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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대 정부의 대북 인권정책

Dalam dokumen 한국의 대북 인권정책 연구 (Halaman 37-47)

변화를 위한 여러 국가의 협조체제는 어떠해야 하는가? 특정 국가의 인권 상황 변화가 중요한가? 혹은 그 인권정책을 수행하는 국가의 대 외 신인도 혹은 일관성이 중장기적으로 더 중요한가? 이 질문들은 인 권정책의 이행에 있어서의 다양한 고려 요소를 상정할 때 필수적으로 던져야 할 질문들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현실정치에서 완벽한 의미의 일관성을 확보한 인권정책을 실행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국가들 간 관계에서 최소한 안보와 평화에 대한 목표는 가장 큰 정책 적 우선순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별성, 일관성, 효율성, 협조성의 측면에서 인권정책을 수립할 때 어느 정도의 비일관성은 염두에 두어 야 한다.34

4. 한국 역대 정부의 대북 인권정책: 양자적 차원을

전에 우선 강조점을 두고 다자적 차원의 대북 인권정책의 측면에서는 소극적 태도를 보였다. 즉, 북한인권 문제에 관한 한 ‘조용한 외교’를 지향하였다. 참여정부 또한 국민의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을 계승하였 으며, 국제사회의 북한인권 관련 결의에 불참하거나 기권하였다. 이명 박 정부는 전임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 인권정책이 남북관계 발 전이라는 명분에 갇혀 제대로 수행되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보편적 인 권관에 기반한 대북 인권정책을 추구하였다. 그 결과 양자적 차원에서 는 북한인권 문제에 대해 명시적으로 접근하였고, 다자적 차원에서 국 제사회 특히 유엔에서의 대북인권결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찬성표 를 던졌다. 또한, 유엔의 대북인권결의안을 공동제안하였다.

집권 2년 차를 보내고 있는 현 정부의 경우 이러한 역대 정부의 대 북 인권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취할 것은 취하고, 고쳐야 할 것은 고쳐 야 할 과제를 안게 되었다. 한국의 대북 인권정책을 역사적 관점에서 분석·기술하는 것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을 수 있다. 한국의 대북 인권 정책을 이론적·비교적 관점에서 사안별·정책별로 분석하려는 본 연구 의 특성상 이하에서는 한국 역대 정부의 대북 인권정책을 간략히 비 교·분석하되 우선 양자적 차원과 다자적 차원으로 나누어 보고, 앞서 제기된 이론적 패러다임을 중심으로 지속성과 변화를 위주로 평가해 보고자 한다.

가. 김대중 정부의 대북 인권정책

(1)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와 정책환경: 화해협력정책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은 한마디로 화해협력을 통한 남북관계 발 전 도모였다. 햇볕정책으로 대변되는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은 남북

관계의 실질적 개선을 가장 큰 지상목표로 삼았다.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한 1998년, 북한은 고난의 행군 기간을 겪으며 국가적 대위기에

처해 있었고 국제사회에 지원을 요청하는 상황이었다. 국민의 정부는 무력도발 불용, 흡수통일 배제, 화해협력 적극 추진의 3대 정책기조를 통해 북한 정권 붕괴론을 불식시키고, 대규모 지원을 통해 북한이 처 한 대내외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 대북정책의 주안점을 두었다.35

남북 정상 간 정상회담의 가능성이 무르익던 가운데, 2000년 6월 15일 남북관계 역사상 최초로 남북 최고지도자 간 정상회담이 개최되었고, 이 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북공동선언을 채택하였다.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 간 다양한 논의가 급속도로 진행되 면서 이산가족, 납북자, 국군포로 사안 등 양측 간 누적되어 온 문제들 이 서서히 풀리는 듯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김대중 정부는 남북관계 의 발전을 통한 점진적 화해 과정을 통해 핵문제를 위시한 북한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도모하고, 한반도 분단이라는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는 것을 시대적 과제로 삼았다.36 대규모 인도적 지원과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통한 교류·협력의 증대는 사회권을 중심으로 한 북한 사회 개 발과 연결되었다.

국민의 정부의 화해협력정책에 힘입어 남북한 간 활발한 인적·물적 교류가 진행되었다. 인적 교류 상황을 보면, 남한 주민의 북한 방문의 경우, 1997년까지 2,405명에 불과했으나, 국민의 정부 집권 이후 방문 이 급증하기 시작하여 2002년 말 기준으로 37,572명에 달하였다. 북한 주민의 남한 방문의 경우, 1994년부터 1998년까지는 한 건도 없었으나,

2002년 한 해만 봤을 때 1,052명을 기록하였다. 국민의 정부 하 양적으

35_통일부, 󰡔1998 통일백서󰡕 (서울: 통일부), pp. 13~15.

36_임동원, 󰡔피스메이커: 남북관계와 북핵문제 20년󰡕 (서울: 중앙 books), pp. 76~135.

