.55-56.
24) 座談會 雜誌 滿洲藝文通信の位置づけ , p.10.
藝文[일문]
(만주예문연맹
→만주예문협회) 1944.01~1945.05
⇗ 滿洲文話會通信
(만주문화회)
⇒ 滿洲藝文通信 (만주예문연맹) 1941.11~1943.10
⇘
藝文志[중문]
(만주예문연맹
→만주예문협회) 1943.11~1944.10 藝文
(예문사) 1942.01~1943.10
⇒ 滿洲公論
1943.11~1945.03
근거 : 植民地文化硏究會, 植民地文化硏究 3(2004), 座談会 二つの芸文 , p.4에 의거하여 작성하였음.
<표1> 만주국 예문 관련 잡지의 흐름
앞서 언급했듯이, 만주예문연맹판
예문
이전에 예문사에서 간행한 동일 명칭의 종합잡지
예문
이 존재하였다. 예문사판
예문
은 만주 예문연맹의 준기관지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예문통신
에는 수필이 외에는 거의 문예작품이 게재되지 않고 그 대신 예문사판
예문
쪽에 소설이나 시 등이 다수 발표되고 있었다.25) 예문사판
예문
은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시작되는 전후시기인 1942년 1월에 창간되었다. 예문사 판
예문
은 만주예문연맹판
예문
창간에 앞서
滿洲公論
으로 명 칭을 변경하였다.이러한 문예잡지의 폐간과 정간 역시도 신문의 통합폐과 마찬가지 25) 座談會 雜誌 滿洲藝文通信の位置づけ , p.4.
로 시국의 변화를 반영하고 특히 만주국 정부의 정치적 의도가 강하게 개입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잡지 창간호의 첫 번째 글을 모두 홍보 처장 이치카와 사토시(市川敏)가 기고했던 점이 주목된다.26)
예문지
와
예문
모두 홍보처의 강한 영향력 하에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 는 것이다.신생
예문
은 창간호의 창간의 말 에서 본 잡지의 사명을 명확히 제시하였다.이번 정부의 특별한 배려에 의해, 藝文의 보급과 육성과 연마를 위해 本誌의 刊行으로 진척된 것은 이 격렬한 시대에서 국가가 예문건설에 기 대하는 바에 예사롭지 않은 것이 있음을 통감한다. 本誌의 사명이 어디에 있는가는 이미 많은 말이 필요 없다. 다만 藝文報國의 신념으로 철저하고 위대한 大東亞文化 興隆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칠 뿐이다.27)
예문
의 창간은 만주국 정부가 예문에 거는 기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종이를 비롯한 물자가 극히 부족하고 더욱이 다른 잡지들이 대 부분 정간되는 시기에 새로이 잡지의 간행이 허락되었다는 것이다. 이 러한 정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예문
은 ‘藝文報國’의 신념을 가지 고 그 사명을 다해야 함을 명확히 하였다. 또한 창간호의 편집후기에 서도藝文報國의 성의는 진실로 決戰戰力이 될 수 있는 藝文의 창조에 의해 달성된다. 本誌는 이런 예문 창조를 위해 切磋琢磨의 기관으로서 또 대표 적 문예작품의 발표 무대로서 국가의 부탁에 응해 가지 않으면 안 된 다.28)
라고 하였다.
예문
의 목표는 決戰의 힘이 될 수 있는 작품을 담아내 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藝文’으로써 ‘報國’을 하는 길이었으며 잡지
예문
의 성격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렇듯 이 시기 창간된 잡 26) 市川敏 弘報處長, 藝文志發刊祝詞 (藝文志 第1卷 第1期 創刊號, 1943.11);弘報處長 市川 敏, 自足他給 (藝文 一月 創刊號, 滿洲藝文聯盟, 1944.1).
27) 創刊の辭 (藝文 1月 創刊號, 滿洲藝文聯盟, 1944.1), p.3.
28) 編輯室 (藝文 一月 創刊號, 滿洲藝文聯盟, 1944), p.134.
