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茶의 종류 및 산지, 製茶法과 茶具
조선 왕조(1392-1910)가 교류한 중국의 역대 왕조는 明나라(1368-1644) 과 淸나라(1644-1911)이였으며, 이 시기에는 연고차, 蒸靑茶, 煮沸茶, 炒靑 茶, 烘靑茶, 靑茶 등의 녹차, 황차, 흑차, 청차, 백차, 홍차, 꽃차와 같은 일 곱 가지의 차가 유행되었다.
조선 시대에도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茶湯과 茶乳를 마셨다. 특히 차탕은 조선시대 음다생활의 주류를 이루었다. 모양과 製茶法에 따른 茶의 종류는 잎 차, 떡차, 말차로 크게 구분하고 잎차는 날잎을 시들리며 발효시켜 그대로 말 린 일쇄차(日 茶), 발효후 찌거나 덖어 말린 것, 살짝 덖거나 쪄서 도중 발효 시킨 것 등 세 가지 발효차가 있으며, 또한 전연 발효시키지 않은 녹차가 있 다. 여기에 속하는 조선시대의 茶로는 天地茶, 竹露茶, 寶林茶, 萬德茶, 白雲玉 板茶, 金陵月山茶 등이 있다. 떡차는 찻잎을 찌고 찧어서 둥글납작한 덩어리로 만든 차이다. 운반과 보관이 쉽고 끓여 마시기에 편리하여, 고려시대나 조선시 대에 즐겨 飮用되었다. 떡차는 團茶 또는 차떡(茶餠)이라고도 하며, 그냥 ‘차’
라고 불리기도 했다. 동그란 떡 모양 가운데에 구멍을 뚫었으므로 돈차(錢茶), 꼬챙이(串)에 꿰어 말리므로 곶차(串茶), 또는 끈(綱)에 꿰었으므로 벼리차(綱 茶)라고도 불렀다. 末茶는 차를 곱게 가루낸 것으로 고려시대에는 성행하였으 나, 조선시대에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떡차의 종류로는 臘前茶, 小 龍團, 餠茶 등이 있다.
차의 생산에 대해서는 조선초의 세종실록지리지 에 보면, 차가 土貢物인 곳이 32개 군과 현이고 토산품이 차인 곳이 3군데로 기록되어 있다. 이 지역 은 거의 오늘날에도 차가 많이 생산되는 전남, 경남, 전북 지방으로 차가 나는 지역은 거의 토공으로 바쳤다. 세종실록지리지 보다 약 50년 뒤에 간행된 신증 동국여지승람 에 기록된 차산지는 39개 군현으로 지리지 보다 11군데가 추가되고 7군데가 삭제되었다. 또한 개인이 집 주변에 차나무를 심거나 차밭 을 가꾼 기록도 흔히 볼 수 있다. 매월달 김시습의 경우, 차밭에 울타리를 엮 어 차나무를 보호하고 일광도 차단하여 고급차를 생산하는 해가림재배를 하였
다.
末茶는 고려와 같이 點茶法으로 달여마셨고, 잎차는 泡茶法으로 우려 마셨 다.
末茶用의 茶具로는 點茶器와 點茶鍾 등이 있고, 잎차용 茶具는 금, 은, 도자 기제인 茶罐, 玉茶鍾, 茶亭, 銀茶鍾, 茶甁, 茶匙, 茶鍾盤, 茶甫兒, 茶椀, 표주박, 풍로 등이며 이들 다구들은 조정이나 사대부, 승려, 서민 등 여러 계층에서 다 양하게 사용되었다.33) 조선시대에는 말차가 쇠퇴하고 잎차와 떡차를 끓인 차 탕을 즐겨 마시게 됨에 따라, 다구도 고려처럼 귀족적이거나 화려하지 않고, 소담한 멋과 단아한 기품을 지니게 된다. 고려의 청자는 퇴조한 반면, 조선 초 부터 16세기 중엽까지 분청자가 등장하는데 이는 청자의 바탕흙에 흰 흙(白 土)으로 분을 바른 것이다. 백자는 태토가 흰색으로 신라말부터 고려시대에도 간간이 생산되다가 15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발달되어 궁중용이거나 고급 그릇으로 쓰였다.
(2) 朝鮮 茶文化의 전개양상
조선 초기의 다도는 고려에서 외래 사신을 위한 다례의식을 그대로 답습하 였고 이는 조선 후기까지 유지되었다. 고려시대에는 飮茶의 풍속이 일반화되 었고 조선초기까지 飮茶風이 널리 보급되었기 때문에 민간에도 음다풍은 자연 스럽게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이 창건되고 李成桂를 중심으로 규합하 였던 신진 사대부들은 抑佛崇儒정책을 시행함으로써 불교와 충돌하게 되었고 이에 불교적 색채가 퇴화되면서 모든 의식이 유교적 성향으로 변모되어갔 다.34)
조선시대의 茶관련 제도와 시설은 궁중에 茶房, 茶色(일종의 茶母), 惠民局 의 茶母 등이 있고, 民間에는 男茶母, 女茶母와 茶市, 茶店이 있었다.
