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 시기 문인들은 崇文 정책과 言路의 보장을 통해 존중받는 한편 강력한 중앙집권제와 치열한 당쟁으로 옥죄여졌기에 실제 정사에서 그들의 뜻이 온전히 실현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그들 역시 역대 문인들처럼 사회적 자아로서의 책 임[出仕]과 개인적 자아로서의 자유[隱逸] 사이에서 심한 내적 갈등을 겪을 수밖 에 없었다. 북송 시기의 郭熙는 《林泉高致》에서 자연적 삶의 즐거움으로 나아갈 수 없게 하는 ‘임금과 어버이에 대한 충효’와 사회적 삶을 지속할 수 없는 ‘一身 만을 위한 자연에 대한 욕구’를 해결하는데 ‘산수화’라는 예술이 중요한 기능을 했다고 주장했다.205) 이러한 심적 균형 기능은 원림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사안이었다.
당대에는 거의 귀족만이 소유하던 城市원림을 북송 시기에는 문인도 소유할 수 있는 경제적⋅사회적 여건이 갖춰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북송 문인들은 “사 람 붐비는 곳에 띠집을 지었지만 車馬의 시끄러움은 없는”206) 주거 형태가 가능 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市井에서 은거하는 市隱207)의 형태로 출사와 은
205)조송식, <북송 사대부의 의식세계와 出任觀 및 그 예술>, 《美學》18권, 1993, 19쪽 참조.
206) “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陶淵明, <飮酒>제5수)
207)市隱은 晉대 王康琚의 <反招隱詩>의 첫 구절인 “소은은 언덕이나 수풀에 숨고, 대 은은 조정이나 저자에 숨는다.(小隱隱陵薮, 大隱隱朝市.)” 등에서 유래하였다. 市隱은 진정한 군자라면 세속에서도 은일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표현으로, “마음이 멀
일 간의 갈등과 모순을 해결할 수 있었다.
옛날의 군자는 반드시 벼슬할 필요도 반드시 벼슬하지 않을 필요도 없었다.
기필코 벼슬을 한다면 그 몸을 잊게 되고, 기필코 벼슬을 하지 않는다면 그 군주를 잊게 된다. 이를 음식에 비유하자면 형편에 따라 배고픔과 배부름에 맞게 할 뿐이다. 그러나 선비 중에는 그 의리를 실천하고 그 절도를 따를 수 있는 사람이 적다. 벼슬하지 않는 자는 옛 것에 안주하기에 출사하기가 어렵 고, 벼슬하는 자는 이익에 탐닉하여 돌아옴을 잊는다. 이에 부모를 거스르고 세속과 절연했다는 비난, 복록을 품고 구차하게 안일해지는 폐단이 생긴다.
장씨네 선군은 자손을 위한 계책이 원대하고도 주도면밀하여, 변수와 사수 사 이 배와 수레를 탄 여행객과 관복을 입고 가마를 탄 관리들이 왕래하는 요충 지에 집을 짓고 원림을 가꾸었다. 아침저녁으로의 봉양과 연회를 베풀고 보는 즐거움은 남에게 구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그 자손이 문을 열고 출사하면 반 걸음이면 조정에 이르고, 문을 닫고 귀은하면 고개를 숙이고 올리는 사이에 산림 아래에 이른다. 생계를 꾸리고 성품을 다스리는데 있어, 의를 실천하고 뜻을 구하면 불가한 것이 없다.208)
소식은 이 문장에서 벼슬이란 음식과 같은 것이기에 그 형편에 맞게 할 뿐, 반드시 벼슬할 필요도 반드시 은거할 필요도 없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 맥락 에서 장씨의 선군이 원림을 조정과 가까운 거리에 조성하여, 은일하면서도 속세 와 유리되지 않고 속세에 거처하면서도 산림지사로서의 면모를 가질 수 있게 만 든 점을 크게 칭송하고 있다. 벼슬하면서도 은거를 즐길 수 있도록, 즉 생계를 꾸리면서도 성품을 다스릴 수 있도록 공간을 조성하였기 때문이다.
