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내적 초점화의 주관적 서사 양상
2.2. 내적 초점화의 양상과 인물에 의한 허구세계의 종속
흔히 일본의 고백체 소설을 언급할 때 호출되는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은 고백이라는 제도로 인해 감추어져 있던 ‘성(性)’을 발견하 게 되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66) 중요한 것은 소 설의 내용이 사회에 주는 교훈이나, 작가의 사상, 메시지 등을 담고 있 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매우 내밀한 사생활, 속마음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앞 절에서 『창조』의 동인들과 ‘고백체’의 문제에 대해서 논의한 바 있다. 고백체라는 제도적 장치가 고백해야 할 번민을 만들었다는 것이 다. 특히 「마음이 여튼 자여」는 본격적인 편지 형식을 사용하고 있으 66) 가라타니 고진, 앞의 책, 113면 참고.
며, “마츰내 告白할날이 왓슴니다”67)라는 문장으로 시작하여 고백체 소 설의 전형적인 유형 중 하나로 꼽힌다. 김윤식은 “메이지, 다이쇼 시대 의 일본의 근대소설”과 “이광수와 창조파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고백체 를 제도적 장치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파악하고, 두 가지를 같은 선 상에 놓는다. 그러나 앞 절에서 밝혔듯이 창조파가 늘어놓는 번민은 근 대의 제도적 장치로 인해 사회와 격리된, 오롯이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 는 점에서 일본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
두 번째는 ‘고백체’라는 형식의 문제에 있다. 편지나 일기라는 장치를 통하지 않더라도 ‘고백체’의 글쓰기는 성립할 수 있다. 앞서 예로든
『이불』의 경우에는 심지어 일인칭 ‘나’를 사용하지 않고 삼인칭 ‘그’
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백체 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간주된다.
이는 실제로 진실이든 허구든 상관없이 “허구임에도 마치 진실인 것처 럼 꾸미기 위해 고백이라는 형태가 사용”68)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백체’의 요건은 그것을 담보하는 진실성이며, 서술자가, 나아가 작가 가 자신의 이야기를 사실대로 전달하고 있다는 ‘환상’을 일으키는 형식 인 것이다.
그렇다면 김동인의 초기 작품들은 ‘고백체’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는 가? 전자의 문제가 소설의 내용에 해당한다면, 후자는 소설의 형식, 특 히 서술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반드시 일인칭 대명사를 쓰지 않더라 도 김동인이 내세우는 일원묘사의 원리는 ‘그’를 ‘나’로 바꿔 쓸 수 있 다는 점에서 표면적으로 서술자와 등장인물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단정 할 수 없다. 이번 절에서는 김동인의 초기 작품들의 서술자를 연구하고 서술자의 태도를 살펴봄으로써 고백의 형식으로 진행되는 서술에 대한 신뢰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토도로프가 제안하고 후에 쥬네트가 채택하고 있는 시점의 세 가지 유형은 특히 인물과 서술자의 정보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주의 깊게 다룰 필요가 있다. 쥬네트는 서술의 시점을 ‘서술자>등장인 물(서술자가 등장인물이 알고 있는 것 보다 더 말하는 경우)’, ‘서술자
67) 김동인, 「마음이 여튼 자여」, 『창조』 3, 1919.12., 27면.
68) 가라타니 고진, 앞의 책, 108면.
=등장인물(서술자가 등장인물이 알고 있는 것만을 말하는 경우)’, ‘서 술자<등장인물(서술자가 등장인물이 알고 있는 것보다 적게 말하는 경 우)’로 나눈다. 쥬네트는 이를 ‘초점화(focalization)’라는 용어를 통해 새롭게 정의하고, 첫 번째 유형을 ‘비초점 서술(non-focalized narrative)’ 혹은 ‘제로 초점화(zero focalization)’이라 이름 붙인다. 두 번째 유형은 ‘내적 초점화(internal focalization)’이라 불린다. 이는 다 시 세 가지로 나눠지는데, a)초점이 한 사람에게 고정된 경우, b)초점 이 여러 등장인물에게 순차적으로 옮겨가는 경우(가변적variable), c)여 러 등장인물에 의해 사건이 여러 번 서술되는 경우(복수multiple)다. 세 번째 유형은 ‘외적 초점화(external focalization)’로, 등장인물의 생각이 나 감정을 독자에게 일절 알려주지 않는다. 이는 위의 구분에서 볼 수 있듯이 본질적으로 정보량과 연관되어 있다.69) 김동인의 일원묘사는 이 세 가지 유형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 서술자는 등장인물이 알고 있는 것만을 말 할 권리를 가진다.
