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商會와 권력
上海에서는 1920년을 기점으로 商會의 주도세력이 紳商이 아닌 일 련의 신흥 상공업자본가가 진입했다는 연구가 있다.182) 하지만 호남에 서는 1926년 이후에도 여전히 紳商이 商會를 주도하고 있다.183) 紳商 의 중요 인사인 史春庭 周季衡 등이 경찰청과 縣署 團防局 각 수령을 소집하여 회의를 개최하는 등 지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商會 성립 이전에는 비록 회관이 있으나 대부분 공동神을 제사한 장소였고 개인 상업에는 간섭이 없었다. 光緖 29년(1903) 商部에서 商會章程이 반포되어 각省 상회가 차례로 설립되었다. 醴陵은 宣統원 년에 성립했고 藍山縣에서는 민국원년, 宜章縣과 汝城縣은 민국 3년에 商會가 성립되었다.184)
1922년 常德商會가 長沙總商會에 올린 글에 의하면 이 시기 호남의 각 현 商會는 100곳 정도로 파악된다.185)
北伐軍의 北上과 관련하여 혁명적 분위기에서 성립된 長沙市商民協 會는 1927년 2月 성립 보고에 의하면 分會가 107개 회원 수 2만여人 으로 파악되고 있다.186) 약간 급진적인 성향의 商民協會는 단기적으로 끝나고 이듬해에는 다시 商會체제로 복귀하고 있다. 長沙大公報의
182) 馬敏 著ㆍ최은신 역, 「최근 10년간의 중국 商會史硏究와 그 전망」 (중국 현대사연구 11, 2001).
183) 長沙大公報 1926년 7月 12日 「昨早紳商維持會開會情形」.
184) 민국 37년刊 醴陵縣志 食貨志, 商會; 민국 21년刊 藍山縣圖志 권21, 食貨上, p.338; 민국 30년刊 宜章縣志 권23, 商會.
185) 長沙大公報 1922년 2月 26日 「發起全省商會聯合會」.
186) 長沙大公報 1927년 2月 16日 「商民協會歡迎唐總指揮之盛況」.
보도에 의하면 長沙總商會가 상급기관의 형식으로 구심점이 되고 있 다. 油業대표가 이금의 폐단을 호소할 때도 長沙總商會에 呈文형식으 로 하고 있다.187) 零陵縣 商會가 舊章의 회복을 요청할 때나 醴陵商團 대표가 夏布 세율조정을 건의할 때도 장사총상회에 呈文형식을 취하고 있다.188) 財政司에서 錢業公所에 借款 요청할 때도 商會를 통해서 하 고 있다.189)
商會의 조직화가 세력증대를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湖南에서 商 務總會가 성립할 때 지위는 ‘司’, ‘道’와 동등한 지위의 기관으로 總ㆍ 協理는 반드시 道臺, 知府수준이어야 했다. 長沙總商會의 최초 총리 陳文瑋는 試用知府 候補道臺의 신분이었다. 坐辦이었던 周聲洋은 優貢 知縣이었다. 이후 長沙商務總會의 임원은 紳商에 의해 거의 독점되게 되었다.190)
1917년 長沙商會가 재정부에서 商會가 관청에 보내는 公文에 印花 稅 1角을 바치게 한 조치에 항의하는 글을 보면 商會는 公法단체로서 정부의 關防을 발급받아 관청과 行文체제가 같고 원래 印花가 부과되 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191)
민국시기 汝城縣의 公法단체 일람표에 보면 縣의회, 縣党部, 縣教育 會등과 함께 縣商會가 적시되어 있다. 縣商會는 가장 장기 지속의 공 법단체인데 이익단체 성격을 가진 공법단체는 상회가 유일하다.192) 민 국시기 호남의 公團세력이 주목되고 있지만 長沙總商會는 省의회, 省 農會, 省교육회와 함께 4法團으로서 특별한 지위를 갖고 있다.193)
商會의 관공서에 대한 공문형식에 대해서는 일찍이 官府에서 상부
187) 長沙大公報 1922년 12月 24日 「釐局苛索油業之駭聞」.
