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茶의 종류 및 산지, 製茶法과 茶具
고려왕조(918-1395)가 교류한 중국의 역대왕조는 五代(907-960), 거란(契 丹, 907-1125), 北宋(960-1126), 金나라(1115-1234), 南宋(1127-1279), 元 나라(1271-1367), 明나라(1368-1644) 등이다. 이 시기에는 연고차, 草茶, 말 차, 납차(蠟茶)의 點茶法을 비롯하여 茗茶의 茗煎法, 芽茶의 촬포법(撮泡法)과 포다법(泡茶法) 등이 성행하였다. 고려시대의 茶를 마실거리로서 구분한다면 차유(茶乳)와 차탕(茶湯)으로 나눌 수 있고, 모양에 따라서는 단차(團茶, 덩이 차 ; 떡차餠茶, 乳團茶), 葉茶, 末茶로 구분할 수 있으며, 발효정도에 따라 발
효차(뜸차)와 비발효차로 구분할 수도 있다.27) 茶乳란 고급 덩이차(乳團茶)나 잎차를 곱게 갈아 체로 쳐서 만든 가루차(末茶)를 끓인 물에 휘젓거나 혹은 차사발에 점다하여 거품을 일으켜 마시는 탁한 차를 말한다. 차유로 마실 차 는 이른 봄에 딴 섬유질이 아주 적은 차싹이라야 찻가루가 고와 가라앉지 않 으며 흰색의 거품이 잘 생긴다. 가루내어 쓰는 차유로 마시는 차는 덩이차건 잎차건 아주 고급품이어서 궁중에서 쓰거나 국제간의 예물로 주고 받는 어차 (御茶)가 대부분이다. 차탕은 거친 떡차나 잎차를 끓여 걸러낸 맑은 찻물을 말 한다. 고려 예종 12년(1117), 왕은 禪과 道를 즐기는 李資玄을 어렵게 만나 앉기를 권하고 ‘차탕’을 내어 이야기했으며, 1198년 李寅甫가 경주에서 山川 의 제사를 지내고 부석사에 들렀을 때 중이 ‘차탕’을 대접한 기록을 볼 수 있 다. 덩이차(團茶)는 곱게 가루내어 末茶로 만들어 차유로 마시는 유단차와 그 냥 끓여 맑은 차탕으로 마시는 떡차(餠茶)로 나눌 수 있다. 유단차는 주로 왕 이 마시는 ‘御茶’나 국제간의 예물 또는 하사품으로 쓰인 고급품이었으며 고려 초엽의 토산차인 뇌원차(腦原茶)도 유단차에 속한다. 덩이차를 말리거나 보관 하기 좋도록 가운데 구멍을 뚫은 것을 돈차 혹은 錢茶라고 부른다. 떡차는 찻 잎이 자라길 기다렸다가 따서 납작한 떡모양으로만든 조금 거친 차인데, 대강 부수거나 그냥 그대로 끓는 물에 넣어 끓여 맑은 차탕으로 마셨다. 떡차는 운 반(여행시)과 보관에 편리하며 대개 발효된 차였을 것이다. 葉茶는 12세기 무 렵 ‘雀舌’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紫筍茶 역시 잎차에 속한다. 末茶는 유단 차나 고급잎차를 맷돌에 갈아 고운 체에 쳐서 만든 아주 미세한 찻가루이며, 茶乳로 마신다. 고려인들이 마신 茶의 구체적인 명칭을 살펴 보면, 腦原茶, 龍 團勝雪茶, 孺茶, 雀舌茶, 紫筍茶, 茶, 香茶, 雙角龍茶大茶, 曾坑茶, 靈芽茶, 露芽茶 등이 있다. 특히 용단승설차는 조선시대까지 계승되었고, 대원군 (1819-1898)에 의하여 충남 덕산에 있던 옛탑에서 일부가 발견되기도 하였 다.
茶의 산지로는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차를 만들어서 나라에 바치던 茶所가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 에 옛 다소라고 기록된 고려의 다소를 살펴보면, 전 북의 용산과 재역, 전남의 와촌, 전남의 요량 수태칠백유 정산 가을평 운고 정화 창거 향여 웅점 가좌 거개 안칙곡이며, 남평현 다소, 화계 다소, 평교 다소가 있
어 모두 19개 지역이 넘는다.
