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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학위논문
일제시기 지역주민운동 연구
- 지역 주민대회를 중심으로 -
2013년 8월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한 상 구
일제시기 지역주민운동 연구
- 지역 주민대회를 중심으로 -
지도교수 권 태 억
이 논문을 문학박사 학위논문으로 제출함 2012년 10월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한 상 구
한상구의 문학박사 학위논문을 인준함.
2013년 1월
위 원 장 (인)
부위원장 (인)
위 원 (인)
위 원 (인)
위 원 (인)
<국문초록>
일제시기 지역주민운동 연구
- 지역 주민대회를 중심으로 -
한상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3·1운동 이후 도, 부, 군, 읍, 면, 리에 이르기까지 각급 행정단위별 로 거의 모든 지역에서 다종다양한 주민 집합행동이 전개되었다. 이러 한 집합행동 중에서 각급 행정단위 전체 주민의 의사를 결집하고 그것 을 실행 또는 관철하는 가장 체계적인 방식으로서 주민대회가 빈번히 열렸다. 지금까지 지역사회에 대한 많은 연구가 축적되었지만, 이와 같 은 주민대회의 상시적인 개최와 그 의미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 았다.
1920년대 초반부터 급격히 조선 전 지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크고 작은 지역단위의 주민대회는 지역과 주민의 이해와 관련된 거의 모든 사안에 대한 주민들의 적극적 반응과 활동이 집약된 것이다. 주민대회 는 지역주민이 식민행정 당국과 외형상으로는 가장 대등하게 만나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리고 주민대회는 지역의 주도적 인물이나 집단이 지역주민과 긴밀하게 결합하는 공간이었다. 총괄하자면, 주민대회는 지역주민 일반과 지역의 주도적 세력, 그리고 식민지 국가권력 삼자가 각기 자신들의 생각과 목적을 가지고 상호간 관계를 형성하고 길항하 였던 일종의 살아있는 무대였다.
주민대회는 기본적으로 식민당국과 공개적이고 합법적으로 교섭하는 다중 집회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주민대회의 목표와 과정은 식민당국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이루어지는 제한적인 성격을 가지 는 것은 아니었다. 주민대회는 합법적 집회라는 방식을 통해 자신들의 의사를 수렴하고 결정하였다. 주민대회는 나아가 그 의사를 실행하는 조직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일들을 연속적으로, 또는 동시에 수행하
는 일종의 의결·집행기구의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식민당국은 일관되게 지역주민의 모든 행동을 자신들의 통제 하에 두려고 하였다.
일제는 식민통치 전 기간에 걸쳐 조선인 내지 지역주민의 자발적인 의 사결집이 이루어지는 어떠한 제도적 행정적 절차도 허용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식민당국의 기본적인 태도 및 정책과 대비하여 본 다면, 비록 주민대회가 식민당국의 허락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할지라 도, 본질적으로는 식민당국이 허용하는 범위를 뛰어 넘는 것으로서, 식 민당국과 대치, 경쟁, 충돌, 저항하고자 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주민대회가 1920년대 초반부터 전국적으로 급속히 확산되어 1927년 에는 최고조에 달하였다. 이후 점차 줄어드는 과정을 거쳐 전시총동원 체제가 가동되는 1936년 이후에는 급속히 소멸해가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주민대회 발생의 시기적 추이는 전국적인 민족, 사회주의운동 의 시기적 소장과 파고와 정확히 일치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주 민대회는 기본적으로 중소단위 지역주민의 여러 가지 공적 사안에 대 한 것으로서 중앙의 민족, 사회주의 운동과 조직적, 인적 연계를 긴밀 하게 가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와 같이 중앙의 운동과 지역주민 집합 행동이 일견 무관한 듯하면서도 경향적으로 일치하는 모습은 지역의 주민대회가 다만 개개 지역의 고유한 사안들에 제한된 지역적 현상만 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민대회를 일으켰던 각급 지역의 주도집단과 주민들은 지역이라는 소우주에 갇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운동과 일제가 싸우고 있는 역동적인 사회공간을 자신들에게 최대한 유리하게 활용하고 대처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지역 주민과 지역의 주도집단이 보여주는 정치사회적 상황에 대한 능동적 대처는 1930년대 초중반 이후 일제가 급속히 주민통제정책을 강화하 면서 주민대회라는 주민 자발적인 집합행동 형식이 허용되지 않게 되 는 부정적인 국면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이 시기 각급 지역에 서는 집단민원과 여론조성 사안이 20년대보다 훨씬 큰 폭으로 발생하 고 있고 주민대회의 기능을 부분적으로 대체하는 각종 기성회 등의 조 직이 폭주하고 있으며, 면회, 읍회 등 식민당국이 시행하고 있던 의사 (擬似) 주민대의기구에 대해서 1920년대에 주민대회에서 활동하였던
주도집단이 분명, 의도적으로 진출하고 있는 모습 등이 나타나고 있다.
각급 지역에서 개최된 주민대회의 사안, 즉 지역에서 발생한 공적 사 안은 무엇보다도 식민행정당국의 행정행위를 직접 문제 삼고 개입하며 요구하는 ‘식민행정요구비판’의 사안이 가장 많았다. 이 사안은 전체 주민대회 사안의 거의 50%를 육박하는 비율을 보인다. 둘째로는 지역 주민들이 자신들의 지역에 대한 발전구상을 구체화 하거나, 지역내 각 종 현안에 대해 주민들 스스로의 대처방안을 논의, 결정하는 ‘지역운영 발전’의 사안이 있었다. 세 번째 비중으로는 일제시기 전기간을 통해 지역사회의 항상적 현안이었던 학교의 설치와 운영에 대한 사안이 있 었다. 넷째 사안은 지역단위 내의 현안이 아니라 전국적 또는 사회적 사건, 갈등 및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개입하는 것으로 ‘사회적 운동사 건’의 사안이었다. 이들 크게 네 범주의 사안들에는 지역주민의 생활공 간의 거의 모든 공적 사항이 망라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사 안의 해결과 실행을 위한 주민대회는 바로 그런 이유로 지역주민들의 자치기구로서의 일반성격을 획득하고 있었다.
지역 주민대회는 각급 지역에 존재하는 정치·사회·경제적으로 유력한 어떤 특정 집단이 시종일관 주도했다고 볼 수 없다. 주민대회는 기본 적으로 다수의 지역주민이 참여함으로써만 기능이 발휘되는 것이었다.
