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新羅 交流史에서 본 新羅求法僧
鄭 炳 俊 (東國大)
Ⅰ. 머리말
Ⅱ. 당의 대외정책과 신라의 위상
Ⅲ. 신라와 당의 교류
Ⅳ. 당 전기 신라구법승의 활동 과 그 의미
Ⅴ. 맺음말
Ⅰ. 머리말
당은 영토가 크게 확대되면서 영역 안에 많은 이민족들을 지배하였 을 뿐 아니라 개방적 대외정책으로 주변국 사람들이 대거 당으로 들어 와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그 중 서역인이 당으로 들어와 국제문화를 전파하고 이것이 다시 동아시아 각국으로 전파된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서역인을 비롯한 외국인의 활동은 수도 장안뿐 아니라 지방의 유력 도시, 나아가 변경이나 해안 지역에서도 널리 확 인된다. 이러한 당의 국제성은 안사의 난(755∼763)을 기점으로 한 당 전기와 후기를 막론하고 별로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당과 신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보면, 그러한 상황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당 전기에는 공적 사신이 양국 교류의 중심을 이루 었던 데 반해, 당 후기에 이르면 공적 교류에 더해 사적 교류가 활발 하게 행해졌다. 특히 張保皐로 대표되는 신라인의 대당교역과 재당신 라인의 활동은 당과 신라의 교류가 새로운 단계로 접었음을 잘 보여준 다. 당 전기에 양국의 사적 교류가 그다지 행해지지 못한 이유는 주변
국과의 사적 교류를 제한하는 당의 율령제도를 넘어설 만한 조건들이 아직 구비되지 못한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주목되는 것은 당 전기에 입당한 신라구법승의 활동이 다. 기록상으로 볼 때 당 전기에 입당한 신라구법승의 숫자는 당 후기 의 그것보다 훨씬 적지만, 그 역시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며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그 개별 활동력이 후기의 구법승보다 혁혁하였다. 크게 보면 당 전기와 후기를 막론하고 신라구법승의 활동은 매우 활발하였 던 것이다. 이는 앞에서 말한 당과 신라의 전반적 교류양상과는 차이 가 있다. 물론 구법은 종교적 열정에 따라 행해진 것이므로 종교적 범 주에서 이해해야 하는 면이 있지만, 그들의 활동이 단순히 종교에 그 치지 않고 외교나 문화 등 다른 방면과도 관련이 있었던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1)
이 논문은 당시 신라구법승들이 수행한 역할이 당과 신라의 교류사 내지는 관계사 속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졌는가를 생각해 보려는 것이 다. 신라인 입당구법승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연구가 나와 있지만, 대부분 불교사의 관점에서 구법승의 활동을 구명하는 데 주력하고2) 당과 신라의 교류사라는 거시적 관점에서의 연구는 그다지 이루지지 않았다.3) 이런 관점에서 신라구법승의 활동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
1) 가마타 시게오, 한국불교사 (신현숙 역, 민족사, 1988), pp.44∼56; 김상현, 慈藏의 정치외교적 역할 (신라의 사상과 문화, 일지사, 1999); 姜淸波, 入 唐的三韓僧人 (入唐三韓人硏究, 曁南大學出版社, 2010) 등. 이하 出典은 원 칙적으로 처음에만 적겠다.
2) 黃有福․陳景富, 한․중불교문화교류사 (권오철 역, 까치, 1995); 陳景富, 中 韓佛敎關係一千年 (宗敎文化出版社, 1999); 김상현, 7․8세기 해동구법승들의 중국에서의 활동과 의의 (불교연구 23, 2005); 김상현, 8세기 동아시아의 불교 교류 (이기동․연민수 등, 8세기 동아시아의 역사상, 동북아역사재단, 2011); 정병삼, 신라 구법승의 구법과 전도-원측과 의상, 무상과 도의를 중심 으로- (불교연구 27, 2007) 등을 들 수 있다. 그 외 개별 구법승에 대한 연 구는 무수히 많다.
