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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중근의 역경

1.2 역경에 대한 정서적 반응

연해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장맛비가 그치지 않고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운 나머 지 길을 헤매는 과정에서 밥 한 끼니도 못 먹어 배는 고프고 발에는 신조차 신지 못해, 춥고 배고픈 상황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또한 귀향길에 어느 마을 길목을 지 나게 되었는데, 일본 병사가 파수를 보고 있다가 안중근을 향해서 총을 발사하며 쫓아왔다. 산속으로 피한 안중근은 큰길로는 가지 못하고 산길로만 다니는 과정에 서 굶주림은 전보다 더 심하게 이어졌다. 어느 산 외진 곳에서 노인의 도움으로 밥 한 끼를 얻어먹기 전까지 12일 동안 두 끼로 견딘 적도 있었다(장석홍, 1992).

1.1.4.3 이토 히로부미의 사살과 투옥5)

1909년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로 마음을 정한 이후 10월 26일 일본 의 엄중한 경계 속에서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데 성공하였다. 일본헌병에게 잡힌 안중근은 일본 법원으로 넘겨져 십여 차례의 심문을 받았고 가끔씩 능욕당하 고 모멸당하는 과정을 겪었다. 1909년 2월 14일에 다음과 같이 선고를 받았다.

“안중근은 사형에 처한다. 그리고 우덕순은 3년 징역, 조도선, 유동하는 각각 1년 반 징역에 처한다.”6)

조부 안인수의 죽음을 통해 반년이나 병으로 앓다가 회복되었으며, 부친 안태훈의 죽음 소식을 듣고 통곡하다가 몇 번이고 까무러치기도 하였다.

또한 안중근이 천주교에 입교한 후, 조선인의 교육 필요성을 느끼고 빌렘 신부에 게 대학설립의 필요성에 대해 강구했지만 빌렘 신부에게 거절을 당하자 심한 분개 감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 당시 배우던 프랑스 말도 그만두는 것으로 분노를 표 현했다.

“교의 진리는 믿을지언정, 외국인의 심정은 믿을 것이 못 된다.”

“내가 만일 프랑스 말을 배우다가는 프랑스 종놈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 만둔 것이다. 만일 우리 조선이 세계에 위력을 떨친다면 세계 사람들이 조선말을 통용할 것이니 그대는 조금도 걱정하지 말게.”7)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이 위중하다고 하여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 친구가 죄도 없이 감옥에 갇혀 풀려나지 못하고 겨울날 차가운 감옥 속에서 고생을 한다는 생각 에, 이렇게 피눈물이 솟아오르는 분노감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나와 같이 악한 정부를 한 주먹으로 두들겨 개혁한 뒤에, 난신적자들을 쓸어버리고 당당히 문명 독립국을 이루어, 명쾌하게도 민권 자유를 얻을 수 있겠는가.”8)

또한 1905년 말 안중근은 상해로 건너가 민영익을 찾아갔으나 문전박대를 당했 고, 상인 서상근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민영익의 냉대와 서상근의 무관심은 안중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안중근은 의병을 모집하여 국내로 진격하여 후치령에서 활동하고 있던 홍범도 부 대와 강원도의 민긍호 부대 등 국내외 의병 세력을 결집해 일본을 몰아내는 의병운 동을 계획하였다. 안중근이 거병을 위해 가장 먼저 찾아간 인물은 간도관리사 이범 윤이었다. 안중근은 당시 의병 지도자로 명성이 높았던 이범윤에게 의병을 일으켜 일본을 물리치자고 했다(김삼웅, 2009). 끝내 이범윤을 움직이는데 실패한 안중근은 크게 실망하였다.

영산전투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하는 과정에서도 안중근은 말로 다 할 수 없 는 심신의 고통을 겪었다.

7) 황병훈(2010). 안중근을 보다, 해피스토리, p.98.

8) 황재문(2010). 안중근 평전: 평화를 위해 총을 겨눈 인간의 다면적 초상, 한겨레, pp.10-11.

“옷을 벗어보니 옷이 거의 다 썩어서 몸을 가릴 수가 없고 이가 득실거려 셀 수 조차 없었다. 출전한 뒤로 전후 날짜를 헤아려 보니 무릇 한 달 반인데, 집안에서 자 본 일이 없이 노영으로 밤을 지냈고, 장맛비가 그침 없이 퍼부어 그동안의 백 가지 고초를 붓 한 자루로는 적을 수가 없다.”9)

1.2.2 인내, 수용․성찰 긍정적 반응10)

안중근은 14세 시절에 동료들과 함께 경치를 구경하다가 미끄러져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상황이 있었다. 당시 절망적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대응하고 있다가 동료들 이 밧줄을 구해 끌어올려 주어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한계적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행동하였으며 구해지는 순간 친구들과 함께 기뻐하며, 천명을 감사하였다.

안중근이 만인계 사장에 피선되어 출표식에서 표인이 5, 6개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수만 명이 돌멩이와 몽둥이가 내쳐지는 상황에서도 안중근은 침착하게 생각하 고, 안중근은 총 한 자루를 꺼내 들고 계단 위로 걸어 올라가, 군중을 향하여 크게 외쳤다. 그는 군중들을 타이르며 의연하게 자신의 의지를 피력하였다.

“무엇 때문에 나를 죽이려 하오? 당신들이 시비곡직도 가리지 않고 소란을 피우 고 난동을 부리니 세상에 어찌 이 같은 야만의 행동이 있을 수 있소. 그대들이 비 록 나를 해치려하지마는 나는 죄가 없소. 어찌 까닭 없이 목숨을 버릴 수 있을 것 이오. 나는 결코 죄 없이 죽지는 않을 것이오.”11)

또한 의병전투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추위와 굶주리는 상황이 지속되었으며 동료들이 괴로운 나머지 탄식을 할 때 안중근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스스로와 동료들을 격려하였다,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매인 것이니 너무 걱정할 것이 없소. 사람은 비상한 곤란 을 겪은 다음에 비상한 사업을 이루는 것이오. 죽을 땅에 빠진 다음에라야 살아나

9) 안중근(2009). 안중근, 예술의 전당, pp.192-193.

10) 오도열(2015). 안중근의 의리정신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는 것이오. 하늘에 뜻에 맡기고 기다려 봅시다.”12)

안중근의 역경 중에 최고는 역시 투옥과 사형선고이다. 이에 대한 안중근의 수용 과 성찰은 놀랍다. 10여 차례의 심문과정에서 대응하는 안중근의 논리와 처연함이 안중근의 인품과 레질리언스가 최고조임을 나타낸다.

안중근은 이후 사형선고에도 “일본에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는가?”라고 반문하 여 안색에 전혀 미동도 없이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이 모습은 자신의 일에 대해 정당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안중근은 순교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 던 것이다. 그리고 구리하라 형무소장이 사형 집행문을 낭독하고 안중근에게 최후 의 유언을 묻는 상황에서도 안중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13)

“아무것도 남길 유언은 없으나 다만 내가 한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동양평화를 위한 것이므로 일․한 양국인이 서로 일치협력해서 동양평화의 유지를 도모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와 함께 동양평화 만세를 부르자.”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 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 국권을 회복 하기 위해 힘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