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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까지의 茶文化

(1) 한국 茶(文化)의 기원과 전래

우리나라에서의 차의 기원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본래 차나무가 자생했다는 자생설(自生說)과 가락국 김수로왕 의 왕비인 허황옥이 시집올 때 갖고 왔다는 남방전래설, 그리고 신라 흥덕왕 때 당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大廉)이 차종자를 갖고 왔다는 북방전래설이 있 다.

구체적으로 자생설부터 살펴보면, 草衣禪師의 東茶頌 에 의하면 우리나라 固有의 茶로서 예로부터 長白山에 白山茶가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長白山 중에 있는 나뭇잎을 따서 알맞게 다려 사람들이 마셨다는 것이다. 백산차가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淸나라 乾隆帝 때 백산차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고, 茶山의 雅言覺非 에 의하면 백산차는 석남차(石南茶)라는 이름으로 일본 중 국 등에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安春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기도 했는데, 曉堂 崔凡述은 이 나무를 생강나무일 것이라 하고 應松 스님은 석남 과(石南科)에 속하는 철쭉꽃이라고 보았다. 정상구 선생1)은 백산차에 대하여 石南科의 식물잎으로 바위의 깨끗한 곳에서 자랐기 때문에 석남차라고 불리워 지기도 하였으며, 높이는 일장(一丈)이고 잎은 버들잎같고 맛은 약간 쓴 맛이 있으나 퍽 좋다고 설명하고 있다.

백산차 외에도 五穀을 볶아서 마시기도 했으며, 오갈피, 오미자, 구기자 열 매 등을 달여 마시기도 했다. 이상은 비록 정통 茶라고 볼 수 없는 대용차이 지만, 우리 民族이 韓半島에 移動하여 農耕生活을 하면서 정착하여 안정된 생 활을 영위하게 되면서 茶 마시는 풍속 즉 飮茶 生活과 文化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 왕의 왕비인 허황후가 AD 48(유리왕 25 년 茶를 인도에서 가져와 백월산에 심었다는 남방전래설은 이능화 (1869-1943)가 朝鮮佛敎通史 2)에서 주장하고 있는 바이다. 원래 伽倻가 위 치한 洛東江 下流 지방은 신라, 고려, 조선시대의 주요 茶산지였으며, 가야에 는 일찍부터 飮茶 풍속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 駕洛國記 에는 新羅 30代 文武王 元年(661)에, 삼국을 통일한 文武王은 金 官伽倻 始祖인 金首露王이 자신의 외가쪽 조상이므로 가야국 宗廟에 제사지내 도록 명령을 내려, 술과 단술을 빚고 떡, 밥, 茶, 과일 등 여러 가지 음식이 차려졌다는 기록이 있다.

가락왕(駕洛王) 17대 후손인 갱세급간( 世級干)이 조정의 뜻을 받아 그 밭(제사지낼 자산)을 책임지고 맡아서 해마다 세시때면 술과 단술을 빚고 떡, 밥, 차, 과일 등 여러 가지 음식을 차렸다.3)

위의 사실들을 볼 때에 이미 7C 때 제사의 제물로 茶를 올렸는데, 제례나 상례등의 형식이 정착되는 데 보통 3代이상 걸리는 것을 감안해볼 때, 가야는 이미 6세기 이전부터 차를 마신 것으로 추측된다.4) 洛東江 下流에 위치한 伽 倻地方은 토지가 비옥하고 중국 남쪽과 交易이 성하여 철기문화와 벼농사가 들어와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이 발달하고 사회가 안정되었다. 이에 茶생활도 일찍 시작되어 土産茶를 재배하고 茶를 祭禮에도 사용하였으며 飮茶 풍속이 널리 성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현재 기록으로 남아있는 문헌가운데 가장 신빙성있는 것은 북방전래 설이다. 이는 三國史記 에 신라 興德王 3년, 서기 828년 12월조에 당나라에 서 차가 들어왔으며, 선덕왕(632-647) 당시부터 茶가 있었다는 기록에 의거 한 것이다.

