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데 대한 반발이 크고 또 치안문제 관련한 각종 까다로운 검사의 부 과에 대한 불만이 원인이었다. 민국 15년(1926) 당시 長沙의 여관업 종사자 400여家가 일치단결해서 투쟁에 나서고 있다. 사건 와중에 체 포되었던 旅業公會 대표가 석방되고 省정부도 일부 규정 완화를 천명 했다. 그러나 旅業에서는 당분간 月捐의 납부를 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지시를 내리고 있다.
이와 같이 省정부 당국은 군사비의 필요나 기타 긴급한 행정 수요 재정충당을 위해 걸핏하면 商人에게 부담을 전가하고 있지만 상인도 罷市와 같은 수단으로 저항을 계속하고 있다.
재정청에서 議定하여 百貨에 徵錢하는데 현행 釐率에 따라 正加이금 외에 참작하여 5成을 더하여 징수한다. 9月 1日부터 실행시기로 한다.
마땅히 즉시 통지하여 따르게 한다 등……商 등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 다. ……不可의 이유는 첫째 印花稅 시행으로 이금은 폐지해야 하나 加徵 하는 것은 不可하다. 둘째 徵銀釐課에서 고쳐서 銀元 징수할 때 상인은 이미 한번 고통을 받았는데 다시 徵錢釐課에 5成을 추가로 징수한다는 것, 상인 능력은 유한한데 수취 가중되는 것은 불가하다. 셋째 省의회 통 과 없이 재정청이 발표 시행하는 것은 불가하다. 넷째, 은행 지폐 남발로 상인들이 고통 받고 금융 불안으로 상인들의 영업 사정이 나쁨으로 불가 하다.
이금을 錢으로 징수하면서 50% 추가 징수한다는 것에 강한 반대를 표시하고 있다.
민국 8년(1919) 10月에 6省 茶業公會 대표 龔璜이 湖南 湖北省長 에게 茶稅의 減免을 요청하고 있다.128) 그의 주장에 의하면 서양은 세 금을 가볍게 해서 상업을 발전시켰다. 英美稅則을 모방해서 茶 생산자 는 일률 감경하고 出口(수출)稅는 半으로 줄여야 하며 내지 각지의 釐 捐은 면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茶商이 실업하면 세금을 거둘 길도 없 다는 것을 주지시키고 있다.
同年 12月의 보도에 따르면 農商部 訓令으로 모든 出口 중국 茶의 海關稅 減免을 2년간 실시하도록 하고 있다. 稅釐에 대해서는 아울러 核減하여 商人에게 혜택을 주고 成本 경감시켜 판로를 확대하도록 하 라는 훈령이다.129)
민국 9년(1920) 2月의 보도에 다시 茶業公會의 요청에 따라 湖南省 長이 湖南 수출 茶의 釐稅를 2년간 면제 한다는 조치를 하고 있다.130) 이렇게 減稅요구가 수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성과를 보지 못하는 것 도 있었다. 민국 9년(1920) 2月 大公報 기사에 의하면 輪運商 泰記 등이 商會를 경유하여 省長에게 米捐 特捐을 경감시켜 유통을 촉진시 켜 달라고 올린 요청은 거부되었다. 省長의 답변은 군사비 수요의 긴
128) 長沙大公報 1919년 10月 4日 「茶業公會代表呈請減免茶稅」.
129) 長沙大公報 1919년 12月 9日 「茶商呈請減免税釐之結果」.
130) 長沙大公報 1920년 2月 2日 「湘茶免釐問題」.
급함 때문에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131)
민국시기 醴陵에서도 縣商의 요청에 따라 예릉의 磁器를 판매할 때 軍事特捐과 火車捐을 면제하고 있다.132)
민국 11년(1922) 1月에 零陵 商會가 釐金 稅率 증가에 반대한 내용 을 보면 다음과 같다.133)
零陵縣 商會가 長沙總商會에 公函을 보내 이르기를 長潭舊章의 회복을 청합니다. 삼가 영릉 각 상인은 趙 前국장이 규정을 개정하여 苛斂誅求하 는 실정을 상회에 두루 보고합니다.
……영릉지역은 편벽한데 兵亂을 겪고 匪盜가 출몰하며 기근이 빈번합 니다. 근 수십년래 못 보던 곤궁입니다. 영릉상업은 長沙 湘潭에 훨씬 못 미칩니다. 영릉의 이금은 長‧潭에 따라 징수해도 이미 부담 가중을 느끼 는데 하물며 趙前국장이 정한 新章 즉 成本을 추정하여 釐金을 징수하는 것은 員司에게 生財의 길을 열어 주는 것이고 뇌물의 문을 여는 것입니 다.
