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서울 근교 공업지역화에 따른 서울 도시권 편입과 갈등
4.3 경성의 공업도시화를 위한 영등포 편입과 갈등
4.3.2 경성의 공업도시화 지향과 영등포 편입
이 절에서는 한반도 제일의 대도시 경성(京城)의 공업도시 관련 언설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아래는 동아일보에 나타난 경성의 ‘공업도시(工業都市)’, ‘공 도(工都)’ 관련 기사의 연도별 숫자이다.
연도 도시명
19 21
19 22
19 23
19 24
19 25
19 26
19 27
19 28
19 29
19 30
19 31
19 32
19 33
19 34
19 35
19 36
19 37
19 38
19 39
19 40합계
京城 1 4 2 1 2 2 12
표 13 1920년 4월~1940년 8월『東亞日報』에서 나타난 경성의 ‘工業都市’, ‘工都’ 관련 기사
*1936년 9월~1937년 5월 자료 부재로 인하여 누락
위의 표에 드러나듯이 1920~1940년 사이의 경성의 공업도시 관련 언설은 1921 년에 1건이 나타난 후 6년의 공백기를 거쳐 1928년에 4건, 1929년에 2건이 나타 나고, 다시 4년의 공백기를 거친 후 1934년에 1건, 1935년에 2건, 1936년에 2건이 나타난 후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앞 절에서 살펴보았듯이 1921년의 언설은 전직 총독부 관료 사이토(齋藤)에 의한 것으로 경성이 장래 대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상공업지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인데, 막연한 장래에 대한 내용이었다고 할 수 있 다.
반면 1928년~1929년의 기사는 조금 더 눈앞에 닥친 현실에 대한 논의이다.
1928년 10월 3일자 기사에서는362) 현재 34만의 경성 인구는 최근의 증가세로 보 아 곧 50만 명을 돌파하려 하기 때문에 대경성(大京城)의 도시를 계획해야 하며, 이와 같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사람들의 직업 통계를 살펴본 결과 13년 전에 비 하여 공업과 상업 종사자의 비율이 늘어363) 이전에는 ‘유의유식(遊衣遊食)으로 세 월을 보냈던 경성도시가 일약 상공업도시(商工業都市)로 변하야진 늣김’이 있다 고 하면서 공업도시화 되어가고 있다는 현실을 논하고 있다. 한편 1928년 10월 17일자 동아일보 기사364)의 내용도 비슷한데 1914년 이래 공장 수가 6배가 되었 고, 자본금은 8배가 되는 상황으로 보아 앞으로 경성이 소비도시(消費都市)에서 생산도시(生産都市)로 변할 것이며, 따라 현재 계획하고 있는 부역(府域) 확장에 서 새로 편입될 지역 중 평평한 지대는 모두 상공업 지대로 상정하고 있다고 전 하고 있다. 1929년 1월 1일의 기사에서도365) 경성시내의 공장 수 및 생산액이 점 차 증가하고 있어 생산도시화 되어가고 있으며, 경성부에서 이러한 형세를 감안 하여 장차 공장 ‘타운’을 따로 만들고자 하고 있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1929년 7월 5일 기사366)에서는 경성은 극빈자가 많아 임금이 저렴하고 교통의 발달로 각 종 원료 집산이 편리하기 때문에 어느 공업도시에도지지 않을 발전 가능성을 충 분히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처럼 1928~1929년에 걸친 경성 공업도시 관련 언설에서는 소비도시에서 생 산도시, 혹은 상공업도시로 전환하고 있다는 내용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367) 아
362) 「有職者戶數六万突破 商工都市된大京城 過去十四年前과 比較統計 조선인부호의 몰락 을 말하는 농업자의 격감과 그대신 공업자가 사할, 상업자가 갑절이 늘어 地主農業者는 激減」,『東亞日報』, 1928.10.03.
363) 이 기사 내용에 의한 1915년 및 1928년의 경성 직업통계는 다음과 같다.