3) 물론 嚴耕望, 新羅留唐學生與僧徒 (唐史硏究叢稿, 新亞硏究所出版, 1969);
권덕영, 三國時代 新羅 求法僧의 活動과 役割 (청계사학 4, 1987); 권덕영, 신라 ‘서화’ 구법승과 그 사회 (정신문화연구 30-2, 통권 107, 2007); 김병
전제로서 당의 대외정책과 외국인에 대한 제반 규정 및 그 변화양상 등에 이해가 필수적이다.
입당구법승이라고 해도 여기에는 국가교류의 일환으로 구법한 경우 와 사적으로 구법한 경우로 나눌 수 있다. 다만 838년에 입당한 일본 승 圓仁(엔닌)이 공적 사신단의 일원으로 입당하였다가 당 조정의 체 류 허가가 나지 않자 개인적으로 구법을 행하였고, 또한 개인이 공적 사신단에 동승하여 입당하거나 귀국한 것으로 보이는 예와 같이 어느 한쪽만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만큼 입당구법승은 다양 한 형태가 존재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적으로 입당한 구 법승과 사적으로 입당한 구법승은 그 활동 내용과 역사적 역할에 있어 서 여러 가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전자는 양국 조정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 활동 역시 공적 성격을 지닌 경우가 많은 반면, 후 자는 공적 임무에 구애받지 않고 개인적 구법에 전념하면서 보다 다양 한 활동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Ⅱ. 당의 대외정책과 신라의 위상
당은 세력을 크게 확장하면서 주변국을 포용하고 끌어들이는 개방정 책을 시행하였다. 여기에는 국력의 융성에 따른 자신감 외에도 지배층 의 민족적․문화적 混種性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 기초를 쌓은 것은 당태종으로 그는 여러 차례 개방적 민족관을 표방하였다. 예를 들면 정관 12년(646) 薛延陀를 평정한 후 鐵勒 13姓 추장들이 태종을 알현 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곤, 羅唐 同盟의 成立과 新羅 求法僧의 役割 (진단학보 99, 2005); 김병곤, 新羅 下代 求法僧의 行蹟과 實狀 (佛敎硏究 24, 2006) 등과 같이 역사학의 관점에서 구법승의 역할을 고찰한 연구가 없지는 않지만, 사실 규명에 치중하 거나 그 범위가 제한적이다.
나는 지금 천하의 주인이 되었는데, 中國과 四夷를 물문하고 모두 길 러 살게 할 것이다. 편하지 못한 자는 내가 필히 편안하게 할 것이며, 즐 겁지 못한 자는 내가 필히 즐겁게 할 것이다(
冊府元龜
권170, 來遠, p.2051).뒤이은 高宗도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등 당의 세력을 더욱 확대하였지 만, 곧이어 주변국의 반격으로 국력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이전의 개방 적 민족관이 후퇴하는 양상이 나타났다.4) 그리고 안사의 난 이후에는 吐蕃 등의 공세에 시달리며 폐쇄적 민족관이 대두하기도 하였지만, 그 것은 거의 대립적 국가나 민족에 한정되었고 당이 망할 때까지 그 개 방성은 기본적으로 유지되었다.
당은 朝貢, 冊立, 婚姻 등 다양한 방식으로 주변 국가나 민족과 관계 를 맺었다. 그 중 가장 넓은 형태는 조공이다. 당 현종 시기에 편찬된
唐六典
을 보면, 당에 조공한 나라[國]는 370여 개를 헤아렸고 당시에 는 70여 개가 남아있다고 한다.5) 그 중 국명이 나열된 것은 67개국인 데, 여기에는 신라와 발해를 비롯하여 波斯, 天竺 등이 포함되어 있다.그리고
통전
,
당회요
,
신당서
,
구당서
에는 모두 167개 나라가 당에 조공하였다고 전하고,
책부원귀
권970, 外臣部의 조공3과 조공4 에는 1,229건의 조공 사례가 실려 있다.6) 이들 조공 관련 기록에도 신 라는 빠짐없이 보인다. 이때 宣宗 이후 당조가 멸망하는 哀帝까지 57 년 동안의 조공 사례는 2건에 불과하지만,7) 이는 당 말기에 실록이 편4) 章羣, 唐代蕃將硏究 (聯經, 1986), p.6. 한편, 토마스 바필드, 위태로운 변경 ( 윤영인 역, 동북아역사재단, 2009)에서는 “이세민(당태종)은 자신을 초원과 중원의 통치자로 동시에 수용하는 정치체제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 후계자들 은 그 정책을 지속시키지 못하였고 초원에 대해 이전 한나라와 같은 방어적 전략으로 되돌아갔다. 이러한 변화는 중원에 한족왕조가 세워지면 상인․군인 계층과의 투쟁에서 문관관료의 권력을 보존하는 방어적 대외정책을 추진하는 강력한 세력이 활동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보여준다”(pp.275∼276)라고 한다.