다수 주민의 참여는 특정 집단에 의해 주민들이 동원되는 것과는 엄청 난 차이를 가진다. 주민대회는 기본적으로 지역의 현안인 공적 사안에 대한 공개적 토론과 의견의 결집이다. 다수이든 소수이든 다양한 의견 이 표출되고 최종적으로 한 가지 결정이 이루어지는 토론의 공간이 주 민대회인 것이다. 주민대회는 참여인원이 나타나 있는 자료로만 본다 면 면단위 지역에서는 통상 200~300명이 참여하는데 이는 면단위 성 인 남성 인구의 1/10에 해당한다. 주민대회는 대회 성립의 정당성을 보장받기 위하여 참여 인원의 주민 대표성과 대의성을 중시하였다. 이 에 따르면 주민대회는 면단위 지역의 10가구의 대표, 대의자 1명이 참 여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주민대회 의장, 부의장, 간사, 실행위원 등 주민대회의 주도적 인물들의 사회경력을 통계적으로 분석해 보면 특정 집단의 우월적 주도성은 확인되지 않는다. 각종 인명자료를 통한 주도
인물들에 대한 경력을 살펴보면, 주민대회에 참여하는 시점에서 이들 주도자들의 절반 가까이(46%) 식민국가의 공직이나 상공인, 지역활동 가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주민대회 참여 이후에도 이들 경력 을 전혀 획득하고 있는 않은 인물들 비중 또한 약 37%로 결코 적지 않다. 주민대회 주도인물의 최소 1/3이 일견 정치·사회·경제적 유력 인 물집단에서 자료상으로는 비켜서 있는 것이다. 경력이 확인된 주민대 회 주도자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경력은 바로 지역의 각종 공적 현안에 참여했던 인물들로 약 40%전후를 보이고 있다. 그 다음 이 식민당국에 의해 지역에 대한 책임을 부여받은 면장, 면협의원 등 공직자들로서 20~30%를 차지한다. 동시에 일제에 직접적인 저항을 행했던 민족·사회운동 경력자 또한 10% 중반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지주, 상공인 등 경제력을 갖춘 인물들 또한 10% 전후의 비율을 차지 한다. 이를 종합해보자면 주민대회의 주도자들은 지역에 존재하는 다 양한 계층, 집단이 연합, 집결 또는 차출되어 있다는 것이 된다. 운동·
이념적으로 본다면 좌와 우, 민족과 비민족, 유산층과 비유산층이 모두 함께 주민대회를 조직하고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지역 현안인 공적 사안에 결합하여 나타나게 되는 연결고리는 바로 현상적으로는 1/3에 달하는 일반 지역주민 일반의 참여라고 할 수 있다.
주민대회에 대한 이상의 분석이 찾아낸 측면들, 즉 주민대회가 갖는 전국적 보편성, 중앙적 운동과의 조응성, 집합행동의 형식적 민주성, 참여 및 주도 집단의 계층·계급적 연합성, 대회 개최사안의 사회적 공 공성은 일제시기 주민대회가 획득하고 있었던 중대한 의미를 확인하게 한다. 이 모든 것은 일제시기 지역사회가 현재에도 그 성취를 위해 많 은 노력을 해야 하는 ‘근대적 시민사회의 공공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지난한 시도를 개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일제시기 주민대회 는 현재의 시민사회 공공성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그 역사·사회적 소환 이 요청되는 한반도 거주 주민들의 역사·사회적 실천과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키워드 : 주민대회, 주민운동, 집합행동, 공공성, 유지, 시민운동
< 목 차 >
서론
1) 문제의식 --- 1
2) 연구사 검토 --- 4
3) 연구방법과 논문구성 --- 14
1장 주민대회의 양태
1) 주민대회의 성립요건 --- 21
(1) 합법성의 문제
(2) 대회명칭과 주민참여의 문제
2) 주민대회의 진행과정과 성격 --- 27
(1) 주민대회의 일반 진행과정 (2) 주민대회의 성격
제2장 주민대회의 시기별 추이와 지역별 현황
1) 시기별 변동 양상 --- 37
(1) 주민대회의 년도별 개황과 지역주민 집합행동 (2) 각급 주민대회의 년도별 추이
2) 지역별 현황 --- 43
(1) 도·군별 주민대회 현황 (2) 각급 주민대회 현황
제3장 주민대회의 사안과 양상
1) 주민대회 사안의 분류 개관 --- 58
(1) 사안별 특성 (2) 사안별 내용
2) ‘식민행정비판·요구’의 대회 --- 62
(1) ‘식민행정비판’의 대회 (2) ‘식민행정요구’의 대회
3) ‘지역발전·운영’의 대회 ---- 111
(1) ‘지역발전’의 대회 (2) ‘지역운영’의 대회
4) ‘학교설립·운영’의 대회 ---- 136
(1) ‘학교설립’의 대회 (2) ‘학교운영’의 대회
5) ‘사회적 운동·사건’의 대회 ---- 152
(1) ‘사회적 운동’의 대회 (2) ‘사회적 사건’의 대회
제4장 주민대회 주도자의 성격
1)
유지와 유력자의 결합과 분리---- 164
2) 주도자의 경력과 성격 ---- 168
(1) 지역사회 인명자료의 현황과 의미 (2) 주도자의 경력과 성격
결론 ---- 182
서론
1) 문제의식
식민지시기에 대한 현재의 주된 이해와 인식의 방법은 식민지수탈론 과 식민지근대화론으로 대별된다.1) 양론은 식민지 대중들이 모두 식민 통치에 저항하였거나 아니면 그들이 모두 식민지하 발전에 포섭되었다 는 것을 주장의 전제 또는 결론으로 삼는다. 양론은 또한 공산주의-민 족주의좌파, 민족주의우파-자본가집단을 자신들의 정치·운동적 주체세 력으로 설정한다. 이리하여 양론은 근대 식민지 정치·경제 지배체제의 완고한 구축 위에서의 민족·계급 단위 운동이라는 차원, 즉 최종적으로
1) 식민지수탈론은 한국사학계의 주류적 입장인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한 식민지 인 식을 대표한다. 이에 대해 1980년대 말부터 안병직과 나카무라 사토루 등 경제사 학자들이 식민지하에서 근대적 발전이 이루어졌음을 강조하는 이른바 ‘식민지근대 화론’을 제기한 이래 약 20년 동안 두 입장 사이에 지속적으로 논쟁이 전개되어 왔다.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정리는 김인걸, 1997, 「1960,70년대 ‘내재적 발전론’
과 한국사학」, 김용섭교수정년기념한국사학논총간행위원회 편, 한국사 인식과 역 사이론 1, 지식산업사와 박찬승, 2007, 「한국학 연구 패러다임을 둘러싼 논의-내 재적 발전론을 중심으로」, 한국학논집 35가 대표적이며, 식민지수탈론의 입장에 서 그간의 논쟁을 정리한 연구로는 정태헌, 2007, 한국의 식민지적 근대 성찰-근 대주의 비판과 평화공존론 속의 역사학 모색, 선인을 참조할 수 있다. 식민지근대 화론의 입장은 안병직, 1997,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 창작과비 평 25-4; 김낙년, 2007, 「‘식민지 근대화’ 재론」, 경제사학 43; 이영훈, 2006,
「왜 다시 해방전후사인가」, 이영훈 외 편,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기파랑이 대표적 이다. 오랜 논쟁에도 불구하고 두 입장 사이에는 여전히 커다란 이론적·정치적 차 이와 간극이 존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지하에서 전개된 근대적 변화 자체 에 대해서는 모두가 인정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근대적 변화의 수준과 함의를 둘러 싼 논쟁으로 발전한 성과가 있었다. 식민지 시기의 근대화 현상과 그 유산의 현재 성에 대한 비판적 정리는 권태억, 1997, 「‘식민지 조선 근대화론’에 대한 단상」, 于 松趙東杰先生停年紀念論叢刊行委員會 편,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 나남출판;
2000, 「近代化·同化·植民地遺産」, 한국사연구 108호를 참조할 수 있으며, 내재적 발전론의 입장에서 식민지근대화론의 문제의식을 일부 수용하여 새로운 근대 인식 의 패러다임을 추구하는 대표적인 논의로는 정연태, 2011, 한국근대와 식민지 근 대화 논쟁-장기근대사론을 제기하며, 푸른역사를 꼽을 수 있다.
