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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따라서 Α와 ~Α, 둘 다를 고려하면, 전체를 대비하게 된다. 만약 둘 중 하나만 중시 한다면, 결국 나머지 하나는 빼먹게 된다. 그래서 실패하기 쉽다. 특히 군주는 전체를, 모 든 가능성에 다 대비해야 한다.

1) 포일(抱一) 득일(得一)

‘抱一’은 ‘하나됨을 껴안음’, 혹은 ‘하나가 되게 껴안음’이고, ‘得一’은 ‘하나됨을 얻음’이 다. 이 둘은 결국 같은 말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대립자의 공존’ 이론이다. 변증법이다.

‘抱一’은 다음 세 번역이 가능하다. ① “하나로 껴안음”은 3격 목적어이고 간접 목적어 이다. ② “하나됨을 껴안음”은 4격이고 직접 목적어이다. 이것은 동명사이다. ③ “하나를 껴안음”에서 ‘하나’를 일반적으로 ‘도(道)’라고 해석한다. 이는 문제가 있는 해석이다. 굳이 道를 ‘껴안음’(抱)라고 할 필요는 없다. 나아가 도를 껴안으면 ‘抱道’라고 할 것이지 ‘抱一’

이라 할 이유는 없다.

이들 해석 중 ②번 해석이 가장 낫다.

노자는 현상 세계를 변화로 본다. 변화는 모순의 공존 현상이다. 노자는 기본적으로 모 순 혹은 대립자의 공존 논리를 가지고 현상 세계를 분석한다. 이 논리를 처세술화한 것이 포일 사상이다. 그리고 이것은 군주에게 중요한 것이다. 제왕학의 핵심이다.

대립자의 공존은 대립자의 양측면을 다 껴안음이다, 혹은 양측면을 하나로 잡고 있음이 다. 이게 처세술의 가장 중요한 요점이다.

부분적이면 온전하게 되고, 굽어져야 곧게 된다.

비워져야 차게 되고, 낡아져야 새롭게 된다.

작으면 얻게되고, 많으면 헷갈린다.

따라서 성인은 하나로 껴안아서(抱一) 천하의 모범이 된다.

曲卽全, 枉卽直; 窪則盈, 敝則新; 少則得, 多則惑.

是以聖人抱一爲天下式 『노자』 22장

이는 ‘抱一’이 어떤 의미인지 가장 잘 설명한 것이다. “부분-전체, 굽음-곧음, 비움-참, 낡음-새로움”은 대립자들이다. Α와 ~Α이다. 사람들은 이 대립된 둘 가운데 하나만 본다.

그래서 늘 일에서 실패한다. 성인은 양쪽 다 하나로 껴안아서 본다. 대립자이고 모순인 A+~A =전부, 전체이다. 만약 A나 ~A 중 하나만 선택한다면, 나머지 부분을 잃게 된다.

이러면 문제가 생긴다. 전부를 보아야 한다.

하나됨을 껴안으면 성인은 천하의 ‘式’이 된다. ‘式’은 첫째는 모범, 규칙이다. 대립자를 다 고려하기 때문에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게 된다. 그래서 일의 처리에 있어서 성인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된다. 모든 사람들은 성인을 배워야 한다. 둘째, ‘式’은 거푸집이다. 대립 자의 공존을 알기 때문에, 성인은 백성들을 어떤 틀에 넣어서 찍어낼 수 있다.

혼(魂-정신)과 백(魄-육체)을 싣고, 하나로 껴안아서, 떨어짐이 없게 할 수 있는가?

載營魄 抱一, 能無離乎? 『노자』 10장

정신과 육체는 하나로 합쳐져야 한다. 만약 마음과 몸이 따로 놀면 안 된다. 얼빠진 상 태, 혹은 넋이 나간 상태일 수도 있다. 정확한 인식을 위해서는 몸과 마음이 하나로 일치 해야 한다. 이는 대립자의 공존으로서 ‘포일(抱一)’ 사상과는 좀 다르다.

