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만주이주 조선인 초등교육기관의 확대와 조선인민회의 역할
석사과정 리우신
1. 머리말
2. 일제하 만주이주 조선인 교육의 형성과 중·일의 갈등 3. 1930년대 만주이주 조선인 초등교육기관의 확대 4. 만주이주 조선인 초등교육에 대한 조선인민회의 역할 5. 맺음말
1. 머리말
유럽 국가들은 강한 국력으로 아프리카 국가에 외래 교육제도를 도입하여 정복했다. 일제 역시 침략을 확장시키고자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의 교육에 주목하였다. 통상 제국주의가 식민 지 민족에 대해 시행한 교육에 대해서는 알트바호와 켈리가 설명한 바 있다. 그들은 "식민지 의 학교는 역외의 기관이었다. 즉, 학교가 가르치는 내용은 식민지 민족의 문화와 사회와는 상관이 없고, 토착 문화를 버리고 새로운 문화나 질서를 심어주는 수단이었다."라고 설명했는 데, 이 점은 일제가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을 대상으로 시행한 교육정책에서도 여실히 드러난 다.1)
19세기 중반부터 조선인 이주가 형성되기 시작한 만주이주 조선인(이하 재만조선인) 사회는 1905년 '을사조약', 1910년 대한제국 멸망,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급속히 확대되었다.2) 만 주지역에서 확대되었던 조선인사회는 만주의 정세 변화에 능동적으로 조응하면서 민족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많이 노력하였다. 1900년대 전반 만주지역의 정세는 다음과 같이 크게 청나라가 지배되었던 1900년대, 중화민국과 봉천군벌이 일제의 침략에 대한 공방전을 벌 였던 1910·20년대, 괴뢰 만주국이 건국된 1930년대 이후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재만 조선인 사회는 이와 같은 정세변화에 대처하면서 1차적인 생존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이후 자 녀의 교육문제 해결에 집중했다. 이 과정에서 재만조선인 사회에 다양한 운영 주체가 설립하 였던 학교가 생겨났다.3)
재만조선인을 위한 학교로는 조선인들이 직접 설립해 독립운동의 토대가 되기도 한 조선인 사립학교와 일제의 만주침략에 따라 식민정책의 한 수단으로써 활용되었던 식민학교가 병존하 고 있었다. 이 중에서 본문은 이 둘을 모두 포괄한 재만조선인 초등교육기관을 대상으로 한 다. 왜냐하면 초등교육기관은 가장 오래 존재하였고,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교 육권과 주도세력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교육기관이었다. 또한 만주사변을 분수령으 1) Landry, Bart, Reviews the book "Education and Colonialism", edited by Philip G. Altbach
and Gail P.Kelly, Social Forces, vol. 57 Issue 3, 1979, p.988.
2) 1910년에는 20여만 명, 1920년에는 45여만 명, 1930년 60여만 명, 1945년 216여만 명에 달하였다.
(유원숙, 「1930년대 일제의 조선인 만주이민 정책 연구」, 부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2년; 金正柱,
『朝鮮統治史料 10』, 東京: 韓國史料研究所, 1971.)
3) 당시 재만조선인 교육에는 주로 조선인, 중국, 일본, 외국인 종교단체라는 네 가지 주체가 관여하고 있었는데, 조선인학교를 '조선인 사립학교', '일본 측 학교' 중국 측 학교', '외국인 종교학교' 네 가지 종류로 분류되어 있었다.
로 1910·20년대와 달리 1930년대의 재만조선인 교육기관의 성격이 완전히 변화하였고, 이전 의 재만조선인 사립학교는 만주국의 건국과 함께 일제의 통제하에 들어간 일본 체제로 넘어가 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재만조선인 초등교육기관의 성격과 역할은 근대교육과 민족교육을 보급 하는 체제에서 식민교육체제에 확립하는 구도로 전환하였다. 본문은 각 경영 주체가 하나로 귀결된 일본 측 학교를 연구하고자 한다.
