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들어와 북한정권은 급격한 정책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 나 논평자가 보기에 김정일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의 사유세계는 매 우 한정되어 있고, 인식의 폭과 깊이는 매우 제한적이라고 판단된다.
중요한 포인트는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 김정일과 북한 지도부는 북한이 경제난에 빠지게 된 근본적 요인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아마 도 자신들의 경제가 “결핍의 경제”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내적․구 조적 결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이 야기된 것이 아니 라, 미국의 북한봉쇄정책과 남북 대결관계의 지속이라는 외부적 요인 때문에 경제적 곤경에 처하게 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 다.
그리하여 약간의 개방정책을 통해 남북관계를 (부분적) 화해협력구 조로 전환하고 미국의 대북한 봉쇄를 풀기만 하면 수령체제를 유 지․강화하면서 동시에 경제적 실리를 챙겨 북한의 경제를 부활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허망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러 한 시도가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을 다소간 해결해줄 수는 있을 것이 다. 그러나 이런 식의 지엽적․표피적 접근으로는 북한 경제가 안고 있는 근본적․구조적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제대로 인 식해야 한다. 구소련과 구동구권이 왜 몰락했는가? ‘우리 식 사회주 의’와 ‘주체사상’이 부족해서였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공산권은 몰
락할 수밖에 없는 내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몰락한 것이다.
두 번째의 문제는 북한 정권이 개방정책을 채택하면서 자신들의 유일 지배체제를 공고히 유지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 나 주체사상과 사회주의사상이라는 낡은 교조적 사고에 얽매인 상태 에서는 개방도 제대로 되지 않고 원하는 경제적 성과도 제대로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일단 개방의 빗장이 풀리 면 새로운 사조와 가치관이 유입되어 사상적 균열이 발생하고 기존 가치제와 지배체제의 불안정성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드러 난 것을 볼 때 북한정권은 이러한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대한 인식 과 대비가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두 가지 점을 고려할 할 때 향후의 남북관계가 우리가 기대 하고 원하는 만큼 원만하게 진행되고 또 높은 성과를 올릴 것으로 전망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북한 지도부의 좁은 안목과 잘못된 믿음 에 있다고 생각된다. 북한의 지도부가 자신들이 겪고 있는 경제난의 원천이 ‘외부’에 있고, 개방과정에서 자신들의 내․외부 상황을 자신 들이 의도하는 대로 모두 통제할 수 있다는 미망을 가지고 있는 한 좋은 성과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북한의 내부 변화를 유도하고 남북관계를 질적으 로 성숙시키기 위해서는 북한의 지도부와 북한 전체를 ‘개방적 학습 체제’(open learning system)로 변화시키는 노력을 다양하게 경주해 야 한다고 본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대북 포용정책이 확고하 다는 점, 우리는 결코 무력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 향후의 협 력과정에서 북한정권의 안전을 최대한 보장할 것이라는 점을 북측에 분명히 인식시켜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북한 지도부로 하여금 사회 주의 경제가 결핍의 경제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것을 극복하 기 위해서는 시장경제로의 전환이 가장 확실한 대안이라는 점, 지식
정보화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경제의 변화추세, 근본적 개혁개방 정책 이야말로 북한의 국력을 키우고 북한 정권의 안전을 가져올 것이라 는 점 등등에 대해 정확한 학습을 할 수 있도록 유도․촉진하는 일 을 해야 할 것이다.
북한의 지도부가 이러한 학습을 하지 않은 채 현재의 인식과 신념 체계의 틀 속에서 개방과 협력을 추진할 경우 그 효과는 매우 미미 할 것이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북한의 경제문제가 더욱 큰 어려움에 빠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관료집단의 부 정부패가 극성을 부리고, 계층간 불평등이 심화되면 이것을 정치적으 로 관리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제대로 된 개방․개혁정책을 추진해보지도 못한 채 김정일 정권은 다시금 폐쇄 와 대결정책으로 전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어느 누구도 원하는 상황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는 북한과 가시적 협력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북한으로 하여금 자신 의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도록 유도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학습하도록 하는 데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논평자가 보기에 이 러한 인식상의 전환과 학습은 경의선을 복구하고 백두산 관광 사업 을 추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래야만 북한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알고, 그것을 해결하는 길을 정확히 찾아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대북 협력사업을 추진하는 데에는 여야의 구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여당과 야당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질 수 는 있겠지만 그것은 의회의 테두리 안에서 조정되어야만 한다. 만약 여야가 북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정책노선과 의견을 직접 적으로 표출할 경우 북한측은 상당한 정도의 혼선과 불안을 겪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갖가지 곤경에 처해 있는 북한이 자신의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해결책을 찾아 나서는 것을 방해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북한측이 외부환경을 위협적으로 느끼면 느낄수록 그들은 더욱 위 축되고, 내부개혁보다는 내부통제에 더욱 치중하게 될 것이다. 이렇 게 되면 문제는 누적되고 북한의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이것이 과연 북한과 우리가 원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북한 지 도부의 학습과 자기개혁을 도와야만 하고, 이를 위해 우리 내부의 갈 등을 해소하는 데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의사와 약사 가 싸우면 환자가 죽어나는 것처럼 여야가 싸우면 중병에 걸려있는 북한의 내부개혁을 방해하고 올바른 남북관계의 발전을 저해하는 우 를 범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리 모두가 자각해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