5) 唐六典 권4, 尙書禮部, 主客郞中 條, “凡四蕃之國經朝貢已後, 自相誅絶及有罪 見滅者, 蓋三百餘國. 今所在者, 有七十餘蕃(中華書局, pp.129∼130).
6) 최재영, 唐代 長安의 조공사절의 변화와 鴻臚寺의 기능 (동북아역사논총 24, 2009), pp.260∼265.
찬되지 않았고 또 당 말의 혼란기에 기록이 소실된 데 따른 것이다.8) 조공은 당이 망할 때까지 기본적으로 유지되었다.
조공국 중에서 당과 거리가 가깝거나 특별한 관계에 있던 국가에 대 해서는 官爵을 수여하여 ‘책봉관계’를 맺었는데, 신라와 발해 등이 여 기에 해당한다. 西嶋定生 등은 책봉관계를 특별히 중요하게 보고 이것 이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규율하는 원리로 작동하였다고 말한다. 이에 의하면 동아시아 나라들은 한자․유교․율령․불교를 공유하는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였지만, 이 역시 책봉을 매개로 실현되었다. 심지어 수 와 당이 고구려를 공격한 것도 책봉관계 내지는 책봉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러한 책봉체제론에 대해서는 일본 내에서도 반 론이 제기되어 책봉만을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역사의 다양한 측면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나오기도 하였다.9) 한국의 동양사학계에서 는 책봉체제론이 동아시아사를 구조적으로 파악하려는 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이념적․명분적 측면과 실제의 차이를 도외시한다는 비판 등을 제기하고,10) 또 한국사학계에서는 동아시아 세계론이 지나치게 외재적 요인을 강조한다고 간주하여 한국사에 적용 하는 데 다소 신중한 태도를 보여 왔다.11)
7) 최재영, 唐代 長安의 조공사절의 변화와 鴻臚寺의 기능 , p.266.
8) 劉節, 중국사학사 강의 (신태갑 역, 신서원, 2000), p.220; 高國抗, 중국사학 사 (오상훈 등 역, 풀빛, 1998), pp.299∼300; 權悳永, 古代韓中外交史-遣唐使 硏究- (일조각, 1997), p.111 등.
9) 菊池英夫, 總說-硏究史的回顧と展望- (唐代史硏究會 編, 隋唐帝國と東アジ ア世界, 汲古書院, 1979), pp.16∼70; 누노메 조후ㆍ구리하라 마쓰오, 중국의 역사 (수당오대)(임대희 역, 혜안, 2001), pp.80∼81 등.
10) 李成珪, 中國의 分裂體制模式과 東아시아 諸國 (한국고대사논총 8, 1996);
이성규, 中華帝國의 팽창과 축소: 그 이념과 실제 (역사학보 186, 2005);
金裕哲, 日本學界의 東아시아 世界論에 대한 비판적 검토 (慶尙大 社會科學 硏究 5, 1987); 김한규, 古代 東아시아 世界의 秩序와 構造 (서강대동양사연 구실 편, 東아시아 歷史의 還流, 지식산업사, 2000) 등.
11) 이기동, 8세기 동아시아 제국의 내정과 국제관계 시론 (이기동․연민수 등,
8세기 동아시아의 역사상), p.23. 이런 가운데 근래에 박대재, 고대 ‘동아시 아 세계론’과 고구려사 (박대재 등, 고대 동아시아 세계론과 고구려의 정체 성, 동북아역사재단, 2007)에서는 동아시아사의 관점에서 西嶋定生 등의 견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봉관계는 단순한 조공관계보다 상대적으로 더 긴밀한 관계였다고 생각된다. 이는 신라와 일본의 경우를 비교해 보면 명료해 진다. 당 후기에 신라는 대당교역을 비교적 자유롭게 행하였던 반면, 일본은 공식적이건 개인적이건 당과 교류할 때 신라인 또는 발 해인의 도움을 받은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 구체적 이유는 여러 가지 를 들 수 있겠지만, 신라가 당과 책봉관계에 있었던 데 비해, 일본은 조공관계에 있었던 것도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생각된다.12) 책봉 등에 수반된 여러 가지 혜택은 중국왕조가 국제질서를 주도하는 중요한 수 단이었고, 책봉관계를 맺으면 그 만큼 당과의 교류에 유리했다는 것이 다.