는 ‘근대’적이며 ‘이념’적이고, ‘엘리트’ 및 ‘뱅가드(전위)’적 정치·경제·
사회 주도세력으로 수렴되는 그러한 차원만을 인식과 논의의 영역으로 삼고 있다. 여기에서 한반도의 강역과 역사·문화 속에 전반적으로 통제 되고 결합되어 있는 일반 대중들과 그 대중들의 사회적 활동과 투사는 인식과 논의에서 대체로 충분히 검토되고 있지 못하다.
양론에 대한 비판적 입론은 지난 10년간 단속적으로 시도되고 있다.
이중 어느 정도 대표적인 것은 ‘식민지 규율권력론’과 ‘식민지 공공성 론’이라고 할 수 있다.2) 이 두 가지 입론의 포괄범위와 심급은 매우 다르다고 할 것이지만, 공유하고 있는 것은 식민권력, 또는 근대적 권 력의 압도적 관철이라고 할 것이다. 역사상 어느 시기나 지배적 권력 의 피지배층 또는 일반 대중에 대한 ‘비대칭적’ 우위성은 현실적으로 적나라한 것이었으며, 일제 식민지시기는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하튼 이들 입론들은 식민지 근대권력의 압도적 우위성과 그 관철에 대한 일반대중, 또는 민중들의 저항선과 탈출구는 어디에 존재 하며 어떻게 준비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론 구성상 뚜렷하게 부각시 키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소위 ‘대자적’ 일반대중의 모습, 즉 근대의 압 도하는 규율권력과 식민국가의 폭력성을 인지해가고, 비대칭적 권력관 계하에서나마 그에 주체적으로 대응해가는 그러한 모습은 대체로 그리 크게 묘사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는 사실상, 식민지수 탈론과 식민지근대화론이 비록 과도하거나 적절치 못하게 강조되었다 하더라도 그나마 설정하고 있던 계급적, 민족적 엘리트, 전위적 정치주 도세력의 역사적 행위와 의미조차도 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3)
2) 김진균·정근식 편, 1997, 근대주체와 식민지 규율권력, 문화과학사; 윤해동, 2003, 식민지의 회색지대-한국의 근대성과 식민주의 비판, 역사비평사; 정근식·
공제욱 편, 2006, 식민지의 일상, 지배와 균열, 문화과학사; 윤해동·황병주 편, 2010, 식민지 공공성-실체와 은유의 거리, 책과함께.
3) 식민지 규율권력론과 식민지 공공성론을 포괄하는 ‘식민지근대성론’에 대한 개괄은 조형근, 2006, 「한국의 식민지 근대성 연구의 흐름」, 공제욱·정근식 편, 식민지의 일상, 지배와 균열, 문화과학사를 참조. 이에 대한 또 다른 입장의 정리는 조경달 (정다운 역), 2012, 식민지기 조선의 지식인과 민중-식민지근대성론 비판, 선인 을 참조.
여기에서 통시대적으로 대중의 자기 선택적 결합 없는 엘리트(전위) 적 정치·사회·경제 운동세력은 존재할 수 없으며, 근대의 인류적 가치 에 근거하면서도 동시에 그 가치에 의해 자기 모순적이며 자기 균열적 이지 않는 ‘근대’ 권력은 없다는 점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 이러할 때 근대에 대한 탈출구는 궁극적으로 근대적 민족·계급적 구분선을 넘나 드는 일반 대중의 다종다양한 ‘가치지향적’ 지향과 그에 따른 사회적 행위들의 재구성이 가능할 때만이 비로소 그 전망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지배적 또는 지배해 들어오는 ‘근대적’ 권력에 일정하게 대치 하고 스스로의 근대성을 사유하고 모색하며 확보하려는 대중의 지향과 행위는 현세기 근대가 여하튼의 과정을 통해 확립, 고착된 때보다 그 이전과정인 근대 이행기의 시점에서 보다 많은 의미와 해석의 여지를 가지며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일제시기의 일반 대중들의 정치·사회·경제적 의 사와 행위를 전체적으로 조감해보는 것은 그 의미가 크다 할 것이다.
이러한 조감이 가장 효율적으로 가능한 것이 바로 일제시기에 실로 전 국적 범위에서 간단없이 행해졌던 지역 ‘주민대회’이다.
3·1운동 이후 도, 부, 군, 읍, 면, 리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지역에 서 다종다양한 주민 집합활동이 전개되었다. 그러한 집합활동 중에서 각급 행정단위 전체 주민의 의사를 결집하고 그것을 실행 또는 관철하 는 가장 체계적인 방식으로서 주민대회가 빈번히 열렸다. 지역사회에 대한 많은 연구가 축적되었지만, 이와 같은 주민대회 자체를 전국적 차원에서 주목한 연구는 아직 없었다.
1920년대 초반부터 급격히 조선 전 지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각급 지역단위의 주민대회는 지역과 주민의 이해와 관련된 거의 모든 사안 에 대한 주민들의 적극적 반응과 활동이 집약된 것이다. 동시에 주민 대회는 지역주민이 식민행정 당국과 외형상으로는 가장 대등하게 만나 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리고 주민대회는 지역의 주도적 인물이나 집단 이 지역주민과 긴밀하게 결합하는 공간으로서도 역할을 하였다. 이와 같이 지역주민 일반과 지역의 주도적 세력, 그리고 식민지 국가권력
삼자가 자신들의 생각과 목적을 가지고 상호간 관계를 형성, 조율하였 던 주민대회의 전체적인 성격과 행동양태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은 일 제시기 지역사회의 정치적 구조, 사회적 상황과 아울러 식민지 지방행 정의 작동방식의 파악에도 일조할 것이다.
2) 연구사 검토
일제시기 지역주민운동에 대한 연구사 검토의 전제로써 먼저 그 전 사가 되는 조선후기 지방사회 구조에 대한 기존 연구를 간략하게 개괄 하면 다음과 같다.4) 조선시대의 지방(향촌)사회는 기본적으로 국가(중 앙정부)의 대행자인 守令에 의한 지방지배와 향촌사회의 지배층인 재 지사족에 의한 향촌자치가 군·현 단위에서 결합, 길항하는 구조로 이루 어졌다. 조선왕조는 전국의 모든 군현에 수령을 파견하여 일원적인 지 방지배체제를 완비하였지만, 재지사족의 협조와 참여 없이는 군현 단 위를 실제적으로 지배, 통제할 수 없었다. 재지사족은 신분적 권위를 배경으로 향회(鄕會)라는 독자적인 향촌자치기구를 조직하여 내적 결 속을 도모하는 한편, 향회로 결집된 조직적 역량을 바탕으로 수령을 견제하거나 수령의 통치에 협조하는 방식으로 상대적인 자율성을 확보 할 수 있었다. 수령에 의한 관치와 재지사족을 중심으로 한 자치가 상 호 유착, 길항하는 ‘사족지배체제’는 16~17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했지 만,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국가의 지방지배가 강화되고 신분제가 동요 함에 따라 새로운 향촌질서로 재편된다. 즉 18세기 이후에는 수령권이 강화되면서 재지사족의 자치기구였던 향회가 형해화되고, 신향(新鄕)·
4) 안병욱, 1987, 「19세기 민중의식의 성장과 민중운동 -'향회'와 '민란'을 중심으로-
」, 역사비평, 역사비평사; 김인걸, 1991, 「조선후기 鄕村社會 변동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고석규 1998, 19세기 조선의 향촌사회 연구
, 서울대학교출판부; 한국역사연구회 조선시기사회사연구반, 2000, 조선은 지방 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아카넷.
