光緖朝東華錄에 의하면 “중국의 商民은 평소에 관리사회와 벽이 있어 그들의 사정을 신속하게 전달할 수 없었다.”……淸代에는 끝끝내 관리는 존귀하고 상인은 비천하여 상하가 장벽으로 막힌 상황에 실질 적인 변화가 없었다146)는 시각이 있다.
申報에도 중국에서 “官과 商은 본래 서로 연락이 없다. 그 사이 상업경영으로 돈을 크게 벌면 捐資하여 관직을 얻고 搢紳의 대열에 끼 이는 것일 뿐이다”라는 기사가 있다.147)
그런데 民國 寧鄕縣志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148)
요컨대 중간 착복을 엄히 다스려 국가재정을 튼튼하게 하고 擾累를 禁 絶하여 商人을 돌본다……官을 채용하고 겸하여 紳을 채용하여 商民이 품달하기 어려운 숨은 실정을 통하게 한다.
호남 巡撫 駱秉章이 釐金局을 개설하면서 관리 인원으로 官吏와 紳 士를 겸용하여 商人의 실정을 통하게 한다는 취지이다. 여기에 官ㆍ商 의 관계 근접성이 진전되고 ‘紳’과 ‘商’도 연합 제휴하게 되었다. 결국
146) 馬敏 著, 신태갑 옮김, 앞의 책, p.618.
147) 劉泱泱, 앞의 책, p.277.
148) 민국 30年刊 寧鄕縣志 故事篇, 財用錄, “要在嚴杖中飽 以裕國計 禁絶擾 累以恤商……用官而兼用紳 以通商民難達之隱”.
에 ‘紳商’이란 紳이면서 商人신분인 자가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淸代 官ㆍ商관계를 서술한 湘報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149)
삼가 생각건대 四民이 不通한 것은 오랫동안 고질적 폐습이 되었다.
官ㆍ商의 사이에는 경계가 현격히 달라 비록 艱難萬狀이 있어도 상달할 길이 없다. 이 때문에 市政은 날로 쇠퇴하고 商務도 침체되고 民生이 날 로 곤궁해진다.
이 내용은 職員 王蔚槐 등이 商人과 함께 保衛局 개설을 청원한 내 용이다. 淸代에 官과 商의 현격한 신분 격차를 지적하고 있지만 동시 에 商人 보호가 국가의 元氣에 해당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馬敏에 따르면 19세기 이전 역사 문헌에 ‘紳商’이란 표현은 거의 등 장하지 않는다.150) 1912년 당시 중국 전국의 紳商 수치는 약 5만명인 데 紳士계층 총수의 약 3.3% 정도였다. 19세기말 20세기초 紳商계층 은 근대 중국에서 하나의 특수한 계층으로 권세와 재물을 독점하고 가 장 중요한 사회조직인 ‘商會’를 좌지우지한 세력으로 파악되고 있다.
‘紳商’이 전체 상인 중의 비율은 불명확하다. 소수임은 분명하지만 ‘商 會’의 주도 세력이고 근대 상공업 발전의 선도세력이었던 점에서 ‘紳 商’에 비중을 두고 서술하고 싶다.
이러한 紳商계층이 역사 무대에 본격 등장하는 것은 湖南의 新政실 시 개혁운동과 관련 있다. 湖南의 新政은 1895年 巡撫 陳寶箴이 실시 하기 시작했고 他省보다 비교적 빨리 시작된 셈이다. 이 때 鑛務總局 이 설립되고 여러 제조공장에 紳士들을 참여시키면서 紳商계층이 형성 되고 부르조아화의 길을 추구하면서도 紳士 기원으로부터 완전히 탈피 하지 못한 도시개혁엘리트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1909년 이후에는 省 의회의 주요 멤버이기도 하다.151)
礦务總局은 朱昌琳에게 추진을 맡겼는데 張祖同은 안티몬 정련공장 149) 湘報 1898年 3月 15日, “竊以四民不通 久成痼習 而官商之間 分際懸殊
雖艱難萬狀 無由上達 是以市政日衰 商務日棘 民生日困”.
150) 馬敏 著, 신태갑 옮김, 앞의 책, p.174.
