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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대회의 성립요건

Dalam dokumen 저작자표시 - S-Space - 서울대학교 (Halaman 31-37)

(1) 합법성의 문제

주민대회의 양태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은 다음의 사례에 대체로 집 약적으로 나타나 있다. 즉 1921년 8월, 일단의 시민 발기자들이 경성 시내와 시외의 전차임금을 통일시키고자 시민대회를 열려고 하였다.

당시 식민경찰당국은 이를 불허하면서 주최자와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경기도 경찰부 당국자에게 그 이유를 물은즉 전차임금 통일문제에 대하여는 "당국자가 되는 우리로도 역시 동감하는 바이요, 한사람의 시민으로도 찬성하는 바이지마는 이에 대하여 시민대회까지 연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에 적당치 아니한 것으로 생각하노라. 가령 구체적인 안건을 상구한다던지, 시민의 의견을 종합하기 위하여 시민대회를 연다고 하나 시민대회라고 시민이 전부 모이는 것이 아니요, 전부 모인다고 하더라도 도리어 의견이 종합되기 어려운 것이므로 오십보 소백보로 유지자 또 발기 몇 사람이 시민의 대표로 되어 일을 집행하여 나아가기는 일반이라. 차라리 이러할진대, 시민 대표 몇 사람이 일을 간단히 하여 나아가는 것이 필요할 듯한데, 시민대회를 연다고 하여 옥외집합을 하겠다고 함에는 절대로 허락할 수 없는 바이요, 따라서 옥내집합에 대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지금 권고중이나 만일 당국의 권고를 듣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금지까지라도 할 수밖에 없는 바, 지금 조선의 현상이 독립운동도 없고 아무 불안한 형세가 없으면 그만이어니와, 특정치 아니한 다수한 사람이 모이는 중에, 어떠한 사람이 모이는지도 알기 어려운 바, 임의로 당국에서 먼저 전차임금 통일문제에 대하여 시민대회를 연다는 데에는 아무 생각할 바 없지만, 결과가 어찌 될까 하여 시민대회를 열지 못하게 하는 바이며, 또 발기인 되는 사람들에 대하여도 다소 생각하는 바인데, 더욱이 이번 시민대회에는 내선인이 전부 포함된 것이라

하더라도 어떤 한편 또는 신문을 보더라도 용산은 내지인이 거주하는 곳이라 하여 임금을 통일시키었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이런 것으로 보더라도 먼저 감정적으로 일을 하려고 하는 자리에 대회의 결과 군중의 심리라는 것은 또한 다른 것인데 어떠한 결과를 지을지 알 수가 없는 소이이라"고 말하는데 그러면 "특정한 인물이라 하더라도 몇 천 명이나 이를진대 어려울 바이나 가령 오십 명, 이백 명 대표자가 일정한 장소 즉 옥내에 집합하는 것은 관계치 아니할가" 한즉, 그것은 될 수 있겠다고 하더라. 22)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주민대회는 철저히 합법성의 테두리, 즉 식민행정당국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 는 것이었다. 이하 살펴보겠지만 주민대회는 식민행정에 대한 비판에 서부터 지역발전에 관한 현안, 그리고 사회적 쟁점에 대하여 지역 주 민들의 의사를 표출하는 자리인데, 이는 ‘대회’라는 이름을 걸고 있는 이상, 일시적이고 즉흥적, 또는 폭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 전에 일시, 장소 등 각종의 형식적 준비, 그리고 논의 사안 자체가 조 율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는 대회를 촉발하는 주민들의 가감 없는 의도와 의사가 그대로 노출되지 않고 식민당국에 의해 통제된다는 것 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항상적인 집회금지의 가능성 아래 에서 주민 의사와 그 표출형식의 정제, 식민당국이 자신들의 의사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하는 합리성과 당위성의 제고, 이를 통한 다중집 합의 현실화를 모색하게 한다. 이는 소위 합법적 주민대회의 개최 자 체가 식민당국과 직간접적인 길항과 긴장, 대치와 갈등을 기본적으로 내장하는 공간과 국면을 조성한다. 이는 동시에 그 사안의 수위와 종 류에 관계없이 주민대회가 어느 정도까지는 사회적이며 정치적 의미를 가지게 하는 것이었다.

