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dak ada hasil yang ditemukan

허구세계의 독립성과 선악 이분법적 인식의 거부

3. 인물과 허구세계를 장악하는 우월한 서술자

3.1. 허구세계의 독립성과 선악 이분법적 인식의 거부

앞 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김동인을 비롯한 『창조』의 동인들은 사 건의 흥미보다 인물이 갖고 있는 인생의 번민과 심리를 표현하고자 했 다는 점에서 그 형식적 표현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색채를 띠고 있다. 그 러나 같은 시기, 김동인 자신은 「자기의 創造한 世界-톨스토이와 도 스토예프스키를 比較」에서 도스토예프스키를 두고, “그는, 自己가創造 한人生을支配치를안코,그만自己自身이 그 人生속에저서,엇절줄을모르 고 헤매엿다”89)고 평하며,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중 톨스토이가 더 위대하다는 결론을 낸다.

톨스토이가 자기가 창조한 자기의 세계를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조종했다는 다소 인상 비평적인 평가 외에도 김동인이 그에 대해서 높 이 평가하는 점은 성격묘사에 있다.

예를 톨스토이의 명작 「전쟁과 평화」에서 들자면그 소설 중의 인물인 안 드레 공작은 톨스토이 자신의 총명한 형의 일면이요, 피에르 백작은 음울한 면 의 자신이요, 러스토프 소백작은 열정적인 면이요, 등등 주요한 청년들은 전부 가 톨스토이 자신을 해부하여 소개의 면으로 나누고 그 일면씩을 부여한 것이 다.

사람의 성격이라는 것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복잡한 면을 그대로 소설에 나타내면(이건 기술도 불가능하거니와) 독자는 도저히 갈피를 차리지 못할 것이다. 1인에게는 1성격씩을, 성격의 단순화한 일면씩만을 주어야할 것 이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의 각 인물들을 다시 생각해보자면 가장 자연적 으로 가장 합리적으로 작중 인물들이 독자의 머리에 들어오고 추호도 부자연 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再考再思하여보면 대체 인간이라는 것이 그렇게 어떤 일면의 성격만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 사람의 성격이 그렇게 단순

89) 김동인, 「자긔의 創造한 世界-톨스토이̇ ̇ ̇ ̇ 와 스터예스키̇ ̇ ̇ ̇ ̇ ̇ ̇ -를 比較하여」,

『創造』 7, 1920.7., 52면.

한 일면만 가졌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피에르의 성격에도 안드레의 일면이 있고, 러스토프의 일면에도 피에르의 성격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자연적 현상 이다.

그러나 그 자연적 현상은 소설 상에는 부자연한 것이 된다. 성격을 단순화하 고야 비로소 ‘소설적 자연성’을 이룰 것이다.90)

김동인이 주장하는 바대로라면, 톨스토이의 작품의 인물들은 인간의 일면만을 부각시켜 단순화된 성격을 갖고 있다. 이는 ‘통일, 단순, 연락’

이라는 「소설작법」의 원리를 실현한 것으로, 김동인이 톨스토이의 창 작 방법에 공감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동인 초기 작품들의 주인 공 심리는 단순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복잡하고 모순적이기까지 하다.

「약한 자의 슬픔」의 엘리자베트는 K남작에게 치욕을 겪으면서도 자 신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것인지 판단하지 못 하며, 혹 자신이 남 작을 사랑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복잡한 심리 상태를 가진다.

인간의 번민하는 심리를 묘사하겠다는 시도는 그가 “기술도 불가능”

하다고 지적한 인간의 복잡한, 자연적인 심리를 묘사하려는 시도나 마 찬가지다. “소설 창작을 바라보는 김동인의 기본적인 관념이 이상과 같 다는 것을 인식할 때, 그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에서 받아들일 수 없 었던 것이 무엇보다 ‘모순’의 측면”91)이었을 것이다. 작가조차 통제하지 못 하는 인간의 모순은 하나의 세계를 완벽하게 통제해야 하는 예술가 에게 있어서 실패로 보인 것이다.