151) Joseph W. Esherick, 앞의 책, pp.13-19, pp.68-69.
에 관여했다. 和豊火柴公司에는 王先謙, 張祖同, 楊鞏 등이 관여했다.
寶善成製造公司에는 王先謙, 黃自元 등이 관여했다. 호남에서 근대적 공ㆍ광업 발생의 특징은 호남성 당국의 주도하에 전개되고 있고 他省 에 유례가 없는 정도의 세력을 가진 호남의 유력한 鄕紳들이 주로 투 자하고 있는 것이다.152)
이 당시 상공업에 관련한 활동이 주목되는 紳士를 정리한 것이 <표 4>이다.
명단 신분 활동내역
왕선겸 進士 전 國子監 祭主 阜湘公司(광산제련) 和豊火柴公司 寶善成製造公司 철도이권회수운동
熊熙齡 翰林院庶吉士 예릉 磁業学堂, 湖南磁業公司
文俊铎 擧人 候補知縣 예릉 磁業学堂, 湖南磁業公司, 광산 개발 朱昌琳 候補道 安察使銜 湖南官銭局, 湖南礦务總局, 長沙항 건설 湯聘珍 전 山東布政使 阜湘公司(채굴, 제련)
龍湛霖 전 刑部侍郎 阜湘公司(채굴, 제련)
劉鎭 候補道 湖南鑛务總公司
陳文瑋 試用知府 湖北補用道 湖南電燈公司, 湖南商會總理
張祖同 전 刑部官員 和豊火柴公司 恒豊木材公司
楊鞏 候補道臺 和豊火柴公司 恒豊木材公司
袁樹勲 전 山東巡撫 하창 안티몬제련회사
袁思高 擧人 經濟特科 하창 안티몬제련회사
禹之謨 監生 毛巾공장
<표 4> 淸末 湖南 紳士의 商工業 참여
* 湘報 地方志 湖南通史 기타 관련 자료에서 정리
朱昌琳은 巡撫 陳寶箴이 湖南官銭局을 설립하도록 했고 礦务總局에 도 관여했다. 후에는 長沙港 부두건설을 완성했다. 그는 乾益號라는 銭莊 운영 뿐 아니라 잡화, 穀米, 鹽, 茶무역 등 다양한 사업으로 치부 하였다. 光緖 3년 섬서와 산서의 賑災 사무를 수탁한 공로 포상으로 道員 安察使銜을 획득하였다.153)
152) 曾田三郞, 「辛亥革命前の諸改革と湖南」 (中國の近代化と地方政治, 東京 勁草書房, 1985).
153) 張朋園, 앞의 책, pp.256-258, pp.262-263; 劉泱泱, 앞의 책, p.281.
王先謙은 進士출신 前 國子監祭主로서 和豊火柴公司, 阜湘公司 宝善 成 製造公司 등 다방면에 관여하고 있다. 그는 동시에 米穀시장에 관 여한 米穀商으로 1910년 長沙 搶米사건의 원인제공자로 지목되고 있 다.154) 그는 철도 이권회수운동에도 관여하고 있다.
陳文瑋는 연납으로 湖北補用道의 직함을 얻었고 湖南 電燈公司를 창립했고 후에 호남철도 이권회수와 민간철도회사 설립을 추진했다.
陳文瑋는 湖南商會 總理였다. 철도이권회수와 회사설립을 둘러싸고 王 先謙 등이 추구한 ‘官率紳辦’의 형태에 반대하고 완전한 商辦철도회사 설립을 추진했다. 이것은 陳文瑋가 전통적인 紳士배경을 무시하고 스 스로를 商人의 편으로 선택한 사례로 지적하는 이도 있다.155)
文俊鐸은 光緖 辛卯(1891)科 擧人으로 知縣候補였고 湖北에서 관직 을 역임한 바 있다. 淸日전쟁시 吳大澂을 따라 참전한 경력도 있다.
