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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 역사적 시기구분과 정책의 함의

Dalam dokumen 한국의 대북 인권정책 연구 (Halaman 59-62)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은 독일정책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다. 독일 정책은 동서독 관계를 중심으로 한 모든 종류의 정책을 일컫는 말이다.

서독의 초대총리 아데나워(Konrad Adenauer)에서 통일총리로 일컬 어지는 콜(Helmut Kohl)에 이르기까지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은 독일 정책의 핵심을 구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서독의 외교정책 을 중심으로 한 독일정책에 대한 연구에 비해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 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적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대동독 인권정책이라는 용어가 가지는 생소함이다. 즉, 독일 연구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내독정책 혹은 독일정책이라는 용어는 통용되는 용어지만, 인권정책이라는 용어는 그리 통용되는 용어가 아니었다.

두 번째 이유는 서독의 독일정책에 있어 대동독 인권정책이 하나의 독 립적 정책분야였다기보다는 독일정책이라는 큰 틀 속의 하위 분야였 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서독의 대동독 외교관계에 있어 대동독 인 권정책이 명시적으로 수립·실행되었다기보다는 동독 주민의 인권을 다루는 사안은 내독관계의 틀 속에서 진행되었다는 뜻이다.59 이러한 연구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본 장에서는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이라 는 용어를 쓰기로 한다. 그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독관계사 에서 서독과 동독이 서로를 두 개의 대등한 국가로 인정하기까지 상당 한 기간이 걸렸으며, 주권에 관한 한 서로 양보하지 않았으나, 서독의 경우 인권 혹은 인도적 차원의 정책들은 이러한 국가승인 문제와 상관 없이 지속적인 정책의 틀 속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관 점에서 ‘대동독 인권정책’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동독이라는 국가와 상관없이 그 정권 혹은 체제 내의 주민들에 대한 정책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에 있어 통일이라는 명제가 어 디까지나 최종목표였지 가시적 목표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통일독일 사례의 기본적 교훈의 하나는 인권 및 자유라는 기본적 가치에 천착할 때 통일이라는 거시적 목표가 실현되었다는 점이다.

독일정책의 관점에서 시기를 구분해보면 크게 ‘대결적 독일정책’ 혹 은 ‘대결적 인권정책’으로 규명되는 1기(1949~1961년), ‘실용적 인권 정책’으로 명명할 수 있는 2기(1961~1969년), 브란트(Willy Brandt) 총리 집권 이후, 동독과의 화해·협력이 강조된 ‘실용적 인권정책’의 3기

(1969~1989년)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60

59_안지호 외,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 KINU 정책연구시리즈 13-06 (서울: 통일연 구원, 2013), pp. 9~10.

독일정책의 관점에서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을 분석해보면 그 함의 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독일연방공화국(Federal Republic of Germany:

FRG)과 독일민주주의공화국(German Democratic Republic: GDR) 의 성립에서부터 베를린 장벽 설치(1961년)에 이르는 기간까지의 ‘보 수적’ 기간이다. 당시 아데나워 총리는 분단 이후의 현실적 장벽을 인 정하지 않고, 동독을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독일정 책의 관점에서 서방과의 통합을 우선 추구하는 ‘힘의 우위 정책’을 주 도했다. 독일 내외의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아데나워 총리의 힘의 우위 정책은 서독의 경제와 민주주의 발전, 세계적 차원의 냉전체제의 등장 등과 맞물려 서독 창설 초기의 사상적 뒷받침을 제공하는 주요한 정책 중 하나였다.61

둘째, 1961년 동독의 베를린 장벽 설치 이후 아데나워 정부의 힘의 우위 정책은 국내외적 변화의 요구에 직면하게 되었다. 베를린 장벽의 설치는 동서독 관계의 본질을 뒤흔드는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 다. 아데나워 이후 서독의 에어하르트(Ludwig Erhard) 총리와 키징 거(Kurt Georg Kiesinger) 총리는 이러한 시대적·상황적 변화에 직 면하여 아데나워의 노선을 부분적으로 탈피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두 총리 모두 기민당(Christlich-Demokratische Union: CDU) 출신이 라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베를린 장벽 설치 이후 1960년대 서독의 대동독 정책의 기조는 분단현실 속의 한계를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동서독 간 새로운 관계정립의 기반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셋째, 1969년 사민당(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hlands: SPD) 브란트 총리의 등장은 기존의 서독의 독일정책 혹은 대동독 인권정책

60_위의 책, pp. 9~15.

61_염돈재, 󰡔독일통일의 과정과 교훈󰡕 (서울: 평화문제연구소, 2010), pp. 63~70.

의 질적 변환을 의미하였다. 흔히, 동방정책(Ostpolitik)으로 알려진 브란트의 신동방정책은 동독을 대등한 국가이자 대화의 파트너로 인 정하고, 양독 간 교류·협력의 확대를 통해 독일의 내적 통합성을 확보 하는 것이었다.

2.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의 특징: 역사적 일관성

Dalam dokumen 한국의 대북 인권정책 연구 (Halaman 59-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