둘째로 주민대회는 기본적으로 주민들의 다중적 참여가 있어야만 가 능했다. 지역내 유력자나 대표성 있는 몇 사람들이 모인다고 하여 ‘주 민대회’라는 이름을 얻는 것은 아니었다. 대표성은 확인되어야 했으며, 이는 실로 백 여 명에서 수 천 명까지 다중이 직접 모이는 것으로 실

22) 「市民大會는 不許可」, 동아일보 1921. 8. 13. (3)3

현되기도 하였고, 실질적으로 단위 지역의 주민들의 대표성이 확인되 는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기도 하였다. 바로 여기에서 주민대회는 지역 주민들의 직간접적인 의사의 실재적 존재, 그리고 그 주민의사의 실질 적인 대의, 대표의 과정의 존재를 찾아볼 수 있게 한다. 위의 사례에서 보듯 바로 이러한 주민의사의 현실적 집합 또는 대의 과정의 존재는 식민당국으로 하여금 상당한 부담감을 느끼게 할 수밖에 없다.

셋째로 이러한 합법성, 즉 식민당국이 그 타당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 게 하는 주민의사의 직접성과 대의성, 그 정제된 형식과 결정 및 결의 는 다시 지역주민 전체로 하여금 그 결정과 결의를 실현하고 실천하게 하는 가장 명시적이고 나아가 자기강제적인 동력이 되었다. 즉, 주민대 회의 결의는 그 결의가 실현되기까지 지속적으로 주민들의 의사를 확 인하고 투사하게 하는 힘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비록 그 시발이 식민 당국이 허용한 합법성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그 실현 과정을 통해 주민들의 의사가 이미 식민당국과 분리되어 지역주민 자신들의 ‘자치’

의 영역으로 전화, 확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일제시기 조선인 사회의 집회에 대한 총독부의 규제 일반 을 정리해둘 필요가 있다. 식민지 시기 조선에서 집회 통제에 대한 연 구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경찰의 집회 통제 자체에 대한 논문은 없지 만 아마도 관련 논문에서 주변적으로 언급한 것은 있다.23)

식민지기 조선의 집회 통제에 관한 법적 근거는 보안법과 집회취체 령(集會取締令)이다. 1907년 7월 통감의 지휘 하에 대한제국 법률로 제정된 보안법은 포괄적인 치안법인데 그 중 제 2조에 경찰관은 안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집회 또는 다중의 운동 및 군집을 제한, 금지 해산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 강점 당시인 1910년 8월 경령(警令)[警 務總監部令] 3호로 만들어진 집회취체령은 정치에 관한 집회 및 옥외 집회를 포괄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위의 두 법만으로 집회는 포괄적으로 금지된다. 위 두 법령은 식민지 시기 내내 살아 있었고 해 방 직후 폐지되었다. 연표 등에는 1945년 9월 폐지된 것으로 나오는

23) 현재로는 鈴木敬夫, 법을 통한 조선식민지 지배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민족 문화연구소, 1989의 연구 밖에 찾을 수 없다.

데 법제처 법령정보에 따르면 1948년 4월 8일 군정법령 제183호 필 요 없는 법령의 폐지에 의해 두 법 모두 폐지된 것으로 나온다.

실제 운용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좀 더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법령상 으로 모든 옥외 집회는 금지되었으며 정치에 관한 집회도 금지되어 있 다. 옥내 집회의 경우 어떠한 방식으로 통제되었는지 불분명하다.

삼

천리 기사에 청총 등 이른바 삼총의 집회 금지가 보안법 제2조에 근 거한 것이라 한 것으로 보아 보안법을 이용하여 옥내 집회도 금지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옥내 집회의 경우 경찰에 사전 신고 및 허가 등 의 절차가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보안법 2조에 따라 경찰이 자의적 으로 집회를 금지, 해산하는 것이 가능하므로 경찰 통제 자체가 법령 조문 상의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나, 다만 1920년대에 옥내 집회에 사 전 허가 등의 통제 장치 없이 경찰이 방치하였을까 하는 의문은 있다.