흥덕왕 3년(828년) 12월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온 大兼이 차종 자를 가져왔으므로 왕은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 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성하였다5).

신라의 사신인 大兼이 唐나라로부터 차종자를 가져와 王命에 의해 지리산에 심은 이후 雙溪寺와 華嚴寺 등 사찰을 중심으로 점차 확대되었고 이는 주로 상류층 사이에서 飮茶의 풍속이 두루 전해졌다6). 그런데 7세기인 선덕왕 (632-647년) 당시에 이미 茶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이는 설총이 화 왕계(花王戒) 에서 ‘차와 술로써 정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꽃을 의인 화하여 간접적으로 충고하였던 것을 보아도 7세기 무렵에 茶와 飮茶의 풍속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7)

高句麗의 茶文化는 아직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없지만, 고구려의 귀족 분 묘에서 錢茶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死者가 生前에 茶를 좋아했거나 土神에게 茶를 바쳤다고 볼 수 있다.8) 이외에도 고구려 初期 首都 집안현(輯安縣)에서 굴뚝이 달린 이동식 화덕이 발견되어 야외(野外)에서 茶를 끓였거나 음식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구려 시대의 비석에는 茗이라는 글자가 새겨 진 빗돌글이 남아 있다9). 고구려 시대의 飮茶 풍속은 부족국가시대에 있어서 우리 固有의 茶文化와 연결된다. 고구려가 강력한 중앙 집권적 귀족 중심의 사회로 발전됨에 따라 茶文化는 성행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百濟의 茶文化는 記錄과 遺積은 없으나 일찍이 中國 南朝와 활발한 文化 交 流로 학문, 예술, 산업 등 文化 전반이 발달되고 귀족사회가 정착되었다. 특히 4세기 후반 불교의 전래에 의하여 왕실과 귀족사회가 강화되고 6세기 이후 화려한 불교 문화의 융성을 이룩하면서 寺院과 귀족층에서 飮茶 풍속이 성행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의 茶에 대하여 짐작하게 해주는 기록으로는 중 국의 소정방이 나당연합군을 형성하여 백제와 전쟁을 할 당시 지리산에 씨를 뿌린 절강차가 지금도 없어지지 않았다는 說이 있다.10) 또한 일본 東大寺要 錄 에는 百濟의 귀화승 행기(行基, 668 - 748)가 중생을 위하여 茶 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百濟의 茶가 일본에 전래되었음을 알려 주는 기록으로, 백제의 승려들이 이미 7세기 이전에 茶를 마셨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11).

(2) 신라 茶文化의 전개양상

新羅는 地理的 위치로 사회적, 文化的으로 그 발전이 고구려와 百濟에 비하 여 後進的 이었으나 6세기 초 佛敎의 公認과 더불어 왕권의 강화와 貴族사회 의 안정이 확립되고 文化가 전반적으로 발전되고 있었다. 특히 眞興王(579 - 632)이후 花郞제도의 公認으로 청소년들의 인재양성과 佛敎의 護國的 信仰의 性格은 국가발전과 삼국통일의 토대가 되었다. 앞서 그 기원과 전래를 살펴보 았듯이 新羅初期부터 있어온 茶가 佛敎의 공인, 중국과의 文化交流의 확대에 의하여 6세기 이후부터 9세기 불교의 융성과 더불어 왕족, 귀족, 승려, 화랑等 귀족층뿐만 아니라 軍 民에 이르기까지 범사회적으로 飮茶풍속이 성행되었 고12), 佛敎寺院에서 부처님께 올리는 獻茶行事와 팔관회 행사에서 헌다(獻茶) 행사가 행하여졌다. 또 儒佛仙 思想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던 花郞(화랑)들은 心身의 修練과 더불어 茶 생활을 즐겼으며, 이에 대한 유적으로는 江陵의 寒 松亭 四仙의 茶 유적을 들 수 있다.

또한 統一후의 新羅(676 - 935) 전쟁이 없는 平和스러운 생활 가운데 영토

의 확장 경제활동의 확대, 귀족사회의 고착 등 많은 사회적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불교의 문화의 융성과 화려한 귀족사회의 발전은 예술 문화전반이 발달 하여 사회 전반에 茶文化가 만연하였다.

