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비핵화가 되면 개혁과 개방이 당연히 뒤따를 것이라는 사 고는 매우 오래되었으며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비핵화 후 북한이 개 혁‧개방으로 이행할 것이라는 사고는 우리의 고안물이다. 이 논리 는 거의 명제처럼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북한 스스로 비핵화 후에 개혁‧개방을 하겠다고 공식적으로 피력한 적이 없다는 점까지 고려 할 때, ‘비핵화 후 개혁‧개방으로의 이행’논리는 외부세계의 희망이 내재해있다. 물론 북한이 비핵화하면 개혁‧개방의 여건이 개선되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 그러나 이 논리는 외부의 희망적 바람이자 북 한을 변화시키려는 정책적 의지가 포함되어 있다.
북한의 개혁‧개방은 비핵화에 종속된 것이 아니며, 비핵화와 개 혁‧개방은 별개의 독립적인 선택의 결과일 수도 있다. 최장집은 최 근 한 언론 인터뷰에서 비핵화가 타결되면 북한의 개혁‧개방이 뒤 를 따라오는 필연적이고 부수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회의적인 입장 을 표명하였다. 대신 그는 “개혁‧개방의 문제는 자동적으로 이어지 는 선택이 아니라 개혁‧개방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또 다른 선택의 결정이자 결과, 또 다른 체제 능력의 산물”41)이라고 본다며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그의 지적대로 설령 비핵화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더라도, 북한의 정치사회체제가 개혁‧개방으로 초래될 심각한 후과를 수용하기 어 렵다고 판단되면, 개혁‧개방에 대한 지도부의 선택은 상당기간 뒤 로 미뤄질 수 있다. 반대로 이상적인 조합으로써 비핵화와 개혁‧개 방이 동시에 진행될 수도 있다. 이 선택 역시 김정은 체제의 수용 능력(capacity)의 산물이 될 수 있으며 실현 불가능한 선택은 아니 다. 그러나 역으로 북한이 비핵화를 하지 않으면 개혁‧개방하기가 어려우며, 설사 개혁‧개방을 한다해도 실효성에 한계가 있다는 점 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여기서 비핵화라 함은 북한이 핵시설 및 핵무기(핵탄두+미사일) 보유 목록을 국제사회에 신고 및 검증받고,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를 국외의 안전지대로 이전하여 폐기하고 핵시설을 해체하는 전체의 과정을 의미한다. 물론 이 비핵화는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 이상 이 걸리는 장기적인 프로세스가 될 것이다. 북한의 비핵화 이행에
41) “최장집 “北 비핵화 뒤 개혁‧개방? 난 그리될 거라는데 회의적”,” 중앙일보,
2019.7.5., <https://news.joins.com/article/23517741> (검색일: 2019.9.3.).
맞춰 다양한 영역에서 상응조치가 이뤄질 것이다. 체제안전 보장을 위한 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과 평화협정 체결과 같은 외교 군사적 조치와 더불어 대북제재의 해제 및 경제재건을 위한 대규모 협력프 로그램이 동시에 추진될 것이다. 이 협력프로그램에는 ‘협력적 위협 감소(CTR)’ 프로그램도 포함될 수 있다.
비핵화의 상응조치로 전개될 새로운 환경과 조건은 북한 당국의 개혁‧개방 정책결정의 기회이면서 압박이 될 것이다. 현 북한 지배 체제의 속성을 고려할 때 북한 당국이 선택할 개혁‧개방의 길이 동 유럽과 같은 체제전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북한 당국이 추구하는 개혁‧개방의 지향은 계획경제와 시장경제의 ‘조화로운’ 공 존과 함께, 특구 및 경제개발구 중심의 개방경제 발전모델이다. 정 치체제 측면에서는 조선노동당의 일당지배 및 수령유일영도 체제의 유지를 최대한 고수하려 할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비핵화 과정에서 증가하는 정치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집단지도체제와 같은 권력의 분권화가 진행될 수 있다.
비핵화 과정은 오랜 기간에 걸쳐 성장한 ‘핵집단의 해체와 공간이
동’을 수반한다. 또한 개혁‧개방 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기 위
해서는 엘리트 교체와 충원이 중요시 된다. 비핵화 상응조치로 유입 되는 경제협력 자금과 해외기업의 투자 등 경제 이권의 분할과 조정 을 둘러싸고 지배연합 내부의 갈등이 증가하는 문제가 발생할 것이 다. 이러한 문제들은 향후 김정은 리더십에 도전적인 요소들이 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급속한 경제성장과 함께 개인 자산이 증가하고 부유한 계층이 늘어나면서 개인과 사회의 임파워먼트(empowerment) 가 증대할 것이다. 북한이 새 세기 산업혁명으로서 지식경제, 정보 산업 발전을 강력히 추진한 결과 ICT를 기반으로 한 개인과 사회의 커뮤니케이션 역시 증가할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김정은 정 권에 통치기술 및 사회통제의 변화를 불가피하게 만들 것이다.
가. 대외환경 전망
북‧미 간의 비핵화 합의가 최종 타결된 이후에도 최소 10년에서 20 년 이상의 장기간 북‧미 간에는 합의사항 이행과 상응조치 문제를 다루는 여러 개의 대화 트랙들(비핵화 트랙, 체제안전 보장을 위한 평화협정 트랙, 경제제재 해제와 경제협력 프로그램 트랙, 북‧미 수 교 트랙 등)이 동시에 진행될 것이다. 이 트랙들의 대화와 협상이 비슷한 속도와 범위에서 진척되고 문제가 해결되며 성과가 도출될 것이라고 예상되지는 않지만, 모든 트랙들의 대화가 지속가능할 수 있도록 선순환 관계를 유지할 것이다. 모든 비핵화 및 상응조치에 대한 프로세스가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북‧미 양 국의 대내외적 환경이 안정적이고 양국 간의 신뢰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며, 특히 우호적이고 호혜적인 미‧중 관계의 유지가 절 대적으로 필요하다.