향족(鄕族)·요호부민(饒戶富民) 등 기존의 재지사족과는 출신과 세력기 반이 다른 신흥세력이 등장하여 재지사족과 향권을 둘러싼 경쟁을 전 개해 나갔다. 이에 따라 관치와 자치가 공존하던 사족지배체제는 점차 동요·약화되고 그를 대신하여 수령에 의한 관치질서가 강화된 ‘수령- 리향(守令-吏鄕) 지배체제’ 또는 ‘관주도 향촌지배체제’가 성립되었다.
결국 조선시대에는 수령권으로 대표되는 국가의 지배력과 재지사족 과 향리·신향 등을 중심으로 하는 향촌사회의 자치질서가 결합되면서 도 점차로 전자가 후자를 압도하는 변화 양상을 보였다고 하겠다. 그 리고 이와 같은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권력구조와 자치질서는 신분제라 는 전근대적 사회원리에 입각해 있었음은 물론이다. 일제시기 지역사 회는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었던 바, 한국의 근대가 전근대 시대의 내재적 발전의 결과만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적 동학과는 전혀 무관하게 외세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조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조 선후기 향촌사회의 권력구조와 자치적 질서가 식민지라는 조건에서 근 대적으로 재편·발현되는 양상에 대한 역사적 통찰력이 요구된다.
개항기 지역사회에 대한 연구는 극히 부진한데, 그 이유는 적어도 사 회사적 차원에서는 이 시기가 조선후기에서 일제시기 사이에 놓인 간 막극 정도로 인식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갑오개혁과 광무개혁 시기 에 추진되었던 근대적 지방제도 수립과 지방자치제도의 도입 시도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연구가 이루어졌지만,5) 실제 지역사회 내부의 구조 와 동학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은 아직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고 보인 다.
일제시기 지역사회에 대한 연구는 일제의 지방·농촌 지배정책에 관 한 연구에서 시작되었다. 김익한과 김영희 등의 선구적 연구를 통해 1910년대의 행정구역 통폐합과 부제(府制) · 면제(面制) 실시를 중심으
5) 손정목, 1992, 한국지방제도·자치사연구(상), 일지사; 윤정애, 1985, 「한말 지방 제도 개혁의 연구」, 역사학보 105; 이상찬, 1986, 「1906-1910년의 地方行政制 度 변화와 地方自治 論議」, 한국학보 42; 1989, 「1894~5년 地方制度 改革의 방 향」, 진단학보 67; 김태웅, 1997, 「근대 중국·일본의 지방자치론과 한말의 지방 자치 문제」, 역사교육, 64; 姜再鎬, 2001, 植民地朝鮮の地方制度, 東京大學出版 會.
로 한 지방행정제도 개편, 1920년대의 모범부락정책과 1930년대의 농 촌진흥운동, 1930년대 말 이후의 전시총동원정책 등 일련의 지방지배 정책에 대한 시기별 개괄이 이루어졌으며, 나아가 1920년 이후에 시행 된 도·부·읍·면 단위의 ‘지방자치’의 실상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정리가 이루어졌다.6) 이를 통해 일제의 지방·농촌 지배정책과 그로 인한 지역 사회의 근대적 재편 양상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는 일제의 지 배정책에 관한 연구로서 ‘위로부터’의 관점이 강하여 지역사회·지역주 민은 지배와 통제의 대상으로만 다루어지고 결과적으로 ‘식민권력 만 능론’적인 인식 경향을 드러냈다.7)
이러한 초기 연구의 한계는 최근 왕성하게 제출되고 있는 일제시기 지역사회 연구에서 상당히 극복되고 있다. 최근의 연구는 식민권력의 지배라는 ‘위로부터’의 힘과 지역사회 또는 지역주민의 대응이라는 ‘아 래로부터’의 역동성을 결합시키려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서로 중첩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첫째 촌락 단위에 초점을 맞춰 일제의 지 배정책과 그에 대한 식민지 민중의 대응을 분석한 연구, 둘째 군·면 단 위에 초점을 맞춰 식민권력과 지역주민의 매개자이자 지역사회의 주도 세력인 유지·유력자를 분석한 연구, 셋째 식민권력을 배경으로 전제하 면서도 지역정치와 주민운동 등 지역사회의 행위성(agency)을 구체적 으로 분석한 연구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일제의 농촌지배정책을 다루면서도 그것이 촌락 단위에서 전개 되는 구체적인 양상과 그에 대한 농민층의 대응으로 분석을 심화시킨
6) 金翼漢, 1996, 「植民地期朝鮮における地方支配體制の構築過程と農村社會變動」, 東 京大 博士學位論文; 김영희, 2003, 일제시대 농촌통제정책 연구, 경인문화사; 염 인호, 1983, 「日帝下 地方統治에 관한 硏究-‘朝鮮面制’의 형성과 운영을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지수걸, 1984, 「1932~35年間의 朝鮮農村振興運 動―식민지 ‘체제유지정책’으로서의 기능에 관하여」, 한국사연구 46; 이하나, 1994, 「1910~32년 일제의 조선농촌 재편과 ‘모범부락’」, 연세대학교 사학과 석사 학위논문; 홍순권, 1997, 「일제초기 面運營과 朝鮮面制의 성립」, 역사와 현실, 23.
7) 일제의 농촌지배정책에 관한 초기 연구에서도 김익한은 식민지배정책에 따른 농촌 사회 리더십의 변화와 농촌지역 사회운동의 전개양상을 연결시켜보려 했다는 점에 서 연구시각 면에서 선구적인 지위를 차지하며 향후 연구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 했다.
연구를 들 수 있다. 이들 연구는 식민권력에 의한 일방적인 강제와 통 제, 그리고 결과적인 포섭과 관제화를 강조하던 초기 연구와 달리, 농 민층의 자율적 행위와 선택의 가능성을 시야에 넣고 식민권력과 농민 층의 관계를 통해 ‘식민지근대’의 성격을 밝히고자 한다.
마쯔모토 다케노리(松本武祝)는 식민권력-(재촌)지주-농민 3자간의 정치적·경제적 결합·대항 관계를 분석하면서 ‘농민 개인-촌락 윤리-외 부 규범’이라는 3층구조 모델을 설정한다.8) 즉, 조선후기에 형성된 촌 락 내부의 평등주의적 공동체 윤리(도덕경제 : moral economy)를 전 제하면서도, 자신의 수입을 늘리기 위한 개인주의적 행동을 취하는 농 민상(합리적 주체)을 상정하고, 총독부에 의해 촌락 외부에 성립한 규 범(근대주의)이 촌락질서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한다. 이에 따르면, 평 등주의적 공동체 윤리의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재촌경작지주(在村耕 作地主-지방유지)는 소작농에 대한 온정적 지배를 통해 농촌사회의 갈 등조정 기능을 담당하면서 촌락의 리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지방 유지층은 1920년대 말부터는 식민권력으로부터의 집합재 공급의 증가 에 따른 세금부담과 소화공황기(昭和恐慌期)의 곡가 하락에 따른 온정 주의적 경영의 한계에 직면하여 ‘동태적 지주’로 바뀌면서 촌락 리더로 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 이를 대신하여 1930년대 농촌진흥운동 과 정에서 총독부의 영향 아래 ‘사사화(私事化) 이데올로기’9)를 내면화한 중견인물(中堅人物-상층 자작농)이 농촌사회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하였 으며, 식민권력은 전시체제 하에서 이들을 매개로 촌락에 대한 헤게모 니 지배를 관철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윤해동은 촌락을 분석하는 관점으로 ‘위로부터의 시각’(지배)과 ‘아래 로부터의 시각’(자치)을 유기적으로 결합하기 위하여 ‘면-촌락-촌락 내 부조직(面-村落-村落 內部組織)’의 세 국면이 서로 연동하는 삼국면구 조(三局面構造)를 설정하며, 이 세 가지 국면은 각각 행정적 지배의 측
8) 松本武祝, 1998, 植民地權力と朝鮮農民, 社會評論社.