재만조선인 교육에 대한 연구는 항일운동의 일환인 민족교육이 시작된 1910·20년대와 일제 식민체제가 확립된 1930년대로 나누어 연구되었다.4) 이 가운데 1930년대 재만조선인 교육에 대한 파악은 비교적 공백으로 남았다. 그러나 1932년 만주국이 건국된 이후 재만조선인 학교의 운영주체와 형태는 뚜렷한 변화를 보인다. 또한, 일본영사관 산하의 조선인민회가 급속하게 성장하면서 일본 산하 조선인 초등교육기관도 급증했다는 점에서 1930년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30년대는 구체적으로 두 가지 사실에 초점을 두는데, 하나는 만주국 건국 이후의 조선인 교육 정책이고, 다른 하나는 1937년 만주국 ‘신학제’의 반포 이후, 조선인 교육 정책의 변화이다.5) 허수동(許壽童)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조선인 사립학교 수가 지속적인 감소 추세에서 어느 정도 회복한다는 점, 시기별 간도 지역 재만조선인 사립학교의 증감 현황과 그 원인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6) 이후 박금해(朴今海)는 재만조선인 교육 정책을 일제의 조선인 교육에 대한 통괄(1931-1936), 노예화 교육 체계의 전면 실시(1937-1941) 두 시기로 구분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교육비 지원으로 인한 초등교육의 확대, 중등교육의 실업화(實業化)를 중심으로
‘왕도주의(王道主義)’ 교육과 ‘황민화(皇民化)’ 교육에도 주목하였다.7)
이와 유사하게 윤휘탁은 일제가 ‘오족협화(五族協和)’와 ‘왕도주의’라는 만주국 교육 이념 틀에서 재만조선인에 대한 교육 정책이 만주 국민으로 양성하기보다 일제 신민으로 육성하려는 점을 지적하였다.8) 한편, 정미량은 장춘조선인민회가 설립한 장춘(신경)보통학교 체제 변화를 중심으로 그 운영권이 조선총독부,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일본영사관 문교부로 이양되었다. 즉, 1930년 이후부터 철저히 일제에 의한 교육체제로 운영되었다.9) 이경숙은
‘국가의 교사론’이라는 관점으로, 만주국의 교사 양성, 임용, 관리과정에 관한 제도와 실천을 살펴보았으며 만주국과 만주국 교사는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과 동화 정책을 전파하던 조선인 교사와 다르지 않음을 지적하였다.10)
위와 같은 연구는 재만조선인 학교의 증감 현황과 교육 정책에 대해 상당한 연구 성과를 축적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재만조선인 초등교육이 확대된 사실을 규명하는 데에 소홀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박금해가 재만조선인 초등교육에 대한 조선총독부가 경비를 4) 이명화, 「1920년대 만주지방에서의 민족교육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집, 천안: 독립기념관 한
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8; 중국조선족교육사 편찬위원회 편, 『중국조선족교육사』, 연변: 동북조선민 족교육출판사, 1991; 천경화, 「일제하 재만조선인 민족교육에 관한 연구: 1906-1920년대를 중심으 로」, 건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8; 박주신, 『간도 한인의 민족교육운동사』, 아세아문화사, 2000;
한강희, 「일제하 북간도 명동학교의 교과서에 나타난 민족주의와 근대 국가 개념」 『산학사상연구소』
184, 2019.
5) 신학제란 1937년에 만주국에 칙령으로 공포된<학사통칙>·<국민학교령>등의 법규와, 그 해에 民生部 令으로서 공포된 <국민학교규정>등 시행 세칙으로 구성된 각종 학교 규정의 縂稱으로 이듬해인 1938 년 1월 시행되었다.
6) 허수동, 「日本の在満朝鮮人教育政策 1932-1937 : 間島(カント)の朝鮮人私立学校を中心に」, 一橋研 究, 27(2), 2002.
7) 박금해, 「日本對東北朝鮮人的殖民主義教育研究」, 연변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7.
8) 윤휘탁, 「만주국의 교육 이념과 조선인 교육」 『중국사학회』104, 2016.
9) 정미량, 「일제 강점기 재만조선인의 교육과 그 체험: 장춘보통학교(1922-1945)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교육사학』29, 2007.
10) 이경숙, 「만주국의 ‘국가교사론’ 체제」 『한국교육사학』 Vol. 33, No.1, 2011, pp. 115~139.
보조하는 방식으로 학교를 운영했고, 그 목적은 정신적으로 충량한 국민을 양성한 것을 분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재만조선인 초등교육기관의 변화와 관련 있는 조선인민회의 역할과 1930년대 중반 대규모 만주이민을 위해 초등교육기관이 확대되는 정치적 목적을 충분히 밝히지 못했다. 또한, 선행 연구의 공통점이자 한계점은 1937년에 신학제의 반포 이전까지 재만조선인 교육은 변화되지 않았으며, 교육 내용은 1910, 20년대와 같다고 본다. 교육 내용에만 주목하며, 학교의 성격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 그러나 1930년 이후 재만조선인 학교는 대부분 사립에서 관립으로 전환되므로 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1930년대 재만조선인 초등교육기관으로 하며, 일제가 그것을 중시하고 증가시키는 목적이 무엇인지, 학교 현장에 어떠한 교육 이념을 투영시켰는지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조선인민회의 역할과 교육활동을 주축으로 재만조선인 학교가 어떤 성격으로 운영되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결과적으로 재만조선인들은 조선 내에서 일제의 통치를 벗어나고 새로운 생활을 추구하고자 만주로 이주하였다. 이로써 이국에서 안정된 삶을 원하였으나, 일제가 만주지역으로 식민지역을 확대함에 따라 일제의 식민교육 지배에 다시 합류되었음을 파악하고자 한다.
재만조선인 초등교육기관에 대한 연구는 우선 초등교육기관을 이용하여 재만조선인 사회의 친일화 공작을 추진하고, 한민족의 계몽이자 독립운동의 책원지를 파괴하고 저지하고자 한 일 제의 의도를 밝히는데 일조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다음으로 일제가 저들의 만주침략에 재 만조선인 초등교육기관을 적극 이용하고자 하였던 측면을 규명하는 작업으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친일교육이라는 구도 속에서 전개된 재만조선인 교육의 사회 여건과 환경에 대한 실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본문에서는 1930년대 이전 재만조선인 초등교육의 양상과 이를 둘러싼 중·일의 재만조선인 교육에 대한 쟁탈을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만주국 건국된 이후 재만조선인 교육 이념으로 초등교육기관이 어떠한 사회 지위로 운영되었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그리고 급격히 성장한 조선인민회와 그의 교육활동을 통해 1930년대 초 재만조선인 초등교육에 대한 일제의 세력 확대를 알아보고자 한다.
