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교통 요지화로 인한 시가지 발전과 서울 주변부로서의 한계
3.3 서울 주변부로서의 입지와 한계
3.3.1 서울 주변부의 성격과 영등포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영등포는 군청소재지ㆍ지정면(指定面)으로서 독자적인 도 시로서 발전하는 한편으로 서울이라는 도시의 주변부(周邊部)이기도 하였다. 이 절에서는 서울 주변부로서의 영등포의 성격에 대하여 알아보기 위하여 먼저 근 대기 서울의 주변부에 대하여 살펴보고 그 안에서 영등포의 특징에 대하여 고찰 해보고자 한다.
주변부란 단순히 어떤 대상의 주위를 두르고 있는 영역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 에, 실제로 어떤 도시의 주변부라 하였을 때 그 경계를 정확하게 그려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논문에서는 서울의 주변부를 서울의 영향을 비교적 강하 게 받는 인접한 지역 정도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전반기에 한 하여 생각해 볼 때, 1936년의 서울 행정구역 확장 범위는 그 이전의 서울 및 주 변부의 변화를 반영한 결과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대략 상기의 범위를 이 시기 서울의 주변부 범위로 간주하여도 큰 오류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도시 주변부의 성격은 도시의 정의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다. 도시가 시가지 화가 이루어진 범위를 뜻한다면 그 주변부는 대부분 자연이 될 것이며, 도시가 성벽이나 행정구역 등의 명확하게 정의된 경계의 내부를 뜻하는 경우 그 주변부 는 시가지화가 이미 이루어진 지역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본 논문에서는 본 연구의 목적과 취지에 따라 대체로 후자의 정의에 따라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근대 도시 주변부는 그 기능에 따라 크게 도시의 반대항(反對項)으로서의 자연 혹은 비일상(非日常)을 즐기는 유락(遊樂)의 장소, 도시의 혐오시설(嫌惡施設)을 축출하는 장소, 그리고 포화 상태에 이른 도시가 개발을 통하여 그 영역을 넓혀 나가는 장소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각각의 기능이 근대기 서울에서는 어떻게 나타났는지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일제시대에는 지식인이나 돈 푼 있는 사람들 사이에 ‘야외(野外) 산보(散步)’라
지명 등장회수 동아일보 게재연도 동소문밖 2 192190),193291)
동대문밖 2 193292),193393)
청량리 10 192394),192495),192696),192797),192898),193299), 1933(2)100),1934(2)101)
청량사 2 1929102),1933103) 영도사 1 1929104)
탑골승방 2 1929105),1933106) 왕십리 1 1933107)
장충단 2 1932108),1933109) 신당리 1 1933110)
성북동 1 1933111) 자하문밖 1 1933112)
세검정 2 1933113),1935114) 경국사 1 1933115)
당인리 1 1933116)
마포 2 1928117),1933118) 서빙고 1 1933119)
표 2 1920~1940년 동아일보에 나온 근대 서울 유락지 목록
는 것이 유행하였다.88) 특히 봄ㆍ가을철에 중산층들은 도시의 번잡함을 벗어나 너도나도 야외로 향하였는데, 이 야외는 곧 자연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당시에는
‘교외(郊外)’라는 단어 역시 이러한 도시 주변부의 자연을 지칭하는데 종종 사용 되었다.
서울 시민들이 주로 자연을 즐기는 곳이 어떤 곳이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1920년~1940년 사이의 『동아일보』 기사에서 제목에 ‘교외(郊外)’89)가 들어가는 것을 검색한 후, 기사 내용에서 자연을 즐기거나 유락(遊樂)을 위한 장소로 지칭 된 지명ㆍ시설명을 뽑아 보았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88) 정선태, 「청량리 또는 ‘교외’와 ‘변두리’의 심상 공간 –한국 근대문학이 재현한 동대 문 밖과 청량리 근처-」,『서울학연구』No.36, 2009, p.85.
89) ‘교외(郊外)’라는 단어로 검색한 것은, 도시 주변부에서 자연을 즐기거나 유락을 위한 장소가 대부분 ‘교외(郊外)’ 지칭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 도시 주변부를 지칭하 는 단어 중 ‘교외(郊外)’가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도시 주 변부를 지칭하는 단어로는 ‘교외(郊外)’ 이외에 ‘근교(近郊)’, ‘주변(周邊)’, ‘외곽(外郭)’,
‘변두리’ 등이 있는데, 1920~1940년도 동아일보 기사를 이들 단어로 검색한 결과, ‘주변’
(제목+본분으로 검색했을 때 8건), ‘외곽’(동 9건), ‘변두리’(동 7건)는 거의 사용되지 않 고, ‘근교’(동 171건)가 그나마 자주 사용되지만, ‘교외(제목으로만 검색했을 때 202건)’에 비하여 그 빈도는 매우 낮다.