茶房은 고려와 마찬가지로 궁궐이나 태평관(사신의 숙소)에서 사신에게 다
례를 베푸는 일과 조정과 왕실의 다례를 주관하는 일을 하였다. 태종 15년에 는 임금이 무술을 연마할 때 다방의 관리는 어가를 수행하여 하루에 세 번 차 를 올리고 국가행사 때도 하루에 한 번씩 차를 올리도록 하였다. 다방에서는 왕실의 채소류와 반찬을 관리하고 쌀과 피륙의 출납도 담당하였으며, 때로는 태조와 왕후의 위패를 모시는 魂殿을 지키는 일도 하였다. 세종 29년에 다방 을 사준원(司尊院:국가적 손님의 접대의례를 맡음)으로 고치고 외국사신에게 다례를 행하는 일에 중점을 두었다. 또한 조선시대의 관청에는 茶時, 즉 차 마 시는 시간이 있었다. 태종 5년에는 서울에 있는 관청 모두 다시를 행하기도 했고, 16세기에는 惠民署에서도 다시를 행하였다.35) 특히, 사헌부의 茶時는 고종 때까지 계속되며 매우 중요시 되었다. 차를 마시는 의례를 행함으로써 치우침이 없고 엄정하며 신중한 판단을 얻고자 하는 의도에서 茶時가 행해졌 을 것으로 추정된다. 茶母란 각 관청에서 관리들의 차심부름을 하기 위해 서 민계층에서 선발된 여성들이다. 태종 6년(1406)에 惠民局에서 醫女 가운데 성 적이 불량한 생도는 惠民局 茶母일을 보게 하다가 성적등급이 오르면 다시 女 醫生徒, 즉 醫女의 임무로 복귀시켰다. 국가의 제사나 諡號에 관한 일을 보던 봉상시(奉常寺)에도 茶母가 한 명 있었으며, 돗자리, 종이, 油紙 따위를 관리 하는 관청인 長興庫에도 茶母가 있었다36). 조선 중엽에는 茶母가 여자 형사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당시 茶母의 선발기준은 키가 5척이 되어야 하고 막걸리 세 사발을 단숨에 마셔야 하며, 쌀 다섯 말을 번쩍 들 정도로 기운이 센 남성 적인 여자를 기용했다. 포도청, 형조, 의금부 등에 있으면서 남의 집 안뜰에 들어갈 수 있어 그 집 종이나 식모 등을 유인하여 정탐하고 수색했다. 치마 속에는 2척 쯤 되는 쇠도리깨와 포승을 차고 다니다가 죄가 분명한 사람의 집 에 쇠도리깨로 들창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죄인을 포박해 올 수 있었다.37) 18 세기에는 茶母가 관리의 차시중 뿐만 아니라 수청을 들기도 했다. 말을 갈아 타는 驛에도 茶母가 있었다고 한다.
조정과 왕실에서 행해지던 茶禮에는 중국과 일본에 대한 事大交隣을 위한 茶禮와 會講茶禮 등이 있었다. 會講이란 한 달에 두 세 차례씩 왕세자가 스승
과 侍講院의 정1품 관리 및 賓客들을 모아놓고 經書와 史記를 복습하며 講論 하던 일인데, 이 때 다례를 행하고 술과 과일을 베풀었다.38) 중국 칙사를 위 한 사신맞이 다례는 太平館, 思政殿, 仁政殿 혹은 明倫堂 등에서 왕이나 왕자 가 중국 사신에게 ‘다례’라는 명칭으로 차를 대접하는 의례를 행하였다. 또한 중국 사신을 위한 遠接茶禮는 問禮官, 差備官을 평안북도 의주의 義順館까지 보내어 茶啖床을 베풀었다. 이들에게는 의주, 정주, 안주, 평양, 황주, 개성, 홍 제원 등을 거치면서 茶禮를 베풀었다. 일본 사신을 위한 다례는 接慰差備官이 부산에 내려가 베푸는 下船茶禮는 書契를 바칠 때 거행되며, 下船宴은 進獻物 을 바칠 때, 돌아갈 때는 上船宴을 베풀어졌다. 궁에 도착하면 인정전, 便殿 접견 등에서 사신을 위한 다례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39)
또한 조선 시대의 선비들은 여럿이 모여 화합하고 결속하는 의미로 차를 모 시기도 하였다. 1616년에는 大北黨과 小北黨이 한때 한 자리에 모여 화해를 도모했는데, 매화향기 속에서 ‘仙茶’를 마시며 모임의 의의를 새긴 것을 볼 수 있다.40) 문인들은 契會를 조직하여 차를 마시며 시도 짓고 결속과 친목을 돈 독히 하였다. 계회란 공동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친목을 도모하기 위 해 술 마시고 차도 마시며 시를 읊고 풍류를 즐기는 모임이다. 茶山의 茶信契 가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 다산이 강진에서 유배를 하던 기간 동안, 다 산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18명의 제자가 있었다. 다산초당으로 옮겨 살 때부 터 떠날 때까지 11년 동안 수학을 한 사람들인데, 1818년 8월 드디어 스승이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가게 되자, 18명의 제자들은 서로 잊는다면 금수(禽 獸)와 같은 것이라며 전문 8조로 된 다신계(茶信契)를 만들어 신의를 다짐한 다. 그들은 헤어질 때를 대비해 2년 전부터 1냥씩 내어 모은 35냥을 스승의 행장속에 넣어드리고, 스승은 서촌의 발 몇 구역을 그들이 신의를 삼을 '다신 계' 자본이 되게 한다. 만든 계의 규약에는 전토(田土)의 크기와 가격, 관리 방 법을 꼼꼼히 기록하고 헤어진 후에 할 일도 조목조목 기록하였다.
