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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주변부로서의 영등포의 성장의 한계

3. 교통 요지화로 인한 시가지 발전과 서울 주변부로서의 한계

3.3 서울 주변부로서의 입지와 한계

3.3.2 서울 주변부로서의 영등포의 성장의 한계

본장(本章)의 초반에서 언급하였듯이 영등포는 여러 면에서 대전(大田)과 유사 점을 가지고 있다. 1932년 3월에 발간된 『충청남도발전사(忠淸南道發展史)』에 기술되어 있는 대전의 발달과정은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겨우 30년 전에는 갈대(蘆萩)가 무성한 전혀 황량한 한촌(寒村) 에 불과했던 대전(大田)이라 옛 사실(史實)은 찾을 길이 없으나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에 이조(李朝) 세종(世宗) 때부터 공주부(公州府) 관하(管下) 회덕 군(懷德郡)의 일부락(一部落)이었는데 1910년에 한일합병(韓日合倂)이 된 4년 후 즉 1914년 3월의 부군폐합(府郡廢合)의 결과 회덕군(懷德郡)ㆍ진령군(鎭岺 郡) 및 공주군(公州郡)의 일부를 합하여 대전군(大田郡)으로 개칭되었고 당시 까지 신탄진(新灘津) 가도의 회덕읍(懷德邑)에 있었던 군청을 1910년 11월에 대전(大田)으로 이전한 것이다. 원래 대전에 일본인이 이주해 온 것은 1904년 노일전쟁(露日戰爭) 당시 경부선(京釜線)의 속성공사(速成工事) 때에 철도공사 관계자가 들어온 것이 처음이며 그때에는 오늘날 은성을 극하는 혼마치도오

147) 「유일한 휴양처 안락의 홈은 어떤곳에 세울가」,『東亞日報』1930.09.27.

리(本町通)(원동(元洞)거리), 카스가마치도오리(春日町通)(선화동(宣化洞)거리)는 잡초가 무성한 원야(原野)와 들판으로 한국인 거주자도 겨우 수십호가 있음에 불과하였고 현재 시가(時價) 백원 이상을 부르는 시가지도 그저 1, 2전으로 매 매되었을 정도이며 1904년말 일본인 거주자 수는 겨우 188인이었다. 그 후 사람도 점점 늘어가 1909년에는 2,487인이 되었으나 1909년 5월에 호남선기 성회(湖南線期成會)가 조직되어 조치원(鳥致院)과 분기점(分岐點)의 쟁탈전이 전개되었으나 지(地)의 이(利)를 득(得)한 우리 대전이 승리하여 1910년 7월부 터 호남철도공사가 착수됨에 이르자 일본인 거주자가 더욱 더 격증하여 1910 년말에는 3,891인을 헤아려 겨우 1년간에 약 1,500인의 격증을 보았으니 ‘대 전(大田)은 철도가 낳은 신시가지이다’라는 말이 있음도 당연하다 할 것이 다. 이리하여 1913년 10월 호남선이 개통되자 조선(朝鮮)의 부원(富源)으로 불 리어지는 삼남(三南) 옥야(沃野)의 현관으로서 대전의 이름은 널리 내외에 선 전되고 신(新) 내왕자(來往者) 날(日)로 달(月)로 증가하여 그 급속한 발달은 전 반도내에서도 드물게 보는 바이며 일본식(日本式) 도시로서의 특색을 점점 더 발휘하기에 이르렀다.148)

이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요 철도의 분기점으로서 철도공사 본부가 설치되 고 교통의 요지로 인식되면서 일본인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시가 지가 형성되었다는 점, 교통의 요지라는 이유로 1910년에 군청소재지가 된 점, 일본인 비율이 높은 교통 요지로서 1917년 지정면 제도가 처음 시행되었을 때 지정면으로 지정되었다는 점 등 구체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영등포와 놀라울 정 도로 많은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 지정면 시행 이후 1920년의 인구에 있어서도 대전면(大田面)이 6,104명, 영등포면(永登浦面)이 5,633명으로 거의 유사한 인구 규모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149)

148) 湖南日報社, 1932『忠淸南道發展史』, pp.45~46. (孫禎睦, 1996『日帝强占期都市化過程 硏究』, 一志社, p.541.에서 재인용.)

149) 물론 당시 면적에 있어서 영등포면은 6.79㎢, 대전면은 1.27㎢로 그 범위에는 큰 차이 가 있지만, 영등포면이 시가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전답을 광범위하게 포함한다는 사 실을 감안한다면 역 주변에 형성된 시가지의 인구에 있어서는 다른 지정면에 비하여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150) 관보(官報) 1921년 2월 19일자 (孫禎睦, 1996『日帝强占期都市化過程硏究』, 一志社,에 서 재인용.)