188) 長沙大公報 1922년 1月 24日 「零陵商會請恢復舊章」; 長沙大公報
1922년 5月 28日 「醴陵商團對于夏布税率之意見」.
189) 長沙大公報 1925년 11月 5日 「財司仍向銭業借款」.
190) 曾田三郞, 앞의 논문.
191) 長沙大公報 1917년 5月 4日 「長沙商會反對呈文貼用印花」.
192) 민국 21年刊 汝城縣志, pp.75-77. 公法團体.
193) 塚本元, 앞의 책, p.48.
에 보고한다는 ‘呈’자를 요구했으나 상인들의 반발로 수평적 관계인
‘移’자를 쓰도록 했다는 지적이 있다.194) 호남에서는 長沙大公報의 많은 기사에서 볼 수 있는 대로 省長에게 보내는 공문은 여전히 ‘呈請’
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 외에 省의 財政司나 기타 부서, 知縣등에 게는 ‘函’자를 쓰고 있어 대등한 관계를 보여 주고 있다.195) 淸代의 布 政使, 按察使급이나 知縣에게 대등의 공문 형식이 된 것도 전통시대에 비해 발전이라 생각된다. 淸末의 史料인 湖南商事習慣報告書의 여러 行規에 知縣, 知府에 대해서도 ‘奉憲, 諭示’ 등의 표현을 쓴 것에 비하 면 商人의 官에 대한 지위가 한층 提高된 것은 분명하다고 여겨진다.
借款제공을 둘러싼 관계도 군벌 정권의 차관의존도가 점점 높아질 수록 상인에 대한 입장도 달라지고 있다 생각된다. 1919년 1月에는 督軍이 商團에 연회 초청을 표시하고 1923년 12月에 財政司長이 商 人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있다. 1924년 5月에도 財政司長의 연회 초청 이 있고 1925년 8月에도 財政司의 연회 초청은 거듭된다.196) 이러한 무절제한 차관 요구에 대해서 商會는 완곡한 말로 사절의 의사를 표현 하고 있는 것이 빈번하게 목격된다.197)
省정부에서 宴會를 베풀어 商人을 달래고 借款을 강요하고 있다. 이 것을 商會가 완곡한 말로 거절을 하면 처음 제시한 액수보다 낮은 금
194) 李和承, 「중국 전통상인의 정체성연구」 (중국학보 62, 2010).
195) 長沙大公報 1925년 12月 12日 「商會呈請省長發還被充米之原因」; 長沙 大公報 1918년 7月 16日 「長沙總商會呈請省長飭湖南銀行」; 長沙大公報
1925년 9月 18日 「商會與財司函商印花案」; 長沙大公報 1925년 7月 5日 「 商會函沅江縣通用新票」.
196) 長沙大公報 1919년 1月 9日 「督軍宴會商團之用意」; 長沙大公報 1923 년 12月 19日 「財政司長昨日大宴商界」; 長沙大公報 1924년 5月 15日 「政 府又有向商會借款消息」; 長沙大公報 1925년 8月 15日 「財政司本日大宴淮商
」.
197) 長沙大公報 1923년 8月 16日 「商會對於政府借款又一緊急會議」; 長沙大 公報 1924년 11月 23日 「政府又向淮商押借巨款」; 長沙大公報 1925년 9月 7日 「淮商婉言謝絕」; 長沙大公報 1925년 11月 9日 「銭業公所婉謝拒絕」; 長沙大公報 1926년 3月 11日 「政府向商會借款之種種消息」; 長沙大公報
1927년 1月 27日 「市商協婉謝政府借款」.
액이라도 빌려 달라고 사정하는 형국이다.
민국 15년(1926) 5月에 상인 楊壽松 등의 公債관련 진술문을 인용 해 보면 다음과 같다.198)
唐 代理省長의 財政司가 淸理명의로 公債回收를 정지하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호남성 헌법 7조 3항 규정에 인민의 사유재산은 법률에 의하지 않고 어떤 처분도 할 수 없다.
大理院經字 제754호 해석에 따르면 국가와 인민은 私法상 관계이고 강권으로 인민의 이익을 침탈해서는 안 된다. 統字 724호 국가와 인민의 抵押 행위는 私法상 행위이고 행정처분이 아니다 省정부가 군용 공채 발 행시 인민과 약정, 이금세로서 담보하고 이금세 완납 기한을 명시하였다.
