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dak ada hasil yang ditemukan

새 옷을 입고 등장한 후계자

연구 동향과 서평

4. 새 옷을 입고 등장한 후계자

연구 동향과 서평 끝나지 않은 전쟁: 두 개의 한국_이근영 | 81

렀다는 가능성에 더 큰 무게를 실었다. 실제로 우라늄 농축을 했는지 아니면 그렇게 간주되었는지 간에 미국은 북한이 제네바 합의를 ‘몰래 어긴’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편, 김정일 위원장은 우라늄 농축을 둘러싼 워싱턴의 기류를 알지 못한 채, 새로운 경제정책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는 경제정책으로 한 번에 엄청난 변화 대신 단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적용 분야를 넓히고자 했다. 새로운 정책을 준비 하는 정황은 김 위원장이 17년 만에 중국에 방문하기 얼마 전인 2000년대 초반에 포착되었다. 2001년 가을에는 운용‧수익‧결과 및 전문 지식 등 경제정책에 기본 토대가 될 만한 중요한 사항에 대한 지시를 내렸다. 또한 신의주에 특별행정구 (Special Administrative Region: SAR) 건설도 허가했다. 북한이 특별행정구를 발표하자마자, 중국 정부의 반대 입장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신의주 특별행정구 추진사업을 서둘러 중단시킨 이유는 김 위원장이 초대 특별행정구 행정장관으로 임명하려 한 양빈(Yang Bin) 어우야(유라시아) 그룹 회장 때문이었다. 그는 중국 에서 거약의 탈세와 자금 세탁으로 공분을 산 인물로 결국 체포되어 18년 형을 선고받았다. 중국의 개입이 나름 이유는 있어 보였지만 그토록 단호하게 김정일 위원장의 경제 발전 노력을 막아서는 모습은 설득력이 떨어졌다. 가장 큰 이유는 신의주 특별행정구 계획 추진 시 중국과 미리 의논하지 않은 데 있었을 것이다.

함께 묻고 싶었을 것이다. 그의 상태는 창건 60주년 기념식에 자리를 채우지 못 하면서 공개되었고, 2008년 10월 초에 대학 축구경기를 관람하는 모습으로 대신 하였다. 당시 김정일의 행보는 같은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스케줄로 가득했으며, 여위고 허약한 그의 모습은 오래 지나지 않아 북한 주민들이 병환 정도를 인식하게 하였다. 이 즈음인 2008년 9월 북한은 불능화 조치를 뒤집는 영변 핵시설 ‘복구’를 선언한다. 당시 김계관은 크리스토퍼 힐에게 단호하게 “상호 협력이 무너졌다” 이전에 양국의 합의는 “끝났고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덧붙였다.

북한은 미 행정부의 뒷걸음질 치는 모습을 보며 미 정부가 애초 진지하게 임한 것 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억제력을 강화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2009년 2월 미 정보국에서 북한이 장거리 탄도 미사일 실험을 계획하고 있다는 믿기 힘든 정황을 발견할 즈음 오바마 행정부는 침착하게 대응하겠다는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 정책을 채택한다. 그러나 오바마 집권 첫 4년간 미 정부의 대북 정책은 ‘전략적 소극성(Strategic Passivity)’이라는 비판을 받을 만큼 선제적이기 보다는 소극적이었다. 당시 로버트 게이츠(Robert Gates) 국방 장관은 “같은 말을 두 번 사지(Buy the same horse twice) 않는다”라는 말로 시각의 변화를 예고하고 북한과 협상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 취임한 오바마 정부가 부시보다 더 나은 조건을 제시했음에도 북한이 도발 행위를 계속한 이유는 지금도 자주 제기되고 있다. 북한이 원치 않던 6자회담은 계속 진행되었고, 북한 내 권력 승계의 분위기가 달구어지면서 북한 정부가 과거와는 다른 색깔의 외교를 펼칠 것이 확실해졌다. 유엔 안보리 결의안 1874호가 통과된 후, 북한은 강경에서 완화 기조로 돌아섰다. 이 기조의 변화는 북한의 정치적 승계를 뒷받침 하도록 내‧외부 조건을 확립하기 위해 급히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한 클린턴의 방북은 북한에는 해빙 무드를, 김정일에게는 오바마의 취임식 연설처럼 ‘적대감을 내려놓는’ 계기를 제공했을 수 있었지만 미국의 속을 꿰뚫어 볼 기회는 주지 않았다.

2009년 말, 미 행정부가 재정비될 때까지 북미 관계가 또다시 악화되어가고, 북한의 2차 핵실험 관련 보도가 한창이었던 5월 23일에 노무현 대통령이 자살

연구 동향과 서평 끝나지 않은 전쟁: 두 개의 한국_이근영 | 83

했다. 북한은 자발적인 애도의 메시지를 보냈고 8월에 김정일은 남한에 다시 연락할 기회를 잡았다. 이후, 클린턴 방북 몇 주 후 김대중 대통령의 사망(2009.8.18.)은 북한으로 하여금 이명박 대통령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이전과는 다른 부담감을 가진 북측 조문단은 김정일의 대화하자는 메시지를 이명박 대통령에게 전달하기 위해 남한 정부의 부정적인 태도와 언사를 견뎌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대화하자는 간단하고도 명확한 김정일의 메시지는 햇볕정책 을 계승할 생각이 없는 이명박 정부와 남한 국민들에게 더 이상 신선함을 주지 못했다.