2. 일제하 만주이주 조선인 교육의 형성과 중 · 일의 갈등
영국의 식민지에서 교육이 식민수단의 하나로 활용된 것처럼 후발제국주의 국가였던 일제도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영국의 경우, 식민지 경제 개발에 중점을 두고 현지 문화와 관습을 비교적 보존한 반면, 일제는 군국주의를 주장하며 식민지 민족을 완전히 동화시키고자 하였다. 이 점은 재민조선인 교육에서 잘 드러난다. 20세기 초 일제는 재만조선인이 가장 밀집한 지역인 간도로 건너왔으며, 이듬해 최초로 조선인만 받아들인 간도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이후 1931년 일제 관동군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재만조선인 교육에 대해 교육침투에서 교육확장과 교육침략으로 전환하였다. 만주지역의 정세 변화 과정에서 재만조선인 교육은 일제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일제시기 이전부터 조선인들은 만주로 이주하였다. 특히 1905년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고 1910년 한일병합으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운동과 사상계몽을 위해 만주로 이주하였다.11) 이주 조선인의 교육은 서당 교육에서 시작되었다. 1906년 재만조선인들에게 11) 중국조선족교육사 편찬위원회, 『중국조선족교육사』,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1991년, p.12.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이 생겨났다.12) 1907년 8월 일제는 조선통감부간도파출소(朝鮮统監府間島派出所)를 용정촌(龍井村)에 설치하였고,13) 서전서숙을 불법이라는 이유로 1년 만에 폐교시켰다.14) 서전서숙은 재만조선인의 민족교육의 시초였고,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재만조선인 교육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서전서숙의 영향으로 만주지역에 정동학교(正東學校), 명동학교(明東學校)와 같은 반일민족학교가 생겨나면서 점점 그 세력을 확대시켰다.15)
그러나 조선인 반일세력이 증가하면서 일제는 조선 이주민을 통치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에 따라 일제는 일본 본토에서 시행되고 있던 '교육칙어'와 조선 국내에서 시행되고 있던
‘교육령’을 재만조선인에 적용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1908년 7월, 일제는 서전서숙의 부지에 관립인 ‘간도보통학교’를 설립하여 이주 조선인에 대한 친일 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했고, 1910 년, 강제 병합 이후부터 조선총독부가 이를 경영하게 되었다.16) 일제는 간도 지역에서 조선인 에 대한 교육의 첫발을 내디뎠다.17) 또한 일부 조선인 사립학교에 대해 교과서 무료 배포, 일 본어 교원 파견, 보조금 지원 등을 실시하는 정책으로 조선인 교육을 일제 지배하에 편입하려 고 하였다.
한편, 청나라는 1909년 <대청국적조례>를 공포하여 "우리의 언어를 사용하고, 우리의 문화 를 습득한다"는 귀화 요구를 하였다. 따라서 청나라는 조선 이주민이 증가하자, 조선인 밀집 지역에 관립학교를 설립하며 조선인 학생들을 수용하고 있었다. 1908년 3월, 청나라는 전년도 에 설립된 조선인 사립학교 양정학당(養正学堂)18)을 관립으로 개편하였다. 청나라는 관립학교 에서 조선인 자제와 중국인을 공학시켰는데 이러한 학교는 극히 적었다. 이후, 중화민국 시기 인 1915년 5월에 원세개(袁世凱)는 일제와 「二十一個條約」19)을 체결하였다. 이를 통해 일제 는 남만 지역에서 철도경영, 일본인 자유 출입, 영사재판권 등 각종 특권을 부여받았다. 이 특 권은 일본인뿐만 아니라 '일본 신민'이라는 조선인들도 포함하였고 재만조선인을 조선총독부 와 일본영사관의 지배하에 두려고 하였다. 따라서 재만조선인 교육문제를 포함하여 중국과 일 12) 서전서숙은 한일협정 체결에 반대했기 때문에 투옥되었던 이상설(李相卨)이 석방된 뒤인 1906년 8월 용정마을(龍井村)에 와서 창설한 것이다. 설립 당시에는 이상민을 포함한 4명의 교사와 2명의 직원에 22명의 학생이 있었지만 역사 산술 등 근대적 교육을 도입했으며 일본과의 전쟁을 상정한 군사훈련 도 실시했다. 서전서숙 출신인 윤정희는 이 학원을 독립군 양성소라고 적었다.
13) 1907년 8월 19일, 일본 육군 중좌 齋藤季治郎는 66명의 군헌을 거느리고 '한민 보호'를 명분으로 용정시에 '통감부간도파출소'라는 간판을 내걸었는데 이듬해 4월 10일 '朝鮮统監府臨時間島派出所'로 개칭하였다. (박금해, 앞의 글, 2007, p.23)
14) 윤혜진, 「北間島 지역의 조선인 민족교육 : 1910년대를 중심으로」,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역사교육 학과 석사학위논문, 2002.