영릉은 장사나 상담에 비해 편벽하고 상업이 덜 발달된 지역이다.
그런데 상품 成本을 추정하여 이금을 징수하겠다는 것은 이금 局卡 관 계자의 자의적 재량권 확대를 의미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수탈 가중이 될 거라는 우려 때문에 舊章을 회복해 주도록 요청하고 있다. 장사총 상회를 통해 省長에게 간청하는 것이다.
同年 3月에 芷江 商人들도 貨捐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데 기사 내용을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134)
芷江商會가 昨日 省署 재정청에 전보치기를 楊知事가 위법하게 百貨稅 捐을 마음대로 거두는 것에 대해 일찍이 元日에 조사를 電請하였다.……
아울러 楊知事에게도 公函을 보내 스스로 징수를 정지하도록 청하고 지 령을 기다렸다.……상품에 대한 강제 징수가 갈수록 격렬해 지니 상인들 은 죽음에 이르더라도 따를 수 없다. 울면서 두려워하여 시중이 동요하였 다. 속히 楊 지사에게 지시하여 命을 거두게 하지 않으면 대중의 분노가 131) 長沙大公報 1920년 2月 2日 「米捐不能減少」.
132) 민국 15年刊 醴陵鄕土志 四, 賦稅.
133) 長沙大公報 1922년 1月 24日 「零陵商會請恢復舊章」.
134) 長沙大公報 1922년 3月 28日 「芷江商民極力反對貨捐」.
걷잡을 수 없게 되어 상회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게 된다. 본 회는 상업 보호뿐 아니라 치안유지를 위해서도 다시 전보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급히 지시 내려 免徵하게 하여 주십시오.
芷江商會회장 林德明의 이름으로 省재정청에 보낸 내용이다. 芷江縣 지사가 제멋대로 百貨稅捐을 부과하니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따르지 못하겠다는 강경한 의사 뿐 아니라 減稅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폭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협박성 주장까지 하고 있 다.
이금의 각종 폐단과 苛斂誅求를 지적하고 이것의 폐지나 경감을 요 구하는 호소는 大公報에 빈번하게 등장한다. 1922년 4月에도 長潭 兩埠商民대표 程海航 등이 商會에 올린 글에서도 省長과 재정청장에게 이금의 각종 폐단해소 나아가 이금 철폐를 건의하고 있다.135)
同年 5月에도 旅鄂 湖南長郡商業公會 대표 彭隆, 龔英 및 각 帮董事 陳耀東 등이 임시 신설한 각 卡을 취소해 달라고 청하고 있다. 岳州와 濱湖일대 불과 삼백 수십 리인데 신설 임시 검사 기관은 20여 곳이고 관련 인원의 횡포가 심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136)
同年 8月에는 茶商대표 李穀蓀 등이 省의회에 이금의 폐단을 시정 해 줄 것을 요청하고 省의회도 이를 수용 省長에게 건의하고 있다.137) 李穀蓀의 주장에 따르면 茶船이 경과하는 靳江河 釐局이하 각 出口에 이르기 까지 釐卡들이 층층이 수탈하는 데 鹿角, 南津港, 城陵磯 등지 와 같은 곳은 혹 禁煙, 雜稅, 印花, 水警 등이 왕왕 무기를 들고 막아 서서 온갖 작폐를 부리고 있다.
민국 11년(1922) 5月 醴陵商團 대표 劉嵩南, 王學鴻 등은 長沙總商 會를 통해 夏布稅率 인하를 요구하고 있다. 3/100稅가 높고 釐金의 각 종 수탈을 견디기 어려우니 경감을 해 달라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138)
135) 長沙大公報 1922년 4月 19日 「名處釐局詐索之情形」.
136) 長沙大公報 1922년 5月 14日 「取銷濱湖病商各釐卡」.
137) 長沙大公報 1922년 8月 4日 「省議會請除釐毒之」.
138) 長沙大公報 1922년 5月 28日 「醴陵商團對于夏布稅率之意見」.
민국 13년(1924) 11月에는 湖南의 塩商들이 세금 경감을 요구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139)
광동에서 郴州에 들어오는 塩은 어떤 卡에서 징수하든지 일률로 매石 榷徵 小洋 1角 5分(1挑) 挑塩은 南關分卡에서 稅 완납하면 단지 呈驗만 할 뿐 이중 收稅의 일은 없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전에 매 挑徵 小洋 1角 5分인데 오직 매挑 100斤에 못 미쳤다. 이미 납세 1毫를 하니 3挑 3票에 이미 3毫를 완납 했다. 매 塩 1擔은 대개 무게 潮秤 180斤에 해당한다. 이미 법에 따라 3 票呈驗과 함께 違抗이 없었다. 어찌 다시 補納 5分을 감당하겠는가. 지금 郴局이 商等에게 補納 5分을 명하는 것은 重徵挑鹽의 名分을 어기는 것 이다.