아니면 오히려 신고·허가 등의 세부 절차 없이 통제하는 것이 경찰로 서는 더 편하였을 수도 있다. 다음으로 애매한 것이 ‘정치에 관한 집 회’에 대한 규정이다. ‘정치에 관한 것’의 범위가 당연히 애매하기 때문 이다. 하여튼 보안법 2조와 집회취체령만으로 조선의 모든 집회는 금 지할 수 있다. 또 보안법 7조 ‘정치에 관한 불온한 언론과 동작’ 운운 의 내용까지 적용하면 사실상 집회 또는 그와 유사한 집단행동 모두를 금지, 해산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식민지 조선에서는 경찰이 포괄적으로 집회를 금지, 해산 할 수 있었는데 다만 실제 운용에서, 특히 옥내집회의 경우 경찰이 어 떠한 방식으로 대응하였는지는 구체적 사건들을 통해 살펴볼 수밖에 없다. 조선에서 집회에 대한 경찰의 대응은, 법률적이거나 행정적이라 기보다는 말 그대로 ‘정치적’ 행위였다.

(2) 대회명칭과 주민참여의 문제

주민대회의 실제 명칭은 대체로 ‘부민대회’, ‘군민대회’, ‘읍민대회’,

‘면민대회’와 같이 부, 군, 읍, 면과 같은 각급 행정단위의 주민인 부민,

군민, 읍민, 면민에 ‘대회’를 붙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논문이 수 집한 주민대회 2,400여 건24)의 대략 70%인 1,600여건이 이러한 명칭 을 사용했다. 이런 명칭법은 대회의 참여주체가 해당 지역 주민들 전 체라는 점을 명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대회라고 하더라도 지역주 민 전체가 참여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명칭의 실 제적인 의미는 해당 지역주민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는 것, 즉 대 회 참여자들이 지역주민들 중에 특별한 자격으로 제한되지 않는 개방 성을 천명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동시에 이것은 대회를 발기하 거나 주최하는 측에서 볼 때, 대회의 개최사안이 해당 지역주민 일부 의 이해나 관심에 국한되지 않는 지역주민 전체의 문제이거나 문제이 어야 한다는 자신들의 뜻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

주민대회 명칭이 갖는 이러한 두 측면의 의미를 각각 ‘주민참여의 개 방성’과 ‘사안의 주민전체 소구성’이라고 한다면, 양자가 동시에 구현될 때, 즉 해당 지역의 상당수 주민들이 대회의 사안을 자신의 문제로 간 주하고 대회에 직접 참여하는 주민대회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대회가 될 것이다.

여기에서 먼저 ‘주민참여의 개방성’이 실제적으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우선 대회 현장에 주민들이 수적으로 가급적 다수가 참석하는, 즉 참 여의 ‘다수성’이 중요하다. 이와 동시에 또한 중요한 것은 주민들이 다 만 참석으로만 끝나지 않고, 대회의 진행과 결의 및 결정과정에 자신 들의 의사를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참여의 ‘능동성’이 발동해 있어야 한 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주민 다수의 실제 참석과 능동적 참여가 비 현실적이거나 비효율적일 경우는 주민들의 대표자로서 자신들의 의사 를 표출, 관철하는 대의적 구조를 가지고 대회가 운영되는 것도 ‘주민 참여의 개방성’을 실제적으로 구현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자연스럽게

24) 이는 면단위 이상의 대회만 모은 것이다. 한 지역에서 한 사안으로 2차 이상 대 회가 열리는 경우도 많다. 6개월 내 동일사안 중복 대회개최는 1건으로 처리했다.

현재까지 정리된 대회는 부민대회 280여 건, 군민대회 330여 건, 읍민대회 650여 건, 면민대회 1,150여 건이다. 이 논문에서 분석하는 주민대회 총건수는 2,420건이 다.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리단위 대회, 즉 동민대회, 정민대회, 리민대회는 현재 300여 건 이상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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