15) 1916년까지 재만조선인 사립학교는 238개교에 이른다. (한강희, 「일제하 북간도 명동학교의 교과서 에 나타난 민족주의와 근대 국가 개념」 『산학사상연구소』184, 2019.)
16) 간도보통학교는 설립 초에 조선 학무부에서 관할하였다가 1910년 강제병합 이후부터 조선총독부가 직접 관할하였다. 이에 따라, 간도보통학교의 교육 이념 및 운영은 조선에서의 식민교육과 같이 「조 선교육령」에 따른 충량한 국민의 양성을 식민교육의 방침으로 삼았다. 간도보통학교를 효시로 재중 한인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교육은 그 첫발을 시작하였다.
17) 천경화, 「일제하 재만 조선인 민족교육에 관한 연구- 1906-1920년대를 중심으로」, 건국대학교 박사 사학위 논문, 1988년.
18) 양정학당은 1907년 3월에 조선인 민족지사 이동춘(李同春)이 현 룡전시 관소촌에서 설립하였다. 이 학당은 규모와 학업 실적에서 중국 관립학당보다 월등했다. 게다가, 이동춘은 공개적으로 반일 친중 함으로써, 중국 관청의 중시를 받았다. (권경오 장남기,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고급 중학교 생물교과 서 분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과학교육연구서 Vol.15 No.1 1990.)
19) 二十一個條約은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1월에 체결되었으며, 일본이 중국에게 자신의 권익을 확대하기 위해 21개조를 요구한 것이다.
본은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중국은 조선인이 일제에 편입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였고, 1915년 6월에 길림성 도청은 획일간민교육변법을 제정하였다. 이어 1920년대 중반부터 중화 민국은 배일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조선인교육권환수운동(朝鮮人教育権回収運動)을 전개하 여 조선인 교육을 중국의 교육제도 내에 편입하려고 하였다.20) 예를 들면 간도 화룡현(和龍 縣)에 위치한 조선인사립학교인 청일학교(靑一學校)·남태학교(南泰學校)·진일학교(震一學校)·귀 정학교(歸正學校)·광성학교(光成學校) 5개 학교에 대하여 중국 측의 관립학교로 전환할 것을 명령하였다. 또한, 중국인 200명 이상이 거주하는 지역의 재만조선인 사립학교는 관립으로 변 경하는 정책도 있었다.21)
이와 같은 정책은 재만조선인을 중국 관할에 놓으려는 의도라 보여진다.22) 따라서 중, 일은 재만조선인 교육권을 장악하기 위해 조선인학교를 설립 · 개편하거나 보조금을 주는 등의 정 책을 펼쳤다. 그러나 재만조선인 사립학교는 중, 일이라는 권력으로부터 난처한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재만조선인 사립학교는 여전히 주류를 이루었다. 만주사변 이전까지 재만조선인 사 립학교(388개)는 전체 재만조선인 교육기관의 62.4%를 차지하였다. 이는 일본 측에서 직접 운 영하거나 보조를 지원하던 학교(66개)보다 5.8배 많았다.23)
당시, 일제가 만주지역의 통치권을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재만조선인에 대한 교육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지 못했다. 이러한 장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간접적인 학교 경영 을 바탕으로 향후 학교의 운영 주체, 설립, 규칙 제정, 교육 내용 등 전체 과정에서 독점적 지 위를 확보하였다. 이러한 추세는 1930년대 초에 더욱 강화되었다. 그 변화는 만주국부터 시작 되었다.
3. 1930년대 만주이주 조선인 초등교육기관의 확대
1930년대 들어 재만조선인 교육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관동군은 이듬해 3월 만주국을 세웠다. 일제는 만주지역에 주도적 지위를 차지했고, 더불어 조선총독부도 재만조선인에 대한 관심을 더욱 기울였다. 이 같은 정세 변화는 재만조선인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며 특히 '일본 신민'이자 '만주국 국민'이라는 사회적 지위의 변화도 생 겼다. 또한 원래 논쟁 대상이었던 재만조선인 사립학교가 일본 측으로 귀속하게 되었다. 이러 한 변화는 1930년대 재만조선인에 대한 교육 시스템을 재구축하게 만들었다.
만주국은 ‘王道政治’와 ‘五族協和’24)를 건국정신으로 ‘王道主義’를 교육 이념으로 삼았다.
왕도주의의 왕도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仁義’로 ‘天下’를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왕도주의’라는 것은 유교사상의 ‘인의’, ’천하’라는 관념과는 달리 일제가 강권과 무력 강점으로 다른 민족을 지배하고, 그들을 자신에게 복종하게 함이고 이것은 忠良한 國民을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해 왕도주의는 유교 사상으로 식민교육을 정당화하는 사상적 증거로 활용된 교육 이념일 뿐이었다.
20) 박금해, 앞의 글, 2007, p.37.
21) 변경하는 조건은 1) 중국 현립(中國縣立)으로 중국인 교장을 임명함. 2) 교육국으로부터 허가받은 삼 민주의(三民主義)적 교과서를 사용함이었다.
22) 유필규, 『연변지역 韓人 '輯團部落'의 설치와 통제적 생활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년 6월, p.134.
23) 김경식, 『在中韓民族教育展開史 上』, 연정교육문화연구소 연구총서, 서울: 문음사, 2004.