9) 마쯔모토는 빈곤 문제를 구조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이해 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사화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를 사 용한다(松本武祝, 앞의 책, 162쪽).
면, 지배와 자치를 매개하는 측면, 촌락 자치의 측면을 대표한다고 본 다.10) 이에 의하면, 1917년 일제의 면제(面制) 시행으로 근대적 지배 체제가 형성되었고 면 아래에 편입된 행정동리(新洞里)의 구장(區長)을 매개로 식민권력의 지배가 촌락 단위까지 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촌락(舊洞里) 단위의 자치질서가 근본적으로 해체되지 않음으로써 촌 락의 행정적 대표자(구장)와 실질적 권위자(長老, 有志)가 길항하는 ‘촌 락 운영의 이원구조’가 식민지 말기까지도 온존되었다. 또한 일제는 촌 락 내부에 다양하게 조직되어 있던 계(契)를 근대적 조합(組合)으로 변 형시킴으로써 촌락 단위의 전통적 연대를 해체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촌락 자치조직인 동계는 상당한 동요 양상을 보였고 공익·생활·생산·금 융 등 다양한 개별적 기능을 갖는 촌락조직으로 분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촌락 내부조직 역시 일방적으로 식민권력의 의도대로 관제화 (官制化)되지는 않았고, 촌락민들의 자율적 조직으로서 끈질기게 존속 됨으로써 촌락의 공동체적 관계는 식민지 말기까지도 유지될 수 있었 다.
김민철은 식민권력과 자본의 촌락 침투가 촌락의 변화를 초래했지만, 그 변화는 국가나 자본에 의한 일방적인 변화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 어진 식민성과 근대성에 대한 농민층의 전략적이고 선택적인 반응이기 도 하다는 전제하에 식민권력에 대한 촌락 차원의 대응방식을 유형화 하였다.11) 그는 행정침투력과 촌락자율성이라는 두 축의 상호관계에 따라, 촌락의 자율성은 낮지만 행정침투력이나 자본침투력이 높아 외 부로부터의 힘에 의해 규정된 행정형·농장형, 행정침투력과 촌락자율성 이 상승적으로 결합된 모범부락형, 행정침투력과 촌락자율성이 모두 낮아 경제적·사회적으로 뒤쳐진 낙후형, 높은 촌락자율성으로 행정력의 침투에 부정적으로 대응한 자율형 등 네 가지 이념형을 설정하고, 총 독부 조사 자료와 기존의 사례연구에서 드러난 촌락의 대응양상을 유 형별로 정리하였다.
위의 연구들은 식민권력의 지배와 농민층의 대응이라는 두 측면이
10) 윤해동, 2006, 지배와 자치-식민지기 촌락의 삼국면구조, 역사비평사.
11) 김민철, 2011, 기로에 선 촌락-식민권력과 농촌사회, 혜안.
어떻게 맞물리는가 하는 점에 주목하며, 지배와 자치의 매개로써 촌락 리더십을 고려하는 진전된 모습을 보인다. 또한 초기 연구가 식민권력 의 억압성과 규정력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며 식민지근대의 불구성·파행 성만을 문제삼던 것과 달리, 식민지배에 내재된 근대의 양면성(도구적 합리성의 진전과 근대 규율권력으로서의 통제성)을 시야에 넣으면서도 식민지근대 자체를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이들 연구 역시 정책사적 관점에서 주로 총독부의 정책 자료와 조사 자료를 활용하기 때문에 촌락 자체의 논리와 자료가 아니라 총독부의 논리와 자료를 통해서 촌락 내부를 바라본다. 그리하여 애초 의도와는 달리 위로부터의 시각과 아래로부터의 시각이 긴밀히 결합되지 못하여, 촌 락의 내적 실상은 모호한 채로 남고, 지배와 자치의 양면성이나 다양 한 촌락 유형을 드러내는 것에서 멈춘다. 이러한 연구를 일제시기 지 역사회라는 차원으로 확장해 본다면, 정책사적 차원을 넘어서 지역사 회 내부의 구조와 동학(動學)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필요한 시점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12)
둘째, 식민권력과 지역주민의 매개자이자 지역사회의 주도세력인 유 지·유력자에 대한 분석은 앞에서 언급한 김익한과 마쯔모토의 연구에 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졌지만, 구체적이고 종합적인 연구로는 지수걸이 대표적이다. 그는 충남 공주에 대한 사례연구에서 시작하여 여러 지역 에 대한 일련의 사례연구를 정력적으로 수행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일 제시기 지역사회를 파악하는 틀로써 ‘관료-유지 지배체제’라는 개념을 정식화하였다.13) 지수걸은 ‘유지집단’을 총독부의 지방지배 과정에서
12) 최근에는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작성된 촌락 문서가 다수 발굴되면서 근대 이행기 촌락의 변화를 탐구한 사례연구가 다양하게 제출되고 있다. 또한 사회학 분 야를 중심으로 다학제적인 공동연구를 통해 다양한 성격의 촌락에 대한 종합적인 조사·연구가 활발해지는 추세를 보인다. 전자의 대표적인 연구성과로는 안병직·이영 훈 편, 2001, 맛질의 농민들, 일조각과 이용기, 2007, 「19세기 후반~20세기 중 반 洞契와 마을자치-전남 장흥군 용산면 어서리 사례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국 사학과 박사학위논문이 있으며, 후자의 대표적인 연구로는 김일철 외, 1998, 종족 마을의 전통과 변화, 백산서당과 정근식 외, 2003, 구림연구-마을공동체의 구조 와 변동, 경인문화사를 들 수 있다.
13) 지수걸, 1996, 「일제하 공주지역 유지집단의 도청이전 반대운동」, 역사와 현실
20; 1996, 「일제하 공주지역 유지집단 연구-사례1: 徐悳淳(1892-1969)의 ‘유지기
형성된 총독정치의 매개집단으로서, 재산(토지재산)과 ‘사회활동 능력’
(공직 수행능력, 일본어 구사능력), 당국 신용(공직 활동 경력)과 사회 인망(민원 해결 역량)을 고루 갖춘 지방사회의 유력자 집단(조선인, 일 본인 포함)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성격을 갖는 ‘지방유 지’를 매개로 한 일제의 지방지배체제를 ‘관료-유지 지배체제’로 개념 화하고, 이를 조선후기 ‘수령-이향 지배체제’의 연장선에 위치 짓는다.
