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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의 특징

Dalam dokumen 한국의 대북 인권정책 연구 (Halaman 62-71)

의 질적 변환을 의미하였다. 흔히, 동방정책(Ostpolitik)으로 알려진 브란트의 신동방정책은 동독을 대등한 국가이자 대화의 파트너로 인 정하고, 양독 간 교류·협력의 확대를 통해 독일의 내적 통합성을 확보 하는 것이었다.

2.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의 특징: 역사적 일관성

책에 여러 가지 함의를 줄 수 있다. 여러 함의 중에서 인권침해 중앙기 록보존소(Zentrale Erfassungsstelle der Landesjustizverwaltung, 이하 잘쯔기터) 운영, 정치범 석방거래(Freikauf, 이하 프라이카우프) 를 통한 정치범 관련 정책, 동방정책(Ostpolitik)62의 역할과 기능 등 을 중심으로 분석하고자 한다.63

첫째, 서독의 역대 정부의 대동독 인권정책은 각각 강조점의 차이는 존재했지만 기민·기사당 혹은 사민·자민당 연립 정부에 상관없이 서독 기본법에 명시되어 있는 평화 및 통일 명제와 더불어 서독의 독일정책 의 우선순위 중 하나였다.64 서독 정부는 기본권으로서의 인간의 권리 에 대한 지속적 강조를 통해 현실적으로 분단되어 있는 동서독 관계를 초월하여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였다. 서독 정부가 동독 정부에 대해 제기 한 인권사안은 주로 동서독 주민 간 자유로운 이주 확대, 동독 국경 탈출 자에 대한 사살중지, 동서독 주민 간 통신 및 정보 교류 확대 등이었다.

양자적 차원에서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의 진화를 보여주는 두 가지 사례가 있다. 첫 번째 예는 1970년대 동서독 관계가 정상화되면서 체 결된 동서독 기본조약과 관련된 내용이다. 기본조약 체결 이후 독일 내 보수파인 기사당이 집권 중이던 바이에른 주는 기본조약의 내용이 기본법의 ‘통일의무조항’과 위배된다는 헌법소원을 제출했고, 이 결과

62_일반적으로 동방정책이란 비스마르크(Bismarck)에서 콜 총리에 이르기까지의 독일 의 여러 지도자들이 추구한 ‘대 동구정책(Eastern policy)’ 일반을 일컫는 용어이다.

이러한 전통적 의미의 동방정책과 차별되는 의미에서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신동방 정책’이라 일컫기도 한다. 본 연구에서 동방정책은 브란트에 의해 추구된 신동방정책 과 동일한 의미에서 사용하기로 한다.

63_관련된 주요 문헌으로 Heiner Sauer and Hans-Otto Plumeyer, 이건호 역, 󰡔서독 잘쯔기터: 인권침해 중앙기록보존소󰡕 (서울: 북한인권정보센터, 2007); 염돈재, 󰡔독 일통일의 과정과 교훈󰡕; 클레이 클레멘스 지음, 권영세 옮김, 󰡔서독 기민/기사당의 동방정책: 고뇌하는 현실주의자󰡕 (서울: 나남, 2010).

64_염돈재, 위의 책, pp. 82~83.

서독 연방헌법재판소는 위헌여부를 심사하면서 통신비밀 제한 금지, 정보교환 제한 금지, 방송청취 허용, 결사의 자유 허용, 장벽·철조망·지 뢰 금지의 5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다.65 서독 연방헌법재판소의 본 결 정은 서독 내 일부 존재했던 기본조약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켰을 뿐 아니라 연방헌법재판소 차원에서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의 기본골격 을 제공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두 번째 예는 서독의 대동독 경제지원과 이에 따른 동독의 인권개선 노력의 상관성이다. 1983년 6월과 1984년 7월에 서독은 동독에 대해