조선시대 여성의 茶 문화는 앞서 언급하였던 茶母이외에도, 여성이 의식다 례를 집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주자가례 나 사례편람 에는 주부가 點茶하여
찻병을 들어 神位 앞에 차를 따르고, 혹은 맏며느리나 맏딸이 차를 따른다는 내용이 있어 일부 실행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누에를 칠 때에는 여성이 蠶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종교적인 茶禮중 불가의 다례는 智還師의 梵音集 과 白坡師의 龜鑑集 등 을 참조로 하여 거행하였다. 한편 국가의 통치이념을 유지하였던 유가는 朱熹 의 朱文公家禮 에 의거한 冠婚喪祭의 茶禮를 적극적으로 권장, 실시하였다.
이밖에 도가에서는 다례를 한양의 昭格署에서 도교의 격식에 따른 茶禮를 거 행하였다. 조선 시대에도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神에게 제사지낼 때는 ‘茶湯’
을 주로 사용했다. 조선시대 불가의 茶禮는 중국 것을 모방하지 않고 독특한 예법이 있었다. 조선 건국 초기부터 출가한 승려들에게 유교적 喪禮를 따르도 록 강요하였고 불가의 제사다례도 다분히 유교적이었다. 불가의 다례는 부처, 나한, 삼보 등에 차를 올릴 때와 돌아가신 스님의 제사를 지낼 때 행해졌으며 탑이나 부도에도 다례를 올렸다. 다례가 있을 때는 茶偈를 읊었다. 조선조에 들어와 유학이 국가의 통치이념이 되고 점차 유교적인 윤리관념이 일반화되게 되면서, 16세기에는 주자가례 가 일반서민에게도 절대적인 기준으로 정착되 었다. 가례란 집안에 일이 있을 때 거기에 준해서 행하는 예법으로 대개 관혼 상제의 예를 말한다. 17세기에는 가례언해 가례집람 등 이와 관련된 서적 도 많이 나왔다. 朱子家禮 에도 祭祠(제사), 婚禮(혼례), 祠堂(사당)의 祭禮 등에 茶를 올리는 獻茶의 법도가 있어 양반 관료 사회에 飮茶 풍속이 성행되 었다. 조선중기 倭亂, 胡亂 등 양란이후 경제적 사회적 혼란으로 茶생산이 감 소되어 茶文化의 쇠퇴를 가져왔다. 그러나 寺院의 僧房에서 飮茶의 생활과 造 茶의 기술이 유지 발전되어 왔다. 조선 말기에 茶山丁若鏞, 秋史金正喜 草衣大 禪師가 쇠퇴한 茶文化를 다시 일으키고 특히 草衣禪師는 海南에 一枝庵을 중 건하고 40년 동안 茶의 모든 것을 연구하고 韓國茶文化를 中興시켰다. 대체로 조선왕조가 신라와 고려시대에 비하여 茶文化가 쇠퇴한 원인은 조선초기 불교 의 탄압과 寺院에 重稅를 부과하여 불교가 힘을 잃은 점과 일반가정의 祭禮에 서도 淸酒를 많이 사용하였으며 일상생활에 담배와 술 같은 기호품의 성행과 韓國의 좋은 生水와 식탁에서 숭늉을 많이 마시는 등 한국인의 생활습관 등에 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고 또 조선후기 地方官吏 茶貢에 대한 지나친 수탈도 茶文化 쇠퇴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