예릉에 湖南磁業學堂과 湖南磁業公司설립에 관여했다.156)
熊希齡은 翰林院 庶吉士로서 陳寶箴의 요청을 받아 예릉자업학당과 자업공사 설립을 주도했다.157)
여러 史料나 논저에 중복해서 언급되는 경우가 많은 인물들을 정리 한 것이 <표 4>이다. 이 인물들 중에 捐納을 통해 紳士신분 획득이 분명한 것은 朱昌琳과 陳文瑋가 대표적이다. 그 밖에 監生 禹之謨 정 도이다. 나머지는 대부분 正途출신 즉 과거에 합격하였고 實職을 지낸 사람도 많다. 그 중에 전 山東巡撫 袁樹勳, 산동 布政使 湯聘珍, 전 刑 部侍郎 龍湛霖 등은 고위관료 출신이다. 종래 상인들이 돈을 모아 연 납으로 官位를 획득하는 경우보다 巡撫의 新政 실시에 호응하여 적극 참가한 正途출신 고위 紳士계층이 많다는 것이다. 이들 새롭게 등장한 紳商은 결코 비천한 신분이 아니다. 商人의 지위 提高를 암시할 뿐 아 니라 ‘官’과 ‘商’의 한층 가까워진 관계를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154) 劉泱泱, 위의 책, pp.644-649.
155) Joseph W. Esherisk, 앞의 책, p.84.
156) 민국 37年刊 醴陵縣志 人物傳 6.
157) 湘報 1898年 3月 28日 「奏辦粤漢鐵路摺」.
馬敏의 지적대로 19세기 이전에는 ‘紳商’이란 표현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淸代 많은 지방지 기록 중에 간혹 ‘儒商’이나 ‘士商’이란 단어 는 보이지만 紳商은 19세기 후반에 빈번하게 보이는 것이다. 戊戌變法 期의 기록인 湘報를 보면 호남에서도 ‘紳商’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
저명한 譚嗣同의 주장에도 印花稅局을 개설하여 ‘官督紳商査驗’하게 하자는 것을 보면 紳商이 주목되고 있다.158) 같은 湘報의 粤漢鐵路 관련 기사에도 호북, 호남, 광동의 3省 紳商이 함께 청한다는 내용이 나오고 있다.159) 원래 粤漢철로는 湖南이 아니라 江西를 경유하도록 계획되었는데 湖南巡撫 陳寶箴이 호남의 士紳들이 時務에 통한다고 하 며 翰林院 庶吉士 熊希齡과 江蘇候補道 蔣德鈞을 파견하여 張之同, 盛 宣懷를 설득함으로써 경로를 바꾼 것이다. 웅희령과 장덕균 모두 이 시기 紳商들이다.160) 같은 湘報에 輪船公司 설립과 관련하여 호남, 호북 兩省 紳商이 주도했다고 하고 있다.161) 礦務總局 설립과 광산개 발 장려로 1896년 8月 6日부터 1899년 2月 19日까지 20건의 광산 허가가 발행되었다. 金, 鉛, 銅, 硃砂, 銻 등에 譚冀京, 黃潤經, 楊萬淸 등 20명의 개발자 명단이 나타난다. 각 자의 신분표시는 불명확하지만 그 중에 擧人출신에 候補知縣이었던 文俊鐸이 예릉의 안티몬 광산개발 에 참여하고 있다.162) 신분이 밝혀지지 않은 여타 인사들도 광무총국 에 관여한 朱昌琳, 王先謙 등과 마찬가지로 紳士 출신일 가능성이 높 다.
紳商에 관한 湘報 기사 하나를 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다.163)
陳大中丞(순무 陳寶箴)이 勅旨를 받들어 昭信股票를 처리하는데 黃관 158) 湘報 1898年 3月 17日 「試行印花稅條說」.
159) 湘報 1898年 3月 22日 「試辦粤漢鐵路稟稿」.
160) 湘報 1898年 3月 28日 「奏辦粤漢鐵路摺」.
161) 湘報 1898年 3月 22日 「輪船開辦」.
162) 湘報 1898年 4月 4日 「湖南商辦礦務表」.
163) 湘報 1898年 4月 22日 「湘紳先輸報國」, “陳大中丞奉旨 開辦昭信股票 委 黃玉田觀察 總理其事 初議集紳商辦 在籍江西補用道 朱觀察昌琳字雨田 卽首先 報效湘平銀一萬兩 業交善後局收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