옛날의 ‘하나된을 얻은 자’는

하늘이 하나됨을 얻어서(得一) 그로써 맑고, 땅이 하나됨을 얻어서 그로써 편안하다.

정신이(神) 하나됨을 얻어서 신령스럽고(靈), 골짜기가 하나됨을 얻어서 가득찬다.

만물이 하나됨을 얻어서 자라고, 제후 왕이 하나됨을 얻어서 천하의 곧음이 된다.

(이 모두는) 그 하나됨을 이룬다.

昔之得一者,

天得一以清, 地得一以寧;

神得一以靈, 谷得一以盈;

萬物得一以生. 侯王得一以爲天下貞.

其致之一也. 『노자』 39장

천지(天地)와 만물, 후왕(侯王), 그리고 곡신(谷神), 이 넷은 반드시 ‘하나됨’을 얻어야 그 기능을 제대로 한다. 이 넷은 현상 사물의 기본 구조이다. 그리고 변화하는 것이다. 변 화는 반드시 Α와 ~Α라는 대립자가 있어야 한다. 그 대립된 양자를 다 껴안을 때 오래 가고.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다.

천지와 만물은 개천설이다. 위와 아래에 하늘과 땅이 있고, 그 사이에 만물이 있다. 그 리고 후왕과 곡신은 그 세계를 다스리는 세력이다. 드러나지 않은 실세는 곡신이다. 드러 난 지배자는 후왕이다. ‘侯王’은 제후였는데 뒤에 왕이 된 사람이다. ‘谷神’은 골짜기의 신 이다. 6장에 나온다.

노자는 도에서 현상 사물이 나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陰)을 짊어지고 양(陽)을 안고 있으며, 텅 빈 기운(沖氣)으로 조화를 이룬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 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노자』 42장

“도→1→2→3→만물”이라는 낳음의 과정은 발생론이 아니라, 구조론이다. 일반적으로

‘生’이라는 말 때문에 도가 만물을 낳는 것으로 본다. 이는 발생론이다. 그러나 도는 자궁

이 없다. 낳을 리가 없다. ‘生’이라는 말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42장은 논리적인 추론 의 결과로 나온 명제이다. 자연과학의 빅뱅 이론처럼 우주 발생론은 아니다.

이는 세계가 5가지 구조가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를 다섯 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다. 도의 측면, 1의 측면, 2의 측면, 3의 측면, 그리고 만물의 측면이다. 1은 도이다.

혹은 기의 원래 상태인 태허(太虛)이다. 도는 표제어이다. 도(道)는 이 모든 과정이다. 만 물은 그 안에 이 과정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2는 음과 양이다. 3은 음과 양에 ‘충기(沖 氣)’를 합한 것이다. 沖氣는 텅 빈 기(氣)이다. 太虛와 같다.

다섯 구조 가운데, 노자가 가장 먼저 이해한 구조는 2인 것 같다. 2는 대립자·모순이다.

대립자가 있으면, 대립자가 없는 상태와 대립자가 조화로운 상태, 둘이 가능하다. 대립자 가 없는 상태가 하나, 조화를 이룬 상태가 셋이다. 셋은 대립자(음+양) + 沖氣이다. 하나 와 셋은 사실상 같은 것이다. 이것이 포일(抱一) 사상이다.

‘沖’은 ‘비어있음’을 뜻한다. ‘中’은 ‘가운데, 알맞음’이란 뜻이다. 이 둘은 비슷한 글자이 다. 따라서 冲和→中和와 같다. 음과 양은 텅 빈 기(沖氣)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음과 양의 가운데(中)이며, 알맞음(和)이다. 알맞음으로 조화를 이룸이다.

노자는 우주의 기본 구조가 음과 양의 충기(沖氣), 충화(沖和)를 이룬 상태라고 본다. 이 는 결국은 대립자의 공존을 뜻한다.

2) 대립자의 공존(모순 공존)과 처세술

세상의 구조는 대립자가 공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을 사는데 대립자의 공존을 알고 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이것을 처세술이라 한다. 그런데 군주가 하 는 처세술을 특별히 ‘제왕학’이라 한다. 그래서 처세술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자질구레하면 온전해진다. 구부러지면 곧아진다.