24) 만주족, 한족(漢族), 몽골족, 일본인, 조선인을 만주국의 5대 주요 구성원으로 지정하였다.
만주국 건국 이후 일제와 만주국 당국은 재만조선인 교육에 대해 관심을 기울어졌다.
재만조선인 교육에 대한 통제와 관리를 강화하기 위해 일제는 조선인의 전속적인 교육 행정기관을 세웠다. 만주국 내무부 산하의 學務局은 朝鮮人教育科를 신설하여 모든 조선인의 교육 사무를 관장하였다.25) 이 시기 조선인교육과를 설치한 것은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1930년 이전에 조선인 교육기관에 대한 통합기관이 없었다. 간도 지역은 조선총독부에서 관할하고, 남·북만주 지역은 일본인 교육기관에서 담당했기 때문에 재만조선인 교육에 막대한 불편을 가져왔다. 즉 재만조선인 교육을 한 부서에서 일괄적으로 통제와 관리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따라서 이는 전문성과 효율성 측면에서의 변화이다.
둘째, 조선인 교육을 담당하는 부서의 성격을 규정하는 시도이다. 이는 조선인교육과 과장은 일본인으로, 부과장은 조선인으로 지방 재만조선인 학교의 지도와 감독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였다.26) 제1차 부과장은 이인기(李寅基)가 재만조선인 교육에 대한 지도뿐만 아니라 조선 국내 학무국 시학관 조재호(曹在浩)와 함께 재만 학령 아동의 교육문제에 대해 선만교육간담회(鮮滿教育懇談會)를 개최하였다.27) "재만조선인은 황국신민인 본질을 기초로 하고 선량한 만주국 국민을 교양하기로 한다는 것을 강령으로 하며, 이것을 교육의 근본방침으로 하였다". 쉽게 말해, 1930년대부터 일본 신민이자 만주국 국민이라는 신분을 가진 재만조선인의 교육은 일제 체제 하에 귀결되었다. 또한 향후 재만조선인 교육은 조선 국내에 실시한 일본 식민교육의 방향으로 마련되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1933년 10월
《매일신보》에서도 반영되었다. "재만조선인 교육문제에 대해서는 '모국어(일본어)' 교육을 충실하게 하는 것이 기본이고, 조선인 교육을 '만주화'하면 조선인의 불행은 물론이고 만주국 당국에도 불편을 초래할 지도 모른다고" 보도하였다.28)
재만조선인 교육체제에 대한 1930년대 초 일제의 입장을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 초등교육기관의 확대 정책이다. 1932년 3월 조선총독부에서는 재만조선인 밀집지역에 20~30개 가량의 초등교육기관을 새로 증설하거나, 이전에 만주사변으로 폐쇄되었던 학교를 일부 복구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여기에 배치되는 교원은 될 수 있는 한 조선인
‘우량자(優良者)’, 즉 조선 국내 사범학교 졸업생으로 충당될 것임을 밝혔다.29)
일제가 재만조선인 초등교육기관을 증설한 방식은 학교 신설뿐만 아니라 일부 재만조선인 사립학교를 활용하는 것이다. 학교는 조선인의 "최대 공적 기관"이자 "자치 조직"이며, 그들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조선인을 일본 쪽으로 끌어들이려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어느 정도 받아 들일 필요가 있다.30) 그리고 조선인 사립학교에 대한 완전한 탄압은 그것에 대항하는 반발을 초래할 수도 있다. 게다가 일본의 통치력 강화로 인해 조선인 사립학교에서의 반일민족운동은 만주사변 전과 같은 조직적인 확산이 어려워졌다. 개별적이고 소규모 저항은 있었지만 1919년 간도에서 일어난 3·13운동, 1930년 초에 조선광주학생운동을 지원하면서 일어난 간도학생운 25) 윤휘탁, p.187.
26) 중국 한인의 역사 (자료집), No.32. 滿洲國 敎育施設의 現情.
27) 이인기는 조선총독부 교과용 도서편찬사무촉탁, 京城高商 강사, 京城師範 敎諭, 間島省 視學官, 間 島省 이사관 등을 담당하였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만교육간담회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교육방침은 조선과 내지와 같이 황국 신민 양성을 주안으로 하고 만주국을 구성하는 인민의 교양을 가지게 할 것. 2. 교과과정은 현재 이상으로 개편하여 황국신민 양성에 치중할 것. 3. 교과서 는 조선의 보통학교용을 사용할 것. 4. 조선으로부터 많은 교원을 파견할 것. 5. 교육경비를 총독부로 부터 긍정적인 보조를 할 것. 6. 조선내 상급 학교로 연락이 되게 할 것. 7. 매년 일차 교육문제에 관 한 선만교육간담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할 것.
28) 『동아일보』, 사설 「교육의 根本義 - 다시 재만조선인 교육문제에 대하여」, 1933년 10월 14일.
29) 『조선총독부 관보』 1566호 1932년 3월.
30) 허수동, p.80.
