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주민의 의식과 태도 변화는 북한 내부요인에 의해 추동될 뿐
아니라 외부환경과의 상호작용과도 관계가 있다. 북한주민 의식의
변화가 시간, 공간, 그리고 구성원의 특성에 따라 외부의 변화를 수
용하는 과정이자 결과임을 고려할 때 이 역시 남북관계 및 한반도
주변정세에 영향을 미치는 국제환경과 분리될 수 없는 구조이기 때 문이다.82)
남북한은 냉전기의 체제경쟁 및 대결 시기를 거쳐 1980년대 후반 부터 급변하는 탈냉전의 국제질서 속에서 외부변화를 수용하면서
체제안정, 관계발전, 통일 지향의 길을 모색해왔다. 1990년대 중반
북한의 식량난과 대규모 기근은 인도적 지원을 위한 북한 당국과의
접촉 및 대화와 협상 등을 수반하는 유엔 및 국제사회의 개입을 초래
하였다. 남북한 차원에서는 김영삼 정부가 1995년 쌀 15만 톤을 북
한에 제공함으로써 대북지원이 시작되었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부터 2000년대 말까지 지원을 확대해 나갔다. 남북한 인적 왕
래 역시 1990년대 중반 이후 경제, 사회문화, 대북지원 등과 관련하
여 꾸준히 늘어났으며, 2000년대에는 금강산관광 및 개성공단사업
이 활발해지면서 남북경제협력은 급격히 확대된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 의해 대북 포용정책이 추진됨에 따라 정부와 민간 차원의 다
양한 교류와 접촉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반된 정보와
문화의 유입, 인적 접촉의 기회는 북한주민들의 의식과 태도에도 영
향을 미치게 되었다.
Ⅲ장에서는 1990년대 중반 이후 북한주민 의식 변화에 영향을 미
82) 전재성, “국제환경 변화와 남북관계에 대한 영향,” 신종호 외, 전환기 남북관계 영향 요인 및 향후 정책 방향(서울: 통일연구원, 2006), p. 201.
친 외부환경을 국제환경 및 남북관계의 변화로 나누어 살펴본다. 탈
냉전기 북한의 지역질서 인식과 대외정책은 국제관계 차원의 변화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환경의 주요 변화를 간략히 살펴보고, 북한의 생존과 번영, 외부와
의 교류 및 타문화와의 접촉, 북한 내 정보와 문화 유입 차원에서
한국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주요 시기별로 분석하고자 한다.
가. 국제환경의 변화
198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탈냉전은 동북아 국제정치뿐 아니
라 남북한의 대외환경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전통적인
미소 대결구도에서 형성된 양극체제가 1989년 동구 사회주의권 붕 괴와 1991년 소련의 해체로 미국의 단극체제로 전환된 것이다.83) 미국 중심의 단극체제는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한반도 를 둘러싼 동아시아 지역 질서를 규정하는 힘으로 작용하였다. 미국
의 클린턴(Clinton) 행정부는 1990년대 초중반 경제적 호황을 바탕
으로 ‘관여와 확대(Engagement and Enlargement)’라는 대외정책
을 통해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와 자유시장 및 민주주의 가치를 확산
하는 데 적극적이었다.84) 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미국의 관여정책은 전통적인 냉전시기 소련에 적용했던 봉쇄정책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이었고 이는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국제정치의 역학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990년대 국제환경의 변화는 한국의 노태우 정부 이후 김영삼 정
부, 김대중 정부 시기 외교 및 대북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대외
83) 전재성, “분단 70년의 국제환경, 대내구조, 남북 관계의 조명,” 통일정책연구, 제 24권 1호 (2015), p. 19.
84) The White House, “A National Security Strategy of Engagement and Enlargement,”
(February 1996), pp. 11~12.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1994년 김일성 사후 김정일 집권 초기의 대외환경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미소 간의 데탕트와 함께 한국은 1989년~1990년 동구권 국가들과의 수교를 시작으로
1990년 한소수교, 1992년 중국 및 베트남과 수교를 거치며 냉전체
제 종식이라는 국제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85)
한국의 북방정책 및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수교 및 관계 개선과 같
은 전향적 조치들은 북한에게는 상당한 충격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
었다. 북한은 탈냉전의 국제정세 변화가 구조적인 방향 전환이라기 보다는 일시적 동요 현상으로 간주하고 ‘우리식 사회주의’, ‘조선민 족제일주의’, ‘사회주의대가정론’ 등을 내세움으로써 내부동요를 막 고 사상통제를 강화하는 모습을 보였다.86)
따라서 이러한 외부환경의 변화가 북한의 대내외 정책의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 요인으로 단정할 수는 없으나 최소한 북한 당국으로
하여금 ‘심각한 딜레마’를 초래한 것은 사실이다.87) 즉 국제질서의
변화와 관계없이 체제응집, 고립노선, 비타협성을 고수하는 것과,
북한 체제에 정치적 도전이 될 수 있지만 제한적인 대외개방, 국제
사회와의 관계 설정, 남한과의 관계 개선 조치 등의 사이에서 선택
을 해야 했다.88) 북한의 선택은 대체로 후자 쪽이었다.