차를 끓이는 법에 관해서는 시문에 전하는 단편적인 자료와 茶具를 중심으 로 살펴볼때 點茶法과 烹茶法으로 추정할 수 있다.
탈거리에 불씨를 붙여 불을 일으키는 것을 點火한다고 하듯이, 점다란, 찻가 루가 끓인 물와 어울려 휘저어져서 차거품을 일으켜 茶乳로 만드는 것을 말한 다. 물을 먼저 끓인 후 찻가루를 떨어뜨려 휘저어 끓여 마시는 방법과, 점다할 그릇에 찻가루를 먼저 넣고 끓인 물을 넣어 휘저어 거품내어 마시는 방법이 있다. 烹茶란 차를 맑은 차탕으로 마시기 위해 끓이는 것을 말한다. 또한 오늘 날과 같이 차에 끓인 물을 부어 우려내어 마시기도 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고려시대 茶具의 특징은 최고의 품질과 멋을 지녔고 귀족적이며 몹시 아름 다웠다. 중국의 모방도 없지 않았으나 다구의 생김새나 만드는 기법이 매우 독창적이었다. 1123년에 송도를 다녀간 徐兢이 지은 高麗圖經 에는
고려인들은 차마시기를 무척 즐기어 더욱 다구를 만드는데, 금꽃문양이 있는 검은 잔(金花烏盞), 청자로 된 작은 잔(翡色小 ), 은화로(銀爐), 세발 차솥(湯鼎)등이다.28)
오늘날 남아 전해진 고려 다구의 대부분은 청자이며 백자가 드물게 있고 청 동으로 된 것과 쇠, 돌로 된 것 등도 전해진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궁실에서 쓰는 야외용 다구도 발달하였다. 왕이나 태자의 행차시나 태후의 책봉시 茶軍 士가 운반하는 화로나 絞床과 물주전자등이 들고 다니기에 좋도록 되어 있었 고, 솥 등은 두 개의 고리에 나무를 꿰어 짊어지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이때는 잘 깨어지지 않는 은그릇도 많이 사용한 것 같다. 당시의 茶具는 사용목적에 따라 神明이나 부처께 獻茶用, 君臣간 進茶用, 일상 飮茶用으로 구분할 수 있 으며, 다구의 종류로는 찻그릇, 찻병, 탕관, 차맷돌, 차술 등이 있다. 찻그릇은 차를 담아 마시는 찻잔 종류이며, 용도에 따라 進茶用과 日常用, 그리고 獻茶
用으로 나뉜다. 進茶用의 경우 왕에게 차를 올릴 때, 茶房參上員이 차를 들고 와서 내시가 뚜껑을 벗기고 집례가 어전에 올라가서 절하고 차들기를 권하고 내려왔으며 신하들에게도 進茶29)하였는데, 차를 잔에 들고 담아 가므로 차가 쏟아지지 않게 만든 모양의 잔과 잔받침을 사용했을 것이며, 잔뚜껑은 차의 향기가 달아나지 않고 식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불교 의례때 부처 에게 올리는 찻잔을 茶器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청자로 만든 것과 청동으로 만든 것이 있다. 들고갈 때 차의 향기가 달아나지 않고 식지 않게 뚜껑이 있 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다. 들고 가서 뚜껑을 벗길 때 뚜껑 안쪽에 수증기가 서려 있으므로 뚜껑을 뒤집어 놓아 수평이 되도록 손잡이가 만들어져 있다.
굽이 낮은 편은 아니지만, 굽이 아주 높은 것은 天神, 地神, 龍王神들에게 올 리던 獻茶器가 아닌가 짐작된다.
(2) 고려 茶文化의 전개양상
고려시대는 불교문화의 융성과 더불어 우리나라 茶文化의 전성기로 왕과 귀 족 관리 백성들 모두가 일상 생활에서 茶를 즐겨 마셨다. 고려사회에 茶文化 가 성행되었다는 사실은 仁宗(1122 - 1146)때 사신으로 왔던 徐兢이 지은 高麗圖經 의 行狀圖에 보는 바와 같이 茶가 성행되었으며 세계에 자랑하는 靑 磁도 茶文化 발달의 所産이라 볼 수 있다.