그가 말하는 ‘관료-유지 지배체제’란 총독부가 각종 ‘관료기구’와 ‘공직 기구’(자치 및 자문기구, 공공조합 및 단체)를 총동원하여 구축한 지방 (농촌)지배의 ‘조직이나 제도’, 혹은 그 ‘기제(機制)나 양식’을 의미한 다. 지수걸에 의하면 ‘지방유지’는 사실상 공직자의 범주와 동일하 며,14) 지방유지에 의해 전개되는 ‘유지정치’는 민원과 진정 등 각종 공 직기구를 매개로 한 비공식부문의 정치로 제한된다.
10여 년에 걸쳐 일관되고 집요하게 수행된 다수의 사례연구와 그것 을 기반으로 한 개념적 종합화는 커다란 연구사적 의의를 갖는다. 그 렇지만 지수걸의 논의에서는 ‘지역사회’의 주체성과 역동성이 사실상 거세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그의 논의에서는 일제 식민권력과 ‘지방유 지’의 수직적 결합으로 이루어진 ‘관료-유지 지배체제’가 ‘민(民)’의 생
반’과 ‘유지정치’」, 역사와 역사교육 창간호; 1997, 「일제하 공주지역 유지집단 연구-사례2: 金甲淳(1972-1960)의 ‘유지기반’과 ‘유지정치’」, 于松趙東杰先生停年 紀念論叢刊行委員會 編, 한국민족운동사연구, 나남출판; 1997, 「일제하 공주지역 유지집단 연구-사례3: 池憲正(1890-1950)의 ‘유지기반’과 ‘유지정치’」, 역사와 역 사교육 2; 1997, 「일제하 전남 순천지역의 소작인조합운동과 ‘관료-유지 지배체 제’」, 한국사연구, 96호; 1998, 「일제하 충남 조치원 유지, 孟義燮의 ‘유지기반’
과 ‘유지정치’」, 역사와 역사교육 3·4합집; 1998, 「일제하 충남 서산군의 ‘관료- 유지 지배체제’-瑞山郡誌(1927) 분석을 중심으로」, 역사문제연구 3; 1999, 「 구한말·일제 초기 유지집단의 형성과 향리-충남 공주지역의 사례를 중심으로」, 연 세대학교 국학연구원 편, 한국 근대이행기 중인 연구, 신서원; 2001, 「근대이행 기 경남 함안지역의 사회이동 양상」,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7; 2005, 「일제시기 충남 부여·논산군의 유지집단과 혁신청년집단」, 한국문화 36; 2007 「일제하의 지방통치 시스템과 군 단위 ‘관료-유지 지배체제’」, 역사와 현실 63.
14) 지수걸에 의하면, 일제하의 유지집단은 ‘관료-유지 지배체제’의 형성과정에서 등 장한 하나의 ‘정치세력’이자 일종의 ‘사회적 지위집단(social status group)’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정치 사회적 지위나 위세는 전근대사회의 양반 신분처럼 생득적으 로 획득된 것(ascribed status)은 아니었다. 일제시기 도·부·군이나 읍면 단위 행정 기관들은 각기 해당 구역의 ‘有志名簿’(‘공직자명감’나 ‘신사록’ 등은 이를 토대로 작성되었다)를 작성하여 관리하였다.
활과 운동의 공간인 지방의 체제적 변화를 직접 대변하는 것으로 설정 되기 때문에 일제의 지방지배의 최종적 대상이자 목표인 지방의 ‘민’
(지역주민)은 사실상 시야에서 배제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견 ‘민’은 유 지들이 언제라도 동원할 수 있는 존재이거나 또는 유지와는 내부적으 로 깊게 결합하여 있지 않은 존재로도 파악되고 있다.15) 또한 그의
‘관료-유지 지배체제’론은 식민권력과 지역주민을 매개하는 ‘지방유지’
의 개념을 대단히 협소하고 정태적으로 규정하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
지수걸이 지방유지의 기본조건으로 거론하고 있는 재산, 사회활동 능 력, 당국 신용, 사회 인망은 현실에서는 상호 모순적일 수도 있는 것이 다. 더욱이 이러한 유지들은 관료의 끄나풀로서 ‘뒷거래 정치’를 그 궁 극의 목표이자 존재이유로 삼는 사람처럼 서술되는데, 이러한 뒷거래 의 실제적 양상이 그의 연구에서 전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해방 이 후 국가에서부터 지방사회까지 하나의 연쇄망을 이룬 한국의 정치적 부패구조를 그대로 일제시기에 적용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갖 게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그의 논의에서는 일제시기 ‘지역사회’가 지역주민과 유력자만이 아니라 다양한 성격의 ‘유지’들에 의해 복잡다 단하게 구성되어 상호간의 교류와 갈등 관계를 맺고 있었던 사실이 송 두리째 관찰의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다.
필자는 일찍이 이러한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서 일제시기 ‘유지(有 志)’의 개념을 재규정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였다. ‘유지’는 어떤 지위 집단이 아니다. 총독부의 직접 지배하에서 정치적, 사회적 위치를 제도 적으로 보장받는 그러한 지위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리고 다시 금 분명히 할 것은 ‘유지’는 ‘유력자(有力者)’가 아니다. 전현직 관리, 주로 재산의 크기를 전제로 해야 하는 문벌이나 문중, 개인 재력가, 지 주 등은 상식적으로 유력자이다. 일제가 이러한 유력자들을 회유하고 자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총독부가 우선 순치되 었으면 하고 바라는 유력자들이 곧 그 지역의 유지가 되는 것은 아니 었고, 될 수도 없었다. 일제시기의 ‘유지’는 글자 그대로 “뜻이 있는 사
15) 한상구, 2000, 「일제시기 ‘시민대회’의 전개양상과 성격, 제43회 전국역사학대회 발표문.
람”이다. 과연 무엇에 대한 ‘뜻’인가를 살펴보는 것이 일제시기 지역사 회의 동학을 푸는 열쇠가 있다고 본다. 일제시기는 절대빈곤과 절대적 비민주상황에서 개발과 계몽과 발전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개발과 계 몽과 발전은 일제에 의하여, 즉 식민국가에 의하여 수행되고 있었다.
모든 개발과 계몽이 총독부 권력에 의하여 진행되었다면, ‘뜻을 가진 사람’은 다만 그 협조자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당시의 유지는 다분히 식민당국의 협조자일 수 있었지만, 동시에 조선인과 조선사회의 자기 발전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즉 자기발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사회적
‘뜻’을 가지는 사람이기도 했던 것이다.16)
정연태도 동일한 문제의식에서 유지를 ‘어떤 일에 뜻이 있거나 관심 이 있는 인사’라는 사전적 의미에서 이해하고, 구체적으로는 ‘지방유지’
의 범주를 학력이나 재력을 바탕으로 지역여론 형성, 사회단체 활동, 지방행정·정치 등에 영향을 미치는 지방사회의 유력자집단으로 규정한 다. 그는 ‘당국 신용’을 중시하는 지수걸의 유지 개념이 제한적임을 비 판하면서, 재력 소유에 기반을 두고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한 자산가형 지방유지와 학력 소유를 바탕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미쳤던 지식인형 지방유지라는 두 가지 유형으로 지방유지를 분류한다.17) 필자는 지방 유지를 하나의 정태적 지위집단이나 ‘당국 신용’에 기반한 친일적 엘리 트(유력자)로 제한하지 않는 그의 견해에 동의하면서도, 지방유지의 사 회적 영향력의 원천을 재력과 학력 두 요소로 한정하는 것은 일제시기 지역유지의 실상과 역사성을 충분히 드러내기에 난점이 있다고 판단한 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재력과 학력 같은 객관적 요소 이외에도 지역 사회의 계몽·개발·발전이나 공공적 가치에 자신을 투사하는 인물로 유 지의 범주를 확장하고, 그러한 유지가 단지 자신의 의지만이 아니라 지역주민의 요구 나아가 적극적인 그들의 ‘압력’ 위에 서있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16) 한상구, 2002, 「일제시기 지역사회의 ‘二重權威構造’에 대한 연구시론」(역사문제 연구소 제18회 토론마당 발표문).