동과 같은 대규모 민중학생운동은 일어나지 않았다.31) 따라서 이들에 대한 회유책의 일환으로 일제는 당분간 사립학교의 존속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일제의 만주국 통치 초기, 조선인 사립학교가 존속할 수 있던 원인이었다. 사립학교는 유지되었지만 일부 학 교는 조선총독부의 보조금을 받아 일제 측 보조학교로 전락한다.
<표 1> 지역별 조선총독부 보조학교 일람표
위 표에 따르면 보조학교는 123개교, 비보조학교는 171개교로 이 가운데 35개교가 폐교된 것을 알 수 있다. 학교 수로 보면 양자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재학생 수로 보면, 보조학교 재 학생 총수는 20,356명으로 비보조학교의 학생 총수보다 2.4배 많다. 평균적으로 보조학교 학 생 수는 165.5명이었으나 비보조학교 학생 수는 48.5명이었다. 다시 말해 사립학교 중 상대적 으로 대규모이고 중요한 지역에 위치한 사립학교는 보조학교가 되었고 소규모, 지역적으로 멀 리 떨어져 있는 학교는 여전히 비보조학교였다.
여기서 보조학교는 일제로부터 지원을 받았으며 재만조선인 사립학교의 자금과 설비가 부족 하고 낮은 입학률을 해결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재만조선인 사립학교를 민족운 동의 책원지로 간주하여 사립학교에 대한 보조한 것은 일제가 항일운동세력과 민중 사이의 연 락을 단절시키기 위한 계획인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만주국 건국을 전후로 공산주의자를 중 심으로 한 조선인 반일세력이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고 일제는 재만조선인 민중이 이에 합류하 는 것을 막고 회유하기 위해 사립학교에 보조한 것으로 보인다.
4. 만주이주 조선인 초등교육에 대한 조선인민회의 역할
초등교육기관에 대한 증설은 그 운영 주체의 변화를 가져왔다. 1930년대 이전 주로 조선총 독부과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경영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만주국이 설립된 이후 재만조선인 초등교육기관의 운영 주체의 중심이 조선인민회로 옮겨졌다.32) 조선인민회는 일제가 만주지역 31) 중국조선족교육사편찬위원회, 중국조선족교육사,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1990년, p.86.
32)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조선총독부가 직영한 5개교,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운영한 12개교를 제외하
조선총독부 보조학교 비보조학교 비고
지역 학교수 교원수 학생수 학교수 교원수 학생수
남만주
지역 58 174(韓人)
9,793 73 119(韓人) 3,337 25(日人)
북만주
지역 19 41(韓人)
1,874 28 54(韓人) 1,810 5(日人)
간도
지역 46 180(韓人)
8,689 70 108(韓人) 3,142 33(日人)
통계 123 458 20,356 171 281 8,289 35개 폐교 자료: 「在外朝鮮人教育費国庫補助ニ関スル件」, 『昭和九年度教育費国庫補助』, 1934년
에 세운 특수 조직이었다. 1913년 11월 안동(현 단동)지역에서 처음 설립하였는데 1931년에 는 34개였고 1936년에는 123개에 달했다. 조선인민회는 대부분 일본경찰서 인근에 설립되어 일본 총영사관이 관할하여 현지 조선인의 위생, 교육, 난민 구제 등을 담당하고 있었다.33) 조 선인민회가 늘어나면서 조선인학교도 증가하였다.
러일전쟁 후 일제는 만주에서 치외법권과 영사재판권을 앞세워 만주침략의 교두보를 마련하 고자 하였다. 재만조선인들도 일제의 ‘신민’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재만조선인 사회에 대한 통제 와 지배를 강화하기 위하여 만주지역 조선인사회도 일본인거류민회에 준하는 조선인민회를 설 립하기로 정하였다. 그의 운영 방침과 임원의 선정 등도 일본영사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조선인민회 가운데 봉천 총영사관 산하 봉천조선인민회만 1932년 7월부터 노구치 타나이(野口多內)라는 일본인이 민회 회장을 담당하게 되어 민회의 사무를 맡 았다.34) 그는 바로 이듬해 만주지역에 조선인학교조합 설립에 대해 제안하였다.35) 학교조합이 란 '관(官)의 감독을 받아 오로지 교육 사무를 처리하는 ‘법인’ 조직으로서 1934년부터 재만조 선인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였다.36) 만주지역 조선인학교조합에서 설립하고 운영한 학교는 오 직 초등교육기관뿐이었다. 이에 따라 이 민회 회장이 변화한 것은 두 가지 측면을 볼 수 있다.
첫째, 봉천은 만주국의 경제와 남만주 철도의 중심지라서 일제는 중심지를 잡아야 그의 영향력 을 더 키울 수 있고 봉천을 중심으로 학교조합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될 수 있다고 보인다. 둘 째, 만주 각지에 흩어져 있는 재만조선인 학교를 통일시켜 일제는 이를 장악하기 위해 준비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따라서 봉천조선인민회는 총영사관의 허가를 받아 노구치 타나이 학교조합장으로 재만조선 인의 향상적인 교육사업을 개선하고 미취학 아동을 구제하려는 목적으로 1934년 봉천조선인 학교조합을 설립하였다. 학교조합규약 제3조에 의하여 학교조합장은 소재지인 조선인민회 회 장으로 정하였다. 그러므로 학교조합규약 제3조는 사실상 조합장을 노구치 타나이로 규정한 것과 다름없었다.37) 일제는 일본영사관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일본인을 중심으로 재만 조선인 교육의 지도체제를 정비하였다.