1991년 9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은 국제사회가 북한의 주권을 제
도적으로 인정함으로써 국제사회의 행위자로 수용하게 된 것을 의
미하며, 북한으로서는 타국과의 외교, 조약 체결 등 국제사회와 대
화와 협상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상황의 변화를 의미했다. 북한이 분
85) 우승지, “남북관계 연구: 검토와 과제,” 국제정치논총, 제46집 1호 (2007), p. 165.
86) 허문영, “북한의 대외정책 현황과 전망,” 민족통일연구원 엮음, 북한의 대외관계 변 화와 남북관계 전망(민족통일연구원 국내학술회의, 1996.11.11.), p. 57.
87)한승주, “북한의 대미관계,” 유세희․이정식 공편, 전환기의 북한(서울: 대한교과 서주식회사, 1991), p. 208.
88) 한승주, “북한의 대미관계,” p. 208.
단 이후 적대관계를 유지해 온 미국과 경수로 지원 및 관계 정상화를 핵심으로 하는 1994년 ‘제네바 합의(Agreed Framework)’를 이룬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미국 주도 질서의 기반 아래서 형성된 동아시아 국제관계는 2000
년대 중반부터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중국의 부상으로 인해 미국
패권 중심의 단극시대가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연평균 9% 수준의 고속성장률을 기록하며 2005년에는 제3위 무역국으로, 2010년에는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무역대국으로 부
상한다. 중국은 경제성장과 발전을 바탕으로 국제사회에서의 영향
력을 점차 확대해 나갔고 2000년대 중반에는 이른바 ‘G2(Group of
Two)’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2005년 부시 2기 행정부에서는 중국의
경제력 및 군사력 증강, 그리고 주변국가에 미치는 영향력 확대를 위
협으로 간주하는 이른바 ‘중국 위협론’이 공식적으로 제기되었다.89)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전후로 미국과 중국의 변화는 더욱 뚜렷
해진다. 미국의 패권은 상대적으로 쇠퇴하는 반면 중국은 지속적 경
제성장 및 국방력 강화를 통해 새로운 글로벌 파워이자 중심축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물론 미국은 여전히 강대국으로 막강한 세력과
주변국에 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1990년대부터 미중 간 경제적 상호의존이 심화함에 따라 중첩되는 이익에서 대결과 충돌보다는 경쟁과 협력관계를 유지해온 것이 사실이다.90)
그렇지만 미국 내에서는 중국의 부상이 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이익을 침해할 수 있으며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89) 김흥규, “미국 오바마 행정부의 출범과 전략적 미․중관계의 형성,” (IFANS 주요국제 문제분석, 2009.2.16.), p. 2. <http://www.ifans.go.kr/knda/ifans/kor/pblct/
PblctView.do> (검색일: 2018.7.16.).
90) 김흥규, “전략적 경쟁에서 전략적 협력으로: 미중관계 변화와 한국에의 함의,” 중소 연구, 제33권 3호 (2009), p. 22.
관측이 제기되었다. 반면 중국에서는 자국의 경제․군사력을 바탕으
로 국익을 위해 주변국에 대해 적극적으로 관여해야 한다는 ‘중국
역할론’이 부상하였다. 이러한 미중 간의 상이한 인식과 상호 경계
태도는 동아시아 역내 질서에 새로운 양상을 가져왔다. 글로벌 차원
에서 미중관계의 경쟁과 대결 구도가 점차 명확해짐에 따라 동아시
아 국제관계의 역학 또한 달라진 것이다. 2002년 ‘화평굴기(和平屈
起)’를 지향하는 후진타오(胡錦濤) 체제 등장,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2011년 미중정상회담 시기까지는 기존 패권국 미국과 도전국 중국 간의 세력균형 변화를 보인 시기였고 동아시아 내의 협력과 경쟁 구도 역시 점차 복잡해지는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중국의 부상과 주변국에 대한 영향력 확대는 한반도의 지
정학적 상황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한국은 북한의 핵위협으로 인한
안보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남북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함과 동시에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면서 중국과의 협력을 확대하는 기조를 유 지했다. 2006년과 2009년 북한의 1, 2차 핵실험은 미국으로 하여금 북한 핵문제 대응과 비확산 목표를 위해 ‘북한문제’에 보다 깊이 개 입하게 된 계기를 제공했다. 이와 함께 2차 북핵 위기 중 출범한 후 진타오 정권 역시 북핵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91) 2003년부터 2008년까지 진행된 6자회담은 북핵문제에 있어 중국의 역할이 새롭게 부각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99년 6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단장으로 한 북한
사절단은 중국을 방문하여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회복하기로 하였고,
러시아와는 2000년 2월 친선․선린 및 협조조약을 공식 체결하였
다.92) 김정일 정권은 대내적으로 사회주의강국 건설, 미국의 일극
91)우승지, “김정일-후진타오 시대 북중관계에 대한 고찰,” 한국국제정치학회 학술대 회 발표논문집, (2006.12.), p. 317.
92) 김국신, 미국의 대북정책과 북한의 반응(서울: 통일연구원, 2001), p. 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