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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인별 북한주민 의식 변화

지금까지 남북한의 접촉 경험을 통해 북한주민들의 의식이 어떻

게 변화되었는지 살펴보았다면, 2절에서는 남북교류의 현장 내에서 도 시기, 공간, 출신 성분, 성별, 세대 등의 요인에 따라 북한주민의 의식 변화가 다르게 나타나는지, 만약 그렇다면 요인별로 어떤 차이 가 있는지 살펴본다.

2절의 분석 내용은 남북 간 접촉을 전제로 교류협력 및 인도적 지

원사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목격되는 북한주민 의식 변화이므로

본 절에서 제시하는 요인들 하나하나가 북한주민 의식 변화에 영향

을 미치는 독립변수라고 확정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심층면접 대상

자들이 접촉지대 내 관찰자로서 경험했던 시기, 공간, 출신 성분, 성별, 세대별 의식 변화의 다양성을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가. 시기별 의식 변화

Ⅱ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본 연구에서는 북한 내부의 변화 양상을

중심으로 ‘충격기(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조정기(2000

년대 중반~2010년대 초반)’, ‘전환기(2010년대 중반~현재까지)’의 세 시기로 나누었다. 이와 같은 구분은 남북관계의 변화, 정치적 상

황 등 다양한 내외부적 요인을 반영하고 있으며, 남북한교류협력과

인도적 지원사업에도 영향을 미쳐왔다.

‘충격기’로 규정한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의 기간은 남북교류협력 및 대북 인도적 지원 준비가 이루어진 시기이자 대북

사업이 시작된 시기이다. ‘조정기’는 노무현 정부 시절 남한의 대북

정책과 북한의 필요가 맞아떨어지면서 남북교류협력 및 인도적 지

원사업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다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상당

수 사업이 중단되었던 시기이다. ‘전환기’에 들어서는 남북한교류협 력과 인도적 대북지원사업이 진행과 중단, 재개를 반복한다.

그러나 남북한 내외부 요인들이 남북 간 사업의 안정성과 인과관

계가 있다고 해서 북한주민들의 의식에도 반드시 영향을 미쳤던 것

은 아니다. 2절에서는 남북한주민의 접촉지대에서 북한주민 의식이

‘시기’라는 조절변수에 의해 영향을 받는지, 만약 그렇다면 시기별로

어떠한 변화가 나타나는지 살펴본다.

먼저 본 연구에서 충격기(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로 규정

한 시기이다. 김대중 정부는 정경분리 원칙을 통해 경제협력사업과

사회문화교류, 인도적 대북지원사업을 남북관계를 둘러싼 정치적 환경으로부터 분리하려고 시도하였다. 북한은 1994년 김일성 주석

의 사망과 1990년대 중반 두 차례의 대홍수로 인해 극심한 식량난과

경제난에 봉착하면서 처음으로 국제사회에 인도적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남북한교류협력 및 인도적 지원사업을 준비하고 있던 정부 기

관 및 민간단체들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 대북지원을 시작하였다.

1999년 후반부터 2000년 초반에는 남북한 모두 남북교류사업에

대한 준비가 잘 되어 있는 상태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으며, 북한 입장에서도 이 시기는 남한 당국과 단체들에 대한 경계와 탐색의 시 기였다. 대북지원 사례8은 이 시기를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처음에 북한 입장에서는 남한의 지원단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 는지가 궁금하지 않겠어요? 어느 정도 규모로 지원을 해줄 수 있는 단체인지 감별을 하는 거죠. 북한도 준비가 안 돼있었던 것은 마찬 가지였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저희 단체 같은 경우에 초기에 우리가 보건의료 분야를 지원하려고 하니까 민경련으로 물자를 보 냈는데 민경련과 사업을 해보니까 규모나 성격이 안 맞는 거죠. 그 러면 북한에서 이 사업을 빨리 민화협으로 넘기던가 해줘야 되는데

북측도 별 관심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몇 년간 서신을 보내도 답이 없었어요. (대북지원 사례8)

조정기(2000년대 중반~2010년대 초반)의 초반부 노무현 정부는

남북 간 교류협력을 적극적으로 확대하여 평화를 추구하겠다는 기 조를 갖고 있었다. 북한에서는 2004년 용천역 폭발사건이 발생하였

고, 국제적십자연맹(IFRC) 평양사무소에 구호를 요청하였다. 이 사

건은 남한 정부와 지자체, 비영리단체(NPO)와 비정부기구(NGO) 등

의 인도적 대북지원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189) 즉, 남한 정부의 대북정책 방향과 북한의 필요가 맞아떨어지면서 남북교류협력 및

인도적 지원사업의 규모와 분야를 적극적으로 확대할 수 있었다. 예

컨대 2004년 남북경제협력의 일환으로 개성공단사업이 시작되었 고,190)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도 본격화되었다.191)

조정기의 전반부(2001년~2017년)는 남북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만큼, 1절에서 살펴보았던 북한주민 의식의 변화가 비교적 뚜렷하게

관찰되었던 시기이다. 그러나 이 시기 남북관계가 좋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북한은 2006년 7월 장거리미사일 발사, 10월 1차 핵실험,

2009년 5월 2차 핵실험을 강행하는 등 군사적 도발을 지속했다. 북

189)황수환, “지방자치단체와 시민참여형 남북교류협력 추진 방향,” 󰡔새로운 한반도 평 협력의 시대 어떻게 열어갈 것인가󰡕(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제23차 남북관계 전문가 토론회 자료집, 2018.8.28.~8.29.), p. 49.

