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중근의 역경
1.1 역경의 내용
1.1.1 조부, 부친의 죽음
안중근은 어릴 때부터 조부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안중근의 조부 안인수는 집으로 서당 스승을 초빙하여 안중근에게 사서삼경 등의 유교경전과 통감 등을 수학하게 하였고, 당시의 시대 흐름도 알게 하도록 하기 위해 조선의 역사 및 세계사 등을 두루 섭렵하게 하였다. 이렇게 각별한 관계의 안인수는 안중근의 나이 14세(1892년) 되던 해에 작고하였다. 당시 안중근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내가 14세 되던 무렵에 조부 안인수께서 돌아가셨다. 나는 사랑으로 감싸주시며 길러 주시던 정을 잊을 수 없어, 심히 애통한 나머지 병으로 반년이나 앓다가 겨우 회복하였다.”1)
또한 1905년 12월, 안중근의 가족들은 청계동을 떠나 진남포에 도착하였는데, 안 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심신의 피로와 더불어 쫓기는 과정에서 얻은 중병으로 세 상을 떠났다. 안태훈은 자상한 아버지요, 사상의 전수자, 그리고 독립운동의 동지로 서 지지했던 아버지의 죽음은 안중근에게 있어 청천벽력과 같은 이야기였다. 안중 근은 아버지의 죽음을 듣고 몇 번이고 통곡하며 까무러치는 상황에 이르렀다. 안중 근은 청계동에 도착하여 가족들과 함께 추운 겨울을 지냈다(이강, 1999).
1) 안중근(2018a). 안중근의사 자서전, 범우, pp.11-12.
1.1.2 외국신부와의 갈등
안중근이 천주교를 믿은 이유는 문명인이 되기 위해서이자 조선을 문명국으로 만 들기 위한 것이었다. 안중근의 선교 활동 중 빌렘 신부는 항의하는 한국인들을 용 납하지 않았다. 또한 안중근은 빌렘 신부에게 대학을 설립하여, 국내에 재주가 뛰어 난 자제들을 교육시킨다면, 수십 년이 지나지 않아 큰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하며 대학설립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당시 천주교 주교는 단호히 거절하였다.
“조선인이 만일 학문이 있게 되면, 천주교 믿는 일에 좋지 않을 것이니, 다시는 그런 의논을 꺼내지 마시오.”
“우리들이 당연히 한성에 가서 민 주교에게 청원하고, 만일 민 주교가 안 들어주 면 당연히 로마교황에게 가서 품해서라도, 기어이 이러한 폐습은 막도록 하는 것이 어떻소.”2)
이에 안중근은 대학 설립에 대해 세 번 권유를 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으며, 안 중근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추구하고자 하는 일이 좌절되는 분노를 느끼었다.
그때 빌렘 신부가 이 말을 듣고, 크게 화가 나서, 안중근을 무수히 치고 때리는 상황에 안중근은 분노와 더불어 모욕스러움을 느끼기도 하였다.
1.1.3 예상치 못한 사건·사고-죽음의 경험3)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특히 사냥을 즐겨, 언제나 사냥꾼을 따라 산과 들에서 사냥 하며 다녔다. 안중근은 친구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 경치를 구경하다가 험한 바위가 겹겹이 쌓인 낭떠러지 위에 이르렀다. 꽃이 탐스러워 그것을 꺾으려다 발을 헛디뎌 그만 미끄러졌다. 십수 척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지만 당시 안중근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또한 두서너 자만 더 아래로 떨어졌더라면, 수백 척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은 안중근이 죽음의 상황에 직면한 첫 번 째 상황이었다.
또한, 1896년 안중근은 당시 동지들과 함께 산에 가서 노루사냥을 하는데 공교롭
2) 안중근(2018a). 안중근의사 자서전, 범우, pp.11-12.
게도 탄환이 총구멍에 걸렸다. 빼낼 수도 없고 들이밀 수도 없어, 쇠꼬챙이로 총구 멍을 뚫으려고 쑤셔대다가 폭약이 터져 쇠꼬챙이와 탄환 알이 함께 안중근의 오른 손을 뚫고 공중으로 날아간 사건이 발생하였다. 또 한 번은 남이 잘못 쏜 엽총 산 탄 두 개가 안중근의 등 뒤를 맞혀 그는 죽음의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다.
1.1.4 독립운동과정에서 고행4)
1.1.4.1 동학운동 토벌 과정 속에서의 고난
1894년 동학운동이 발발하자 안중근은 부친 안태훈과 함께 동학군 토벌에 나섰 다. 동학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안중근은 전투 후 무서운 병에 걸려 두서너 달을 고통스럽게 보낸 끝에 겨우 죽음을 면하고 소생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획득한 군량미 문제가 발생하였다. 당시 탁지부대신 어윤중과 민영 준 두 사람이 잃어버린 곡식 포대를 찾을 욕심으로 부친 안태훈을 추궁하였다. 특 히 민영준은 세력가라 대항할 수도 없어 가계가 위급한 상황이 되자 부친 안태훈과 함께 천주교회로 몸을 피하였다.
1.1.4.2 의병 투쟁 과정에서 고난
1908년 안중근은 김두성과 이범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참모중장의 직책으로 의병과 군기 등을 비밀히 수송하여 두만강 근처에서 모인 다음 큰일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함경북도에 이르러 일본군과 몇 차례 충돌하여 서로 죽거나 다치고, 사로잡 은 일본군도 있었다. 그때 사로잡은 일본 군인과 장사치들을 풀어주는 일이 발생하 였다(김우종·리동원, 1998).
이 과정에서 일본인 포로를 놓아주는 바람에 은거지가 탄로나서 대패배를 하였 고, 병사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얼마나 죽고 살았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삼 일이나 먹지 못하고 추위를 면하지 못했다. 안중근은 흩어진 병사들을 찾고 다녔으 나, 복병을 만나 저격을 받고는 남아 있는 사람들조차 흩어져 재차 병사들을 모으 기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4) 오도열(2015). 안중근의 의리정신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연해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장맛비가 그치지 않고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운 나머 지 길을 헤매는 과정에서 밥 한 끼니도 못 먹어 배는 고프고 발에는 신조차 신지 못해, 춥고 배고픈 상황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또한 귀향길에 어느 마을 길목을 지 나게 되었는데, 일본 병사가 파수를 보고 있다가 안중근을 향해서 총을 발사하며 쫓아왔다. 산속으로 피한 안중근은 큰길로는 가지 못하고 산길로만 다니는 과정에 서 굶주림은 전보다 더 심하게 이어졌다. 어느 산 외진 곳에서 노인의 도움으로 밥 한 끼를 얻어먹기 전까지 12일 동안 두 끼로 견딘 적도 있었다(장석홍, 1992).
1.1.4.3 이토 히로부미의 사살과 투옥5)
1909년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로 마음을 정한 이후 10월 26일 일본 의 엄중한 경계 속에서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데 성공하였다. 일본헌병에게 잡힌 안중근은 일본 법원으로 넘겨져 십여 차례의 심문을 받았고 가끔씩 능욕당하 고 모멸당하는 과정을 겪었다. 1909년 2월 14일에 다음과 같이 선고를 받았다.
“안중근은 사형에 처한다. 그리고 우덕순은 3년 징역, 조도선, 유동하는 각각 1년 반 징역에 처한다.”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