지
예문
뿐만 아니라,
예문지
역시도 ‘藝文報國’의 사명을 띤 국책 잡지였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예문
은 일문으로 출간되었기 때문에 재만 일본인 작가들이 중심이었고,
예문지
는 중문으로 출간되었기 때문에 중국인 작가들이 중심이었다. 하지만 日滿의 구분 없이, 재만 작가들은 국가로부터 전쟁 완수, 전의 고양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는 작품들을 생산해내야 하는 임무를 강하게 부여받고 있었다.
예문
과
예문지
의 내용을 비교하면, 만주국 정부가 재만 작가들 에게 전하고자 하는 지침이나 방향은
예문
쪽에 훨씬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게재되고 있다.
藝文
창간호의 첫 번째 글인 홍보처장 이치카와 사토시(市川敏)의 自足他給 에는29) 藝文報國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예문계가 나아가 야 할 방향이 제시되었다. 그것은 ‘예문가의 동원체제 강화’, ‘예문조직 의 조정’, ‘지방예문의 추진’, ‘예문가의 총의결집’, ‘예문의 자족타급태세 확립’의 5개 항목에 걸치는 것이었다. 특히 그는 마지막 부분에서는 예 문가들을 향해 사람들이 거는 기대를 상기시키며 예문의 自足他給의 경지를 열어야 한다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다음으로 야마다 세이자부로(山田淸三郞)의 決戰時局에 즉응하는 藝文推進의 方向 이라는 글이 보인다.30) 야마다는 예문가들을 ‘藝文戰 士’로 규정짓고 이들이 대동아전쟁, 대동아건설의 戰士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예문가들에게 예문을 취미나 교양에 속하는 것 으로 여겨서는 안 되며, 대동아성전의 완수와 대동아건설에 기여할 수 있는 작품을 생산하기를 촉구하였다. 이치카와의 글은 물론이고 야마 다의 글도 만주국 문화정책의 기본적 방침에 따라 집필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藝文
창간호에는 중국인 작가의 작품이 2편 게재되었다. 爵 靑의 日滿系作家의 交遊 (수필)와 疑遲의 寒流 (소설)이다. 2월호에 29) 弘報處長 市川 敏, 自足他給 , pp.4-7.30) 山田淸三郞, 決戰時局に卽應する藝文推進の方向 (藝文 一月 創刊號, 滿洲 藝文聯盟, 1944), pp.8-13.
는 러시아 작가의 소설이 게재되었다. 이것은 만주예문계의 일치단결 이나 혹은 五族協和를 드러내기 위해 의도된 편집방침의 결과로도 볼 수 있다.31)
2월호에는 첫 번째로 관동군 보도부장 하세가와의
전쟁과 예문
이 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32) 결전으로 작가(혹은 작품)들을 동원하고 자 했던 관동군의 사고방식과 방침을 보여주는 글이다. 그는 특히 전 시 작가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즉 전시 작가는 지도자를 지도해야 하 는 입장에 서야 하고, 작가 스스로 결전의식을 고양시켜야 한다는 것 이었다. 하세가와의 글 이외에도 2월호에는 決戰과 문학의 역할 (西 村眞一郞), 決戰과 작품가치 (中川一夫) 등이 실렸다.한편,
예문지
의 내용에서도 그 성격이 드러난다. 우선 홍보처장 이치카와는
예문지
창간호의 藝文志發刊祝辭 에서 본 잡지가 창간 된 목적이 “대동아전쟁을 위한 복무”이며 작가(예문가)들의 “聖戰 협 력”임을 분명히 하였다.33) 또한
예문지
에는 전쟁을 지지하기 위한 특집(란)이 여러 차례 기획되었다. 예를 들면, 1943년 12월호(第1卷 第 2期)에는 聖戰二周年頌歌 (金音), 殲敵詩 (田兵), 1944년 5월호(第1卷 第7期)에는 ‘必勝吟’특집란이 기획되어 殲滅而已 (高村光太郞), 殺死 它! 鬼畜美魔 (李廼瓊), 殺敵 (大維) 등의 시가 실렸다. 이들 시는 대 개 ‘獻納詩’ 혹은 ‘決戰詩’, ‘必勝吟’의 類에 속하는 것이었으며 즉 ‘시가 로써 영미를 격멸시키려는’ 목적을 지닌 것으로, 본 잡지의 창간 목적 이자 국책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이었다.34) 이상 두 잡지는 모두 전쟁 의 완수에 기여하기 위한 ‘藝文報國’의 국책 잡지로 창간된 것이었다.31) 呂元明, 第一卷 解說 藝文と滿洲藝文聯盟及び滿洲藝文協會 -藝文創刊號, 二月號の解說を兼ねて (藝文 第1卷, (ゆまに書房, 2010), p.15.