로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 급증한 인적 교류의 배경으로 정부가 추구했 던 정경분리 원칙에 기반한 대북화해협력정책의 지속성, 북한 내 경수 로 건설사업 추진, 이산가족 상봉행사 진행, 사회문화 협력사업 추진 등의 요소들을 꼽을 수 있다.37

김대중 정부 하 한반도에서 남북관계가 해빙되는 사이, 국제사회는 북한에 대한 관심을 집중하였다. 특히, 국제사회는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이후 급격히 쇠퇴한 북한 체제의 기능에 주목하였다. 수백만 명 이 아사하고, 사회주의 체제의 특징으로 여겨졌던 배급체계, 무상의료·

무상교육이 붕괴되면서 북한체제는 총체적인 구조적 모순에 직면하게 되었다. 한편, 정권 차원의 정치범수용소 및 여러 구금시설 등의 실태 가 점증하는 탈북민에 의해 드러나면서 국제사회는 긴급 구호 및 인도 적 지원에 집중함과 동시에 정권 차원의 인권탄압을 지적하기 시작했 다. 여러 국제 비정부기구들도 북한인권에 대한 관심을 높이며, 북한 당국의 개선을 촉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이러한 국제 사회의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인권이라는 주제가 지나치게 민감한 주제로서 변화하 는 남북관계의 동학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정부 차원의 정 책적 판단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소극적인 대북 인권정책은 변화하는 국제사회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한계와 비판에 직 면하게 되었고, 활발한 남북 간 교류에도 불구하고 북한 주민의 자유 권을 중심으로 한 인권 개선 노력은 상대적으로 저조하였던 것으로 평 가되었다.

37_김형기, 󰡔남북관계 변천사󰡕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10), pp. 276~277.

(2) 김대중 정부 하 북한인권 문제

김대중 정부 하 북한인권 문제는 경제적·사회적 차원에서의 북한주민 전반의 삶의 질 향상을 의미했다. 따라서 북한 내 관리소 및 교화소, 집결소 등 여러 구금시설에서 일어나는 북한 주민들의 자유권 침해에 대해서는 소극적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한국 사회 내 진보 와 보수의 이념갈등도 격화되어 북한인권 중 자유권을 중시하는 보수 와 사회권을 중시하는 진보 간 그 갈등의 골이 더 깊어졌다. 하지만 동 시에 국민의 정부 시기, 여러 NGO 및 시민단체들의 역할이 확대되기도 했다. 이는 한국 사회 내 시민사회의 활성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38 국민의 정부 하 북한인권 문제는 안정적인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명시 적으로 제기되지 않았고, 정부 또한 조용한 외교로 일관하였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 인권정책은 인도적 지원을 중심으로 한 북한 내 사회권 증진에 국한되었으며, 이에 따라 국제사회에서는 소극적 입장으로 일 관하게 되었다.

국민의 정부는 특히 1990년대 어려움을 겪은 북한의 인권 상황 중 식량난에 주목하여, 인도적 위기 상황 극복을 위한 구호에 정책의 최 우선 역점을 둔 것으로 파악된다. 국민의 정부는 이러한 북한인권에 대한 인식 하 대북 인도적 지원을 추구하되, 우선 정부 차원의 직접적 지원 방식과 국제기구를 통한 간접적 지원 방식을 병행하고, 대북 지원 민간단체의 활동을 정부기금으로 보조하는 방식을 취했다.39 또한 국

38_기본과제 자문회의, 선문대 박흥순 교수, 2014년 9월 25일.

39_국민의 정부 하 정부의 직접지원과 국제기구를 통한 간접지원의 총액은 2억 7천만 달러로 알려져 있다. 이수훈, 󰡔북한인권 개선을 위한 중·장기 정책 및 로드맵 구축:

제도적 기반 확립 및 Action Plan 수립을 중심으로(국가인권위원회 연구용역보고 서)󰡕, p. 144.

민의 정부는 남북 간 인도적 사안의 해결을 위해 남북 간 이산가족 문 제해결에 초점을 맞추었다. 앞서 언급된 정상회담의 결과 채택된 남북 공동선언의 결과 남북 간 이산가족 상봉문제도 탄력을 받게 되어 총

6차례의 상봉행사가 진행되었고, 그 결과 총 6,210명의 가족이 상봉하

였다. 직접상봉 이외에 생사확인을 통해 확인된 인원도 14,303명이었다. 또한, 2002년 9월 6일부터 8일까지 진행된 제4차 적십자 회담을 통해

‘전쟁시기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자들’에 대한 생사확인 문제에 대한 협의가 있었는데, 이는 이산가족 상봉문제 뿐만 아니라 납북자 및 국군 포로에 대한 남북 간 제도적 협상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의의를 가진다.40

나. 노무현 정부의 대북 인권정책

(1)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와 정책환경: 평화번영정책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은 평화번영정책이다. 전임 정부인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의 전통을 이어 받은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는 대 규모 대북 지원을 통해 남북관계의 선순환적 협력관계를 도모하였

다.41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

방위원장은 2000년 정상회담에 이어 남북 간 긴밀한 협력을 도모하였 고, 한반도의 평화를 추구하는 데 합의하였다.

특히, 노무현 정부는 ‘동북아균형자론’을 통해 한국이 한반도의 중심 이 될 뿐만 아니라 동북아의 중심축 역할을 통해 균형외교를 펼칠 것

40_이수훈, 󰡔북한인권 개선을 위한 중·장기 정책 및 로드맵 구축: 제도적 기반 확립 및 Action Plan 수립을 중심으로(국가인권위원회 연구용역보고서)󰡕, p. 144; 김형기,

󰡔남북관계 변천사󰡕, p. 266.

41_통일부, 󰡔2004 통일백서󰡕 (서울: 통일부), pp. 238~247.

Dalam dokumen 한국의 대북 인권정책 연구 (Halaman 37-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