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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안중근의 가족 생애사

3.3 안중근의 형제

안정근은 ‘전천후 독립운동가’라고 평할 수 있다. 임시정부의 간도 특파원으로 선 발되어 북간도 지역 독립운동단체 통합에 앞장섰으며, 1920년에는 청산리 전투에도 종군했다. 또한 대한적십자회 책임자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흥사단 등 각종 애국단체에서 간부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정근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소설가 송우혜는 1992년에 발표한 독립운동가 안정근의 생애라는 선구적 논문에서 너무나 유명한 형인 안중근 의사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안정근은 1885년 안태훈과 조마리아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청계 다. 형 안중근이 자기주장이 강하고 호걸형이었다고 한다면 그는 성격이 순후, 온순 하고 인정이 두터운 외유내강형이라고 할 수 있다. 어려서는 청계동 서당에서 한학 을 7-8년간 공부했으며, 진남포로 이사 가서는 형이 세운 삼흥학교에서 신식교육을

35) 정운현·정창현(2017). 안중근家 사람들 -영웅의 숨겨진 가족이야기-, 역사인.

받았다(오영섭, 2008). 1908년경에는 형의 뜻에 따라 서울로 유학을 떠나 1909년 3 월부터 양정의숙 법률과에 다녔다. 그해 9월, 양정학교에 콜레라가 발생하자 휴교령 으로 귀향했는데 얼마 뒤 안중근 의거가 일어나면서 학업을 중단했다.

차남인 그는 평소 형을 대신해 집안일을 챙겼다. 1902-1904년까지 자기집안 소유 의 농토에 대한 농사감독을 맡았고 진남포 시절에는 사업차 바쁜 형을 대신해 삼흥 학교 운영과 집안의 토지 관리를 전담했다. 말하자면 형제들 중에서 집안 살림꾼이 었다. 형이 순국한 후에는 모친과 형의 가족, 그리고 본인과 동생 공근의 가족 등 대식구를 이끄는 가장 역할을 했다.

1910년 5월경, 안정근은 북간도를 거쳐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길에 올랐 다. 동생 공근은 원산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이들이 연해주를 망명지로 택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그곳에 형의 가족들이 머물고 있었 다. 게다가 연해주 일대는 안중근의 활동무대였고, 하얼빈 의거로 안중근에게 우호 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한인 지도자들은 ‘안응칠유족구제회’를 결성해 안중근 추모사업과 함께 기금도 마련해 놓고 있었다(박태균, 1992).

안정근은 일가를 거느리고 연해주 의병의 본거지이자 ‘단지동맹’의 현장인 연추로 가서 한인 지도자 최재형의 집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안정근은 동생과 함께 러시아 어 공부를 하면서 생활기반 조성을 하였다. 그러나 이곳도 안전지대가 되지 못했다.

일제 밀정들이 이들 형제와 가족의 동향을 일일이 감시했다. 결국 새로운 터전을 찾아 나서게 되는데 이때 도움을 준 사람이 바로 도산 안창호였다.

무령 시절 그에게는 특이한 경력이 하나 있다. 그의 이력서에는 1911-1912년까지

’아라서 보병‘으로 근무했다고 되어 있다. 그는 1912년에 동생 안공근과 함께 러시 아 정부에 귀화선서를 하고 러시아 국적을 취득했다. 또한 단순히 군에 입대만 한 것이 아니라 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 장교 신분으로 참전하기도 했다(오영섭, 2008).

당시 안정근 집안의 넉넉지 못한 생활비를 충당해 준 사람은 그의 장모 왕재덕이 었다. 황해도 신천의 만석지기 갑부였던 그의 장모는 사위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거금을 보내주었다. 안정근의 부인 이정서가 몰래 국내로 들어와 옷 속에 숨겨 가 져가기도 하고 더러는 국내 천주교회를 통해 전달하기도 했다(오영섭, 2008).