190) 2000년 8월 9일 남쪽의 현대아산과 북쪽의 아태, 민경련 간 ‘개성공업지구건설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 이후 북측이 2002년 11월 27일 「개성공업지구법」을 공포하였 고, 12월 남측의 한국토지공사, 현대아산과 북측의 아태, 민경련 간 ‘개발업자지정 합의서’를 체결하였다. 2003년 6월 개성공단 착공식을 가졌고, 2004년 6월 시범단 지 2만 8,000평 부지 조성을 완료했다. 2004년 10월에는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 사무소를 개소하였고, 2004년 6월 시범단지 18개 입주업체 선정 및 계약을 체결, 2005년 9월 본 단지 1차 24개 입주업체 선정 및 계약으로 본격 가동되었다.

191) 남북한은 2004년 하반기부터 통일국어사전 편찬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다가 2005년 2월 공동편찬위원회를 결성, 남한에서는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가 만들 어지면서 사전 편찬 작업이 본격화되었다.

한주민들은 남북교류의 접촉지대에서 북한의 도발에 대해 남한과 다르게 알고 있거나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행태를 보였다.

2006년에 1차 핵실험을 했을 때, 민간단체들이 지원사업 하러

북한에 들어가면 북한사람들이 핵실험에 대해 자랑스럽게 얘기해 요. 북한의 기술이 그만큼 발전한 거고, 미국한테 자신들의 힘을 보여준 것이라고. 2009년에 2차 핵실험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예요.

그때도 방북을 계속 했었는데 핵실험에 대해 매우 자랑스러워했어 요. (대북지원 사례8)

유엔 등 국제사회 대북제재와 2010년 천안함 사건 이후 남한 정부

의 5․24조치에 대해서도 개성공단 내 북한 직원들은 남한 측 분위

기와 상반되는 인식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남한이나 미국을 공격하려고 핵이나 미사일을 만드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혹시 우리가 공격을 받으면 자위수단으로 쓰려고 하는 건데 그것도 못 만들게 하고 제재를 합니까?” (개성공 단 사례1)

일부 단체의 대북사업은 북한의 도발, 남한 정권의 대북정책 변화

등 정치적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했다. 예를 들어,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던 2007년에 만들어 놓았던 남북합의서에 근거하여 2010

년 천안함 사건 이후 북측에 물자를 보내려고 하면, 통일부에서는

새로운 합의서를 갖고 오라고 요구하였다. 북한의 민화협 같은 기관

은 남한 정부의 정책 변화에 따른 이러한 요구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한이 물자를 지원받기 위해 합의서를 새로 만들어주는 등

남한의 요구를 들어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남한 정부의 정책 변화

를 인정한 것이 아니라 조정기를 거치면서 남한 기업과 단체들이 쌓

아놓은 신뢰 관계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2011년 김정일 위원장이 사망하면서 북한의 태도도 완전히 바 뀌어요. 2011년 11월에 평양 이외에 지방을 지원하는 계획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다고 했었는데 김정일 위원장 사망 이후에 만나니까 지방은 안될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지도자가 바뀌었기 때문에 과거에 얘기한 것을 그대로 할 수 없다는 거죠. 북한도 지도 자가 바뀌면 남한과의 협력사업 방침이 바뀔 수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어요. (대북지원 사례8)

조정기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2008년 금강

산 관광객 사망 사건으로 사업이 중단되었고, 2009년에는 개성공단

근로자 억류 사건도 발생하였다. 2010년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도발 등으로 5․24조치가 시행되었다. 천안함과 연평도 포격 사건으

로 남측의 민간인까지 희생당하면서 남북교류에 대한 여론도 악화

되었다. 5․24조치는 개성공단 및 금강산을 제외한 방북 불허, 남북

간 교역과 교류 전면 중단, 북한 선박의 남한 해역 항행 금지, 대북

지원사업의 원칙적 보류, 인도적 지원을 포함한 모든 지원 차단 등 으로 이어졌고 기존에 진행해왔던 남북교류협력 및 인도적 지원사 업의 대부분이 중단되거나 축소되었다.

이 시기 가장 큰 사건은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

이다. 이때 일시적으로 개성공단 내 분위기가 사뭇 조심스러워졌다.

김정일 위원장이 사망했을 때 북측 직원들이 우리에게도 조문해

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어요. 우리는 애도는 표하지만 조문을 할

수는 없다는 상황을 설명하고 안 되면 피하기도 했어요. 그 후 김정 일 위원장의 기일에는 공장을 쉬거나 회식을 취소합니다. 그럴 때 는 남측 사람들이 밖에서 운동을 하거나 떠들면 북한 총국에서 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