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독 도시간 교류·협력사업은 매년 갱신되는 연간 실행프로그램에 의해 확정되었기 때문에 실행프로그램의 내용과 변화 추이를 통해 사 업의 일반적 실태를 판단할 수 있다. 대체로 실행프로그램에 명시된 교류·협력사업의 기본 골격은 유사했다. 또한 실행프로그램의 갱신은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지만, 갱신시 내용상의 변화는 거의 없었으며 매 우 예외적으로만 새로운 사업이 추가될 뿐이었다는 공통성도 있다. 대 개의 경우 동독측은 재정적·기술적 문제를 구실로 전년도에 비해 교 류·협력의 양을 더욱 줄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인적 접촉의 확대 및 심화 덕분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교류·협력은 점점 우호적 분위기 속에 서 진행될 수 있었다.
동독측의 경직된 실행프로그램 운영과 별개로 간혹 실행프로그램에 인원과 개최일자가 미리 확정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동독측의 교류·협력 사업에 대한 개방의지를 보이는 것이라기보다 동·
서독 도시간의 이견을 조율하지 못한 결과였다. 인원과 개최일자가 확 정되지 않은 사업의 경우, 대체로 사업추진상 어려움을 겪었으며, 교 류 인원도 1-2명으로 제한되는 것이 일반적 추세였다. 실행프로그램에 서 합의되지 않은 즉흥적 교류·협력 사업은 기본적으로 기대하기 어려 웠으나, 아주 예외적이나마 사적 차원에서 비공식 형태로 이루어지기 도 했다. 예를 들면, 서독측 시민들의 여행사를 통한 단체여행 도중에 동독측 자매시 당국에 의해 접대를 받는 것과 때때로 동독 예술가 몇
명이 서독측 자매도시에서 예정에 없던 공연 또는 전시회를 갖는 것 등이었다.49)
나. 교류·협력 사업의 종류
<전문가 교류>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적 문제들에 대한 경험을 교환하기 위해서 시 정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서로 만나 의견을 나누었다. 여기에는 도시 계획을 비롯하여 오래된 건물의 유지·보수, 교통계획, 환경정책 등의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동독에서는 ‘도시의 미래’라는 이름아래 이미 도시발전 정책이 강조 되어왔다. 이 맥락에서 동독측은 서독과의 협력을 통해 동독도시의 발 전에 관한 유익한 정보와 경험을 얻기 원했다. 동독의 이러한 의도는 서독 사민당과 동독공산당 간에 지방정부의 정책에 관한 대화와 협력 사업들에서 명확하게 밝혀진다.50)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상호 경험의 교류는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다. 무엇보다 동서독 의 각 정당과 행정관료들 사이에 독일정책 노선에 관한 이견들이 있 었기 때문이었다.
이 밖에도 전문가 교류에는 수공업자들간의 만남과 공공보건에 대 한 정보교환 차원에서 의사들간의 교류가 포함되었다. 전문가 교류는 49) Nicole-Annette Pawlow, Innerdeutsche Städtepartnerschaften, pp.
117-120.
50) 사민당과 동독공산당의 대표들은 1988년 9월 베를린에서, 1989년 4월 쾰른에서 각각 내독 도시간 자매결연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으며, 여기 서는 양 지방자치체제와 지방정책에 관한 논의들이 있었다. Manfred Klaus, Städtepartnerschaften zwischen ost- und westdeutschen Kommunen, pp. 30-31.
연간실행계획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자매결연 사업이었으며, 양국 도 시에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었기 때문에 지속성을 가졌다.
<체육 교류>
체육교류 역시 실행계획들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요 사업이 었다. 양독간 체육교류는 1974년 5월 동독의 체육연맹(DTSB)과 서독 의 체육연합(DSB) 사이에 합의된 “공동의 체육행사일정”(Gemeinsamen Sportkalender)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기존의 체육교류는 주로 엘 리트 체육차원에서 최고의 기량을 가진 선수나 단체들간의 교류에 국 한되었다. 자매결연 차원의 체육교류에서 서독도시의 입장은 엘리트 체육보다는 시민들의 참여에 초점을 맞추는 생활체육 분야를 강조했 다.51) 따라서 서독측 참가자들은 모임자체와 정보교환에 더욱 큰 비 중을 두었다. 그러나 동독측은 가능한 주민접촉 면을 줄이려 노력했기 때문에 생활체육 교류가 활성화되기 쉽지 않았다. 더욱이 동독 도시들 은 “공동의 체육행사일정” 협정에 입각하여 체육교류가 도시당국의 관할사항이라기보다 동독 체육연맹의 소관임을 내세웠다.
그렇지만 도시간 자매결연을 통해 청소년 체육을 비롯하여 생활체 육 분야에서 새로운 체육교류의 장이 마련될 수 있었다.52) 예를 들면 볼링대회(자알브뤼켄-코트부스), 축구대회(짤즈기터-고타), 탁구대회 (호프-플란우엔) 등 일반주민들이 참여하는 행사가 있었다. 그러나 동 독측은 “공동의 체육행사일정”에 따라 이러한 행사들을 일년에 일회 만 개최하는 데 동의했다. 그러므로 같은 해에 방문경기를 생각하기는 51) Jan Hoesch, “Drei Jahre kommunale Partnerschaften mit der DDR,”
p. 43.
52) Hans-Dieter Krebs, “Städtepartnerschaften bereichern Sprotaustausch,”
Deutschland Archiv, Nr.1 (1988), pp. 10-11.