신라인이 마신 차의 종류는 국산차와 중국차를 막론하고 고형차였다. 금석 문자로는 최고의 기록인 崔致遠(875-?)이 지은 河東雙谿寺眞鑑國師 (775-850) 大空塔碑 의 비문에는 당시 신라인들이 떡차(餠茶)를 마셨던 사실 이 기록되어 있다.

다시금 중국차를 공양하는 이가 있으면, 섶나무로 돌솥에 불때어 가루를 만들지 않고 차를 달여 말하기를 “나는 이 맛이 어떠한가를 가리지 않고 다만 배만 적실 뿐이다”라고 하였다. 참된 것을 지키고 속된 것을 싫어함 이 모두 이와 같았다.13)

이외에도 硏膏茶도 마셨을 것으로 추정된다. 唐의 段成式(?=863)이 쓴 유 양잡조(酉陽雜俎) 의 異國奇聞 조에는 신라에 연고차의 풍습이 있었다는 것 을 시사해 준다.

요사이 어떤 바다 사람이 신라로 가는 길에 바람에 불려 한 섬 위에 이르니 산에 가득하게 흑칠 젓가락이 달린 큰 나무가 많았다. 그가 자세히 들여다 보 니 이 젓가락들은 모두 칠나무의 꽃이나 수염들이다. 그는 이내 백여쌍을 주 워 가지고 돌아와서 써보니 무거워서 쓸 수가 없었다. 뒤에 우연히 이 젓가락 으로 찻물을 젓다가 보니 녹아 버렸다.14)

떡차를 마시는 방법은 唐나라 陸羽의 茶經 에 적힌 煮茶法으로 달여 마셨 고15) 연고차는 北宋 때 蔡襄(1012-1067)이 지은 茶錄 의 點茶法에 의해서 달여 마셨을 것이다.16)

그리고 신라의 茶文化를 짐작케 해주는 茶와 관련된 가장 대표적인 유적은 앞서 잠시 언급했던 四仙의 차화덕(茶 )이다. 여기서 사선이란 글자 그대로 네 사람의 仙人을 뜻하며, 즉 화랑인 永郞, 述郞, 南郞, 安詳을 말한다.17) 강 릉 경포대에 이들이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돌화덕이 전해지고, 寒松亭에도 사 선의 유적에 관한 기록이 전해진다. 고려의 金克己(1148-1209)가 지은 시를 참고해보면, 이미 12세기에 四仙이 쓰던 차화덕을 확인한 것이 있다.

여기가 四仙이 유람하던 곳

지금도 남은 자취 참으로 기이하다 酒臺는 쓰러져 풀 속에 묻혔고

차화덕은 내뒹굴어 이끼가 끼었구나18)

또한 李穀이 지은 東遊記 에 의하면

날이 아직 기울기 전에 경포대에 올랐다. 옛날에는 대에 집이 없었는데 요즘은 好事者가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옛날 선인의 石 가 있으니, 아마 도 차를 달이는 도구일 것이다. 삼일포와 경치가 막상막하로되 툭 트이고 훤칠한 점은 그보다 낫다. 비가 와서 하루를 묵고 강성을 나와 文殊堂을 구경하니, 사람들의 말이 文殊와 普賢의 두 석상이 땅에서 솟아나온 것이 라 한다. 동쪽에 四仙碑가 있었으나 胡宗旦이란 자가 물 속에 넣어버리고 오직 귀부(龜趺 : 거북모양의 비석받침돌)가 남아 있을 뿐이다. 한송정에서 송별연을 했다. 이 정자 또한 사선이 유람하던 곳인데, 고을 사람은 구경꾼 들이 많은 것을 귀찮게 여겨 집을 헐어버렸고 소나무도 들불에 타버렸다.

오직 서리 내리는 밤의 달이 맑을 뿐이었다. 다만 돌화덕, 돌연못과 두 개 의 돌우물이 그 곁에 남아 있는데 역시 四仙의 茶具이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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