17) 정연태, 2003, 「조선말 일제하 자산가형 지방유지의 성장 추구와 이해관계의 중 층성-포구상업도시 강경지역 사례」, 한국문화 31(정연태, 2011, 앞의 책에 재수 록).
셋째, 이상의 연구가 식민권력을 축으로 지역사회의 내부구조를 분석 하는 것이라면, 최근에는 식민권력을 분석의 배경으로 삼으면서도 지 역사회라는 장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주민운동을 통해 지역주민의 주체 성과 행위성에 주목하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18) 기왕에도 노동·농 민·청년 등의 대중운동과 신간회 같은 정치적 운동이 지역 차원에서 전개되는 구체적 양상을 분석한 연구는 상당정도 축적되어 왔다.19) 그 러나 최근에 활발해지고 있는 일제시기 주민운동은 민족·계급모순을 중심으로 구획되고 식민통치와 계급지배에 대한 조직적·자각적 투쟁을 다루던 기존의 연구와 달리, 일상의 층위에서 지역주민들의 역동성이 어떻게 발현되는가 하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시 말하면, 식민 권력의 지배에 일방적으로 포획되지 않는 비균질적 공간으로서 지방을 주목하고, 구체적으로 수탈과 저항의 이항대립에 의해 해소되지 않는 지역주민운동을 다루는 것이다.
주민운동은 대개 지역주민의 일상생활이나 발전욕구와 밀착된 지역 현안을 매개로 이루어졌는데, 도로나 학교 같은 공공재의 설치 요구, 세금이나 부역의 불공정 부과에 대한 이의 제기, 각종 기부금 및 의연 금 모금을 위한 회합 등 지역사회 공동의 문제에 대한 주민들의 관여 는 1920~30년대에 걸쳐 전국적으로 확인된다. 이 과정에서 식민권력 과 지역유지는 상호 교섭하고 경쟁하면서 주민을 동원하고자 했다. 제 도적인 결정권은 당국에게 있었고 지역유지는 주민을 ‘대표’하여 당국 에 대한 진정과 교섭과정을 주도했다. 지역유지의 대표성과 정당성은 일반주민의 참여와 지원 여부로 드러났으며 그것이 다시 상황을 전개 시키는 추진력으로 작용했다. 일반주민은 당국의 통제와 동원에 저항
18) 김제정, 2000, 「1930년대 초반 경성지역 전기사업 府營化 운동」, 한국사론 43;
염복규, 2007, 「1920년대 후반~30년대 전반 차지·차가인운동의 조직화양상과 전 개과정」, 사회와 역사 73; 이기훈, 2008, 「1920~30년대 보통학교와 지역사회」,
한국민족운동사연구 54; 문영주, 2009, 「1920~1930년대 금융조합 유치운동과 지역사회」, 역사문제연구 21; 허영란, 2009, 일제시기 장시 연구-5일장의 변동 과 지역주민, 역사비평사; 김영미, 2009, 동원과 저항-해방 전후 서울의 주민사 회사, 푸른역사.
19) 지수걸, 1993, 일제하 농민조합운동 연구, 역사비평사; 박사논문, 역사문제연구 소 편, 1993, 한국근현대지역운동사 1~2, 여강.
하거나 회피하면서, 지역유지의 대표성을 확인하거나 견제하는 방식으 로 현안에 참여했다. 지역유지가 주민들의 희생과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기반은, 지역사회가 기대하는 공통의 가치를 보장하고 자기결정 권을 확장하려는 주민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연구는 지역사회의 내적 동학을 구체적으로 밝혀주었다는 점 에서 커다란 연구사적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구가 특정한 지역이나 현안에 대한 사례연구의 성격을 가지며 극히 최근에야 시작 된 새로운 연구 분야라는 점에서 부분적, 부조적(浮彫的) 분석이라는 기본적인 한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앞으로의 연구에서는 주민운동이 활성화되었던 1920~30년대 전체에 걸쳐서, 특 정한 지역·현안에 대한 사례연구를 넘어서 지역사회의 역동성이 발현 되는 전국적 양상에 대한 종합적 연구로 진전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본고가 취하고 있는 주민대회를 통해서 지역사회의 다양한 집 합행동의 일반양상과 의미를 전체적으로 추적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까 지 연구의 성과를 바탕으로 그 한계에 도전해보고자 하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3) 연구방법과 논문구성
일제시기 주민대회의 발생과 진행, 그리고 주민대회 참가자들의 유형 과 실태를 분석하기 위해 이 논문은 통계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신문 과 인명 자료를 통해 수집가능한 모든 정보들을 모아 몇 가지 기준과 구분틀에 맞춰 분류해서 입력한 뒤 주민대회와 참가자들의 양태를 통 계적으로 추출하였다. 이를 통해 식민시기 전 조선지역에서 일어났던 주민대회를 시간적·공간적으로 분석하고, 사안과 형태에 따른 유형화를 시도함으로써 주민대회의 전체상을 조망하고 개별 사안의 특성을 해명 하고자 했다. 또한 주민대회 참가자들이 어떤 유형의 사람들이며, 어떤
삶의 궤적을 그리고 있는가를 확인함으로써 지역의 주도적 인물들, 즉 소위 ‘지역유지’나 ‘지역유력자’로 호명되는 개인이나 집단의 실체를 밝 혀내고자 했다.
이를 위해 다소 무모하다고까지 할 정도로 관련 자료를 최대한 수집 하여 입력·정리·분류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개별 사례 연구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싶어서였다. 물론 개별 사례나 특정인에 대한 연구는 그 나름의 장점을 갖고 있다. 전형적인 인물을 통해 그가 속한 집단, 계층 등의 특징을 효과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러나 역시 이러한 방법을 통한 연구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 류에 빠질 위험성을 적지 않게 안고 있다. 이 한계를 극복하고 싶었다.
또 하나는 식민지기를 살면서 사회적 발언을 한 사람들의 전체적인 모 습과 그 실체를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기존의 역사 연구와 논쟁에서 정작 배제되어 버린 ‘발언하고 행동한’ 사람들, 즉 ‘民’의 이야기를 말하고 싶었다. 그 ‘민’은 일본제국하의 어쩔 수 없 는 ‘신민(臣民)’이기도 하고, 한반도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이기도 하 며, 또 식민권력에 맞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민’이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을 해명하는 데, 인명자료의 구축이 완전히 성공적이었다 고 자신할 수는 없다. 자료와 정보의 파편성, 활동 영역의 차이 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각기 서로 다른 많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활동하 고 있어, 일관되고 종합적인 설명이 쉽지 않다. 주민대회 또한 사건과 사안마다 수많은 이야기와 특징들을 갖고 있어 그 모두를 추적하는 것 은 사실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쩌면 그 의미가 오히려 적을 수도 있 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을 통해 전체적인 흐름과 경향성을 확인할 수 있으며, 나아가 식민지의 전체 사회상을 좀 더 풍부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할 것이다.