일반적으로 서술자는 행위의 단순 전달 외에 해석, 판단, 일반화의 역할을 함께 수행70)한다. 그러나 내적 초점화의 서술자는 인물의 내면 69) Gérard Genette, 앞의 책, 177면 참조.
70) 시모어 채트먼, 김경수 옮김, 『영화와 소설의 서사 구조』, 민음사, 1990, 290-302면.
채트먼은 ‘해석’을 어떤 상대적인 의미 — 이야기 자체의 관점에서 이야 기 밖으로 나가는 일 없이 무엇을 설명해보려는 자유로운 시도 —로 제한 한다. 해석하고 있는 화자는 단순한 미래의 일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 날 수 있는 일을 어림짐작하면서 기원하는 분위기를 조성할 수도 있다.
직접적인 성격 묘사는 ‘해석’과 서로 뒤섞일 수 있다. 해석의 형태는 ‘그 래서’, ‘왜냐하면’, ‘그렇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같은 분명한 해석상의 간단한 인과 관계처럼 사용된다. 또는 화자의 해석은 수화자에 의하여 제 기된 질문을 반복하기도 한다. 해석은 무지와 섬세하지 못함, 극적 부적 절함, 또는 다른 이유들 때문에 어떠한 등장인물도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 를 설명할 수 있다. 또는 해석은 ‘전조’로서의 역할을 한다.
‘판단’은 도덕적 가치평가에 근거한 설명이다. 어떤 형용사는 직접적으로 판단 적이고, 다른 것들은 내포적이고 환유적인 뜻이 있다. 또는 일반화가 소극적인 판단을 나타내기도 한다. 일반화는 플롯상 그럴듯하지 못하지만 매우 필요한 행 동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한편, ‘일반화’는 이야기상의 사건이나 인물들을 비허구적인 실제 세계의 것들 과 비교하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행해지는 ‘일반적 진실’에 대한 빈번한 인용은 어떠한 절대적 의미에서의 진실성이 아니라, 작품의 허구적 문맥 속에 그것들이
과 행위만을 초점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술자 자신의 해석, 판단, 일 반화가 제한되어 있다. 「약한 자의 슬픔」은 일원묘사라는 김동인의 원칙을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원칙과 창작활동의 분열 양상이 두드러진 다.
「약한 자의 슬픔」의 서술자는 그 역할에 따라 세 가지로 구분된 다.71) 첫째는 소설의 지배적인 서술자로, 엘리자베트의 시점을 따르는 내적 초점화의 서술자다. 이 서술자는 엘리자베트가 보고 느낀 것만을 서술할 권리를 가진다. 둘째는 서사를 빠르게 진행하기 위해서 이야기 를 생략 또는 요약하여 제시하는 서술자로, 해석하는 서술자의 범주에 들 수 있다. 셋째는 전체 서사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엘리자베트가 알 수 없는 정보를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서술자다. 세 번째 서술자 또 한 해석하는 서술자의 범주에 들 수 있겠지만 정보량의 측면에서 서술 자가 인물이 가진 정보량을 뛰어넘고 있다는 점에서 초점화의 층위가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소설에서 세 부류의 서술자는 분열되어있다고 느 껴지지 않는다. 필요에 따라서 서사의 가속과 감속을 조절하고, 이야기 의 중요한 부분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이야기의 시간과 서술자의 ‘말하 는 시간’(서사 시간)을 일치시키는 ‘장면’을 이용하는 것은 서술자 고유 의 권한이기 때문이다. 스토리 시간과 서사 시간이 일치되는 ‘장면’과 반대로 서사는 얼마든지 가속화될 수 있다. 그러나 「약한 자의 슬픔」
은 이야기 시간과 서사 시간이 거의 일치되는 등시간적 진행이 서사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서사를 요약하는 서술자의 목소
얼마나 적합하게 들어맞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화의 과도한 사용 은 분명히 문학사에서의 불안정한 과도기를 나타낸다. 전통적 규범이란 항상 역 사에 의하여 뒤집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 확실하거나 비이성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작가들은 이미 알려진 규범으로는 자신의 의도가 분명해지지 않기 때문에 일반화를 필요로 한다. 또한 일반화는 행위와 성격 묘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사용되기도 한다. 일반화의 전형적인 문 장은 지시적인 의미가 강화된 명사로 구성되며, 그 지시어를 분명하게 해주는 수식절을 거느린다.