32) 長谷川宇一, 戰爭と藝文 (藝文 二月號, 滿洲藝文聯盟, 1944), pp.3-9.
33) 市川敏 弘報處長, 藝文志發刊辭詞 (藝文志 第1卷 第1期 創刊號, 1943年 11月).
34) 이러한 헌납시는 1941년 이후 만주국에서 통용되는 문체로 신문이나 잡지에 빈번히 등장하였다. 헌납시에 대해서는 劉曉麗, 僞滿洲國時期附逆作品的表裏 -以‘獻納詩’和‘時局小說’爲中心 (中國現代文學硏究叢刊 2006-4) 참조.
Ⅳ. ‘決戰’, ‘開拓’과 ‘增産’의 제창
전황이 악화될수록 만주국 정부는 작가들이 전쟁 완수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대중들의 전쟁 의지를 고무할 수 있는 작품을 생산해내 기를 요구하였다.
현재를 사는 예문인들은 장렬한 이 시대를 생사를 건 정열을 가지고 한 작품 한 작품을 거듭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단순한 자기 만족적인, 또는 자신 한 사람 밖에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을 발표하려고 하는 태도는 적어도 국민적 작가가 취해야 할 태도가 아니다. 현재의 예문가는 국민과 함께 기뻐하고 걱정하고 비분하고 그 위에 국민에게 내일에 대한 지침을 암시하는 역할을 다해야 한다.35)
시국은 이미 문예가 개인의 사상, 의지를 담고 있는 작품이 아니라 이른바 決戰의 성격을 띠는 작품을 요구하고 있었다.
藝文
역시 이 러한 시국에 즉응하기 위한 작품을 담아내기 위해 편집위원회와 편집 진을 강화하면서 잡지 경영을 7월호부터 만주문예춘추사에 위촉하기로 했다.36)
예문
은 이른바 ‘決戰藝文’에 어울리는 글들이 게재되면서 시국에 즉응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보이기 시작하였다. 우선 전쟁 기록(戰記)과 현지보고를 들 수 있다. 라바울의 투지 는37) 해군보도 반원의 보도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태평양전쟁 중 라바울 공습을 제 재로 한 작품으로, 적기의 공습이 계속되는 중에도 전장에서 싸우는 군대의 모습을 필사적으로 카메라에 담으려고 하는 영화반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1943년 말, 新京에서 개최된 ‘決戰文藝家大會’, ‘全國文藝家協會’에서 35) 編輯室 (藝文 1944年 5月號, 滿洲藝文聯盟, 1944), p.132.
36) 藝文 1944年 5月號 (滿洲藝文聯盟, 1944), p.79.
37) 木村莊十, 南海激鬪記 ラバウルの鬪志 (藝文 1944年 七月號, 滿洲文藝春 秋社, 1944), pp.90-97.