19억 5,000만 마르크의 차관을 제공하였고, 이에 대한 대가로 동독 정부

는 국경지역의 자동발사장치를 제거하고 여행규제를 완화하였다.66 첫 번째 예가 서독 내 대동독 인권정책에 대한 기본토대를 제공해 주었다 면, 두 번째 예에서는 서독 정부의 대동독 인권정책의 수립 및 실행을 통한 가시적 성과를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은 시대적 상황에 적응하는 기민성을 보였다. 이는 앞에서 언급된 일관성과 연결된다. 1961년 8월 베를린 장 벽의 설치에서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제거에 이르기까지 서독 역대 정부의 대동독 인권정책은 독일정책의 핵심기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 며, 변화하는 국제정치 흐름을 반영했다.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이 직면한 초창기의 도전 중 하나가 동독 측에 의한 1961년 8월 베를린 장벽의 설치였다. 베를린 장벽의 설치는 동서독 체제경쟁이 가열되는 가운데 동독정권의 불안감이 야기한 대외적 조치 였다. 베를린 장벽의 설치 결과, 동서독 간 자유로운 주민의 이동이 차단 되고, 하루아침에 수만의 이산가족이 생기게 되었다. 베를린 장벽 설치

65_위의 책, pp. 85~86.

66_위의 책, pp. 86~87.

이후 서독에서 동독으로의 이주 노력보다 당연히 동독에서 서독으로 의 이주 노력이 확대되었으나, 1961년 8월 베를린 장벽 설치 이후 1989년 11월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수많은 동독탈출 시도자들이 사망 하였다. 서독은 당시 아데나워 총리가 서방과의 통합을 추구하는 힘의 우위 정책을 이행하는 과정에 있었는데, 이러한 사태에 직면하여 베를 린 장벽을 넘다가 사살 당한 동독 주민들의 인권상황을 중심으로 동독 내 인권탄압 상황에 대한 기록을 보존할 수 있는 시설을 설립하였다.67 역사를 도전과 응전의 과정으로 묘사했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

(Arnold Toynbee)의 언급처럼, 당시 서독의 지도부는 동독 정부의 갑

작스런 장벽 설치라는 ‘도전’에 대응하여 ‘중앙기록보존소 설립’이라는 결과물로 ‘응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 한 연구에서는 다 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베를린 장벽 건설은 서독의 무력함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정치 적 사건이었다. … 장벽 건설은 결과적으로 동독에서 발생하는 인권침해에 대한 중앙기록보존소가 설립되는 실질적 계기가 되 었다. 이러한 중앙기록보존소의 설립은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 의 핵심이었다. 소위 장벽살해(Mauertoten) 즉, 국경을 넘는 사 람들에 대한 발포로 인한 사망과 동독의 국경수비대에게 내려진 사살 명령은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의 중요한 주제였다.68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이 보여준 기민성은 비단 양독관계에만 국한

67_1961년 8월 13일 베를린 장벽 설치 이후, 1961년 10월 25일에서 27일까지의 회의를

통해 니더작센(Niedersachsen) 주 법무장관의 일반처분으로 소위 잘쯔기터(Salzgitter) 라고 명명되는 중앙인권기록보존소의 설립이 결정되었다. 인권기록보존소의 초기작 업은 베를린 장벽을 넘어오다 살해 혹은 구타당한 사건들에 대한 인권침해 기록을 통해 기소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Heiner Sauer and Hans-Otto Plumeyer, 이건호 역, 󰡔서독 잘쯔기터: 인권침해 중앙기록보존소󰡕, pp. 26~27.

68_안지호 외,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 p. 98.