또, 당대 대외관계의 중요한 특징을 나타내는 것으로 羈縻府州가 있 다. 기미부주는 원래 당이 정복한 지역이나 당의 영역으로 투항해 온 경우에 설치하였지만, 뒤에는 이와 무관한 지역에도 설치되었다. 예를 들면 고종 龍朔 3년(663) 4월에 신라에 鷄林州都督府가 설치되었고, 현 종 선천 2년(713)에는 발해에 忽汗州都督府가 설치되었다. 이에 대해 栗原益男은 “신라와 발해는 당과 책봉관계에 있으면서 기미주가 설치 되었는데, 1국의 영토 전체가 1기미주로 된 것이어서 민족 분할제어라 는 성격을 가진 기미주현의 설치와는 전혀 다르며, 민족적 통합력을 가진 독립왕국으로 당이 인정한 것이라고 해도 좋다”13)고 말한다. 또 堀敏一은
신라왕은 앞서 당과 함께 싸우던 중인 663년 계림주도독에 임명되었 다. 이는 물론 신라까지 기미주로 편입시키려고 한 것이지만, 그 후 신라 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12) 이는 외면적으로 일본의 책봉체제론자나 중국의 藩屬理論者들의 견해와 비슷 한 면도 있지만, 책봉의 의미를 상대적(또는 제한적)으로 평가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번속이론에 관해서는 정병준, 중화인민공화국의 藩屬理論과 고 구려 귀속문제 (고구려연구 29, 2007); 이석현 외, 중국 번속이론과 허상 (동북아역사재단, 2010) 참조.
13) 栗原益男, 唐の衰亡 (東アジア世界における日本古代史講座 7, 學生社, 1982), p.21.
가 한반도를 통일하자 한반도 전체가 하나의 기미주가 되었고 여기에 종 래의 낙랑군왕과 신라왕 등의 책봉호가 더해지면서 그것은 사실상 책봉 제와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이 되었다. 이 점은 뒤이어 일어난 발해의 경우 에도 마찬가지이다. ……기미주 체제는 원래 諸民族을 분할 지배하는 것 이었지만, 이들은 당이 半독립왕국의 존재를 인정한 것으로 당제국 지배 의 일대 전환기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다. 이러한 독립왕국 내지 는 반독립왕국의 예로는 雲南에 나라를 세운 南詔를 더 들 수 있다. 현종 은 개원 26년 그 왕을 越國王에 봉하고, 이어 운남왕에 봉하였다.14)
라고 말한다. 즉 계림주와 홀한주는 일반 기미주와는 그 성격이 다르 다는 것이다. 이는 譚其驤의 견해와도 비슷한 면이 있는데, 그에 의하 면 기미주는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즉 하나는 항복한 자들을 내지로 옮겨 설치한 것(僑蕃州)이며, 또 하나는 원래 거주지에 설치한 것이다. 이 때 전자는 당조의 판도에 속하지만, 후자는 기본적으로 당조의 판도가 아 니며, 신라와 발해는 후자에 포함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계림주에 대해 서는 실질적으로 “조공관계에 있는 隣國의 별칭”이라고도 한다.15) 요컨대 일반 기미주는 실질적 지배력이 관철되었던 데 반해, 계림주와 홀한주 는 책봉관계의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책봉관계에 부가되어 맺어진 이러한 ‘기미주관계’는 안사의 난 이후 인 代宗 永泰 원년(765) 7월에 押新羅渤海兩蕃使라는 관직(현 山東의 平盧節度使가 겸임)이 설치되면서 더욱 구체화된다. 이 관직은 제도적 으로 계림주와 홀한주를 押領(즉 관장)하는 임무를 지녔는데16) 그 기 본 직무는 다음과 같다. ⓐ 외교 관련 업무 : 당 조정과 신라․발해를
14) 堀敏一, 中國と古代東アジア世界 (岩波書店, 1993), p.223.