지명 등장회수 동아일보 게재연도 연희정 1 1933120)
뚝섬 1 1933121)
한강 2 1933122),1938123) 인천 2 1928124),1933125) 의정부 2 1934126),1935127) 의정부 망월사 2 1933128),1935129)
90) 「한식을 마지하는 교외의 봄빗, 작오일 동소문밧 목장에서(寫)」,『東亞日報』, 1921.04.06.
91) 「郊外로 花苑으로 三春行樂의 人波,『東亞日報』, 1932.04.25
92) 위의 기사.
93) 「郊外에 賞春客 沙汰, 昌慶苑에만 萬名 快晴의 日曜!,『東亞日報』, 1933.04.17
94) 「락엽진 교외의 쓸쓸한 나무(사)」,『東亞日報』, 1923.11.29
95) 「첫녀름의 교외, 비지나간뒤 청량리 수풀에서(寫)」,『東亞日報』, 1924.05.09
96) 「신추교외(寫)」,『東亞日報』, 1926.09.08
97) 「落木寒天 락엽지튼 교외(寫청량리에서)」,『東亞日報』, 1927.10.31
98) 「日로 晝夜 平均 살쩌가는 봄밋 춘분도 이틀밧게 안 남아 郊外엔 探春客激增」,『東 亞日報』, 1928.03.19
99) 「교외의 봄은 무르녹아 가는데, 작일 청량리에서(사진)」,『東亞日報』, 1932.04.12
100) 「暑休 첫날에 郊外로! 三千餘學童이 動員,『東亞日報』, 1933.07.21.(1)
「쓸쓸한 郊外의 길[寫 청량리에서]」,『東亞日報』, 1933.12.14.(2)
101) 「郊外의 寒寂 淸涼里所見」,『東亞日報』, 1934.02.20(1)
「落葉! 한닢두닢 떨어지는 郊外의 秋色[寫]」,『東亞日報』, 1934.10.07(2)
102) 「지는 꼿 앗가와서 探花客 오락가락 창경원으로! 교외로! 昨日 曜日의 京城市內外」,
『東亞日報』, 1929.04.22
103) 「오늘 내일 이틀 休日에 郊外로! 公園으로! 전차깝도 싸진 바람에 더욱 많을 봄빛찾 을 行樂의 철」,『東亞日報』, 1933.04.02
104) 「新年의 郊外[寫]」,『東亞日報』, 1929.03.04
105) 「지는 꼿 앗가와서 探花客 오락가락 창경원으로! 교외로! 昨日 曜日의 京城市內外」,
『東亞日報』, 1929.04.22
106) 「오늘 내일 이틀 休日에 郊外로! 公園으로! 전차깝도 싸진 바람에 더욱 많을 봄빛찾 을 行樂의 철」,『東亞日報』, 1933.04.02
107) 위의 기사.
108) 「지터 가는 郊外의 秋色[寫]」,『東亞日報』, 1932.09.04
109) 「端陽節의 郊外情趣, 작일 장충단에서[寫]」,『東亞日報』, 1933.05.24
110) 「가을빛은 광주리로 가득[寫 今日郊外 新堂里에서]」,『東亞日報』, 1933.08.31
111) 「暑休 첫날에 郊外로! 三千餘學童이 動員,」,『東亞日報』, 1933.07.21
112) 「오늘 내일 이틀 休日에 郊外로! 公園으로! 전차깝도 싸진 바람에 더욱 많을 봄빛찾 을 行樂의 철」,『東亞日報』, 1933.04.02
위의 결과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서울 시민이 자연을 즐기기 위하여 자주 향 하는 곳은 성내(城內) 장충단(獎忠壇), 성외(城外)의 세검정(洗劍亭), 청량리(淸凉 里) 일대, 한강변, 그리고 더 멀리는 경인선을 타고 나가야 하는 인천(仁川) 등지 였다.130) 성내 장충단은 남산자락에 조성된 수목 가득한 공원으로 서울 시민이 가장 손쉽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세검정은 북측 성벽 바로 너머에 자리한 조선 시대부터 내려오던 명승지(名勝地)로 특히 북촌(北村)에 주로 거주했던 한국인들 의 대표적인 유흥지였다. 한강변은 주로 여름에 뱃놀이나 물놀이 등을 하러 가는 유흥객(遊興客)이 많았고, 인천에는 월미도(月尾島) 유원지(遊園地)가 개발되어 해수욕장과 조탕(潮湯)을 목적으로 가는 사람이 많았다.131)
113) 「暑休 첫날에 郊外로! 三千餘學童이 動員,」,『東亞日報』, 1933.07.21
114) 「郊外의 秋 散策地割引, 철도국에서」,『東亞日報』, 1935.09.24
115) 「暑休 첫날에 郊外로! 三千餘學童이 動員,」,『東亞日報』, 1933.07.21
116) 「오늘 내일 이틀 休日에 郊外로! 公園으로! 전차깝도 싸진 바람에 더욱 많을 봄빛찾 을 行樂의 철」,『東亞日報』, 1933.04.02
117) 「첫겨울의 교외[寫]」,『東亞日報』, 1928.11.18
118) 「오늘 내일 이틀 休日에 郊外로! 公園으로! 전차깝도 싸진 바람에 더욱 많을 봄빛찾 을 行樂의 철」,『東亞日報』, 1933.04.02
119) 위의 기사.