주민대회와 참가자들에 대한 기록은 크게 두 가지 자료군에 의존했 다. 주민대회는 주로 신문자료에 기초했고, 사람들에 대한 자료는 인명 록을 비롯하여 인물 관련 정보자료에 의존했다.
현존하는 총독부 경찰 관련문서나 당시의 각종 잡지에서 주민대회를 구체적으로 다룬 기록은 실로 두세 건밖에 찾아지지 않는다.20) 이에
비해 당시 동아일보 한 신문에서만 각종 주민대회가 언급된 보도기사 는 8,000여 개를 훨씬 넘는다. 조선일보나 시대일보 등 당시 다른 조 선문 신문, 그리고 총독부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도 지역의 주민대회를 다룬 기사는 빈번히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신문들의 주민대회 관련 기 사들에서 동일 대회에 대한 연속보도와 신문간 중복보도를 묶어서 건 수 1개로 처리해보면, 당시 개최됐거나 개최가 모색되었거나 또는 단 순히 거론되기만 했던 것까지 합쳐서 도·부·군·읍·면·리 단위 각급 주민 대회를 3,000여 건 이상 추출할 수 있다.21) 따라서 일제시기 주민대회
20) 일제 경찰문서에서는 1924년 세무감독국 유치와 관련된 전주시민대회 진정위원 의 상경활동에 대한 정보보고가 구체적인 대회기록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 다(「陳情委員 入京에 관한 건」, 1924. 4. 15, 검찰행정사무에 관한 기록(1)) 그 밖에는 신간회나 갑자구락부 등 단체의 회의 내용에 주민대회 계획 등이 언급 된 수준이다. 당시 잡지에서도 1925년 함남 고원군청의 행정실태를 비판하는 고원 군민대회에 대한 기자의 짤막한 보고 외에 개별 주민대회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나 기사는 찾아보기 어렵다(「南信北通」, 개벽 60호, 1925. 6.). 이들 4개의 주민대 회들의 내용에 대해서는 당시 신문들이 모두 상세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밖에 당시 경찰문서와 조선문 잡지에서 주민대회가 언급된 보고나 기사는 수십 건이 찾아지 는데, 개별 주민대회에 대한 것은 아니다. 이들 기록은 주민대회 일반에 대한 당시 의 인식 방향이나 분위기 등에 대해서는 도움이 된다고 보이지만, 대체로 산만하고 심도가 깊지 못한 형편이다. 국내에 현존하는 총독부 경찰문서와 국문잡지 대부분 에 대한 본문 및 색인어 검색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를 이용하였다.
21) 이들 대회를 신문별로 정리해보면 동아일보에 1,900여 건, 조선일보에 1,000여 건, 시대일보류(시대일보, 중외일보, 중앙일보, 조선중앙일보 합산통칭)에 400여 건, 매일신보에 500여 건이 보도되었다. 이 중 동아일보에만 보도된 대회는 1,400여 건, 조선일보에만 500여 건, 시대일보류에만 150여 건, 매일신보에만 300여 건 가까이 있다. 2개 이상의 신문에 중복 보도된 대회 건수는 600여 건이다. 여기에 서 시대일보류에서 주민대회 기사가 가장 작은 건수로 추출되는 것과 전체 3,000 여 건의 주민대회 중 약 반에 가까운 대회가 동아일보 단독보도라는 것은 주목할 만한 점이라고 할 것이다. 신문마다 보도된 주민대회 건수가 크게 차이가 나는 것 은 각 신문의 주민대회와 같은 주민 집합행동에 대한 호불호를 직접적으로 반영하 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이들 신문의 발간일수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일제시기 동아일보 발행일수를 보면 동아일보는 7,300여 일이고 이에 비해 시대일보류는 2,600여 일이다. 이와 함께 똑같이 고려되어야 할 상황은 주민 대회 관련 기사 수집에 있어 각 신문자료의 검색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먼저 유념 해야만 한다.
이들 기사의 추출은 동아일보는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newslibrary.naver.com), 조선일보는 ‘DB조선’ (http://srchdb1.chosun.com), 시대일보류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매일신보는 ‘국립중앙도서관 전자도서관’(http://www.dlibrary.go.kr)과 ‘미디어 가온’(http://www.mediagaon.or.kr)
에 대한 연구는 당시 신문기사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상세히 밝혀두어야 할 것은 신문기사에서 이 논문 이 다루는 주민대회 기사를 취합할 때에 어떤 기준으로 선별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주민대회에 대한 일반정의와도 관련되기 때문에 중 요한 것이다. 일반정의는 다음 항에서 상세히 다루기로 하고, 기사선별 기준의 형식적 측면만 분명히 하자면 다음과 같다. 일제시기 각급 지 역단위 주민들이 열었던 공식, 비공식적 각종 옥내외 집회에 대한 신 문기사는 실로 무수히 많다. 이러한 집회들에서 집회 명칭에 각급지역 단위 전체 주민명과 ‘대회’를 사용한 경우만을 주민대회로 선별하였다.
즉 ‘마산부민대회’, ‘용천군민대회’, ‘성덕면민대회’, ‘후동리민대회’ 등과 같은 명칭이 사용되었을 때에만 주민대회로서 일차 추출하였다.
이와 같이 주민명과 ‘대회’라는 용어의 사용을 엄격하게 적용한 이유 는 다음 항의 주민대회 정의에서 상세히 다루겠지만, 여기서 간략히 요약하자면 그러한 명칭만이 지역주민 전체의 참여가 직간접적으로 실 현되거나 그러한 참여를 지향한다는 것을 분명히 천명하는 ‘주민참여 의 공식성’을 나타내기 때문이고, 이러한 ‘공식성’에 따라 대회의 결정 사항을 주민들 전체가 수용하여 수행하게 되는 ‘주민의사의 합의성’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 분석과 통계에 사용되는 주민대회는 이들 3,000여개의 대회에서 관제대회와 리민대회, 기타 언급정도로만
을 이용하였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는 기사전문검색이 가능하여 제목에는 나 타나 있지 않고 기사본문 속에만 들어있는 주민대회 언급까지 검색할 수 있다. 현 재 자연어 검색이 완전히 구현되고 있지 못한 상태지만 현재로서는 가장 광범한 검색이 가능하다. ‘DB조선’과 ‘국립중앙도서관 전자도서관’은 기사제목만 검색이 된 다. ‘미디어 가온’은 1919년 1월 ~ 1925년 6월을 제외한 기간에 기사제목과 본문 의 색인검색이 가능하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도 기사제목과 본문 의 색인검색이다. 위의 신문별 대회 보도건수에서 동아일보가 압도적인 것에는 현 재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수준의 신문검색방법에서 동아일보가 가장 넓게 검색이 가능한 이유에서 비롯된 점도 크다고 보인다. 현재 검색수준이 가장 낮은 것은
‘DB조선’인데 이것은 기사제목상의 검색이라는 점과 아울러 기사제목의 전산입력 오류와 누락이 대단히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조선일보에서 1,000여 건의 주민대 회가 추출된 것을 보면, 입력이 정확히 되고 본문검색까지 가능할 때에는 동아일보 수준의 대회 기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분류 자료명
관 문서류
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 「國民精神總動員役員名簿」(1939.5) 國民總力朝鮮聯盟, 國民總力朝鮮聯盟役員名簿(1944.6.1.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