패이면 찬다. 닳으면 새로위진다.

작으면 얻는다. 많으면 헷갈린다.

이래서 성인은 하나로 껴안아서 천하의 법도가 된다.

스스로 보이지 않으므로 밝아진다.

스스로 옳다 하지 않으므로 드러난다.

스스로 자랑하지 않으므로 공이 있게 된다.

스스로 뽐내지 않기에 우두머리가 된다.

曲則全, 枉則直; 窪則盈, 幣則新; 少則得, 多則惑.

是以聖人抱一爲天下式. 不自見 故明, 不自是 故彰;

不自伐 故有功, 不自矜 故長. 노자 22장

이 장은 대립자의 공존 논리를 서술하면서 처세술과 연결시키고 있다. ‘부분-전체, 구부 러짐-곧음, 닳음-새로움’ 등은 대립자이다. 이는 하나만 존재하지 않고, 반드시 둘 다가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양자를 보면, ‘스스로를 보임’과 ‘드러남’은 모순이 된다는 것을 안

다. ‘스스로를 드러내 보임’은 대립자 공존에 의해서 반드시 ‘드러나지 않음’이 따른다. 따 라서 전자인 ‘스스로를 드러내 보임’을 하지 않는다. 이는 고도의 처세술이다.

처세술의 의미는 세상일이란 내 것이 적으면 얻게 되고, 많으면 내가 헷갈려 잃게 된다.

따라서 자신의 능력 활동성과 유연성을 키우고 보존하기 위해서는 재산 지식 등 나를 붙 잡는 모든 것을 줄여야 한다.

이 대립자의 공존은 두 가지 방향에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장자적 경향이다. 현실에서 초월 달관하는 방법이다. 대립자의 악순환으로 문명 사회를 부정하고, 대립자의 선순환으로 원시 사회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이것은 노자가 말 하는 성인 또는 참 되게 세상을 이끌 사람의 마음가짐과 행위 방식이다.

둘째, 한비자적 경향이다. 힘의 관계로서 현실을 파악하고 현실의 갈등 속에서 승리를 위한 교묘한 처세술이다. 이것은 제왕학과 연결된다. 군주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 바 로 대립자의 공존이 세상의 본질이라는 점이다.

회오리 바람은 한나절을 불지 못하고 소나기는 하루를 내리지 못한다.

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孰爲此者? 天地.

天地尙不能久, 而況於人乎! 노자 23장

이 자연 현상도 대립자의 공존이다. 회오리바람과 소나기의 특징은 힘이 센 것이다. 거 세다. 그 힘으로 보자면, 정말 오래 갈 것 같다. 그러나 힘이 세기 때문에 오히려 오래 가 지 못 한다. 자연 현상도 ‘대립자의 공존’이라는 것을 넘어서지 못 한다.

노자는 사람이 자연에서 배워야 함을 여러 방면에서 강조한다.

되돌아 오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고, 약함(弱)이 도의 작용이다.

反者道之動, 弱者道之用.

天下萬物 生於有, 有生於無. 『노자』 40장

이는 대립자의 공존 사상이며, 포일 사상이다. 되돌아가 감이 도의 움직임이다. 즉 Α와

~Α의 어떤 한 극단으로 가면 반드시 반대쪽으로 가게 되어 있다. Α와 ~Α는 공존한다.

그래서 이 양 측면을 다 껴안아야 한다.

대립자의 공존을 알면, 강함에서 시작할 필요가 없다. 대립자의 공존은 객관 필연성이 다. 도의 움직임이다. 그것을 따르면 일이 잘 된다. 따라서 약하고 부드러움에서 시작해도 된다. 약함이란 도의 작용이다. 도의 속성이다.

3) 처세술

노자는 대립자의 공존의 논리를 처세술의 핵심으로 삼는다. 사람의 행위를 바로 이런 관점에서 분석한다.

발끝으로 서는 자는 (오래) 서지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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