2008년에서 2009년 사이, 남북 관계는 악화되었고 북한의 위협은 더 거칠어 졌다. 가장 우려되는 지역인 서해에서는 양국 간 작은 해상 충돌이 이미 여러 번 일어났다. 1년 안에 큰 충돌이 예상되었지만, 김정일은 우회로를 택했다. 2009년 10월 남북 대표는 싱가포르에서 회동을 가지고 3차 남북 정상회담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다. 당시 남한 측 대표인 임태희 수석 보좌관과 김양건 부장의 비밀회담은 상반된 내용으로 전해지며 회담은 끝내 결렬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당시로서는 노무현이나 김대중 대통령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르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기에 남북 정상회담에 소극적이었다.

그 해 11월 개성에서 열린 회담에서 정상회담 이전에 해결해야 할 사항에 대한 남북한 의견차가 크고, 회담 장소 변경을 요청한 남한에 격노한 상황에서 며칠 뒤 남한의 해군 군함이 서해 북방한계선을 넘은 북한의 경비정을 공격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남한 군함은 북한 경비정에 포탄을 쏟아 부었고, 상당한 사상자가 발생한 경비정은 심각한 손상을 입고 후퇴했다. 서해에서의 해상 충돌과 회담 결렬 중 하나만으로는 북한 내 정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기에 부족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두 사건이 합쳐지자 김정일은 청와대에 한 수 가르쳐 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 ‘한 수’는 2010년 3월 26일 밤에 남한에 전해졌다. 남한의 콜베트함인 천안함이 정찰 임무 중 폭침되어 두 동강이 난 후 수 분 만에 바다 속에 가라 앉아 해군 46명이 사망했다. 천안함은 선체 바로 아래에서 폭발한 북한 어뢰의 버블제트 충 격파로 인해 침몰한 것으로 결론을 내려졌다. 그러나 결과보고에 사용한 북한 어뢰

사진이 잘못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연구 결과 역시 신뢰받지 못했다. 이후 러시아 해군 대표단이 그 기록을 살펴보았으나 그들의 결론은 발표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안함 폭침에 대한 의심을 받고 있는 조선인민군 정찰국을 김정일이 태평하게 시찰한 모습은 천안함을 폭침하지 않았다는 그들의 주장에 설득력을 잃게 했다. 이명박 정부 내내 남북 간 비밀 회담이 지속되었지만 양측은 관계를 개선하거나 포용하려는 노력과 비전을 보이지 않았다. 남한 정부는 김정일이 쇠약 해져가고 북한의 현 시스템이 그에 따른 정치승계를 감당할 수준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압박과 북한 내부의 변화를 기다린 것이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북한이 종말을 맞기를 기다리는 것은 효과적인 전략이 아님이 밝혀졌다.

원자바오(溫家寶)의 방북 한 달 후에 김정일은 재앙에 가까운 조치인 화폐개혁 (2009.12.)을 지시한다. 북한 인구의 핵심층을 이루며 부상하고 있는 소비자 계층 에서 특히 반발이 심하다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애초에 북한이 화폐 개혁을 하려 했던 이유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정일이 시장 붕괴를 원했고 개혁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시 시장에서는 판매자와 신생 기업들이 돈을 물 쓰듯 하고 있었다. 화폐개혁은 돈을 재정부로 옮겨갈 수 있게 하면서도, 새 정책이 어떤 혜택을 발생시키더라도 결국에 힘을 가진 대상은 국가라는 사실을 중산층에게 알려줄 기회를 주었다.

당시 화폐개혁은 김정은의 승계를 촉진시키기 위한 거대 계획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화폐개혁 반발은 단순한 실패가 아닌 승계 계획을 완전히 뒤엎을 수 있는 위험을 의미했으므로 희생양이 필요했다. 박남기는 화폐개혁 반발이 심했던 2010년 한 번 모습이 공개된 뒤 1월에 사라졌고 3월에 처형되었음이 공개 되면서 마무리되었다.

천암함 침몰(2010.3.26.) 몇 달 후인 11월 23일 오후, 북한에서 날아온 포탄이 서해 5도 중 연평도 해안에 떨어졌다. 인명 피해와 정부의 발 빠른 대응 부족으로 남한 국민들은 당황하고 격노했으며, 정부는 12월에 또다시 인근에서 군사 훈련을 진행하겠다고 발표했다. 북한의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예상치 못한 자위력’을 행사

연구 동향과 서평 끝나지 않은 전쟁: 두 개의 한국_이근영 | 85

하겠다고 경고하는 모습을 본 마이크 멀린(Mike Mullen) 미 합동참모본부 의장은 서울을 방문하여 상황을 설명하며 이명박 대통령보다 한발 앞서 상황을 통제하고자 했다.

연평도 폭격은 보통 천안함 폭침과 함께 묶여 논의된다. 그러나 두 사건은 근본적 으로 다르다. 천안함의 경우가 북한이 서해에서 패한 것에 앙심을 품은 보복적 조치였다면, 연평도는 북한 인민군 제403군 4대대에 의해 준비된 후 공개적으로 행해진 포격이었으며, 근 몇 십 년간 가장 대규모로 양국 간에 포격이 오고 간 사건이었다.

한편, 김정은의 등장과 더불어 다수의 인력 교체가 발표되면서, 김정은을 도울 인물들이 전면에 등장했다. 2011년 5월, 김정일이 탄 기차가 중국에서 돌아왔을 때 김정은은 환영인사를 위해 역으로 나가 있었으며, TV는 기차에서 내린 핵심 간부단이 이 젊은 후계자에게 고개 숙이는 모습을 공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