김동인이 이처럼 소설에서 번민하는 인물을 다루지 않기 시작한 시기 는, 흥미롭게도 『창조』가 폐간한 이후부터다. 『창조』가 폐간 된 후 처음으로 발표된 단편 소설인 「태형(옥중기의 일절)」(『동명』

16~34, 1922.12.17.~1923.4.22.)은 이제까지 인간의 번민하는 심리를 세부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이 아니라 한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선택의 갈등 문제를 다룬다. 이후 다시 「눈을 겨우 뜰 때」(『개벽』 37~41,

90) 김동인, 「창작수첩」(『매일신보』, 1941.5.25., 28~31), 『김동인 전집』 16, 조선일보사, 1988, 432-433면.

91) 조시정, 「1930년대 후반 한국문학의 모색과 도스토예프스키」, 서울대학 교 박사학위 논문, 2015.8, 55면.

1923.7~11)와 「거치른 터」(『개벽』 44, 1924.2)에서 심리의 문제 를 다루는 모습을 보이지만 「유서」(『영대』 1~5, 1924.8~1925.1) 이후부터는 인간의 심리에 집중하기보다 인물, 사건, 서술 세계를 염두 에 두면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1924년 8월에 이전 <창조>의 잔당들이 모여서 <영대>를 발행하였다. 거 기 「유서」를 썼다. 처음에는 무의식하게 써 나아가던 나는 어떤 때에 우연히 그 「유서」 가운데서 강렬한 동인미를 발견하였다.

지금 보기 싫은 작품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계획하는 일이 무의식중에 발아 생장한 의미로 「유서」는 결코 내게는 잊지 못할 작품이다.

나는 마침내 동인만의 문체 표현 방식을 발명하였다. 그리고 거기 대한 완전 한 긍지와 의식 하에 「명문」과 「감자」를 발표하였다.92)

「유서」는 김동인에게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작품으로, 그는 이 작품을 발표한 이후 발견한 ‘동인미’를 의식하며 「감자」와

「명문」까지 창작하게 된다. 여기서 ‘동인미’의 발견이란 작가로서 자 신만이 갖는 개성을 발견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김동인은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개벽』, 1921.8~10)를 읽 고 강적이 출현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김동인은 이 「표본실의 청 개구리」가 “로문학의 윤곽을 쓴 것”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파악하고, 그것을 “선망과 경이”로 바라보았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염상섭은 곧 로문학을 벗어던지고 조선 문학을 발견하였으며, 그 가운데 염상섭 개인의 길까지 발견한다. 염상섭은 “유성(類性) 가운데 개성(個性)을 발견”한 것이다.93)

조선의 문학을 세계 문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기치로 모였던

『창조』 동인의 해산은 김동인에게 있어서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으며, 이미 자신들의 목표는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는 자신감이 함께한 결정이 었다. 그러나 이 과정 동안 김동인은 작가로서 자신만의 개성, 즉 ‘동인

92) 김동인, 「朝鮮近代小說考」(『조선일보』, 1929.7.28.~8.16.), 『김동인전집』

16, 조선일보사, 1988, 33-34면.

93) 김동인, 위의 책, 25면.

미’를 발견하지 못 하고 있었으며, 염상섭을 시야에 두고 있던 김동인 으로서는 그만의 문체를 확립하는 일이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이 절에서는 『창조』의 동인으로서 조선 문학을 건설하려던 시기를 벗어나 자신만의 개성을 발견, 그것을 단서로 시작한 창작 활동의 양상 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인생의 번민을 묘사하던 이전 시기에서 벗어나 내면 밖의 세계, 즉 소설 내부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와 인물의 갈등이 나타난다. 통일, 단순, 연락의 창작 원리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 타나는 시기이며, 서술자가 서사 전체를 장악한 잘 짜인 서사가 진행된 다.