151) 1930년 『國勢調査報告』전국편ㆍ각도편 (孫禎睦, 1996『日帝强占期都市化過程硏究』,

연도 도시명

1920

150)

1925

151)

1930

152)

1933

153)

1934

154)

1935

155)

1936

156)

1937

157)

1938

158)

1940

159)

1941

160)

開城161)36,544 46,337 49,520 52,526 53,614 54,457 55,482 56,595 68,500 72,062 78,828 咸興162)18,265 31,679 43,851 42,198 44,612 52,634 54,350 61,430 70,000 75,320 78,433 全州 15,862 22,683 38,595 39,210 39,877 40,593 40,936 42,520 44,800 47,230 48,164 海州163)14,793 19,287 23,820 23,876 25,191 29,688 45,674 48,649 - 62,651 65,988

兼二浦 13,936 10,078 12,663 12,405 14,228 17,235 18,451 20,051 - 26,324 - 光州 12,667 23,734 33,023 35,148 38,008 52,674 56,444 57,461 64,300 64,520 67,230 水原 9,817 11,699 13,182 12,805 13,058 13,328 24,153 25,252 - 28,872 - 浦項 6,588 10,826 11,791 12,685 13,144 14,338 14,646 15,250 - 28,349 - 城津 6,512 10,196 13,823 14,181 16,913 19,349 22,064 23,496 - 62,209 - 大田 6,104 8,614 21,696 34,079 34,532 36,378 37,151 40,001 46,400 45,541 47,482 永登浦

164) 5,633 6,069 8,420 11,951 13,345 15,754 통합ㆍ

소멸 - - - -

표 3 주요 지정면 도시의 인구통계 (1920-1941)

*굵은 글씨는 부 승격 이후

一志社에서 재인용.)

152) 1930년 『國勢調査報告』전국편ㆍ각도편 (孫禎睦, 1996『日帝强占期都市化過程硏究』, 一志社에서 재인용.)

153) 1933년 말 인구 (朝鮮總督府, 1935『朝鮮の人口統計』)

154) 1934년 말 인구 (朝鮮總督府, 1936『朝鮮の人口統計』)

155) 1935년 말 인구 (朝鮮總督府, 1937『朝鮮の人口統計』)

156) 1936년 말 인구 (朝鮮總督府, 1938『朝鮮の人口統計』), 나진부(羅津府) 추가.

157) 1937년 말 인구 (朝鮮總督府, 1939『朝鮮の人口統計』)

158) 1938년 10월 현재 추계인구 (朝鮮總督府, 1940『朝鮮人口動態統計』)

159) 1941년 4월 18일자 總督府告示 제555호 (官報 1941년 4월 18일자 號外) (孫禎睦, 1996

『日帝强占期都市化過程硏究』, 一志社, p.208에서 재인용.)

160) 1941년 10월 현재 추계인구 (朝鮮總督府, 1943『朝鮮人口動態統計』) 진주부 추가.

161) 1930년 10월 1일 부(府)로 승격.

162) 1930년 10월 1일 부(府)로 승격.

163) 1938년 부(府)로 승격.

164) 1936년 4월 1일 경성부 편입 후 영등포구(永登浦區)의 인구수는 다음과 같다.

1942년 말 111,767명 / 1943년 말 116,886명 / 1944년 말 109,388명 / 1945년 6월말 111,102명 (서울특별시 시세일람 1948년도판 p.40, 손정목, 앞의 책 p.74에서 재인용.)

그림 56 경성부 주변의 면

그러나 1925년에 이르면 대전면의 인구는 8,614명으로 2,500명 가까이 증가한 데 비하여 영등포의 경우 6,069명으로 400여명의 증가에 그쳤다. 1930년에 이르 면 그 차이는 더 극명해져 대전면은 21,696명으로 거의 2.5배의 인구증가를 보인 데 반하여 영등포면의 인구는 8.420명에 그치고 있다. 이후 대전은 1931년 1월의 도청 이전 결정, 1932년 10월 의 충남도청(忠南道廳) 이전 등을 거쳐 인구 증가 를 거듭, 부(府)로 승격한 1935년에는 약 3만6천명에 달하게 된다. 영등포도 1930 년대에 들어서면 대규모 공장입지 등에 힘입어 인구 증가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서울 편입을 앞둔 1935년에는 1만5천명을 돌파하게 되지만, 1920년에 거의 비슷 한 인구 규모를 형성하고 있던 대전과의 인구 차는 2배 이상으로 벌어졌다.

물론 1930년대 이후 대전의 도시 발달은 총독부를 대표하는 일본인들의 충청 남도(忠淸南道) 내 한국인 중심 전통도시인 공주(公州)에 대한 세력 견제 등 정 치적 이유 등이 작용하기 때문에 영등포와의 단순 비교는 어렵겠지만, 1930년대 이전의 인구 추이에서도 큰 격차가 발생하는 것은 두 도시의 입지에 기인(起因) 하는 바가 큰 것으로 여겨진다. 1920년대 이후 농촌으로부터의 인구 이동에 의한 도시 인구 증가가 전국적으로 이루어지는데, 대전은 주변 도시인 공주(公州), 청 주(淸州) 등과 상당한 거리가 있어 주변 농촌지역의 인구를 끌어들일 수 있었던 데 반하여, 영등포는 바로 근처에 대

도시 경성(京城)이 있어 주변 농촌인 구가 인구흡인요인이 더 강한 경성으 로 직접 향하였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차이는 대도시 주변부라는 입지를 가진 영등포의 독 자적인 도시로서의 발전 한계를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서울의 다른 주변부 와의 비교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아래 는 1920년대 서울 주변에 자리한 면 (面)들의 인구 변화를 정리한 것이다.