는 결의를 통해 “戰時增産形勢”에 적응하기 위해 문예가를 조직하여 工鑛산업, 개척단, 근로봉공대, 軍警부대로 파견해서 현지시찰을 진행 하고 아울러 그곳의 생활을 반영한 보고(서)를 써서 제출하도록 하였 다.38)
예문
의 작품 중 현지시찰과 보고의 성격을 띤 글로는 시인이 자 동화작가인 일본인 야기하시 유우지로(八木橋雄次郞)와 중국인 작 가 古丁이 쓴 熱河宣傳隊現地報告 가 있다. 이들은 12명으로 구성된 西南地區文學宣報隊의 일원으로 熱河로 파견되었고 여기서 직접 체험 하고 느낀 것을 글로 남겼다. 야기하시는 새로 (警備)도로가 건설되고 집단부락이 결성되는 열하의 모습을 서술하면서 “오래된 열하, 암울한 열하, 秘境의 열하는 지금 새로운 국토, 밝은 생활, 근대 산업의 탄력 있는 지대로서 신선한 건국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라고 끝을 맺는다.39) 古丁도 熱河를 민족협화가 제대로 실현되는 곳으로 묘 사하고 열하의 밝은 미래에 대해서만 언급하였다.40)
예문지
(1944년 7월호)에도 西南行外記 (金音), 西南踏査記 (田兵), 祝福熱河 (疑遲), 西南雜感 (古丁), 西南地區與決戰文藝 (田瑯) 등의 현지시찰기가 실 려 있다.실제 전황은 패색이 짙어감에도 불구하고, 현실과는 정반대로 잡지 의 지면에는 대중이 전쟁의 투지를 불태울 수 있는 글, 전시 상황을 극복하고 미래에 대한 밝은 희망을 가지게 하는 글들이 실렸다. 작가 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적어도 지면상에서 볼 때는 철저히 국책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다.41)
38) 劉曉麗, 앞의 논문.
39) 八木橋雄次郞, 熱河宣傳隊現地報告 新しき道を行く (藝文 1944年 十一 月號, 滿洲文藝春秋社, 1944), pp.85-91.
40) 古丁, 西南雜感 (藝文 1944年 十一月號, 滿洲文藝春秋社, 1944), pp.92-95.
41) 근래 재만 중국인 작가들의 국책 순응에 대한 변론이 자주 등장한다. 가령 최정옥의 경우는 藝文志에 실린 재만 중국인 작가의 작품이 당시 국책을 따 르는 ‘익찬적’인 성격을 띠는 것에 대해서 古丁의 언급, 즉 “이 잡지는 우리들 의 것으로, 여러분들이 전력으로 그것을 배양하고 키우고 그것을 원조하여 우 리들 이상의 잡지로 만들기로 희망”한다는 것을 인용하면서 이 잡지가 형식적 으로 官方이 작가를 동원하고 그들의 익찬을 목적으로 하였을지라도 내용적인
다음으로 두 잡지의 작품에서 중요하게 선전되고 있는 키워드는 ‘開 拓’과 ‘增産’이다. 물론 ‘增産’ 역시도 전쟁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藝文
에 실린 毛大人과 增産 42), 湯原縣記 -增産地帶現地報告- 43)는 춘경기 농촌에서 농산물 증산에 힘쓰고 있는 농민들의 모습을 서술한 것으로 농산물 증산의 모범적인 사례가 되는 것이었다. 특히 湯原縣은 일본인개척단, 원주민 집단부락, 백계러시아인개척단이 있는 곳이었다.이들 개척단의 상호 교류는 만주건국의 이상인 민족협화와 연결이 된 다. 湯原縣은 농민들의 증산의욕, 현직원 등의 의기 등에 힘입어 1943 년도 三江省에서 제일가는 出荷 성적을 냈다고 한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병참기지, 식량공급지라는 만주국의 위상에 비추어 볼 때, 농산물의 증산은 만주국의 중요한 국책이었다. 따라서 만주국 정부는 작가들을 농산물 증산의 모범적인 사례가 되는 곳에 직 접 파견하고 이들이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보고서나 창작물을 만들어 내게 하고, 이들 작품을 보급함으로써 대중들의 증산 의식을 고취시키 고자 한 것이었다.
藝文志
에도 시국의 요구인 개척, 증산을 고취하는 중국인 작가의 작품들이 보인다. 疑遲의 凱歌 3부작과 古丁의 下鄕 , 石軍의 新部 落 이 그것이다.44) 이 작품들은 당시 유행했던 이른바 ‘時局小說’류에 속한다.45) 疑遲의 凱歌 3부작의 전체 내용은 沙嶺村이라는 마을이 면에서까지 그럴 것이라고 단정짓기 어렵다고 하였다. 최정옥, 앞의 박사학위 논문, p.226 참조.42) 大貫大八, 毛大人と增産 (藝文 1944年 七月號, 滿洲文藝春秋社, 1944), pp.42-44.