공업 상업 농업 어업 기타 합계
1915년 13% 31.3% 2% 0.1% 53% 99.4%
1927년 36% 40% 1% 23% 100%
표 14 1915년과 1928년의 직업통계
364) 경성에서는 앞흐로 경성부가 확장하야갈 것을 예상하고 평평한 디대는 전부 상공업 디대로 작정하야 대경성의 도시계획을 진행중이오 消費都市로부터 生産都市로 변하리 라는 예측으로 모든 계획도 이에 딸하 하는 중인데 (「京城에工場激增 昨今엔 九百十四 處 소비도시로부터 생산도시로 일변 십사년전과 비교하면 육배가 늘어 朝鮮人經營은 不過八分 日本職工과 比較 工賃도 三倍의 差異 일본인은 최고가 칠팔원되는데 조선인 은 최고가 삼원을 안넘어」,『東亞日報』, 1928.10.17.)
365) 「會社數에八倍激增 資金도十五億圓」,『東亞日報』, 1929.01.01.
366) 「工業都市化 하는京城」,『東亞日報』, 1928.07.05.
직 조선공업화정책(朝鮮工業化政策)이 시행되지 않은 이 시기에 이러한 언설이 나타난 이유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기사에서 드러나듯 이 경성의 공장 수, 공업종사자 인구 비율, 공산액, 공업자본의 증가라는 실제적 인 변화가 바탕이 되고 있음은 반박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에 더하여 1928년 경부터 공업도시로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공업도시(工業都市)’, ‘공도(工都)’로서 찬양되기 시작한 평양(平壤)의 존재가 경성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消費都市(소비 도시)로 인식하게끔 하였고, 한반도의 수부(首府)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하여 당시 부정적 인식이 있는 소비도시(消費都市)에서 벗어나 공업도시화(工業都市 化)를 촉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나아가 위의 언설에서도 나 타나듯이 1920년대에 일어난 경성부 부역확장 및 도시계획 논의가 좀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도시에 대한 장기적 비전에 대하여 고민하는 계기로 작용한 것 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예전에 비하여 공업도시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경성은 소비도시라는 인식도 동시에 존재한다. 1928년 10월 4일의 기사368)에서는 공업, 상업 종사 인구 비율이 증가하고 있기는 하지만 다른 선진국의 상공업도시와 그 성질상 차이가 심하고, 대개 선진국도시의 발전은 대공업의 발흥에 의하여 촉진 되기 때문에 공업인구가 다른 인구의 합을 능가하는데 반하여 경성은 공업인구 가 겨우 32%를 차지할 뿐이며 실제 육안(肉眼)으로는 일상적으로 매연을 보기 힘들다는 직관적인 관찰에 의해서도 공업도시로서는 손색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 다.
이렇게 공업도시화되고 있으나 동시에 아직 공업도시가 아니라는 내용의 언설 은 1934~1936년 사이의 기사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1934년 3월의 기사369)에서는
‘(부근접속읍면(附近接續邑面)을 합하면) 공산연액은 4500만원에 달하랴 전선공산 액(全鮮工産額)의 2할약(割弱)을 점(占)하게 되엇는바 아직 상공도시(商工都市)에 서는 유감(遺憾)의 점(点)이 다(多)하야 의연(依然) 소비도시(消費都市)의 역(域) 을 탈(脫)치 못한 현상(現狀)’이라 하고 있으며, 1934년 6월 1일의 기사370)에서는
367) 그러나 이들 언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다른 하나의 내용은 경성이 공업도시화하는 상황에서 실제 공업과 상업의 발전이 대부분 일본인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조선인이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 혹은 유직자가 늘어나면서 직업을 가지지 않으면 경성에서 생활해 나가기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조선인이 어떻게 살아남 아야 하는가 등에 대하여 우려하는 내용이다.
368) 「變態的近代都市로서의京城」,『東亞日報』, 1928.10.04.
369) 「京城及附近一帶 工業의 現在와 將來槪觀 (一)」,『東亞日報』, 1934.03.30.