인물의 내면을 경유해 이야기하는 내적 초점화의 서술자는 결국 인물 이 가진 세계에 대한 인식과 정보의 한계로 인해 제한된 서술만을 하게 된다. 이 경우 주어진 딜레마를 파괴하고 외부의 세계로 나아가는 영웅 적인 주인공이 제시되지 않는 이상 이야기는 결국 인물의 내면에서 시 작되어 내면으로 끝나는 구성으로 귀결된다. 「약한 자의 슬픔」에서 사회 권력에 의해 짓밟히는 개인을 보여주었으면서도 이야기의 결론이 개인의 나약함과 허위의 문제로 귀결된 것이나, 「마음이 여튼 자여」

에서 문단의 허위, 여인의 인권을 멸시하는 악사조(惡思潮)와 같은 사 회 문제를 언급하면서도 ‘마음이 여튼 자’는 자신이라는 개인의 차원으 로 모든 문제가 수렴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내면의 세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실질적인 움직임은 1923년 「어즈러 움」(『開闢』 35, 1923.5)이라는 작품에서부터 발견되기 시작한다.

「어즈러움」은 같은 해 발표한 단편소설집 『목숨』에서 ‘소설’로 분 류되어 실려 있지만, 개작되기 전 『개벽』에 실렸던 원문에는 김동인 의 친구인 ‘요한’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개작되기 이전에 「어즈러움」은 허구의 세계가 아닌 실 제 작가의 자전적 고백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이 작품에서 화자는 자신의 교만하던 자아가 파괴되고 ‘남’을 의식하 게 된 사연을 요한에게 전한다. 지니고 있던 재산을 탕진하고, 물려받 은 집마저 팔아버린 ‘나’는 마주치는 학생들의 비웃음을 피하기 위해

큰 길보다 작은 길을 택하는 등 위축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와 함께 싹트는 것은 절대적으로 신뢰하던 자아에 대한 의심이다. ‘나’는 의심의 원인을 개인으로부터 찾아보고자 절대적 권세를 지닌 개인을 상 상한다. 그는 “日氣와 별의 運動에까지 밋는” 전지적 권세를 상상하고,

“數十의 愛人”과 백억의 돈을 가진 인물을 공상한다.94) 그러나 공상의 끝은 결국 불행이 존재하고, 불만족한 개인만이 남는다.95)

「어즈러움」의 고백은 개인의 경험 수준에서 머물지 않는다. 자아로 구축된 견고한 성채에서 벗어나 인간이 놓여 있는 공간으로서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껏 인물의 내면을 매개로 하여 주관화되 었던 세계와 타인은 그 자체로 객관화되어 인물과 갈등하고 대립하는 또 다른 주체로 자리매김한다. 따라서 이 시기의 작품들은 인물을 경유 해야 했던 내적 초점화의 방법을 버리고, 외부의 요소들을 객관화 하면 서 새로운 주체를 확립시키는 과정보아야 할 것이다.

연구의 시각에서 밝혔던 것처럼, 「배따라기」는 1921년에 발표된 작품임에도 이야기와 서술하는 시간의 거리가 멀고, 서술의 주체를 등 장인물에게 양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당시의 다른 작품들과 기법상의 차이가 있다. 이 절에서는 「배따라기」가 중기 작품에서 나타나는 변 화의 징후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살피고자 한다.

「배따라기」는 ‘배따라기’ 노래에 묻어 있는 뱃사공의 애환을 통해 초월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인 ‘운명’의 모습을 형상화한다. 뱃사공의 애 환이라는 분위기를 확보하기 위해서 작가는 뱃사공, 뱃사공의 아내, 뱃 사공의 동생과 함께 이전 작품에서 등장하지 않던 추상적 개념인 ‘운 명’을 등장시킨다. 「배따라기」의 운명은 뱃사공의 아내를 죽음에 이 르게 하고 동생을 떠돌게 만든다. 무엇보다 중요한 기능은 사건의 진실 을 은폐함으로써 뱃사공이 감정적 혼란의 상태에 영원히 머물도록 한 것이다. 실상 「배따라기」의 서사는 죄의식을 갖고 유랑하는 뱃사공의

94) 김동인, 「어즈러움」, 『개벽』, 1923.5, 146-147면.

95) 신범순은 「어즈러움」을 김동인의 “현저하게 위축된 자아의 파탄된 모 습”을 찾을 수 있으며, “자유의지가 아니라 복종하는 의지의 미묘한 내면 심리가 드러난” 글로서 평가한 바 있다.(신범순, 『이상 문학 연구-불과 홍 수의 달』, 지식과 교양, 5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