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북송 문인들은 추상적인 사상과 감정, 아취를 실제적 공간과 구체적 경물을 통해 표현하고 구현함으로써, 원림을 ‘상징적’ 공간으로 적극 향유하였 다.
제 4 절 역사적 공간으로 향유
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로부터 ‘평산(당)’이란 이름이 천하에 널리 알려졌다. 가우 8년, 직사관 단양 조공이 공부랑중에서부터 府의 일을 다스렸는데, 구양 공과의 거리가 겨우 17년이었지만 ‘평산(당)’이 그저 존재만 하고 있을 뿐, 모 두 썩어 문드러지고 벗겨지고 어지러운 상태였다. 공께서 오셔서 1년이 지나 자 모두 철거하고 새롭게 보수하였다.251) 沈括, <揚州重修平山堂記>
<滄浪亭記>에도 폄적 후 마음이 탁 트일만한 곳을 찾던 소순흠이 우연히 五代
때 孫承右의 池館을 발견하고 그 남긴 뜻이 좋아 그 땅을 매입한 모습이 드러난 다.
……동쪽으로 수백보 가니 버려진 땅이 있었는데, …… 주변에 민가는 없고 좌우가 모두 수목이 이지러지게 우거져있었다. 마을에 오래사신 노인께 여쭤 보니, “전씨가 나라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가까운 친척인 손승우의 池館이라 네. 우묵하고 불룩한 훌륭한 형세니, 남긴 뜻이 아직 보존되어 있지.” 라고 말 씀하셨다. 내가 그 곳이 좋아 왔다 갔다 하다가 마침내 사만 전에 그것을 얻 어서 북쪽 물가에 정자를 짓고는 ‘창랑’이라고 하였다.252)
蘇舜欽, <滄浪亭記>
이렇듯 원림기에는 소유주는 바뀌지만 이전 園主의 뜻을 계승하려는 일종의
‘系譜’적 면모가 드러나는데, 낙양에 있는 19곳의 원림을 소개하고 있는 이격비 의 《洛陽名園記》가 대표적이다. 歸仁園은 당대 우승유의 원림이었고, 松島는 당 대 원상선의 원림이었으며 大字寺園은 지금 그 공간의 절반이 장씨의 會隠園의 소유인데, 당대 백거이의 履道里宅園이었다.
251)沈括, <揚州重修平山堂記>: “前日(守)今叅政歐陽公為揚州, 始為‘平山堂’於比觀上之(北
岡之上), 時引客過之, 皆天下豪俊有名之士. 後之人樂慕而來者, 不在於堂榭之間, 而以 其為歐陽公之所為也. 由是‘平山’之名, 盛聞天下. 嘉祐八年, 直史館丹陽刁公自工部郎 中領府事(治), 去歐陽公之時, 纔十七年, 而‘平山’僅若有存者, 皆朽爛剥漫, 不可枝撑.
公至, 逾年之後, 悉徹而新之.” (《全宋文》 권1690, 329쪽.)
252)蘇舜欽, <滄浪亭記>: “……東趨數百步, 有棄地, ……旁無民居, 左右皆林木相亏(虧)蔽.
訪諸舊老,云: ‘錢氏有國, 近戚孫承右之池館也. 坳隆勝勢, 遺意尚存.’ 予愛而徘徊, 遂以 錢四萬得之, 構亭北碕, 號‘滄浪’焉.” (王水照, 《宋代散文選注》, 上海: 上海古籍出版 社, 2010, 36-37쪽.)
