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지역사회 주도계층의 신분 지위, 학력, 재산 등에 대한 파 악은 사실 당연히 집요하게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대체로 특정지역, 시 점, 사안 등에 제한되어 전국적 차원에서는 어쩔 수 없이, 부조적(浮彫 的) 이해를 넘어선 전체적 일반화를 자신 있게 이루어내기는 버거운 상태였다. 이를 전국적으로 전시기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분명 불가 능할 것이다. 여기서 시기 지역별로 광범위하고, 지역 집합행동의 조직 적이고 정제된 형태라고 할 주민대회에 있어서, 그 주도자들 전체에 대해 그들의 부분적 활동경력이라도 일관되게 파악할 수 있다면 그것 은 식민지시기 각급 지역의 사회적 구성, 정치적 구조 그리고 그것의 식민지시기 전후 및 식민지시기 내의 변화 등과 같은 주요한 사항들에 대한 해명에 상당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이를 위해 주민대회 신문 기사에서 회장, 의장, 발기자, 대표자, 교섭 위원, 서기 등, 주민대회의 발기에서 진행에 참여한 것으로 보도된 사 람들의 인명을 수집하였다. 이들은 대회에서 어떤 형태로든 특정한 직 책과 임무를 맡아 활동한 이들이므로 이하 ‘주민대회 주도자’로 통칭하 겠다. 1장에서 살펴본 대로 일본인도 다수 참여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일본인들은 현재 비교 인명자료가 조선인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제한 되어 있어361) 여기에서는 일단 제외하기로 한다. 주민대회 주도자에서 조선인은 현재 수집한 연인원 6,100여 명이다.362) 이 명단을 주요 인 명자료들과 비교하여 그들의 경력파악을 시도하였다.363) 그런데 주민
361) 일본인들이 수록된 인명자료는 상공대감, 조선회사조합요록, 면협의회, 부협 의회, 도평의회 등 의원 명단, 기타 산만한 인사록 등인데, 아래 살펴볼 조선인 관 련 인명자료와는 비교할 때 본격적인 경력파악을 하기에는 많은 제약이 있다.
362) 이는 신문기사에 나타난 인명을 정리한 것인데, 부·군·읍·면민대회에 참여한 인 물은 연인원 조선인 6,100여 명, 일본인 1,000여 명이다. 복수의 대회에 중복하여 참여한 경우를 정리한 실인원으로는 조선인 5,300여 명, 일본인 900여 명이다. 이 밖에 리민대회 참여자로서 연인원 조선인 800여 명, 일본인 100여 명과 도민대회 참여자로서 조선인 180여 명도 정리하였다.
363) 대회의 신문보도의 인명 거론은 불규칙적인 것이어서 이들 명단이 주도 인물의 전체라고 할 수 없지만 통계학적 이해는 가능한 수준이라고 본다.
대회 주도자 인명과 각종 인명자료상의 명단을 기계적으로 대조하는 데에는 기본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그것은 주민대회 주도자의 명단 자 체가 모든 주민대회 참여자를 포괄하지 못한다는 점과 대조 인명자료 또한 모두 전국적으로 균일한 자료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어느 지역 에서는 각종 인명자료 명단은 풍성한데, 주민대회 자체가 많이 없거나, 보도된 인명이 적은 곳이 있을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가장 먼저 대조에 나서야 하는 면협의원의 매회 명단조차 1926년을 제외하 면 전국단위로 정리된 명단이 없고, 당시 신문에 보도된 명단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신문보도 명단은 전국 모든 읍면의 협의원을 보도 한 것이 아니고, 그 수록 여부의 기준 또한 대단히 임의적이다. 따라서 주민대회 주도자 명단과 주요 인명자료에서 각각에 해당 조선인 인원 이 군별로 20명을 넘는 경우에 한하여 명단교차를 통한 통계적 경력 검토를 행하였다.364) 이에 해당하는 군의 수는 88개365)이고, 이것과 12개 부지역을 합쳐서 100곳의 각급 지역을 가지고 작업하였다. 이들 지역에서 수집된 조선인 주도자는 연인원 5,300여명이고 실인원은 4,600여명이다. 전체 2,377건의 주민대회에서 주도자가 보도된 대회는 1,184건에 그친다. 이중 주도자수 20인 이상이 있는 88개군과 12부에
364) 군별 주도자 20명 이상은 해당 군에서 일어난 군·읍·면민대회 전체에서 보도된 주도자 수를 합한 것이기 때문에 각 대회별로는 보도된 주도자가 한두명에 불과하 거나 없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군단위로 주도자 경력을 대조하는 것은 다음의 이유 때문이다. 면단위로 소속을 세분화하여 대조할 경우 면소속이 나오지 않는 인명자료가 많아 대조가 불가능해지고, 또한 군민대회의 경우는 주도자의 거 주 면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또한 면단위 교차 검색은 불가능해진다. 군단위로 인 명을 대조할 경우에 동명이인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나, 필자의 ‘경험상’
인명자료상의 동명이인의 존재는 대단히 적은 경우로 보이며, 자료검토상에서 대부 분 쉽게 판별될 수 있었다고 본다. 자료검토에서 간과된 동명이인이 있다 하더라도 이하 통계적 처리에 유의미한 장애를 주는 정도는 아니라고 확신한다.
