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代 200년간은 상업세의 증가가 거의 없었다. 상인에 대한 세금은 국가 재정의 기여도가 미미했고 상업세는 상인에 대한 최소한의 관리 수준이었다. 그런데 淸末이 되면 긴급한 군사비지출과 배상금 각종 新 政 비용을 상업세에 의존하는 정책으로 전환되었다.
217) 위의 책, p.199.
218) 민국 37년간 醴陵縣志, pp.396-398, 人物 6.
219) 민국 21年刊 汝城縣志 권16, 政典志, 民政.
220) 長沙大公報 1922년 4月 22日 「商會注重各縣議員」.
221) 長沙大公報 1922년 8月 28日 「常德商民提倡市自治」.
상업세 부담의 가중은 예산 구조의 변화에서도 알 수 있다. 宣統3년 (1911) 예산 세목은 56.3%가 상업세이고 田賦와 漕糧을 합친 토지세 는 26.7%에 불과하였다. 19세기 중기까지 거의 75%가 토지세였던 것 과는 대조적인 수치이다. 1917년도 예산은 田賦 38.8%, 이금은 41.8%이다. 이금에 잡수입과 잡세를 더하면 60.3%가 상업세이다.
이금은 원래 임시세였지만 1931년 폐지될 때까지 호남에서는 76년 간 지속되었다. 처음에 이금국은 21局이었지만 宣統 3년에는 36局에 分卡이 172곳이었다. 민국기에도 계속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민국 기에도 이금은 호남의 大宗경상수입이었고 統稅로 바뀐 뒤에도 세금은 배로 증가하였다. 正稅의 이금 외에도 징수과정에서 각종의 부가적 수 탈로 상인들은 고통을 호소하였다.
鹽稅는 청일전쟁, 의화단 등의 배상금을 他省에서는 田賦附加로 해 결했으나 호남에서는 鹽稅부가로 해결하였다. 淸末시기 호남의 鹽稅는 443만兩이란 수치도 있다. 同治 7년에서 光緖 33년까지 부과된 鹽課 稅釐는 모두 25종이었다. 군벌정권은 걸핏하면 재정난 해소의 방법으 로 鹽稅附加에 의존했다. 塩商들은 商本까지 침탈당하는 고통을 겪고 있다.
잡세는 印花, 煙酒, 屠宰, 土硝 5항 잡세가 기본이지만 지역에 따라 종종의 잡세가 부과되어 ‘苛捐雜稅’라 하여 국민혁명기 투쟁의 대상이 되었다.
화폐 남발은 민국기 군벌정권이 재정난 해결을 위해 흔하게 사용하 는 방법이었다. 張敬堯정권의 裕湘銀行 설치와 화폐 남발, 惠民票의 통용강제 등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역대 군벌정권은 정도의 차이는 있 으나 대부분 화폐 남발로 비용 조달을 하고 있다. 1935년 추계로 호 남 통용의 銀元은 777만여元, 지폐는 호남성은행과 기타 은행을 합쳐 1929년에서 1935년 사이 2,700여만元을 발행하였다. 은행 발행지폐 외에도 省정부와 각 기관 縣정부 등이 발행한 流通券 종류를 ‘市票’라 하였는데 이것들 역시 악성 통화 팽창의 주범이었다. 이것의 최대 피 해자는 역시 상인층이었다.
차관의 강요 역시 상인층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잦은 차관 강요로 省정부 조차 차관 액수를 파악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1927 년까지 약 10년간 長沙大公報에서 대강 파악되는 차관만 1,776만여 元이다. 빈번한 차관강요에 상인들의 호소가 거듭되고 있었다.
이러한 省정부 권력에 상인들의 저항도 다양하였다. ‘繞越’은 세금을 기피하기 위하여 징세리가 있는 関卡의 경로를 우회하는 것이다. 省정 부는 요월을 막기 위해 계속해 局卡을 늘려 나갔다.
罷市는 淸末에 보이기 시작하는데 민국시기에는 상인들의 유효한 투쟁의 수단이 되고 있다. 상인들의 조직적인 罷市에 省정부가 부분 양보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減稅요구는 縣商會나 同業分會가 長沙總商會를 경유하여 조직적으 로 제출되고 있다. 이러한 감세요구가 부분적으로 수용되는 경우도 있 지만 재정난에 허덕이는 省정부는 여전히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官ㆍ商의 관계에서 보면 淸末期에 ‘紳商’성격의 변화를 들 수 있다.
19세기 중엽 이전에는 紳商이란 용어도 잘 보이지 않는다. 호남성 당 국의 중상주의적 新政실시 과정에서 호남의 유력한 鄕紳들이 상공업에 참여함으로서 새로운 紳商층이 대두되고 있다. 종래 돈을 많이 번 상 인이 捐納으로 官位를 획득한 것과 달리 正途출신의 유력 향신의 상공 업투자는 官과 商관계에 변화를 초래했다. 즉 상인의 지위가 提高되고 官과 商의 접근성이 높아진 것이다.
민국기에도 紳商의 활동은 지속된다. 商會의 주도세력은 여전히 紳 商이었다. 長沙總商會를 구심점으로 휘하에 縣급 상회가 100여 곳이 나 되었다. 商會에서 관청에 보내는 공문은 省長에게는 ‘呈文’형식을 취하지만 省정부 財政司나 縣정부에 보내는 공문은 대등한 관계인
‘函’자를 쓰고 있다. 차관을 둘러싸고 省長이나 財政司가 빈번하게 商 人을 관청에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고 있다. 상인은 완곡한 말로 차관 을 거절하는 경우가 많다. 성정부의 상인에 대한 수취의존도가 높아질 수록 상인과 官의 관계 근접성도 높아진다. 따라서 상인의 지위도 제 고되고 있다.
상인은 장사총상회의 독려로 현급상회 모두가 성의회의원, 현의회 의원 선출에 적극 참가하고 있다. 商會출신이 성정부 財政司長, 民政 司長과 같은 고위직에 직접 취임하기도 하고 현의회의장과 縣知事대리 를 맡는 등 縣政을 장악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권력과 상인의 관계는 상인의 입장에서는 ‘적대적 상호의존관계’라 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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