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釐金 수취의 加重에 대한 商人의 반발은 타 지역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湖北의 샤양(shayang)에서도 이금국의 관리가 이금세율을 몇 퍼 센트 올린데 항의하여 상인들의 4일간 罷市가 있었고 泰州에서는 폭 동 후에 釐金局의 숫자는 18개에서 5개로, 分局의 수치는 36에서 20 으로 축소된 일도 있었다.114)

湖南에서도 咸豊년간 大錢주조와 私鑄의 성행으로 악성통화 팽창이 발생하여 商店이 도산하게 되자 長沙상인들이 罷市풍조를 일으켰 다.115)

同治년간 湘潭縣 한 史料를 보면 다음과 같다.116)

同治 2년 (1863) 商人이 釐金局員의 조사가 지나치게 엄격하여 3일간 罷市를 하였다.

같은 湘潭縣志의 비슷한 사건을 보면 다음과 같다.117)

光緖 2년(1876) 常平倉 창고건물을 重修하는데 상인들이 이금세가 과 중하다는 이유로 이금국 문 앞에 집결하였다. 委員이 (해산을) 권유하였 다.

위 두 사건은 10여년의 간격을 두고 벌어진 일이다. 이금의 수취 증 가에 대해 湘潭상인들은 계기가 생기면 ‘罷市’를 행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민국 7년(1918) 9月에는 長沙屠業이 罷市를 하였다. 大公報의 기 사 내용을 보면 屠稅를 상인들이 위탁받아 여러 해 동안 폐단이 없었

114) Susan Mann, 앞의 책, pp.142-143.

115) 劉泱泱, 앞의 책, pp.153-155.

116) 光緖15年刊 湘潭縣志 事紀14, “商民以釐金局員 刻覈過甚 罷市三日”.

117) 위의 책, 事紀15, “光緖2年 重修常平倉廒 商民以榷稅苛刻 紛集局門遒 委員 勸諭”.

는데 갑자기 押金과 稅金을 증가시키려 하니 이에 대한 항의로 罷市를 한 사정을 알 수 있다.118)

민국 9년(1920) 4月에서 발생한 武岡罷市 원인에 관한 史料를 보면 다음과 같다.119)

이 달 10일에 武岡全城의 罷市에 대해서는 대략 지난번에 보도했다.

罷市 원인을 들으니 印花稅局의 부당한 처리가 초래한 것이었다. 商店의 장부에 종전에 貼印花 2分이던 것이 지금은 貼이 4分 혹은 1角으로 된 것이 하나의 이유이다. 또 舊票 폐지 후 新票사용하는데 전에 商會 개회 시 印花稅局 주임이 선언하기를 이미 舊票로 貼한 것은 有效하고 다시 新票로 바꿀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近日 각 상점에 온 검사원이 舊票를 인정 안하고 新票로 다시 붙이게 한 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四城 에 사람을 파견하여 鄕民이 구매한 물건을 검사하는 일은 종전에 없던 일이다.……鄕民 한 사람이 現錢으로 한 점포에서 물건을 수 백문 구입하 고 다른 집에서 수백文어치 구매하여 합계 1元 정도였다. 검사원이 즉시 같이 상점에 가 벌금 약간을 매기고자 하였다. 鄕民이 원인 모르고 눈물 을 흘리며 심지어 다시 城中에 물건 사러 가지 않겠다하니 이것이 세 번 째 원인이다.

이것을 보면 과도한 세금의 증액과 이중 과세, 그리고 이러한 과도 한 수취가 정상적인 상업 활동마저 저해하는 상황에 대해 罷市로서 항 의한 것을 알 수 있다.

1923년 1月에는 전국 商界연합회가 주도하여 전국적인 罷市를 시도 하고 있다. 국가 재정이 파산에 가까운 것은 군벌이 다수 군대를 보유 한 탓이라는 것으로 이에 裁兵운동을 결의하게 된 것이다. 행동 방식 은 첫째는 罷市, 둘째는 抗稅를 결정하였다. 다만 罷市를 거행하면 금 융이 더욱 긴박할까 염려하여 음력 명년 정월 19일 전국 일제히 罷市 를 결행한다. 정부가 군벌 상태를 방치하면 그 다음은 抗稅로 나아갈 것이 商界의 목표였다.120)

같은 해인 1923년 7月에 醴陵에서도 全城의 罷市가 발생하였는데

118) 長沙大公報 1918년 9月 26日 「屠業罷市之近聞」.

119) 長沙大公報 1920년 4月 21日 「武岡罷市之原因」.

120) 長沙大公報 1923년 1月 26日 「全國商界定期罷市」.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121)

예릉통신에 이르기를 근래 의결을 하여 兵差 비용을 대개 城區 商人 부담으로 돌렸고 다만 긴급한 시기를 당하여 보관처가 능히 참작하여 津 貼을 매길 수 있다고 운운했다. 일반 商民들이 들어서 알고 마땅히 全城 이 부담해야 할 軍費를 일부 지역의 商民에게 부담을 강요하는 것은 무 단전횡이 극에 달한 것이라 아울러 宋지사에게 청하여 전달, 다시 의논하 게 하였으나 여전히 효과가 없었다. 지난 15일 全城에서 閉市를 하고 午 刻에 3,000여人이 집합하여 遊街(거리데모)를 행하였다.