71) 「약한 자의 슬픔」에서 서술자의 분열 양상은 손정수(『텍스트의 경계』, 태학사, 2002), 류승환(「김동인 문학의 리얼리티 재고」, 『한국현대문학연 구』 22, 2007.8)에 의해서 연구된 바 있다.
리는 낯설게 느껴진다. 세 번째 범주의 서술자는 류승환에 의해서 “전 체 소설의 의미를 잡아나가기 위한 작가의 간섭”72)73)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간섭은 작품에서 총 4회 등장하며, 그것을 통해 ‘참 번민’과 ‘허 위적 번민’을 구분할 수 있다.
소설의 서술자가 세 가지로 분열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서술자는 매우 제한적으로 이야기에 개입을 하고 있으며, 첫 번째 서술자는 해석, 판단, 일반화와 같은 전통적인 서술자의 권한조차 행사하지 못 하고 있다. 이는 일인칭 소설의 주인공만큼이나 엄격한 형 식적 제한으로 인한 것이다. 그렇기에 내적 초점화의 서술자는 그 원칙 을 파괴하는 서술자의 분열이나 갑작스러운 개입이 없을 경우, 서사 내 에서는 그 권위가 주요 인물과 동등하거나, 혹은 그 이하의 수준까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원칙적으로 서술자와 인물의 정보량이 동등하지 않은 경우의 소설에 서 서술자는 “경험상 그저 좀 더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의미 에서 ‘다 알고 있고’ 진리를 이해”74)한다. 반면에 이야기의 인물은 무지 의 영역에서 출발하여 다가오는 사건에 갑작스럽게 맞닥뜨리고 오류와 시련을 통해 정보를 조금씩 얻어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서술자의 진술 은 대체로 절대적이며 확정된 사실들이다. 서술자의 서술을 받아들이는 수화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서술자를 신뢰할 수밖에 없으며 그 를 통해 인물과 사건을 이해한다.
그러나 주요 인물 한 명의 권위가 서술자의 수준까지 닿아있는 소설 은, 바꿔 말해 인물이 가진 정보량만큼만 서술자가 진술할 수 있다는 72) 류승환, 앞의 글, 101-143면, 120-121면.
73) 서술자와 작가는 서사학에서 명백히 다른 용어지만, 이는 일관적이지 않 은 목소리를 서술자로 인정하느냐, 살아있는 작가인 김동인의 개입으로 보느냐와 같은 근본적인 연구 시각의 차이다. 류승환이 지적한 총 4회의 간섭 중, “엘리자베트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한 삽입을 역할을 하는” 개입 은 의도적으로 분석에서 제외하고 있는데, 그것은 서술자의 역할로 볼 수 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손정수가 서술자의 의미를 다소 폭넓게 사용하고 있다면, 류승환은 독자를 직접 상대하는 서술이라는 의미에서 작가를 끌 어온다. 이는 연구 시각에 따른 용어 규정이기에 본고에서는 ‘서술자’로 규정하도록 하겠다.
74) Gérard Genette, 앞의 책, 24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