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으로 가장 큰 사건은 김정일 태도의 급격한 변화일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과 언론사 사장단 면담을 통해 나타난 김정일의 태도 는 기존의 보수적·진보적 관점을 모두 뒤집는 것이었다. 어떤 누구도 정확히 예측하지 못한 김정일의 개방적 태도는 본인의 결단에 의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주민들의 뜻을 반영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경제
44) 「중앙방송」, 2000. 6. 21.
난으로 인한 주민들의 개방에 대한 욕구는 김일성 사후 권위제고를 노려온 김정일로서는 호재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즉 ‘광폭정치와 인덕정치’를 표방해온 김정일로서는 주민들의 소망을 수용함으로써 김일성에 버금가는 ‘인민대중 중심의 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을 것이 기 때문이다. 그 동안 김정일은 ‘김일성=김정일’이라는 구호를 통해 김일성과의 동일시 작업을 꾸준히 추진해 왔다. 지난 정상회담이나 언론사 사장단 면담시 보인 김정일의 언어행동은 김일성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였다. 이는 김정일이 김일성을 얼마나 닮으려 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러한 분석의 정당성은 정상회담 이후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 강 조로 증명되고 있다. 정상회담 이후인 6월 19일자 「로동신문」은 김정 일 총비서의 당중앙위원회 사업시작 36돌(6.19) 기념사설에서 “사회 주의 강성대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김정일 동지의 령도를 충성으로 받들어 나가는 것”45)이라면서 전당·전군·전 민이 김 총비서의 영도에 더욱 충실할 것을 촉구했다.
한편 정상회담이나 언론사 사장단과의 대담에서 보듯이 김정일은 무소불위의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도 될 것 같다. 김정 일은 시종일관 전향적인 정책을 쏟아놓았고 이것은 권력장악이 확실 시되지 않고서는 보일 수 없는 행동이었다. 대남비방 중지, 6·25행사 중지, 당규약 개정 약속, 경의선 복원, 이산가족면회소 설치, 6·25에 대한 성격규정, ‘내부용’ 주한미군 철수론46) 등 실로 ‘혁명적인’ 조치 들은 김정일이 절대권력자이며 ‘제왕적’ 위치에 있음을 반증해 준다.
특히 그가 통일시기에 대한 질문에 대해 “그건 내가 맘먹을 탓입니
45) 「로동신문」, 2000. 6. 19.
46) 「월간 조선」(2000년 8월호), pp. 62~66.
다”47)라고 대답하여 남한이나 주변국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결정에 의해 통일문제가 좌우될 수 있음을 나타냈다. 그의 이러한 발 언은 1997년부터 시작된 ‘고난의 행군’을 통해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는 자긍심의 발로인 것으로 보인다.
국방위원장인 김정일이 실권자인 만큼 국방위원회가 실세그룹임이 밝혀졌다. 김정일은 최고정책결정기구로 국방위원회를 언급하였다.
그는 6·25행사 중지 문제를 정상회담기간인 6월 15일 아침 국방위원 회를 소집하여 결정하였음을 공개하였고, 8월 12일 언론사 사장단과 의 면담에서는 자신의 ‘서울답방 시기’ 문제와 관련 국방위원회와 외 무성이 토론중임을 밝혔다.48) 여기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가 당과 국방위원회와의 관계이다. 당과 국방위원회와의 관계는 당과 국가기 관과의 관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이 국가기관을 지도한다는 점에 서 원칙적으로 국방위원회는 당의 지휘를 받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당과 국방위원회는 기본적으로 역할분담이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은 정책방향을 정하고 국방위원회는 이를 집행하는 것이다. 다만 김정일이 당총비서와 국방위원장을 겸직함으로써 정책입안과 집행을 동시에 하고 있기 때문에 혼란이 초래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국 방위원회의 역할이나 국방위원들의 면면을 보아 국방위원회가 단순 히 군사기구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49)
한편 관료들의 경직성 즉, 관료주의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다.
김정일은 “관료들을 보면 신경질이 난다”50)라는 표현으로 관료들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였다. 김정일의 관료들에 대한 불만은 부정적인
47) 「동아일보」, 2000. 8. 14.
48) 「한겨레신문」, 2000. 8. 14.
49) 국방위원회 위원에는 민간인인 연형묵, 전병호 등이 포함되어 있다.
50) 「세계일보」, 2000. 8. 14.
정책건의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주로 김용순을 비롯한 당관료들에 대한 불만이 컸다. 주한미군 문제와 관련 김용순은 “주한미군이 반드 시 철수해야만 된다”고 주장하였고 김정일은 “내가 무얼 하려고 해 도 밑에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반대한다”라고 말하여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51) 이러한 김정일의 태도는 관료들에 대한 불신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정상회담시 김정일은 김용순에게 환영인파의 숫자를 물었고 김용순은 “60만명 가량인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고, 김정일 은 “나는 40만명 정도 되는 것 같던데”52)라고 대답하여 관료들이 자 신에게 과장 또는 축소보고하는 것으로 인식한 것 같았다. 이것은 김 정일이 자신외에는 믿지 않는 성격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53) 김정일 은 본인의 말대로 조직비서를 20여년 역임한 관계로 매사를 교차확 인하고 직접 챙기는 습관이 있다.
북한당국은 관료사회를 쇄신하고 주민들의 여론 무마를 위해 관료 들을 연경화시키고 있다. 1997년부터 본격화된 관료교체는 각도 농촌 경리위원장부터 시작되었다. 평안남도·양강도·황해남도 등 6개의 도·
직할시 농촌경리위원장이 퇴진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50년대 작업반 장, 분조장으로 일하면서 농촌협동화 사업에 앞장섰던 60~70대 노력 영웅들이었다. 이어서 도·군당 책임비서 및 인민위원장, 공장·기업소 지배인들이 교체되었다. 12개 도·직할시 당책임비서 및 인민위원장 가운데 80%이상이 교체된 것이다. 간부교체는 98년 7월 26일 실시된 최고인민회의 제10기 대의원 선거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대의원 687 명중 64%에 해당하는 449명이 교체되었다. 제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 원 교체폭 31.4%의 2배를 넘었다. 아울러 1998년 9월 5일 출범한 1
51) ‘방북언론사장단-김위원장대화록’, 「중앙일보」, 2000. 8. 14.
52) 「한겨레신문」, 2000. 6. 14.
53) 김성철, 「김정일의 퍼스낼리티·카리스마·통치스타일」, p. 93.
차 내각에는 50~60대 신진 전문관료들이 대거 승진등용되었다. 신임 부총리 조창덕, 곽범기를 비롯하여 전기석탄공업상 신태록, 경공업상 이연수, 체신상 이금범 등이 대표자들이다.54)
그러나 하급 관료들의 부패는 늘어만 가고 있다. 통행증 부정발급, 장마당이나 뙈기밭의 세금착복, 돈받고 무단결근 봐주기 등과 같은 각종뇌물 사건, 자재유출 사건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55) 이러한 부 패는 주민들의 간부들에 대한 불신의 원인이 되고 있다.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