봉천조선인학교조합은 봉천조선인민회 소속으로 봉천영사관과 민회장의 감독을 받아 조합 구 역 내에 거주하는 조선인 교육을 관장하였다. 봉천학교조합의 교육규정에 따르면, 일반 과목인 수신, 국어(일본어), 조선어, 국사 외에 남자에게 상업초보(商業初步)와 농업초보(農業初步)를, 여자에게 재봉과 수예를(제1조) 교수한다고 규정하였다. 조선총독부가 편찬하거나 검정을 통과 한 교과서만 사용(제5조)로 교정하고 있다. 또한 이전 한 학년 아동 수는 30여 명이었는데 학 교조합에 의해 각 학교의 한 학급 아동수가 60명으로 정했다. 이를 통해 조선인 초등교육기관 의 규모가 커지고 있고 재만조선인 교육은 점차 실업화로 전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35년 봉천조선인민회는 학교조합 내에 초등교육기관을 증설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38) 이 고, 나머지 학교는 조선인민회에서 경영하였다.
33) 金泰國, 「滿洲地域 ‘朝鮮人 民會’ 研究」, 국민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2, p.12.
34) 1921년 3월 山田昌壽, 宇井孝三, 戶澤民十郞 등과 자금을 기부하여 조선에서 철도의 건설 운수 및 그에 부대한 사업을 참여하였다. 南滿洲太興合名會社(51000), 山田昌壽(630), 野口多內(300). 野口多 內는 조선 철도건설, 만주지역 移送病者, 재난구제, 학교설립, 농가흥업 등 여러 가지 원조사무로 조 선총독부시정 25주년 923 기념표창인물도 되었다. (朝鮮銀行會社要錄, 1923년판, 東亞經濟時報社 1923년, 8월; 『奉天居留民會三十年史』, 1936, p.215.)
35) 조선인민회 『회보』, 제4호, 1933년 6월, p.75.
36) 조미은, 「일제강점기 재조선 일본인 학교와 학교조합 연구」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0년 6월, p.88.
37) 『奉天居留民會三十年史』 就職寫真, 1936.
38) 『회보』, 제12호, 1935년, p.48.
처럼 조선인민회는 조선 국내의 보통교육체제를 도입하여 재만조선인사회에 대한 친일화교육 을 강화하려 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 조선인민회가 지향하는 보통교육은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말살시키고, 민족동화를 추진하여 식민지 지배질서에 순응하는 황민화교육이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인민회는 일본영사관, 남만주철도주식회사, 만주국, 외무성과 경찰청 등 주요 기관에 될 수 있는 한 재만조선인을 많이 채용할 것을 요구하였다.39) 이는 조선인민회가 이 시기에 이르 러 조선인사회에 대한 통제뿐만 아니라 만주국의 식민지배에 적극 참여하고자 시도하고 있었 음이 확인된다.
이렇듯 봉천조선인학교조합에 대한 관심을 조선총독부에서도 확산되고 있었다. 1935년 경성 부 수하동12 중추원 참의 김한규 씨는 조선총독부에서 재만 동포 자제에게 교육기금 10만 원 을 부조해 장래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보냈다.40) 또 매년 조선인 자제 중 우수한 학생을 뽑 아 조선 국내 실업교육을 받게 보내려고 하였다.41) 이처럼 학교조합은 일제와 조선총독부의 양쪽의 지지를 받아 학교조합이 재만조선인 초등교육의 새로운 경향으로 자리 잡았고 총독부 는 일제가 만주지역 식민교육을 공고히 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후 조 선인학교조합이 설립되면서 봉천조선인학교조합을 중심으로 만주지역에 확대되었으며 1937년 까지 학교조합은 38개로 확대되었다.42)
한편 조선인민회는 졸업생지도학교와 산업지도부락 설정 문제를 주요한 과제로 제기되었다.
졸업생지도학교란 각 민회에서 관할구역 내 초등학교 중 가장 '우수'한 학교를 선정하여 영사 관, 조선총독부, 민회가 집중 지도를 실시한다는 것이다. 졸업생지도학교에서는 재학생 가운데 서 조선인 촌락별로 '우수'한 학생 1~2명을 졸업 후 지도생으로 선발하여 졸업하기 1년 전부 터 '특수교육'을 실시한다는 계획이었다. 졸업생의 지도과목은 본업으로서는 稻作 등 농작물 재배, 부업으로 養豚, 養鵝 등 실습을 지도하고, 농한기에는 '정신 진작, 근검 역행(勤儉力行), 사회 공덕, 국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 등 공민 교육'을 실시하여 향후 조선인 마을의 농업지도 자로, 일본의 식민정책을 충실하게 실행하는 '인재'로 육성한다는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公太 堡보통학교에서는 東亞勸業株式會社가 경영하는 公太堡농장 소속 소작인 집단농촌에서 졸업생 들을 대상으로 직업교육을 실시한 바 있었다.43)
그리고 산업지도부락 설정이란 각 민회 담당구역 내에서 호수, 경지면적, 치안 관계, 교통관 계 등을 조사하여 우수한 마을을 선정한 후 영사관, 조선총독부 파견원, 민회 등에서 연합으로 지도, 육성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산업지도부락의 건설은 만주의 경험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조선에서 행하고 있는 농촌진홍운동을 모방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한 사실은 우선 산업지 도부락의 목표와 지침이 조선의 농촌진흥운동의 것을 그대로 복사한데서도 확인된다.44) 조선 의 농촌진흥운동은 1931년 6월 조선총독 우가키(宇垣一成)가 황폐해진 조선농촌을 구제한다는 명목 하에서 파쇼화하는 새로운 정세에 처하는 구체적 방침이었다. 파쇼체제에 적합한 조선지 배정책으로, 농민의 노동력을 대륙침략정책에 총동원하고 절약, 식량증산을 통해 전쟁 협력체 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45) 따라서 봉천조선인민회는 미취학 아동을 구제하는 명목으로 학교 39) 『회보』, 제16호, 1935년, p.94.