어려웠다. 더구나 동독측은 체육교류를 단순한 시민들의 축제행사로 간주하지 않고 경쟁적인 태도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동독측의 책임자들은 경기에서의 승리를 추구했다. 이는 호프와 플라우엔 시 축 구시합에서 플라우엔 시 팀이 패하자, 동독측 인솔자는 변명거리를 만 들어야 한다는 푸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53)
<청소년 교류>
청소년 교류는 도시간 교류·협력 사업들 중 거의 제도화되다시피 할 정도로 보편화된 것으로서 대부분의 조약문에 “집중적으로 증진시켜 야 할 분야”로 명기되었다. 대개의 경우, 청소년 교류는 15세에서 30 세 사이의 서독 청소년 30여명이 단체로 동독측 자매도시를 방문한 후, 동독측의 답방이 이루어졌다. 설문조사 결과, 청소년 교류에 대한 서독도시들의 경험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났다.54) 어떤 도시의 답변에 따르면, 서독을 방문한 동독 청소년들은 개방적인 행동태도를 보였으 며, 호기심이 많았고, 토론을 즐길 뿐만 아니라 제공된 프로그램에 대 해 매우 만족했다고 한다. 이와 달리 동독측 청소년과 어울리기가 매 우 힘들었다는 경험도 있었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도 청소년 개개인 들간의 사적 접촉은 매우 힘들었다는 공통적인 답변을 들을 수 있었 다. 서독을 방문하는 동독 청소년은 방문에 앞서 일체의 개인행동을 하지 말 것을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청소년 교류를 주관하는 조직단체와 관련, 서독과 동독간에 큰 차이 가 존재했다. 서독의 경우 시 당국이 청소년 교류를 주관했던 데 반 해, 동독측 주관기관은 시 당국이 아닌 청소년여행기관이었다. 이에
53) Nicole-Annette Pawlow, Innerdeutsche Städtepartnerschaften, p. 122.
54) ibid, pp. 123-124.
따라 서독을 방문한 동독 청소년 단체방문단은 구성상 서독측과 큰 차이를 보였다. 적지 않은 수가 기혼자였으며, 때로는 자매결연 파트 너 도시 이외에 거주하는 자가 단체방문단에 끼여 있는 경우도 있었 다. 특히 후자의 경우, 동독 청소년여행기관이 비사회주의국 여행을 신청한 자들을 자매결연 도시간 청소년 교류프로그램에 일방적으로 포함시켰기 때문이었다.
동독은 학교를 이데올로기적 체계를 구축하는 제도로 간주하고 있 었기 때문에 청소년 교류와 학생들간의 교류를 구분했다. 따라서 학교 및 학생들간의 교류는 청소년 교류 틀 속에 포함되지 않았다. 동독측 은 심지어 학생들간의 서신교류조차 거부했다. 다만 예외적으로 라퐁 텐의 사민당이 집권했던 자알란트 주는 1988년 말 제한적이나마 동독 과의 학생교류를 허용 받았다.55) 이는 호네커의 사민당 좌파의 라퐁 텐에 대한 정치적 배려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평화 회의>
대부분의 조약문에는 동독의 요구에 따라 “평화를 위한 시민들의 주도권”을 전개할 수 있도록 평화문제 관련 회의와 때로는 “평화를 위한 행동”까지 개최할 것이 명시되었다. 동독이 강조하는 평화개념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념적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었다. 동 독은 분단이래 서독에 대해 정치적 목적을 갖는 평화공세를 끊임없이 해왔으며, 이 맥락에서 동독은 교류사업에도 항상 평화문제를 개입하 고자 했다.56) 이에 따라 동·서독 자매도시간에 평화관련 회의가 매년 55) Jan Hoesch, “Drei Jahre kommunale Partnerschaften mit der DDR,”
p. 43.
56) Wolf-Rüdiger Baumann, “Innerdeutsche Städtepartnerschaften haben Konjunktur,” p. 1237; Manfred Klaus, Städtepartnerschaften zwischen
개최되었다. 1988년과 1989년에는 특히 평화회의에 여성대표들의 참여 가 괄목할 정도로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평화회의의 틀 속에서 여성 문제도 논의되었다. 평화와 안보 관련 회의에 대해 서독측 참가자들은 큰 관심을 갖지 않았으며, 대체로 의무적 참여 수준에 머물렀다.
평화회의의 회수가 증가하면서 동독측은 서독 파트너 도시에 평화 관련 “공동선언” 채택을 강력히 요구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실제로 공 동선언을 채택했다. 서독 도시의 평화문제에 대한 개입은 서독 연방정 부의 외교·안보정책에 간접적인 압력으로 작용했다. 따라서 서독 연방 정부는 이러한 형식의 공동선언이 법적·정치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지 적하고, 서독 시 당국에 경고했을 뿐만 아니라, 동독측의 평화 및 안 보 공세에 대해 인권문제 제기로 대응할 것을 촉구했다.57)
<문화 교류·협력>
동·서독 자매시는 매우 다양한 문화행사를 번갈아 가며 개최했으며, 여기에는 전람회, 음악인들의 상호 교환 연주, 무용발표, 영화상영 및 문학가들의 모임 등이 포함되었다. 그밖에도 사진전, 각 도시의 축제 를 계기로 합창단 및 무용단 교류 등이 있었다. 특히 도시 차원에서는 민속예술을 비롯한 각종 분야의 예술을 취미로 즐기는 일반 시민들의 참여가 가능했다. 서독측의 요구로 그러한 사업들이 실행프로그램에 점점 많이 반영될 수 있었다.
그러나 동독측은 기본적으로 서독의 문화가 유입되는 것을 우려했 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제약을 가했다. 우선 동독 당국은 동독측 참가자 ost- und westdeutschen Kommunen, p. 20; Marlies Jansen,
“Entspannungspolitik von unten: Innerdeutsche Städtepartnerschaften,” p.
1382
57) Nicole-Annette Pawlow, Innerdeutsche Städtepartnerschaften, p. 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