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는 ‘전쟁의 부재’로서 ‘평화’란 개념의 일상적 의미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평화 연구 가들은 전쟁의 부재로서 평화란 ‘평화가 무엇이 아닌지’를 보여주기는 하여도 ‘평화가 무엇인지’를 적극적으로 확인하지는 못하고 있다고 주 장한다. 또 ‘가정의 평화’나 ‘평화스러운 분위기’, ‘마음의 평화’와 같은 일상적 용법에서 평화의 의미는 ‘전쟁의 부재’라는 부정적 정의와는 전혀 합치하고 있지 않다. 다른 한편 평화에 대한 긍정적 정의는 시대
19_이선진, “동남아에 대한 중국 전략: 현황과 대응,” JPI 정책포럼, 제27권 (제주평 화연구원, 2010.3), p. 12.
와 문화권에 따라 다르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헤브루
어의 ‘shalom’과 이슬람 문명권의 ‘salaam’은 같은 어원으로서 신적
힘에 의한 정의의 실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평화의 여신’을 의미하 는 그리스의 ‘eirene’, 로마의 ‘pax’ 그리고 중국의 ‘화평(和平)’이란 개
념에는 ‘법과 질서에 의한 번영’이라는 뜻이 들어 있으며, 비폭력에
의한 평화의 획득과 관련하여 인도의 ‘ahimsa’란 살생을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20
여기서 분명해진 것은 ‘평화’에 대한 다양한 의미는, 평화가 존재한 다고 상정되는 다양한 상황, 장(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외적으로 평화가 지배하는 크고 작은 사회에서도 한 개인의 내적 평화가 항상 보장되는 것은 아니며, 또 외적 평화가 반드시 내적 평화의 전제조건도 아니다. 이럴 때 내적 평화란 대개 ‘내적 갈등의 부
재’로 설명되거나 후자가 전자의 필요조건으로 간주된다. 다른 한편 국가
간의 평화를 ‘전쟁의 부재’라고 보는 것은 전쟁의 부재가 국가 간 평화 의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으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갈등의 부재라는 필요조건을 넘어서서 무엇이 평화를 가 져오는 충분조건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마음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로운 삶을 위해 사회의 구성원 개인이 획 득해야 할 주관적 조건과 사회가 보장해야 할 객관적 조건을 구별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 아니다.
20_“Recommendation for Promoting Research on Peace Studies,” National Committee for Peace Research, November 26, 2002, <http://www.scj.go.jp/
ja/info/kohyo/pdf/kohyo-18-t985-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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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평화의 ‘소극적 해석’과 ‘적극적 해석’인도 출신의 평화 연구가 수가타 다스굽타(S. Dasgupta)가 그의 논문
「비평화, 나쁜 개발(Peacelessness and Maldevelopment)」21에서 ‘전쟁이 없음에도 평화가 없는 상태’를 ‘비(非)평화(peacelessness)’로 규정한 이 래, 현재의 평화학(peace studies)에서 평화의 개념을 직접적 폭력이나 전쟁의 부재상태보다는, 비평화를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사회적 불평등 의 지속상태’로 보는 것이 대세가 되었다. 즉, 교육, 직업, 의료 및 복지가 갖추어진 선진국에서는 전쟁의 부재가 평화의 일종이긴 하지만, 그렇지 못한 저개발국가에서는 단순히 전쟁의 부재만으로는 평화스러운 삶을 전혀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평화의 사회적 조건이 갖추 어지지 않은 것이다. 다스굽타의 비평화 개념의 도입을 노르웨이 출신 의 평화 운동가인 요한 갈퉁(J. Galtung)이 그의 논문 「폭력, 평화, 평화 연구」22에서 받아들여 전쟁이나 테러와 같은 ‘직접 폭력(direct violence)’
에 대비하여 가난, 사회 불안, 불안전, 부정의, 불평등, 정치적 탄압, 기아 와 질병의 반복을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이라는 개념을 도입 하였다. 즉, 전쟁과 평화라는 전통적인 이분법과는 달리, ‘전쟁도 없고 평 화도 없는 상태(no war plus no peace)’가 이 세계의 많은 현실에 더 가까 울 수 있다고 갈퉁은 보고 있다. 이처럼 갈퉁은 ‘단지 전쟁이 없다는 의미
의 평화’를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로, ‘간접적 혹은 구조적 폭력이
없는 상태’를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로 정의하면서, 그의 제안은 대부분의 평화 연구가들에 의해 받아 들여졌다.23
21_Sugata Dasgupta, “Peacelessness and Maldevelopment,” IPRA Studies in Peace Research, Proceedings of the IPRA Second Conference, Vol. Ⅱ (1968).
22_J. Galtung, “Violence, Peace, and Peace Research,” Journal of Peace Research, Vol. Ⅵ, No. 3 (1969).