43) 桑原宏, 湯原縣記 -增産地帶現地報告- (藝文 1944年 七月號, 滿洲文藝春 秋社, 1944), pp.45-49.
44) 疑遲, 署(凱歌第一部) (藝文志 第1卷 第9期, 1944.7); 光(凱歌第二部) ( 藝文志 第1卷 第10期, 1944.8); 明(凱歌第三部) (藝文志 第1卷 第11期, 1944.9); 古丁, 下鄕 (藝文志 第1卷 第11期, 1944.9); 石軍, 新部落 (藝文 志 第1卷 第6期, 1944.4).
45) 시국소설은 말 그대로 ‘시국’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그 소재는 시국에 따라 바뀌었다. 만주국 건국 10년에 즈음해서는 ‘건국’을, 1941년 이후에는 防諜反諜 (意識)을, 1943년 이후에는 개척과 증산을 소재로 한 소설이 등장하였다. 이전
강가의 저지대의 황무지를 개간한다는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근로 증산을 사명으로 삼는 중국 농민 吳海亭과 일본 개척단의 성원 古林이 다. 제1부 署 에서는 吳海亭과 古林이 협력하여 전 마을 사람들이 황 무지를 개간하고 勤勞增産하도록 만들고, 또 마을의 아편쟁이와 좀도 둑을 개과천선시키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 제3부 明 에서는 吳海亭의 동생 吳海山이 군복무를 마친 후 그의 형과 古林 등과 함께 근로증산 에 힘쓰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동생은 고향에 돌아온 지 3일째 되는 날부터 농사일을 시작하였다. 당시 만주국에서는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징병제, 즉 國兵法이 이미 시행되고 있었다. 국병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만주국의 국민이 되는 길이었다. 동생 吳海山은 국 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전역 후에는 국책에 적극 협력하는 이상적 인 만주국의 국민으로 등장하였다. 그의 입을 통해 만주국의 국책이 그대로 선전되고 있었다.46) 소설은 독자들에게 沙嶺村에서와 같이 개 척, 증산, 국병의 의무 등 국책의 실행을 독려하고 있다.
다음으로 古丁의 下鄕 은 “出荷督勵班”이 농촌으로 내려가 현지 농 민들의 출하를 독려하는 내용이다. 소설 속에는 “出荷로써 聖戰에 협 력” 혹은 “일본의 흥기(興)”, “만주의 흥기(興)”, “낱알을 영미를 격멸 하는 탄환으로 만들어서 우리들 大東亞의 승리를 쟁취한다” 등의 시국 구호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특히 소설 속 현지 농민과 “출하독려반”의 간담회에서는 국무총리 겸 협화회장 張景惠의 격려의 말, 또 황제 푸
까지 이러한 시국소설은 앞서 언급한 ‘헌납시’ 혹은 ‘결전시’와 아울러 만주국 시기 동북 중국작가들의 대표적인 ‘附逆作品’으로 비판받았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서는 부역작품으로 규정된 작품 중에서도 문학의 독립성을 확립한 작품도 있으며, 또 현실의 암담함(暗)을 직접 나타낸 것도 있고 우회적으로 만주국 정 부의 통치를 분석하고 비판한 것도 있음을 근거로 해서 부역작품을 새로운 시 각에서 접근하고 있다. 劉曉麗, <<藝文志>>雜誌與僞滿洲國時期的文學 (求 是學刊 第32卷 第6期, 2005.11) 등을 참조.
46) “군인이 된다는 것은 국민의 일종의 광영의 의무이다. 국가를 보호하고, 향토 를 지키는 것, 신성하고 숭고한 청년들의 천직이다.” / “총을 메고 보국하는 시 기를 나는 이미 지내왔고 금후의 보국은 바로 낫과 호미를 들고 할 것이다.”
(疑遲, 明(凱歌第三部) , 藝文志 第1卷 第11期, 1944.9).
이의 뜻이 전해지기도 했다. 이것을 통해서 소설은 出荷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것이 전쟁에 협력하는 농민들의 사명임을 인식시키려 한 것이다.