북‧미 간의 최종적인 비핵화 합의와 성공적인 이행은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미국과 중국의 평화로운 공존이 이루어질 때 가능하게 된 다. 북‧미 간의 비핵화 타결은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북한 지 역에 대한 미국의 평화적 통제와 관여(engagement)를 중국이 수용 할 때 가능성이 높다. 북한 지역이 비핵화되고 경제가 개방되며 나 아가 동북아시아 지역이 평화경제공동체로 발전하는 것이 중국의 경제발전과 지역안정에 기여할 것이라는 판단 하에서 중국은 북‧미 간에 비핵화 합의가 성사될 수 있도록 협조할 것이다.
특히 비핵화 합의로 경제제재라는 장애요인이 제거됨으로써 상대 적으로 낙후한 중국의 동북지역의 경제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 을 것이며, 중국 국경과 가까우면서 개발 청사진이 갖춰진 몇 개의 전망 있는 경제개발구들(나선경제무역지대, 황금평-위화도경제지 대, 신의주국제경제지대, 압록강경제개발구 등)에 대한 중국 기업들
의 적극적인 투자와 진출이 시작될 것이다.
북‧미 간의 비핵화 합의 타결이 가시화되면 일본은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영향력이 크게 위축될 수 있다는 불안감으로 ‘조건없는’ 북‧일 수교를 위한 회담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 할 것이다. 일본은 북‧미 수교가 성사되기에 앞서 북‧일 수교를 성사시키기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며, 따라서 북한의 요구사항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북‧일 수 교 합의사항을 받아들일 것이다. 북한은 적정 수준에서 일본인 납치 문제를 마무리하면서 동시에 식민지 및 전후 배상 문제 처리로 대규 모 경제협력 자금을 일본에 요구할 것이며 일본은 북한의 요구를 수 용할 가능성이 있다. 북‧일 수교로 들어올 막대한 자금은 북한의 경 제재건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북한의 무리한 요구 사항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북‧일 수교에 적 극적으로 나서려는데는 북한의 개발이권을 선점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2019년 6월 7일 일본무역진흥기구(JETRO) 아시아경제연구소가 발
간한 아시아동향연보 2019년도판(アジア動向年報 2019年版)의
북한 부문을 살펴보면, 북‧미 간에 비핵화 협상이 진전되면서 북한 개발이권을 둘러싸고 미국 기업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들로부 터 다양한 출처의 자금이 유입될 가능성이 점차 커지고 있는 것에서 느끼는 일본의 초조함이 반영되어 있다. 특히 북‧미 관계가 개선된 이후 미국, 중국, 한국과 달리 일본이 동북아시아에서 점유하고 있 는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아지는 것에 대한 우려가 높다.42)
비핵화 프로세스가 진행되는 동안 남북관계 또한 크게 발전할 것 이라는 예상은 빗나갈 수 있다. 오히려 북한의 대외환경 개선으로
42) 이 내용의 출처는 文浩一, “非核化と平和体制構築への画期的前進: 2018年の 朝鮮民 主主義人民共和国,” アジア動向年報 2019年版(2019), pp.69~94.이며, 해당 내용 은 김은혜, “북한 주민의 일상과 공간 변화의 정치적 파급효과” (통일연구원 자문회의 발표자료, 2019.6.14.). 내용을 토대로 작성된 것임을 밝힘.
인해 남한의 효용성은 저하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북한이 개방 정책을 결정하면 중국은 이미 북한의 최대 교역국으로 서 우위를 누릴 것이며, 북한은 남한 기업보다는 미국과 일본의 글로 벌 기업의 자본과 투자에 더 관심을 가질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북한 당국이 경제정책에 있어서 민족경제를 우선적으로 사고한다는 보장 이 없으며, 따라서 북한 지역에 남한 기업이 진출할 수 있는 입지는 줄어들 수 있다. 개성공단 폐쇄의 경험은 오랫동안 북한 당국자들에 게 트라우마로 작용할 수 있다. 국제사회에서의 국위 향상과 경제재 건을 위한 막강한 후원국들의 지원이 현실화되면 남북관계에서 남 한의 비교우위는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러한 관계 역 전은 향후 전개될 남북대화에서 남한이 직면하게 될 도전적인 상황 이 될 것이다.
나. 분야별 전망
(1) 정치 변화(가) 권력구조의 지속과 리더십의 도전적 요소
핵보유국 이데올로기는 수령유일영도체제를 뒷받침하는 정신적 토대이면서 동시에 절대절명의 위기 가운데에서도 체제결속의 강력 한 접착제 역할을 하였다. 북한 정권의 비핵화 길은 핵보유국의 지위 상실을 의미하며, 핵보유국 이데올로기의 폐기를 의미한다. 그 빈자 리는 경제강국과 같은 실용주의적 이데올로기로 새롭게 고안되어 대체될 것이다.
핵보유국의 자발적 철회로 인해 기존의 유일지배체제의 정당성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약화된 체제 정당성을 경제성장의 결실로 상쇄할 수 있다. 따라서 비핵화 후 경제발전을 목표로 한 개혁‧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