120) 위의 기사.
121) 위의 기사.
122) 위의 기사.
123) 「五月의 日曜 ; 郊外의 발자욱은 흙내요 田園의 呼吸은 香氣롭다,『東亞日報』, 1938.05.09
124) 「日로 晝夜 平均 살쩌가는 봄밋 춘분도 이틀밧게 안 남아 郊外엔 探春客激增」,『東 亞日報』, 1928.03.19
125) 「暑休 첫날에 郊外로! 三千餘學童이 動員,『東亞日報』, 1933.07.21
126) 「郊外의 春色, 昨日 議政府에서[寫]」,『東亞日報』, 1934.02.28
127) 「郊外의 秋 散策地割引, 철도국에서」,『東亞日報』, 1935.09.24
128) 「오늘 내일 이틀 休日에 郊外로! 公園으로! 전차깝도 싸진 바람에 더욱 많을 봄빛찾 을 行樂의 철」,『東亞日報』, 1933.04.02
129) 「가을빛 가득한 교외로!,『東亞日報』, 1935.09.27
130) ‘봄빗을 차저 금잔뒤속입푸릇푸릇 솟아나오는 교외 들과 산에나 실버들가지 늘어진 강변으로 또는 봄빗에 넘슬거리는 해변으로 行樂의 '씨-슨'은 왓다. (중략) 벌서부터 봄 빗을 온몸에 실고 그래도 부족하야 혹은 昌慶苑 혹은 장춘단으로 또문 밧그로는 청량 리나 영도사를 차저가는이 좀더 멀리 인천으로 春裝한 사람들의 걸음거리가 잇대어잇 섯다’ (「日로 晝夜 平均 살쩌가는 봄밋 춘분도 이틀밧게 안 남아 郊外엔 探春客激增」,
『東亞日報』1928.03.19.)
131) 인천의 경우처럼 교외에 인공적인 유원지를 만드는 것은 근대기 서양의 도시에서 시
그림 48 세검정
「세검정」,
『東亞日報』19 27.02.06.
그림 49 한강배놀이
「이졔부터는배 작일한강에서본노리 바」,『東亞日報
』1921.05.28.
그러나 가장 손꼽히는 교외 유락지(遊樂地)는 청량리(淸凉里)였다. 청량리 지역 은 원래 구릉지였는데 중앙 구릉의 서남쪽에 면한 완만한 경사지와 그 근처의 평지에는 노송(老松)을 주로 한 밀림(密林)이 있었다.132) 이 밀림 지역에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의 홍릉(洪陵)이 들어서면서 동대문에서 이에 이르는 도로에 백양수(白楊樹) 가로수길이 형성되었으며133), 1897년에는 홍릉참배의 편을 도모한 다는 이유로 전차가 개통되었다. 고종(高宗) 승하(昇遐)에 따라 홍릉이 1919년 금 곡(金谷)으로 이장(移葬)된 후에는 이 터에 영휘원(永徽園), 숭인원(崇仁園) 등의 묘와 임업시험장(林業試驗場) 등이 자리하였는데, 이러한 시설 입지로 인하여 밀 림이 보존될 수 있었다. 즉 청량리는 원시적인 자연, 즉 숲과 개울 등이 남아 있
작되었으며, 후에 일본에서도 유행하였고, 한국에도 이러한 유원지를 건설하려는 시도가 종종 있었다. 1921년 일본에서 창립된 ‘화이트시티주식회사’는 ‘유락지의 경영 및 임대’,
‘운동경기장의 경영 및 임대’, ‘제연예 및 경기의 흥행 및 중개’, ‘일반운동경기선수의 요 청’, ‘각종공진회전람회의 경영’을 목표로 설립되었다. 이 회사에서 京濱전철과 협력하여 川崎大師근방 강변에 설치하려고 한 ‘세계제일류유람장’(실제로 지어지지는 않음)의 취
‘大都의 먼지를 뒤집어쓰고 週日의 고투를 끝낼 때, 누구라도 하루 위안의 천지를 생각하지서에서 지 않는 자 없다. 이를 泰西에 보면, 런던에 수정궁, 올림피아 있으며 뉴욕에 코니아일 랜드 있으며, 바리에 니스가 있으며, 기타 로마, 베를린, 브뤼셀 등 세계의 대도에 그 近 郊淸興의 땅이 없는 곳이 없다.’
라고 하여 제외국의 대도시에는 교외에 청유의 땅이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동경 에도 아사쿠사6구 등의 歡樂場이 있으나, 서구 리조트에 비하면 질도 양도 빈약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132) 서울특별시, 2001『서울都市計劃沿革』, p.35.
133) 京城府, 1934~1941『京城府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