全城의 군대 주둔 비용을 오직 城區지역 상인에게만 부담시키는 것 은 형평에 맞지 않고 현재 상업 형편이 좋지 않아 상인들의 능력이 부 족하다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상인들의 요구문에 서명한 사람은 商圑 대표인 王學鴻 傅光輝 뿐 아니라 工會회장, 각 城董 등이 대표자로 참여하고 있고 44,000명이 함께 호소한다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실제 거리 데모에 참가한 3,000명 외에도 상인들이 각계를 동원 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민국 14년(1925)의 桃源에서도 罷市가 나타나고 있다.122)

桃源 특약기자가 5月 20日 서신에 이르기를 어제(19일) 거리 각 茶樓, 酒館이 문을 닫아 一家도 영업하는 집이 없었다. 春芳樓 등지에 탐문하니 듣건대 경찰이 우리에게 酒席捐 1/10을 요구한다. 우리는 宣講所에 納捐 하고 있는데 또 경찰서에서 納捐을 요구하니 실로 할 수 없다. 단지 영업 을 안 할 수밖에 없다. 오후 1시에 이르러 각 상점이 홀연히 또 전체 閉 市하였는데 사정은 南街의 謙泰齊가 稅局 員巡 2人에게 검문을 당했는데 서류 한부에 붙인 印花가 잡세국의 확인 도장이 없다하여 員巡등이 局에 데리고 가서 조사하려 하였다. 뜻밖에 상점에 사람이 많아 처음에 피차 실랑이를 하다 나중에 서로 욕설 구타를 하였다.

잡세국 국장 李孝友가 듣고 심히 不服하여……11旅 留守處에 나아가 병사 8人을 파견하여 謙泰齊 店主를 붙잡아갔다.……商會가 이 소문을 듣고 따라서 통고하여 전체가 罷市하였다.

桃源상점의 罷市는 19日과 20일 양차에 걸친 것으로 생각된다. 하

121) 長沙大公報 1923년 7月 17日 「醴陵全城罷市罷工」.

122) 長沙大公報 1925년 5月 24日 「桃源商店忽然罷市」.

나는 경찰에서 각 茶樓, 酒館등에 1/10의 酒席捐을 부과하게 된 것이 고 하나는 印花문제로 시비가 붙어 잡세국에 체포된 謙泰齊 店主 석방 을 둘러싼 것이다. 후에 쌍방조정으로 謙泰齊 店主는 석방되었다. 酒 席捐의 증세에 반대하여 罷市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店主 석방이 罷市 의 사유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할 수는 있다. 사건 발단이 印花稅와 관 련된 것이기 때문에 공동보조를 취한 것으로 생각된다.

민국 14년(1925) 10月에 일어난 湘潭 罷市사건을 보면 다음과 같 다.123)

湘潭에서 3師의 縣주둔 군량문제로 현 의회와 이견이 발생하여 罷市를 일으켰다.

……들으니 18일 罷市 후 上午 商會에서 100人을 推擧하여 縣署에 나 아가 청원하게 하였다. 이전의 墊款(차입금)은 마련하여 상환해 주시고 이후 자금 조달은 17區로 나누어 할당하여 주십시오. 孫縣長이 밖으로 나와 답변하였으나 각 상인은 불만족이었고 마침내 결과 없이 해산하였 다. 昨日(19日) 罷市는 여전히 그대로하고 있는데 上午에 현의회 앞에 홀 연 乞丐 수백 인이 나타나 난동을 부렸다. 마땅히 縣署에서 청하여 군대 를 출동시켜 비로소 퇴출시겼다. 孫縣長이 商會에 재삼 조정하여 종전 商 會 墊付의 房捐은 방법 마련하여 상환하고 이후 籌款은 城區가 2/10를 맡고 鄕區가 8/10을 담당하도록 하겠다.……상인들이 승낙하고 하오에 開市하였다.

湘潭 주둔군 3師의 군량 부담에 반발하여 罷市를 일으킨 것인데 내 용이 다채롭다. 일단 罷市를 하면서 100명의 대표를 보내 청원 형식 을 취한다. 대표를 100명이나 보낸 것도 시위성이라고 여겨진다. 청원 이 통하지 않자 이번에는 乞丐 수백 명을 동원하여 난동을 조장한다.

단순한 罷市로부터 투쟁방법이 진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민국 15년(1926) 10月에도 長沙 旅業이 근 열흘간 罷市를 일으킨 일이 확인된다.124) 사건 내용을 보면 종전에 없던 月捐을 따로 부과하

123) 長沙大公報 1925년 10月 20日 「湘潭罷市風潮解決矣」.

124) 長沙大公報 1926년 9月 23日 「長沙旅業罷業之第五日」; 長沙大公報

1926년 9月 27日 「長沙旅業罷業之第八九兩日」; 長沙大公報 1926년 10月 3

「長沙旅業罷業風潮解決矣」.

는데 대한 반발이 크고 또 치안문제 관련한 각종 까다로운 검사의 부 과에 대한 불만이 원인이었다. 민국 15년(1926) 당시 長沙의 여관업 종사자 400여家가 일치단결해서 투쟁에 나서고 있다. 사건 와중에 체 포되었던 旅業公會 대표가 석방되고 省정부도 일부 규정 완화를 천명 했다. 그러나 旅業에서는 당분간 月捐의 납부를 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지시를 내리고 있다.

이와 같이 省정부 당국은 군사비의 필요나 기타 긴급한 행정 수요 재정충당을 위해 걸핏하면 商人에게 부담을 전가하고 있지만 상인도 罷市와 같은 수단으로 저항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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