1차 세계대전 후 일본과 러시아가 동맹관계를 맺으면서 재러 한인들에 대한 감시 와 탄압은 더해갔다. 안정근의 위상이 높아질수록 일제는 이들을 주목하기 시작했

다.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황실 총영사 외무부는 연해주 군총독에게 비 밀문건을 보냈다. 권업회 해산과 기관지 권업신문 폐간, 그리고 반일성향의 한인 지 도자들을 연해주에서 축출하라는 내용이었다. 문건 속에는 축출대상자 21명이 명단 도 함께 들어 있었는데 이동휘, 이동녕, 계봉우, 이범윤, 이갑 등을 비롯해 안정근·

안공근 형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연해주 행정청은 8월 22일에 니콜리스 크-우수리스크 경시총감에게 안정근, 안공근, 이강 등 3인에 대한 직업, 품성, 가족 사항, 사회적 지위 등을 상세하게 조사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니콜리스크-우수리 스크 지역 경찰서장은 9월 21일에 답신을 보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김광재, 2006).

안정근: 1912년 러시아 국적 취득, 보리소프스카야읍 농민조합 소속, 니콜리스크 거주, 상업, 처와 3자녀 부양

이때까지만 해도 안정근은 별다른 범죄경력이 없었다. 경찰서장의 보고가 있던 그달 9월에 고태규 등 북만주 일대의 독립운동 세력과 함께 밀정 김정국을 처단했 다. 김정국은 블라디소스토크 주재 일본 총영사관의 스파이 협의를 받고 있었다. 이 일로 고태규 외 2명은 체포되었으나, 안정근은 몸을 피했다. 일제는 이 사건을 중대 사건으로 취급하고 두 사람 체포에 나섰다. 그러나 안정근은 당시 러시아 국적자여 서 일제가 함부로 체포할 수 없었다(오영섭, 2008).

안정근은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 군대로 몸을 피하여 니콜리스크 병사관에 출두해 국민병 종근을 자원했고 곧바로 하바롭스크 병영으로 들어갔다. 이 사건은 훗날 안 공근이 한인애국단의 특무공작을 벌일 때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연해주 시절 안정근은 또 하나의 값진 성과를 거두었다. 1919년에 안정근은 기후 풍토 여건상 벼농사가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진 니콜리스크에서 사상 처음으로 벼농 사에 성공했다. 그해 5월에 모를 심고 8월 초에는 200석가량을 수확했다. 이 소식을 듣고 현지 러시아인들과 학생들이 농장을 견학했으며, 일제도 이를 주목했다(도진 순, 2009).

니콜리스크에 자리를 잡고서 한창 성공해 가던 안정근이 돌연 중국 상하이로 향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가을 무렵의 일이다. 니콜리스크에 일군 벼농사 농장과 여타 사업은 동생 안공근에게 맡겼다.

안정근이 상하이로 향한 이유는 표면상으로 2세들의 교육을 위해서였다. 형 안중 근의 딸 안현생과 아들 안준생, 본인의 장남 안원생, 그리고 동생 공근의 장남 안우 생 등이 그들이다. 안원생은 이미 2년 전에 상하이로 건너가 중법학당과 남위열 중 학에서 수학했다.

안정근이 니톨리스크를 떠난 실질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하나는 러시아 한 인사회의 분열과 그로 인한 갈등, 다른 하나는 평소 형님으로 모셔온 안창호의 요 청 때문이었다. 상하이 생활을 계기로 안정근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1917년 2월에 러시아혁명이 바람을 타고 러시아 한인사회에서도 통합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 재러 한인사회는 토착한인과 이주한인, 반볼세비키파인 고려족 중앙총회와 친볼세비키파인 한족 중앙총회로 나뉘어 갈등을 빚고 있었다. 이 문제 를 해결하고 대동단결 차원에서 이듬해 1월에 한인사회당 창당이 논의되었다. 이때 안정근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볼세비즘을 반대했다. 이는 이동 휘와 노선을 달리한 것으로 재러 한인사회에서 안정근의 입지는 크게 줄어들었다 (오영섭, 2008).