북송대 문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책임의식으로 인해 출사의 끈을 쉽게 놓지 못했다. 그러나 벼슬살이가 늘 자기 마음대로 풀리는 것은 아니었으며 당
어지면 땅은 절로 외져진다.(心遠地自偏.)”는 사상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208)蘇軾, <靈壁張氏園亭記>: “古之君子, 不必仕, 不必不仕. 必仕則忘其身, 必不仕則忘其
君. 譬之飲食, 適於饑飽而已. ……然士罕能蹈其義、赴其節. 處者安於故而難出, 出者狃 於利而忘返. 於是有違親絕俗之譏, 懷祿苟安之弊.今張氏之先君, 所以爲子孫之計慮者遠 且周, 是故築室藝園於汴、泗之間, 舟車冠蓋之沖. 凡朝夕之奉, 燕遊之樂, 不求而足. 使 其子孫開門而出仕, 則跬步市朝之上;閉門而歸隱, 則俯仰山林之下. 於以養生治性, 行 義求志, 無適而不可.” (《唐宋八大家文鈔校注集評》 권120, 5599-5600쪽.)
쟁으로 인해 억울하게 폄적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들은 사회적 책임이라는 ‘출 사’와 개인적 자유라는 ‘은일’ 사이에서 늘 갈등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문제에 봉착하였는데, 바로 이 원림이 출사와 은일로 대표되는 모순 해결 공간으로 기 능하면서 그들이 현실의 삶 속에서 심적 균형을 유지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다시 말해 원림은 일견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치[出仕-隱逸, 窮-達, 市-野 등]가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공간이었다. 기존의 문인들은 “등용되면 도 를 행하고, 버려지면 은둔한다.(用之則行, 捨之則藏.)”는 공자 사상과 “벼슬길에 나아가면 천하를 구하고, 벼슬길이 막히면 홀로 수양한다.(達則兼濟天下, 窮則獨 善其身.)”는 맹자 사상의 영향으로 늘 한 가지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다. 그러나 북송 문인들은 벼슬하면서도 은거를 즐길 수 있는 방안을 터득하여 양자택일 식 의 극단적 선택을 경계하고 중용의 자세를 추구할 수 있었다. 蔡襄은 <葛氏草堂 記>에서 山과 城에 거처하는 모습을 대비시키면서 거처하는 장소와 상관없이 유 연한 갈군 공작의 삶의 태도를 묘사하였는데, 바로 이러한 태도가 북송 문인들 이 지향하는 바였다.
“집이 산에 있으면 비록 산골짜기와 계곡이 고요하고 깊은 맛은 있으나 사 람과 멀어서 현사와 호걸을 따라 노닐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도성에 이 르면 비록 사람과 가깝긴 하나 속세가 시시때때로 사람의 뜻을 혼탁하게 하 니, 스스로 청매해지고자 해도 그럴 수가 없지요. 저는 산에 있으면서도 (사 리에) 어둡지 않고, 성에 있으면서도 허둥대지 않습니다.”209)
이러한 태도는 白居易의 <中隱>詩에 보이는 “대은은 저자에 살고, 소은은 산 림으로 들어가지만 산림은 너무 쓸쓸하고, 저자는 너무 시끄럽네. 중은하며 하급 관료로 은거하는 것만 못하다네.”210)라는 입장과도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209)蔡襄, <葛氏草堂記>: “宅於山, 雖有巖壑靚深之趣, 然以人遠, 欲從賢豪遊, 不可得也.
至於都城, 雖與人近, 然俗塵時溷人意, 欲自親邁, 不可得也. 吾不晦於山, 不汩於城.”
(《全宋文》 권1018, 193쪽.)
210)白居易, <中隱>: “大隱住朝市,小隱入丘樊. 丘樊太冷落,朝市太囂諠. 不如作中隱,隱 在留司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