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중근의 역경
1.3 역경 극복의 힘
는 것이오. 하늘에 뜻에 맡기고 기다려 봅시다.”12)
안중근의 역경 중에 최고는 역시 투옥과 사형선고이다. 이에 대한 안중근의 수용 과 성찰은 놀랍다. 10여 차례의 심문과정에서 대응하는 안중근의 논리와 처연함이 안중근의 인품과 레질리언스가 최고조임을 나타낸다.
안중근은 이후 사형선고에도 “일본에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는가?”라고 반문하 여 안색에 전혀 미동도 없이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이 모습은 자신의 일에 대해 정당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안중근은 순교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 던 것이다. 그리고 구리하라 형무소장이 사형 집행문을 낭독하고 안중근에게 최후 의 유언을 묻는 상황에서도 안중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13)
“아무것도 남길 유언은 없으나 다만 내가 한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동양평화를 위한 것이므로 일․한 양국인이 서로 일치협력해서 동양평화의 유지를 도모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와 함께 동양평화 만세를 부르자.”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 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 국권을 회복 하기 위해 힘쓸 것이다.”
1.3.1 가족의 지지
위기 경험에서 가족원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보살피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과정에 서 안정과 긍정적 힘을 갖도록 서로 노력하였다.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은 평소 안중근의 두 동생 안정근․공근에게는 열심히 공부 하라는 얘기를 자주했지만, 장남 안중근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면에 서 볼 때 부친이 안중근의 호연지기를 알아보고 어렸을 때부터 안중근의 상무정신 을 키워주기 위해 노력하였다고 판단된다. 성장기의 안중근은 향리를 기반으로 한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 성장하였다(정운현·정창현, 2017).
또한 안중근이 독립운동에 매진할 때 안정근은 안중근을 대신하여 집안 일을 챙 겼다. 자기집안 소유의 농토에 대한 농사감독을 맡았고 진남포 시절에는 사업차 바 쁜 형을 대신해 삼흥학교 운영과 집안의 토지 관리를 전담했다. 또한 부인 김아려 는 안중근을 대신해 가족을 챙겼으며 묵묵히 참고 견디어 냈다.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아들이 사형 선고를 받은 후에도 장렬하게 죽을 것을 권했다.
“네가 만일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 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 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공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 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 하고 받은 형이니 비 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어미는 현세 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14)
사형선고를 받고 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안중근에게는, 당당함과 서릿발 같은 기상으로 안중근에게 가족의 안부를 걱정하지 말고 떠나라는 말을 할 수 있을 정도 로 위대한 어머니가 있었다.
1.3.2 종교적 영성
안중근이 영세를 받은 것은 부친 안태훈의 영향으로 19세에 받았으며, 그 이후
그는 신부님과 함께 황해주 전역을 다니며 전도와 강연을 하였다. 성당의 미사집전 시에는 복사역할을 하면서 종교적 신념을 다졌다. 그의 천주를 향한 교의는 그가 죽음의 순간에도 의연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사형선고를 받은 후, 죽음에 대한 불안감으로 몸무게가 현저 하게 주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안중근은 입감될 당시 54.5kg이었는데, 사형선고를 받은 이후 56.5kg으로 오히려 체중이 증가하였다. 이를 두고 만주일보는 특이한 일이라고 보도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의 체중이 증가한 것은 무엇보다 죽 음을 앞두고서도 그의 심리상태가 안정되었음을 의미한다.15)
이는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지키라는 천명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천당에 갈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는 남긴 편지들에서 마지막 부분을 한결같이
“천당에서 만나자”라는 말로 마무리했다.16)
< 사진1 > 하얼빈 안중근의사기념관 방문 시 내부 촬영 사진 (2019.05.01. - 2019.05.04.) - 사진 제공: 한복희
15) 최병영(2015). 안중근 평화프로세스의 모형정립과 적용에 관한 연구. 공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6) 하얼빈 안중근기념관(2019). 용정의 역사와 항일독립운동
1.3.3 목표와 희망
안중근은 안태훈이 작고하자 국가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조선을 발전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직접 사립학교를 설립하거나 기존에 있던 사립학교를 인수·운영하는 등 근대 교육 보급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1906년 그는 다 음과 같이 말했다. “교육을 미리 대비하여 훗날을 위한 준비를 하고, 갖가지 일에 힘을 써서 실력을 기른다면 대사라 해도 쉽게 이룩할 것이다.”17)
또한 영산전투 참패 후 안중근은, 모진 고통을 이겨내고 미국 독립의 영웅이 된 워싱턴을 경모하였던 것은 당시의 고통을 이겨내고 다시 전진하고자 하는 안중근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영산전투 참패 이후 안중근은 내면의 고통을 이겨내고, 단 지동맹을 조직하게 된다. 이에 대한 기록에서 보면 그들은 결의를 다지고, 대한독립 을 혈맹한 것을 볼 수 있다. 피로써 대한독립을 쓰고, 만세 삼창을 하고 그들은 흩 어졌다. 이에 대한 자료는, 서울 남산에 있는 안중근기념관 동상 뒤에 확대되어 남 아있다.
“이듬해 기유 연추 방면으로 돌아와 동지 12인과 상의하되, 우리들이 전후에 전혀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으니 남의 비웃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오. ··· 오늘 우리들은 손가락을 끊어 맹세를 같이 지어 증거를 보인 다음, 마음과 몸을 하나로 묶어 나라 를 위해 몸을 바쳐, 기어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어떻소.”18)(안중근, 2018b).
하자 모두가 그대로 따르겠다 하여 마침내 열두 사람이 각각 왼편 손 약지를 끊 어 그 피로써 태극기 앞면에 글자 넉 자를 크게 쓰니 대한독립이었다. 쓰기를 마치 고 대한 독립 만세를 일제히 세 번 부른 다음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