‘작금 경성부근의 공장발전은 현저한 숫자를 나타내어 공업도시로서의 또는 소비 도시에서 공급도시로서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하고 있는 반면, 1936년 3월 13 일의 경성부회(京城府會) 회의 내용을 보도한 기사371)에 의하면, 당시 부의원(府 議員)인 쇼지(庄司)가 부당국에 대하여 경성을 소비도시에서 생산도시로 만들 구 체안에 대하여 질문하였고, 이에 대하여 모리(森) 내부과장은 ‘원래 경성부는 면 적의 관계로 공업도시를 만들 수 없으나 새로히 2천만 평에 달하는 지역을 얻게 되엇으니 자연히 생산도시(生産都市)로 화(化)하게 될 것’ 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경성에서는 1928년경부터 공업도시화에 대한 일반적인 관 심이 높아지고 공업도시화를 지향했으나, 대공장(大工場) 입지에 필요한 토지의 부족으로 실현이 되지 못한 채 1936년의 행정구역 확장을 맞이한 것이다.
(2) 행정구역 확장과 영등포 편입 논의
앞 절에서 살펴보았듯이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중반에 걸쳐 당시의 일 반적인 경향에 따라 경성 역시 공업도시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으나, 1920년대 중반에 이미 대공장을 지을 만한 땅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실현되 지 못하였다. 따라서 경성(京城)의 1936년 행정구역 확장을 논하는데 주로 언급 되었던 인구 급증으로 인한 과밀과 주택난(住宅難) 외에 공업지역 확보 역시 영 역 확장의 주요(主要) 동인(動因)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경성의 행정구역 확장 시도는 1930년대에 처음 나타난 것은 아니다. 1919년 일 본의 도시계획법(都市計劃法) 제정에 자극받아 1921년 5월 경성부에서는 도시계 획 준비에 착수하기 위하여 조사계(調査系)라는 새로운 기구를 설치하였고, 이 기구에서는 행정구역 확장을 우선과제로 삼아 교통, 인구 등의 조사를 진행하였 다. 1921년 당시 행정구역 확장의 주된 이유는 도심부의 포화 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사계(調査系)에 의하여 도시계획안(都市計劃案)이 1925년 말까 지 완성되었으며, 이에 대한 보고서가 1926년 4월 『경성도시계획구역설정서(京
370) 「京城商議서 工場實情調査」,『東亞日報』, 1934.06.01.
371) 庄司의원은 1. 행정기구의 개혁에 관한 방침 2. 인사쇄신에 관한 방침 3. 소비도시에 서 생산도시로 만들 구체안 4. 시구개정 급 도로계획에 대한 근본적 방안 5. 편입구역 의 시설에 대한 구체안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行政機構改革코 消費에서生産都市로 편입구역의 시설은 무엇?」,『東亞日報』, 1936.03.13.)
城都市計劃區域設定書)』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372) 이 계획에서 새로 포함하 고자 한 인접지역은 고양군(高陽郡) 용강면(龍江面), 한지면(漢之面)의 전부, 숭인 면(崇仁面), 은평면(恩平面), 연희면(延禧面)의 일부와 시흥군(始興郡) 북면(北面) 의 일부(노량진리(鷺梁津里), 본동리(本洞里), 흑석리(黑石里))으로, 아래 그림과 같다.373)
그림 88 1925년에 결정된 도시계획안의 행정구역 확장 예정도 출전 : 京城府, 1928『京城都市計劃調査書』p.7.
이 범위와 실제로 1936년에 결정된 범위를 비교하면 다음 그림과 같다.
372) 염복규, 「日帝下 京城도시계획의 구상과 시행」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9, pp.75, 107~108.
373) 아래 그림은 1926년도에 간행된 『京城都市計劃區域設定書』가 아니라 그 2년 후에 간행된 『京城都市計劃調査書』에 나온 그림이지만, 두 보고서에 게재된 경성부 행정구 역 확장 예정도가 동일하기 때문에 『京城都市計劃調査書』의 그림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