이어 안정근이 발을 들여놓은 곳은 대한적십자회였다. 1919년 11월 20일 자 상하 이 독립신문에는 안정근 관련 기사들이 둘이나 실렸다. 1면에 실린 기사는 그가 임 시정부 내무차장에 임명된 사실을, 3면 기사는 대한적십자회 부회장에 피선된 사실 을 보도했다. 1919년 8월에 빈민구제를 목표로 설립된 대한적십자회는 임시정부의 외곽단체였다. 초대회장 이의경이 미국에 장기체류 중이어서 부회장인 그가 사실상 회장 직무대행을 했다. 취임 후 그는 회원모집대회를 비롯해 적십자간호원양성소 개소 등 활발한 사업을 펼쳤다(송우혜, 1992).

1920년 7월 하순부터 10월 청산리전투 전까지 안정근은 독립단체 통합 마무리 작 업에 나섰다. 양보와 타협을 일체 거부한 대한구정서와 북벽주의 계열인 광복단을 제외하고 대한국민회, 의민단, 신민단, 한민회 등 4개 단체가 최종 통합을 했다. 얼 마 뒤 이들 4개 단체 연합부대는 대한국민회 사령관 홍범도의 지휘 하에 청산리 전 투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안정근도 청산리 전투에 참가했다. 그는 3일째 전투가 끝난 후 현장에서 긴급보고서를 작성해 왕상덕이 임시정부에 긴급히 전하도록 했 다. ‘간도의 상황’과 ‘간도시찰원 보고’라는 문건이었다. 이후 안정근은 상하이로 돌 아가지 않고 독립단체 통일과 지원 사업에 나섰다. 안정근은 1921년 3월까지 북간

도에 머물면서 직·간접적으로 독립단체를 도왔다(정운현·정창현, 2017).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전역이 일본군의 영향 하에 들어갔다. 안정근 가족들은 중국 땅 어디에서도 신변안전을 확보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이들은 영 연방에 속하는 홍콩으로 피신했다. 그의 가족은 안공근의 주선으로 광서로 이주했 다가 다시 홍콩으로 옮겼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자 안정근은 상하이로 돌아 왔다. 그는 한국적십자회의 회장과 한국구제총회 회장을 역임하며 동포들의 귀국을 지원하고 그들을 구호하는 사업을 펼쳤다. 초기에는 안경근, 안홍근, 안민생 등 여 러 친인척이 함께했다.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대한민국 상하이 총영사관에서 발급한 서류를 갖고 활동했으며, 1949년 3월 17일에 안정근은 형이 잠들어 있는 뤼순에서 뇌암으로 타계했다.

안정근 이정서 부부는 슬하에 원생, 진생, 혜생, 미생, 옥생, 은생 등 2남 4녀를 두었다. 독립운동가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은 회고록 ‘임정의 품 안에서’ 안중근 가문 후손들의 행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시했다(정운현, 정창현, 2017).

장남 안원생은 상하이 명문 자오통 대학을 나와 충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차 남 안진생은 이탈리아에 유학해 조선공학을 전공했고, 귀국하여 해군에 입대해 대 령으로 예편했으며 이후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장녀 혜생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차녀 안미생은 십 대 소녀 때부터 상하이와 난징을 오가며 임시정부의 연락원으로 일했다. 나중에 김구의 장남 김인과 결혼해 김구의 맏며느리가 되었다.

삼녀 안옥생과 사녀 안은생은 일찍이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안공근은 1889년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에서 3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오영섭, 2007b). 큰형인 안중근의 의거 직후 공범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후 1909년 11월 중국대련으로 가서 안중근의 옥바라지에 매달렸다. 이후 1910년대 러 시아 연해주로 이주해 권업회에서 활동하였다. 1918년 2월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와 이동휘가 주도한 한인망명자회의에 신민회 회원들과 함께 참석하여 소비에트 정부의 단순한 후원만을 받고 순수한 민족주의 단체를 조 직하자는 ‘신민회 우파’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1920년 1월 안공근은 한형권·여운형과 함께 외교 교섭을 위해 러시아 모스크바로 파견될 특사로 선정되었다. 7월에 이희 경이 중국 상해를 떠나 러시아 모스크바를 향할 때 안공근도 함께하였다. 안공근과 이희경은 독일 베를린을 거쳐 1922년 초에 러시아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대한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