이것을 보면 補納 명목으로 5分의 추가 징수를 하는 것은 부당하다 는 것, 종래 이중과세를 하지 않겠다는 명분을 어기는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민국 13년(1924) 12月 총상회는 경찰청의 門牌稅에 반대하고 있다.
현실성을 고려하여 완전 철폐를 주장하지 않고 등급의 다분화를 간소 화하고 최대 한도 1元을 넘지 않도록 하는 감경 요구를 제시하고 있 다. 이 총상회의 주장은 內務司에 의해서 수용되고 있다.140)
민국 14년(1925) 8月 商人 대표들은 새로 실시하려는 郵釐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141) 청원단 대표 張思明, 沈錫齡, 蔡其杞, 胡 學書, 魏振帮, 李昌榮, 饒國生, 粟鴻時, 熊佑文, 常恒治, 冠慶勸 등은 省 長, 財政司, 省의회에 청원서를 보냈는데 郵包를 보내면서 이미 郵費 를 내고 관세도 납부했다. 결코 교묘하게 國庫를 避免하려는 것은 아 니고 단지 편리해서 시기를 놓치는 것을 면하고자 할 따름이라는 주장 을 펴고 있다. 더구나 省헌법상 청원권을 행사하는 것과 민국 3년 5月 에 만국 郵政包裹公約에 가입했기 때문에 조약에도 위배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商會는 郵釐폐지를 위해 같은 날 전체 회원 대회를 소
139) 長沙大公報 1924년 11月 11日 「湘南塩商電請減輕粤稅」.
140) 長沙大公報 1924년 12月 28日 「總商會對於門牌費之意見」.
141) 長沙大公報 1925년 8月 7日 「商業代表反對郵釐之請願書」.
집하여 요구사항을 의결하고 있다.142) 商會 會長 黃藻奇 주재로 열린 이날 회의에서 난상토론 끝에 몇 가지를 결의했다. 첫째 正副회장이 정부에 가서 郵包釐金 및 新章 명령 철회요구를 한다. 둘째, 정부가 商艱을 체휼하는데 성의가 없고 철회하지 않을 시에 각 行은 최후의 대청원을 하고 목적 도달 전에 그만두지 않는다. 셋째 省의회는 全民 의 대표이다. 이번 정부가 違法抽釐하는데 비록 폐회기간이라 의결할 수는 없지만 전체 상주위원이 정부에 엄중교섭하고 郵包抽釐를 폐지하 게 하여 商艱을 살펴야 한다. 넷째 省長訓令 50% 감소에 대해서 마땅 히 商會 각 行業 전체 회의를 열어 부인 이유를 밝히고 완전 철폐를 요구해야 한다. 다섯째 이상 방법이 원만한 결과를 도달하지 못할 때 는 오직 全市가 停業할 뿐이다. 同年 8月 9日에도 商會는 省의회에 公 函을 보내 상인들의 의사를 경고하고 의회가 실행중단 노력을 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同年 8月 11日에는 각 行商이 郵釐거부 선언을 발표 한다.143)
민국 15年(1926) 6月에는 淮商이 湘中湘西汽車路局이 부과한 路股 를 취소해 주도록 요청하고 있다. 6月 27日에는 淮商이 교육경비의 代收 책임을 면제해줄 것 요청하고 있다.144)
민국 15년 12月에는 市商民協會가 苛捐雜稅의 폐지 운동을 전개하 고 있다. 각 分會에 지시하여 苛捐雜稅를 구체적으로 조사하도록 하고 이를 省民회의에 건의하여 철폐를 추진하는 것이 골자이다.145)
이상에서 보면 省정부의 징세와 추가징세 등에 대하여 상인들은 끊 임없이 減稅나 철폐 요구를 제기하고 있다. 지역 商會에서 總商會를 거쳐 조직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省의회까지 요구 실현에 동원하고
142) 長沙大公報 1925년 8月 8日 「商會昨日又爲郵釐閉全体大會 -決議要求完 全撤消」.
143) 長沙大公報 1925년 8月 9日 「商會爲郵釐事致省議會函」; 長沙大公報
1925년 8月 11日 「各行商否認郵釐之宣言」.
144) 長沙大公報 1926년 6月 4日 「淮商請取消附加塩稅路股」; 長沙大公報
1926년 6月 27日 「淮商請解除代收敎育經費責任」.
145) 長沙大公報 1926년 12月 25日 「商民協會廢除苛捐雜稅之運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