연도 1920 1925 1930 인구증가율(%)

동리

한지면

신당리 536 4,933 14,593 2,622.6

마장리 592 903 1,811 205.9

이태원리 1,716 3,093 4,007 133.5

상왕십리 3,561 4,991 5,513 54.8

하왕십리 3,770 4,999 5,997 59.1

상기 리 합계 6,405 13,920 25,924 304.7

면 전체 19,814 32,527 49,299 148.8

숭인면

용두리 452 1,517 1,718 280.1

신설리 1,177 2,563 3,430 191.4

성북리 900 1,120 1,666 85.1

돈암리 1,412 1,830 2,462 74.4

상기 리 합계 3941 7,030 9,276 135.4

면 전체 9,046 23,371 30,895 241.5

용강면

아현리 2,585 5,862 10,453 304.4

공덕리 3,415 6,784 10,888 218.8

신공덕리 1,166 2,974 4,381 275.7

상기 리 합계 7,166 15,620 25,722 258.9

면 전체 22,270 32,723 45,040 102.2

연희면

북아현리 1,318 2,582 4,034 206.1

대현리 592 854 1,299 119.4

상기 리 합계 1,910 3,436 5,333 179.2

면 전체 7,091 12,079 14,806 108.8

은평면

홍제내리 464 864 1,089 134.7

홍제외리 626 728 822 31.3

상기 리 합계 1,090 1592 1,911 75.3

면 전체 3,304 8,334 9,226 179.2

영등포면 면 전체 5,633 6,069 8,420 49.5

67,158 115,103 157,686 134.8

표 4 경성부역 주변 마을 인구추이 (1920~30)

*출전: 京城府, 1932『京城府市計劃資料調査書』, pp.7~11 (孫禎睦, 1996『日帝强占期都市化過程硏究』, 一志社, p.145에서 재인용.)

표를 살펴보면 1920년에서 1930년 사이에 경성부를 둘러싸는 한지면(漢芝面), 숭인면(崇仁面), 용강면(龍江面), 연희면(延禧面), 은평면(恩平面)의 인구는 모두 100% 이상의 인구 증가율, 즉 2배 이상씩의 인구 증가를 보인데 비하여 영등포 면은 고작 50% 정도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동리 별로 살펴보면, 한지면 신당 리의 경우는 원래 거주 인구가 적었던 탓도 있지만 무려 2,600%에 달하는 인구 증가율을 보이고 있으며, 그 외에 마장리, 용두리, 아현리, 공덕리, 신공덕리, 북아 현리 등의 지역도 200~300%에 달하는 인구증가율을 기록하고 있다. 인구증가율 이 비교적 낮은 동리로는 상왕십리(54.8%), 하왕십리(59.1%), 홍제외리(31.3%) 등 이 있는데, 이 중 상왕십리와 하왕십리는 1920년에 이미 3천명이 넘는 인구를 보 유하고 있던 점을 감안하면 이미 시가지화가 상당히 진행되어 추가적인 시가지 화의 여지가 적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절대 인구수에 대해서는 면마다 면적이 달라 정확한 비교는 어렵지만, 여의도 를 제외하면 영등포면과 거의 면적이 비슷한 용강면의 경우 1920년 시점에서 영 등포 인구의 4배에 달하는 2만2천여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으며, 1930년에는 영 등포 인구의 5배가 넘는 4만 5천여 명의 인구를 기록하고 있다. 그 외에 한지면, 숭인면, 연희면, 은평면 모두 영등포보다 항시적으로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인구 뿐 아니라 시가지화의 면적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아래는 1919년 및 1936년 현재 서울 및 주변부 시가지화 정도를 당시의 지도자 료를 바탕으로 표시한 것이다. 1919년은 『조선오만분일지형도(朝鮮五万分一地形 圖)』를, 1936년은 『지번구획입대경성정도(地番區劃入大京城精圖)』를 참고하였 다.

1919년 현재의 시가지화 양상을 나타낸 다음 지도를 살펴보면 시가지화는 주 로 1914년의 경성부 경계 안에서 현저하게 나타나지만, 마포를 중심으로 한 서부 한강 연안과 동대문 밖 왕십리 주변, 뚝섬 등에도 상당히 큰 시가지가 조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지역은 공통적으로 조선시대 교통의 요지에 입지하여 비교적 큰 시가지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곳으로, 시가지 밀집 정도가 영등포 지역의 시가지에 비해서 상당히 높을 뿐 아니라 시가지화된 지역의 범위도 넓은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