또한 石軍의 新部落 은 북만의 어느 마을이 증산을 위해서 옆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새마을을 건설한다는 내용이다. 마을 유지인 鄭忠 福은 촌장의 시국 연설에 크게 감명을 받고 증산에 힘쓰게 된다. 전체 촌 회의에서는 ‘增産報國’이 역설되었다. 증산은 “바로 집을 위해, 국가 를 위해, 나아가 대동아를 위해 전쟁을 하듯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만주국의 농촌은 대동아공영권의 식량공 급지로서의 역할이 강요되었다. 그리하여 농산물에 대해서는 생산, 출 하, 배급 전 방면이 국가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농산물의 증산과 출하는 “대동아전쟁 완수의 도상에 있는 우방 일본에 기여하는 가장 중요한 일의 하나로써 국민에게 부여된 지상명령으로”까지 선전되었 다.47) 따라서 중국 작가들도 이러한 국책을 작품에 담아낼 것을 강요 받았을 것이고 자의든 타의든 대중들에게 ‘決戰’, ‘開拓’, ‘增産’, ‘蒐荷’의 중요성을 선전할 수 있는 작품을 양산해야 했을 것이다.
Ⅴ. 맺음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만주국 내의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방면은 전쟁과 결부되었다. 즉, 일본의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데에 국가의 총력 을 다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된 것이었다. 이 무렵 만주국 정부는 전쟁 완수를 위한 국책을 대중들에게 선전하고 동원하기 위한 수단으 로 문학, 예술, 이른바 ‘藝文’ 에 주목하게 되었다. 1941년 3월 홍보처 에서 예문지도요강 이 발표되고 정부에 의해 문예인들(의 작품활동) 에 대한 통제가 가해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만주국의 ‘藝文’은 정부에 47) 吉林省戰時農産物蒐荷弘報宣傳要綱 (宣撫月報 1943年 2月).
의해 내용이 규정되고 국책을 선전하는 수단으로 전락되어 갔다.
문학 작가들에 대한 통제는 주로 기존 작가협회나 단체들을 해산시 키고 정부 통제 하의 새로운 어용단체를 창단하거나 또 문예 잡지의 폐간과 창간을 통해서 작가들의 작품활동의 공간(지면)을 통제하는 방 식이었다. 요강 발표 후, 문학 방면에서는 기존 滿洲文話會가 해산되 고 기관지
滿洲文話會通信
도 정간되었다. 곧이어 작가들의 새로운 활동공간으로
滿洲藝文通信
과
藝文
이 창간되었다.
滿洲藝文通信
의 지면은 당시 문학, 예술가들의 동원양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문예가 들은 關東軍報道演習을 비롯해 각종 국책 행사에 상당한 횟수로 동원 되었다. 뿐만 아니라, 참가 작가들은 대회참가나 현지시찰 후에는 좌담 회나 보고회를 갖거나 보고서 형식의 결과물을 제출해야 하였다.태평양전쟁의 전황이 급전했던 1943년 무렵이 되면, 만주국의 상황 은 모든 것을 ‘전쟁의 완수’로 귀결시키고 ‘決戰’을 부르짖게 되었다.
대중들의 결전 의지가 절실히 요구되는 이러한 시점에서 문학계에서는 두 개의 잡지,
예문지
(중문)와
예문
(일문)이 창간되었다. 신생 잡지 의 사명은 ‘藝文으로써 報國’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특히 두 잡지 창간 호의 첫 번째 순서에 실린 홍보처장의 글에서는 작가들의 사명이 전쟁 완수, 전의고양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는 작품을 양산해야 함을 분명 히 하였다.두 잡지의 지면에서는 우선 결전 시국에 작가들을 동원하고자 한 만주국 정부의 문화정책을 읽을 수 있다. 홍보처장을 비롯한 정부 관 련자의 글이 빈번히 등장하여 예문가들의 사명과 역할을 강조한다. 아 울러 정부의 방침에 즉응하기 위한 작가들의 움직임을 볼 수 있다. 우 선 많은 작가들은 현지시찰에 동원되었다. 광산이나 농촌의 현지를 시 찰하고 그 체험을 보고서나 시국소설 등의 작품으로 제출하였다. 작가 들의 작품 대부분은 시국을 반영하는 것이자 만주국 정부의 국책을 선 전하는 것이었다. 특히 당시 시국의 엄중한 요구였던 ‘개척’과 ‘증산’이 중요하게 선전되었다. 疑遲의 凱歌 3부작과 古丁의 下鄕 , 石軍의 新部落 은 그 대표 작품이다.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만주국 정부는 국
책을 미화하고 선전하려 한 것이었다. 작가들은 패색이 짙어가는 전황 을 감추고 여전히 대중들이 전쟁의 의지를 불태울 수 있고 암울한 전 시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내용으로 작품을 구성하였다.