365) 88개 군은 다음과 같다. 강원 : 강릉, 이천*, 철원, 춘천 / 경기 : 개성, 고양, 시흥, 안성 / 경남 : 김해, 동래, 밀양, 사천, 의령, 진주, 창녕, 창원, 통영, 하동, 함안, 합천 / 경북 : 김천, 안동, 영일, 예천, 칠곡 / 전남 : 광양, 광주, 나주, 무 안, 보성, 순천, 여수, 영광, 완도, 장성, 함평 / 전북 : 고창, 김제, 순창, 익산, 전 주, 정읍 / 충남 : 공주, 논산, 당진, 대전, 부여, 예산 / 충북 : 영동, 청주 / 평남 : 강동, 강서, 개천, 맹산, 순천*, 안주, 평원 / 평북 : 벽동, 선천, 영변, 용천, 정 주 / 함남 : 고원, 단천, 문천, 북청, 신흥, 안변, 영흥, 이원, 정평, 함흥, 홍원 / 함북 : 경성, 경흥, 길주, 명천, 성진, 온성 / 황해 : 봉산, 서흥, 신천, 안악, 은율, 장연, 재령, 해주, 황주
포함된 대회는 911건이다. 이들 대회의 주도자는 연인원 5,337명인데 이하 통계와 분석은 이들에 한정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들을 각급 대회별로 보면 부민대회 154건 1,023명, 군민대회 118건 1,406명, 읍 민대회 247건 1,447명, 면민대회 392건 1,939명이다.
(1) 지역사회 인명자료의 현황과 의미
주민대회 주도자들의 신상과 활동, 그리고 경력을 얼마나 의미 있게 추적하느냐 하는 것은 본고가 활용하는 인명자료의 질과 성격에 의해 좌우된다. 주요한 인명자료를 중심으로 그 특성에 대하여 먼저 밝혀두 고자 한다.
가장 좋은 인명자료는 공신력 있는 기관에 의해 전국적이고 전시기 에 걸쳐 수 만 명 수준의 해당분야 인원을 모두 정리한 자료가 될 것 이다. 이에 가장 부합하는 자료는 아마도
조선회사조합요록과 조선
총독부 직원록일 것이다.조선회사조합요록은 1921부터 1942년까
지 격년 간격으로 전국에 있는 회사와 조합의 간부와 주주들의 명단을 수록하고 있다. 여기에 수록된 인물들은 어느 정도의 경제력을 갖춘 인물들로 간주하여도 무방할 것이다.조선총독부 직원록은 매년 전
국의 총독부 관리와 공립학교 교장·교원, 그리고 면장의 명단을 수록하 고 있다. 그런데 이 자료는 각종 관설 조합장 등 ‘공리’들, 그리고 면직 원, 구장, 정총대 등의 명단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읍·면단위 공리들의 활동을 추적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366) 대표적인 ‘공리’라 고 할 수 있는 면협의원, 읍회의원, 부협의원·부회의원, 도평의원·도회 의원들의 명단은 현재 대체로 확보할 수 있다. 이들 지방행정 자문·의 결기관 의원들의 명단을 총독부에서 공개 발간한 자료는 현재 없다.당시의 신문들이 보도한 명단을 취합하는 수밖에 없는데, 전국의 읍·면
366) 여기서 미리 말해둔다면, 종합적인 인명자료 교차 검색을 통해 보면 교원·교장과 하급, 말단을 포함한 총독부의 정식 관리들은 이러저러한 각급 지역사회의 활동에 거의 참여하지 않거나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의 의미는 아래에서 다시 설명하겠 다.
이 모두 들어있는 것은 아니어서 일정한 한계를 가진다. 그렇다 하더 라도 이들 의원들이 일정한 재력과 사회적 인망, 식민권력과의 유착력 을 가지고 지역사회에서 유력한 지위집단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부족하나마 전국적인 인명조감은 매우 활용도가 높다 할 것이 다. 국가보훈처가 발간한
독립유공자 공훈록을 들 수 있다. 여기에는
국가 훈포상자만이 아니라 국내외 각종 운동의 발단과 진행에 있어 관 련자들도 명단으로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지역에서의 민족·사회운동의 인적 파장까지 가늠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일제시기 전체에 걸쳐 중앙 과 지역의 공산주의자들의 인명도 대체로 파악할 수 있는데, 그것은 여러 한국공산주의운동사 관련 저서에 언급된 인명들의 취합·정리이다.그런데 이들 공산주의 활동가들의 지역주민운동과의 개입정도는 주객 관적인 여러 요인에 의해 매우 제한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현상이 지역사회에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가 상당히 중요하므로 아 래에서 자세히 살펴보겠다. 필자는 지역의 인물들을 관찰하는 주요 지 점으로 그들의 각종 민간단체활동과 지역사회에 대한 각종 기부행위를 주목하였다. 단체활동자와 기부행위자들의 인명은 일제시기 조선문 신 문 기사에 엄청난 양으로 실려 있다. 이렇게 신문기사에 보도된 인명 들 전체는 결코 아니지만, 무작위적인 표본추출 방식으로 필자는 단체 활동자 5만여 명과 기부행위자 2만여 명의 명단을 취합, 정리하였다.
지역 인물들의 사회활동과 경제적 수준 일부를 추정하는데 크게 도움 이 된다고 본다. 포괄 인명수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전국과 전시기에 걸쳐 있어 의미 있는 인명자료로는
조선의 취락과 김민철의 기로에
선 농촌에 수록된 중견인물들의 명단이 있다.다음으로 전국적이지만 특정 시점 또는 일정 기간 안의 인명자료들 이 있다. 대표적인 것은 1929년의
조선상공대감이다. 한 시점의 전
국 상공인에 대한 취합이지만, 이들의 상공업 활동이 1929년 전후로도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무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자료 또한 지역인물의 경제력과 활동영역을 가늠하는데 유용하다고 본다.지역 인물의 경제력을 추정할 수 있는 인명 취합으로는 1910~1915년 까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