되지 않는다. 서독 국내정치적 관점에서도 연정이라는 특성 속에 수많은 논의와 협의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크게는 대동독 정책, 작게는 대동독 인권정책의 영역에서 수많은 이견이 존재했던 것이 또한 사실이다. 클레멘스(Clayton Clenmens) 교수가 표현했듯이 전통적 보수 우파 정당의 연합이었던 기민·기사당 연정은 초기에는 동독을 인 정하지 않고 서독을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하는 대결적 인권정책을 고수했지만, 베를린 장벽의 설치 및 동서 간 데탕트 등 변화하는 국내 외 정세 속에서 ‘이중적 적응(ambivalent adaptation)’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69

한편, 사민·자민당 연정의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은 기민·기사당 연정의 보수적 독일정책에서 탈피하여 변화하는 시대적 흐름에 적극 동참하여 동독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들과의 새로운 관계 정립 및 소련 과의 새로운 관계 정립으로 이루어진다. 특히, 서베를린 시장 출신인 빌리 브란트 총리는 시장 재직 당시 소련에 의한 베를린 봉쇄를 목격 한 바 있다. 이에 기민당의 아데나워 총리가 서방과의 통합을 추구하 는 ‘힘의 우위 정책’을 통해 독일정책의 근간을 구성했다면, 사민당의 브란트 총리는 ‘접근을 통한 변화’라는 정책적 변화를 통해 변화된 시 대상을 반영하며 동독과의 관계개선에 힘썼다.

역사적 적응성 혹은 기민성의 영역에서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은 힘을 발휘하였다. 브란트의 신동방정책이 추구한 ‘연속과 개혁’의 명제

69_클레멘스, 󰡔서독 기민/기사당의 동방정책: 고뇌하는 현실주의자󰡕, pp. 32~40. 기민·

기사당 연정이 1969년 이후 실행된 사민·자민당 연정의 동방정책의 필연성에 대해 어느 정도 동의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동방정책의 근본적 전제인 유럽 내 현상유지 수용을 통한 독일통일 및 안보강화라는 명제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위의 책,

p. 35 참조. 이로 보건대, 기민·기사당의 이중적 적응 현상은 장기적 차원에서 독일

단일성의 포기 혹은 통일철학의 변화라기보다는 당시 국내외 정치현실의 반영이라 는 단기적 차원으로 해석할 수 있다.

는 바로 서독의 대동독 정책에 있어서의 특성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즉, 역사성을 가지되 동시에 시대의 변화에 부응한다는 것이다. 브란트 의 대동독 정책으로서의 동방정책을 통해 서독과 동독 간 인적·물적 교류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서독은 외교정책에서 동독을 배제하는

‘할슈타인 독트린’의 근본적 폐기를 결정하고, 국제무대에서 동독을 정상

국가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두 개의 독일을 통한 평화공존이라는 목표 가 실현된 것이다. 또한 사민·자민당 연정의 신동방정책은 독일 분단

이후 1969년까지의 정책이 양독관계를 악화시키고, 효율적이지 못했

다는 판단에 기인했다.70 대결 일변도의 정책보다는 ‘접근을 통한 변

화’ 혹은 ‘화해를 통한 전환’ 정책이 더 효율적이라는 뜻이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에 대해 당시 야당으로 전락했던 기민·기사당의 수많은 정치인들은 극렬한 반대와 비판을 감행했다. 가장 핵심적 사안은 하나의 독일이라는 법적 명제 혹은 독일의 국가 단일성이라는 정책적 목표가 동서독 관계의 사회·문화적 적응이라는 현실과 타협 가능하냐 의 문제였다. 서독 내 정통우파의 입장은 독일 문제를 당분간 유럽적 틀 속에서 미완성 과제로 남기는 것이 독일 전체의 미래에 이바지 한 다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우파의 생각에 비해 브란트가 주도한 사민·

자민당 연정의 경우 사실상의 분단이라는 현상을 인정하고, 객관적 현 실인식 위에 실질적인 협력을 모색하겠다는 것이었다. 동서독 정치사 에서 있었던 수많은 조약과 논쟁 중에 1970년대 초반, 브란트의 동방 정책을 둘러싼 서독 내 논의는 단연 눈에 띈다. 그 당시 동방정책을 둘 러싼 다양한 의견들과 논쟁들을 모두 소개하는 것은 본 연구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다. 하나 주목할 사실은 동방정책을 둘러싼 다양한 논쟁

70_위의 책, pp. 106~120.

Dalam dokumen 한국의 대북 인권정책 연구 (Halaman 6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