이렇듯 태평양전쟁 시기 만주국의 작가들은 그들의 작품을 통해 만 주국 정부의 국책에 적극 협력하는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것이 식민 권력의 압제 하에서 생존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해도, 그들은 작품을 통해 전쟁을 독려하고 또 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국책을 적극적으로 선전하였다. 물론 여기에 저항하는 작가도 존재했고, 또 저 항의 한 방법으로 山丁과 같이 중국 쪽으로의 탈출을 선택하는 작가들 도 상당수 존재하였다.
하지만 적어도 두 개의 잡지의 지면을 통해서 볼 때, 재만 작가들은 만주국 정부의 통제 하에 국책에 부합하는 작품을 양산하면서 전쟁에 적극 협력하는 모습이었다.
본 논문에서는 태평양전쟁기 단지 만주국에서의 식민 권력에 의한 작가동원의 고찰에만 머물고 같은 시기 일본의 식민지 대만이나 조선 에서 간행된 어용잡지(『文藝臺灣』또는 『국민문학』)나 친일 작가들 의 전쟁협력에 관해서는 미처 살피지 못하였다. 추후의 연구를 통해서 이 부분이 보완된다면 만주국에서 작가동원의 실상과 특징이 더 부각 되리라 생각한다. 추후의 과제로 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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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Culture Control in Manchukuo during the Pacific War
-Focusing on Mobilization of Writers-
Jeon, Kyoung Sun
With the outbreak of the Pacific War, Manchukuo had to direct all it's strength to support Japan's war of aggression. During this period, the government of Manchukuo focused on literature and art, so-called 'YeMun(藝文)' as a way to propagate the national policy of fulfilling the war objective to its people and to mobilize them. In March 1941, the Government Information Agency of Manchukuo gave out guidelines of YeMun and started to control the activities of literary people.
Control over literary people was implemented mainly by breaking up existing associations or organizations of writers, establishing new government service groups that were under control of the government, or controlling the activity space of writers from discontinuance and launch of literary magazines. In addition, writers were mobilized quite frequently in all kinds of government-run events and were forced to hold symposiums or briefing session or to submit written reports.
Around 1943, when the state of affairs at the Pacific War drastically changed, the Manchuguo government handled all matters toward 'fulfilling the war objective' calling out for 'the decisive
war. In the literary world, two literary magazines were first published at this point when the will for a decisive war was desperately required of the general public: YeMunji(藝文志, Chinese) and Yemun(藝文, Japanese). The mission of these new magazines was to practice 'allegiance to the country through literature and art.' The first publication of both magazines, in particular, features at the top of the list of contents essays by the Chief of the Government Information Agency, which clearly stated that the mission of contemporary writers is to produce works in large quantities that can contribute to promoting the will to fight and to fulfilling the war objective.
The list of contents of these two magazines indicate that the writers enthusiastically cooperated with the government's demand at the time. A lot of the writers made fact-finding tours to mines or farming areas and produced creative works including reports and novels based on their experiences at these sites. A major part of the contents of these works involved national policies of Manchukuo at the time such as 'decisive war,' 'development,' and 'increased production.' The writers idealized and propagated the national policies. The writers of Manchukuo during the Pacific War submitted to the colonial power and actively cooperated to the nation's war efforts.
주제어 : 만주국, 예문, 예문지, 결전, 보국 關鍵詞 : 滿洲國, 藝文, 藝文志, 決戰, 報國
Keywords: Manchukuo, YeMun, YeMunJi, decisive war, allegiance to the country (원고접수: 2014년 9월 15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4년 10월 10일, 수정
원고 접수: 10월 15일, 게재 확정: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