40) 한성일본어학교 교원을 거쳐 중추원 부찬의에 취임했다. 그 후 조선상업은행 감사, 조선화재해상보 험주식회사 감사, 주식회사 한일은행 전무이사를 역임하고 1933년 7월 조선총독부 찬의에 임명되어 1935년에 이른다. 조선식산은행 상담역,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 감사역으로 활동했다. (한국근현대인물 자료, 한국사테이더베이스)
41) 『회보』, 제23호, 1935년, p.126.
42) 오세창, 「在滿朝鮮人民會研究」, 白山學報 25호, 1979, p. 23.
43) 『회보』, 제28호, 1935년, p.56.
44) 金泰國, 「滿洲地域 ‘朝鮮人 民會’ 研究」, 국민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2, pp. 214.
조합 내에 각 학교가 동아권업주식회사가 경영한 학교와 함께 합병하여 통일 운영할 것을 요 구하였다.46) 이에 따라 학교조합이 설립한 정치적 목적은 앞으로 대규모 만주로 이주하는 조 선인들 중에 만주 농촌을 이끌 수 있는 인재를 많이 육성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학교조합이 운영하는 학교는 주로 신설되는 관립보통학교와 보조받는 사립학교 두 가지 나 눌 수 있다. 이전에 보조학교는 조선총독부와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보조하여 일제 체제에 편 입되었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사립학교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조합 설립 때에 이 르러 외무성과 영사관에서 직접적으로 학교조합의 규칙을 제정하여 직원도 영사관 관리와 민 회 직원으로 담당하였다. 학교조합 구역 내의 조선인들은 모두 조합원이며 조합 직원의 관할 을 받았다. 이에 따라 초등교육기관의 성격과 범위를 더욱 잘 확정할 수 있다는 것으로 파악 된다. 그러나 학교조합은 단순하게 재만조선인 초등교육기관을 통합하는 차원에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재만조선인 초등교육기관에 대한 통치체제의 재정비뿐만 아니라 만주 점 령을 위한 인적 기반을 점검하려는 보다 폭넓은 의도가 내포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학교조 합장으로 일본인을 임명함으로써 학교조합을 이용해 재만조선인 교육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 였다는 점이다.
5. 맺음말
지금까지 1930년대 재만조선인 교육의 실태와 변화 과정 속에서 초등교육기관 확대를 중심 으로 살펴보았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30년대 이전에는 재만조선인 초등교육 기관이 만주지역에 흩어져 있고 중, 일은 이에 대해 다툼을 벌여 왔다. 1930년 초 만주국이 설립된 이후 일제가 만주지역에 세력을 확대하면서 재만조선인 교육은 일본 측으로 분류된다.
또한 조선인 이민자가 늘어나면서 조선인민회에서 그 학교 경영을 맡게 되어 조선인민회를 중 심으로 재만조선인 교육사업이 담당되었다. 이러한 조선인민회는 재만조선인 초등교육기관의 최대 경영 주체가 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선인 교육에 대한 행정권과 자율성을 갖추지 못하 였다. 이러한 조선인민회는 점차 확대되는 재만조선인 초등교육기관에 대해 친일교육을 실시 하고 만주 개발을 위한 산업에 졸업생을 참여시킨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재만조선인 초등 교육은 점차 일본화, 실업화로 전환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인다.
본문에서는 1930년대를 중심으로 재만조선인 초등교육의 활동과 경영 주체의 변화를 제한 적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추후 연구에서는 1930년대 중반, 일제가 치외법권을 폐지하고, 만주 국 ‘신학제’가 반포되면서, 재만조선인에 대한 교육권이 만주국으로 이관되었으나 조선인학교 조합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 이로 인한 초등교육기관의 변화와 그 실체를 파악할 필요가 있 다. 이는 본문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일제와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초등교육기관 확대한 목 적으로 볼 때 모두 향후의 행동을 위한 준비할 작업으로 이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 다. 또한 본문에서는 봉천 조선인민회와 학교조합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하였으나 다른 지역 조선인민회와 학교조합에 대한 교육활동과 재만조선인 교육과의 연계성도 앞으로 과제로 남겨 두었다.
45) 박경식,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지배』, 서울 청아출판사, 1986년, pp337~338.
46) 『회보』, 제29호, 1935년,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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