歸仁은 그 坊의 이름이다. ……唐대 승상 우승유의 원림이었는데 七里檜는 그 옛 나무다. 지금은 중서시랑에게 속하는데 마침 그 안에 정자를 짓고 있 다. 253) 李格非, 《洛陽名園記⋅歸仁園》
……松島는 수백년 된 소나무다. ……당나라 때는 원상선의 원림이었는데 본 조에서는 문정공 이승상에게 속하다가 지금은 오씨 원림으로 삼대째 내려왔 다.254) 李格非, 《洛陽名園記⋅松島》
대자사원은 唐代 백거이의 옛 원림이다. 백락천이 “내게는 履道坊에 있는 집이 있는데 다섯 마지기 宅, 열마지기 원림으로 물은 연못이 하나 있고 대나 무는 천 그루가 있다.” 말하였으니, 이것이다. 지금 장씨가 그 절반을 얻어서 會隠園을 만들었는데 물과 대나무가 여전히 낙양 제일이다.255)
李格非, 《洛陽名園記⋅大字寺園》
한편 북송 문인들은 존경하는 옛 문인의 뜻을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 원림을 만들기도 하였다. <歸来子名緡城所居記>에는 만년에 자신을 ‘歸來子’라고 부르고 원림의 이름을 ‘歸去來園’이라고 할 만큼 도연명을 사모한 조보지의 모습이 그 려져 있는데, 그는 松菊堂, 舒嘯軒, 臨賦亭, 寄傲庵, 倦飛庵 등 원림 속 경관의 명명을 모두 <歸去來辭>에서 따왔다.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읽었는데, 자신이 비슷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를 닮고자 옛 민성의 밭을 사서 스스로를 ‘귀래자’라고 하였다. 초가집에 유람하며 편안히 쉬는 땅으로, 그 방 한 칸과 그 창 하나는 모두 <귀거래>의 뜻에 이르고자 한 고로 도연명의 詞를 취해 명명하였다. 堂을 만들었는데 園 을 마주하고 있는 초목으로 인해 ‘松菊’이라 하였으니, ‘소나무와 국화는 여전
253)李格非, 《洛陽名園記⋅歸仁園》: “歸仁, 其坊名也. ……唐丞相牛僧孺園, 七里檜, 其故 木也. 今屬中書侍郎, 方剏亭其中.” (李廌 記, 《洛陽名園記》, 北京: 中華書局, 1985, 8쪽.)
254)李格非, 《洛陽名園記⋅松島》: “……松島, 數百年松也. ……在唐爲袁象先園; 本朝屬李文 定公丞相, 今爲吳氏園, 傳三世矣.” (위의 책, 11쪽.)
255)李格非, 《洛陽名園記⋅大字寺園》: “大字寺園, 唐白樂天舊園也. 樂天云: ‘吾有第在履道 坊. 五畝之宅, 十畝之園, 有水一池, 有竹千竿.’ 是也. 今張氏得其半, 爲會隠園, 水竹尚 甲洛陽.” (위의 책, 14쪽.)
히 있네.(松菊猶存)’라는 구절을 따온 것이다. 軒을 만들었는데 그 주위를 텅 비게 하여 바람이 들어올 수 있어서 ‘舒嘯’라 하였는데, ‘동쪽 언덕에 올라 길 게 휘파람을 부네.(登東皋以舒嘯.)’라는 구절을 따온 것이다. ……亭을 만들고 그 끝자락을 낮추어 연못을 바라보게 하고는 ‘臨賦’라 하였는데, ‘맑은 물에 임해 시를 짓네(臨清流而賦詩.)’에서 따온 것이다. 흙을 북돋아 臺를 만들고 그 위에 屋을 만들었는데 樓처럼 백리를 볼 수 있어서 ‘遐觀’이라고 하였고 室을 만들었는데 그 안이 동굴과 같은데 깊이가 五步 정도라 ‘流憩’라고 하였 는데, ‘지팡이 짚고 두루 돌아다니면서 쉬고, 때때로 머리를 들어 멀리 바라 보네.(䇿扶老以流憩, 時矯首而遐觀.)’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庵을 지었는 데 햇빛을 안고 있는 둥글게 지어서 낮에 즐기는 것은 ‘남쪽 창에 기대 뻐기 는 마음을 기탁하는 것(倚南窗以寄傲)’이기에 ‘寄傲’라 하였고, 庵을 지었는데 그늘을 등지고 네모나게 지어서 밤에 쉴 수 있는 것은 ‘새가 날기에 지쳐 돌 아올 줄 아는 것(鳥倦飛而知還)’이기에 ‘倦飛’라고 하였다.256)
晁補之, <歸来子名緡城所居記>
원림 속 景點의 명명을 모두 도연명의 시 구절을 인용해 취한 조보지의 모습 이나 구양수가 만든 평산당을 복원하려는 심괄의 모습에서 북송 문인들의 前人 정신 계승의 면모가 충분히 발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