茶는 귀중한 예물로써 왕이 신하에게 茶를 下賜하였으며 宮中의 여러 行事 를 준비하는 茶房이란 관청을 두었고 일반 백성들이 茶를 사서 마실 수 있는 茶店을 설치하여 茶를 마시는 풍속이 사회전반에 성행하였다. 또 특히 나라의 큰 행사인 팔관회(八關會)와 연등회(煙燈會)때 土神과 부처님께 獻茶하고 宮中 의 각종 의식에도 茶禮가 베풀어졌다.
또 귀족과 文人사회에도 獻茶(헌다) 풍속이 매우 성행하여 茗席(찻자리)을 마련하여 여러 사람이 모여 茶를 마시며 담소하기도 하였다. 茶를 마시는 모 임 혹은 찻자리를 흔히 茶筵 茶席 茗筵 茗席 이라 하였고, 茶를 끓여 마시기 위해 茶軒 이나 茶屋 을 따로 지었다. 그리고 특정 다연에 참석함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였으며, 때로는 초대장을 보내어 예를 갖추기도 하여30) 미
리 약속하여 찻자리를 마련하였다. 또한 손님의 자격이나 앉는 자리를 정하였 으며, 茶禮도 규범과 절도가 있었다.
특히 寺院의 僧房(승방)에서 茶文化가 발달하여 茶禪一致의 경지에 이르렀 으며 수행시 茶로서 잠을 쫓기도 하였다. 그리고, 승려들은 수행할 때뿐만 아 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차를 즐겨 마셨다. 또한 사원에서는 차 끓이기를 서로 겨루는 명선(茗禪)이라는 풍속이 행해졌다. 이렇듯 사원에서는 차의 쓰임새가 많아지자 사원주변에는 차를 전공하기 위한 다촌(茶村)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차가 고려 궁중의식의 중요한 음식이 되면서 국가에 의식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진다의식(進茶儀式)이 따랐다. 進茶는 술과 과일을 임금님께 올리기 전 에 임금이 먼저 차를 청하면 신하가 차를 올리는 것을 말하며 진다의식은 이 때 행하는 제반의식을 말한다.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는 연등회와 팔관회가 궁중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였는데, 이때에도 진다의식이 행해졌다. 왕이 신이 나 부처에게 재(齋)를 올릴 때도 진다의식이 행해졌다. 또한 왕이 죄인에게 참 형을 결정하기 전에 신하들과 차를 마시는 의식을 행함으로써 보다 공정하고 신중한 결정을 내리도록 노력했으며, 정월 초하룻날 대궐에서 조회를 할 때의 의식인 원회의(元會儀)와 궁중의 연회 때도 신하가 왕에게 차를 올리고 신하 들은 황이 하사한 차를 마셨다.
관청에서도 차 마시는 풍습이 있어 사헌부(司憲府)에서는 날마다 한 번씩 차를 마시는 다시(茶時)를 가져 사안의 공정한 판결을 기했다. 차는 왕이 신하 와 백성에게 하사하는 귀중한 예물이어서 신하가 죽었을 때 왕이 차를 하사했 다. 또한 국제 외교상 중요한 예물로도 사용하여 송나라에서 고려에 보낸 예 물 중에 용봉차(龍鳳茶)가 들어 있었고, 고려가 원나라에 예물을 보낼 때도 예 물 속에 향차 등을 넣어 보냈다. 나라에서 사신을 맞을 때도 중국 왕의 조칙 을 가져온 사신에게는 진다의식을 갖추었고, 조칙을 가져오지 않은 사신에게 는 차를 베풀고 간단한 인사를 한 후 객관으로 안내했다.
이와 같이 궁중에서 차의 쓰임새가 많아지고 빈번해지자 차에 관한 일을 보는 관청이 생겼는데, 이를 다방(茶房)이라고 한다. 다방에는 의약과 치료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태의감이 소속되어 있어 그 직무의 폭이 상당히 넓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궁중 밖에서 왕족에게 차를 올리거나 준비하는 일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