이 공채는 정부와 인민의 일종의 私法상 계약행위이다.
이 내용을 보면 부르조아민주적인 省헌법과 국가 법률을 근거로 하 여 公債상환은 省정부가 상인에 대하여 당연히 집행해야 된다. 또 省 정부와 상인은 대등한 민법적 계약관계임을 밝히고 있다.
지방권력과 상인층의 협력 대항의 관계를 복잡한 정치사에서 단순 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1913년부터 1926년까지 호남의 省레벨 정 치는 외부세력인 北洋系군벌과 토착정치세력인 호남지배층의 대항관계 를 기축으로 진행되고 있다.199) 새롭게 부상한 재지 省엘리트의 중요 기반은 재지지주층과 長沙의 상인층으로 파악되고 있다. 聯省自治운동 을 배경으로 한 1919∼1921년의 시기를 國家건설의 시도로 보는 분 석이 제기되고 있다.200)
사실 제1차 譚延闓정권(1911.10∼1913.10)때부터 국가건설의 기초 가 되는 여러 가지 개혁을 실행에 옮겼다. 즉 교육개혁, 사법개혁, 아 편단속과 實業진흥이다. 제 3차 譚延闓정권(1920.6∼1920.11)도 裁兵 (군축), 興學, 實業의 제창, 民治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공업 진흥 위해 省정부 내에 「製造局」을 설치하고 외부로부터 설비 도입에
198) 長沙大公報 1926년 5月 31日 「商會請回復釐局搭收公債原案」.
199) 塚本元, 앞의 책, p.23.
200) 위의 책, pp.103-104.
의한 근대적 공장을 건설하려고 시도했다. 譚延闓정권은 여러 가지 개 혁과 실업 진흥을 위한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국가건설의 시도가 있었 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聯省 自治운동 역시 각각 省이 省헌 법을 제정하고 정치민주화를 한 후에 聯邦制를 달성하자는 것으로 譚 정권에 의해 추진되었다. 趙恒惕정권 때 省헌법 제정은 譚정권 때의 연장된 결과이다. 長沙상인층과 省권력과의 협력관계가 가장 양호한 시기는 譚延闓정권시기와 聯省自治운동기간이라 할 수 있다.201)
지방권력과의 대결구도가 극한에 이른 것은 驅張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北洋系 군벌인 張敬堯정권(1918.3∼1920.6)은 화폐남발과 지나 친 수탈로 상인층의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驅張운동은 상인층만의 독 자 행동은 아니고 호남 전체 재지세력의 반발이었다. 長沙總商會는 省 의회, 省農會, 省교육회와 함께 4法団의 하나로서 투쟁에 동참하고 있 다.202)
1927년까지 10년간의 長沙大公報 기사를 보면 譚延闓정권을 제 외한 여타의 군벌정권은 경제정책의 제시가 거의 없다. 가끔 ‘米禁’의 포고나 화폐강제통용에 관한 지시가 있을 뿐이다. 1926년에 건설청에 서 상업진흥계획을 세운 일이 있고 1932년에 省정부에서 3년 경제건 설계획을 세운 일이 있다.203) 그러나 1932년 全省 경제 건설 예산은 전체 재정지출의 1.3%에 불과했다.204)
군벌정권의 무절제한 借款요구와 苛捐雜稅 등은 정상적인 상업활동 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이 시기 군벌정권을 정상적인 국가권력으로 간 주하기에도 어려움이 있다. 상인층은 南北대결 국면과 군소 군벌의 대 립 속에 최소한의 치안확보를 통해서 상업활동을 보장받는 것이 필요 했다. 상인층은 거대한 이데올로기 보다 현상유지에 더 집중했다.
201) 위의 책, pp.103-112.
202) 위의 책, pp.48-60.
203) 長沙大公報 1926년 9月 12日 「建設廳振興商業計劃」; 通郵地方物産誌, 華世出版社, 1988, p.1.
204) 宋斐夫, 앞의 책, p.2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