그러나 평화의 소극적, 적극적 해석에 앞서 평화의 추구에서 논리적 으로 우선하는 것은 ‘평화가 전쟁이나 여러 갈등상태보다 더 바람직하
다’라는 전제이다. 이 전제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첫째, 평화가 ‘자연스러
운 상태이며, 전쟁이나 비평화는 부자연스러운 상태’라는 인간 본성에 깃든 평화지향성을 정당화해야 하고,24 둘째, ‘평화가 전쟁이나 폭력보 다 지향할만하다’는 윤리적 우월성을 확보해야 한다. 평화지향성은 상식 적으로 매우 강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지만, 현실세계에서는 결코 항상 지켜야할 보편적 규범으로 인식되고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평화란 일 반적으로 두 존재 간의 관계(relation)이며25개인, 단체 혹은 국가의 일 방적 속성(property)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어느 존 재가 매우 평화스럽거나 혹은 평화 지향적이라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해도,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이러한 속성 이 오히려 폭력을 유인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이처럼 평화지향성과 평화의 유지가 일치하지 않았던 가장 적절한 예로는 냉전 체제를 들 수 있다. 미국과 소련은 수천 발의 핵무기로 상대방을 위협하 면서도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두 강대국의 평화지향성이 아 니라 상호 공멸에 대한 이성적 대처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23_“요한 갈퉁의 평화 개념,” 평화만들기, 2005년 8월 27일, <http://www.peacemaking.
co.kr/news/news/view.php?papercode=PEACE&newsno=1604&pubno=116>;
“Peace and conflict studies,” Wikipedea, <http://en.wikipedia.org/wiki/ Peace_
and_conflict_studies>; “Johan Galtung,” Wikipedea, <http://en.wikipedia.org/
wiki/Johan_Galtung>.
24_악마와 같은 인간들이 나타나서 전쟁이 야기된다는 ‘악마이론(devil theory of war)’이 대표적이다.
25_Ekkehart Krippendorff, “The State as a Focus of Peace Research,” Peace Research Society, Vol. XVI (The Rome Conference, 1970). 여기서 저자는 현대 평화학의 기원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관계에 있다고 보고 있다; <http://
wbk.in-berlin.de/wp/wp-content/uploads/2006/07/State_as_Focus_of_Peace_
Research-197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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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평화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평화지향성만으로는 충분하 지 못하지만, 공멸의 공포감에 의해 유지되는 소극적 평화는 그 자체 가 구조적 폭력, 즉 비평화의 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냉전 시에 평화 운동가들은 미소의 핵 전쟁에 의한 인류 멸망 가능성에 대 한 공포가 인류의 정신건강에 매우 파괴적임을 강조하였다. 실제로 소 련의 해체와 함께 붕괴된 냉전체제 후, 미국과 소련은 인류를 수십 번 전멸시키고도 남을 만큼의 핵무기를 대대적으로 감축하면서, 상호 공 멸에의 공포에 의한 소극적 평화의 유지가 매우 비정상적 상황이었음 을 실감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전쟁의 부재로서 소극적 평화는 적 극적 평화로 가기 위한 필요조건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평화의 구조적 실현이라는 적극적 평화의 단계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우선 평화의 속성적 측면을 강조하는 운동가나 학자들이 평화운동 의 출발을 종교에서 찾는 것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부 분의 세계 종교는 내면적 가치의 개발을 강조하고 있고, 이런 내면적 가치에 평화 지향성을 찾아보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기 때문이다.26 예 를 들어 유교에서도 법만으로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없으며, 오 로지 덕치(德治)를 통해서만 인간의 자발적 규범 준수가 가능하다고 보았다.27
그러나 평화와 종교와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은 적어도 세 가지 다른 측면을 갖고 있다.
26_“딱딱한 계시종교가 폭력을 정당화하는 논리 제공-인도전통의 부드러운 종교,
비폭력 정신이 평화운동으로 부각돼,” 한국종교문화연구소의 심포지엄 “종교, 폭 력, 평화” 보도기사, 가톨릭 뉴스, 2010년 6월 21일, <http://www.nahnews.net/
news/articleView.html?idxno=369> (검색일: 2010.6.25). 그러나 인간이 사회를 구성할 때에는 적어도 이론적으로 상호 존중의 규범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이 점은 세계 종교의 계율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27_論語, 「爲政」,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첫째, 2001년 9・11 테러 이후 이슬람 원리주의자의 테러리즘에 대한 대처와 관련하여 이슬람 문화와 여타 문화와의 갈등이 내연(內燃)하고 있고, 바로 동아시아에 무슬림 다수가 거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와 평화와의 관계를 도외시할 수 없다.
둘째, 동아시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교를 갖고 있고 또 종교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즉,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의 이해와 관련하 여 종교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개인의 종교에 의한 정체성 확보가 집단의 민족주의와 결부될 때 ‘종족-종교-민족주의’로 휘발‧확 대되어 조그마한 갈등의 불씨도 대형 분쟁으로도 발화할 수 있다. 그 러나 이 점은 역설적으로 종교가 중재를 통해 분쟁 해결 및 평화 정착 에 기여할 수 있는 잠재력이 매우 크다는 점도 의미한다.
셋째, 그러나 분쟁과 폭력을 종식해야 할 종교가 역설적으로 바로 분쟁의 원인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매우 많다. 즉, 평화지향적인 종교 간에 폭력분쟁이 일어나는 원인과 배경을 살펴보는 것은 평화지향성 이라는 내적 조건 이외에 평화 정착의 외적 조건들이 무엇인지를 확인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다. 종교의 내면적 지향으로서 평화
아시아의 종교는 보통 이슬람, 불교, 힌두교, 가톨릭으로 대변되지만, 20세기 이후 전 세계적으로 종교 간의 교류와 신도의 변화 추세가 활발 해졌다. 그 이유는 주로 교통과 통신의 발달에 기인한 것이겠지만, 인간 이 주어진 종교적 도그마를 무조건 신뢰하지 않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 선택하는 경향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 특히 미국에서 불교 신 자들이 급격히 늘고 있으며,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이슬람교도가 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