15) 譚其驤, 唐代羈縻州論述 (長水粹編, 河北敎育出版社, 2000)(원래는 紀念 顧頡剛學術論文集, 巴蜀書社, 1990에 게재), pp.148∼151.
16) 정병준, 8세기 동북아 정세의 변화와 당조의 대응체제-평로절도사 겸임의
‘압번사’ 계통 관직들- (이기동․연민수 등, 8세기 동아시아의 역사상, 동북 아역사재단, 2011), p.247. 애초 押蕃使’는 도호부와 邊州 도독부를 중심으로 하 는 기미주 지배가 붕괴하던 시기에 이들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 또는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기 시작한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村井恭子, 押蕃使の設 置について-唐玄宗期における對異民族政策の轉換 (東洋學報 84-4, 2003), p.40, p.44 참조.
소통시키고, 입국사신을 접대하고, 해당 국가에 관한 정황을 보고하고, 당 조정의 의사를 전달하였다. ⓑ 입당한 사람들에 대한 통행증(過所) 을 발행하였다. ⓒ 당조와 蕃國 간의 육상 혹은 해상 무역을 관장하였 다.17) 이렇게 이때의 ‘압령’이란 두 나라에 대한 실질 지배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이념적․형식적 성격이 강하였다.18) 그럼에도 불구하 고 신라․발해와 당의 관계는 기미주의 설치로 명목적으로나마 더욱 긴밀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은 혼인을 통한 和親關係도 맺었는데, 그 대상은 수렵이나 유목을 위주로 한 국가․민족들이었다. 그 직접적 목적은 해당 국가를 회유하는 것이지만, 그 인근의 국가를 견제하는 것도 중요하였다. 즉 당 태종이 吐谷渾에게 공주를 시집보낸 것은 토번을 견제할 목적도 있 었고, 현종 시대에 해와 거란에게 거듭 공주를 시집보낸 것 역시 돌궐 과 위구르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堀敏一에 의하면, 당 초기에 실제로 공주를 보낸 곳은 토욕혼과 토번뿐이었는데, 그 외의 지역에 대해서는 기미주를 설치하여 직접 지배하려 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19) 이러한
‘혼인관계’는 군사․외교뿐 아니라 互市 등과도 중요한 관련이 있지 만,20) 한반도의 신라 등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西嶋는 책봉을 기준으로 중국적 세계질서를 중국, 책봉국, 非책봉국 으로 단순화하였지만,21) 다수 학자들은 당대의 세계질서를 더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한다. 李大龍에 의하면 당의 세계관념은 ① 九州(중국),
② 海內(사이 지역), ③ 海外(塞外)로 이루어졌고, 또 이에 대응하여 ① 府州 통치구역(직접 통치), ② 都護府 또는 邊防都督府가 관할하는 기
17) 姜淸波, 試論唐代的押新羅渤海兩蕃使 (入唐三韓人硏究, 曁南大學出版社, 2010)(원래는 曁南學報 2005-1), pp.233~234.
18) 정병준, 평로군과 발해의 관계 (정병준 등, 중국의 발해대외관계사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11), p.70, pp.72∼73, pp.85∼86.
19) 堀敏一, 中國と古代東アジア世界, p.234.
20) 日野開三郞, 唐代和蕃公主の眞假制と資裝費 (唐代史硏究會 編, 隋唐帝國と 東アジア世界, 汲古書院, 1979), p.306.
21) 石見淸裕, 唐代の國際關係 (山川出版社, 2009), p.69 참조.
미부주 지역, ③ 藩國 구역(책봉 구역. 통치기구를 두지 않음)이라는 통치 구분이 설정되었다고 한다.22) 그러면서 신라, 백제, 고구려, 토번 등은 처음에 번국 구역에 포함되었고, 이 중 신라와 발해는 다시 기미 부주 지역에 포함되었다고 말한다.23)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신라와 발해에 설치된 기미주는 일반적 책봉관계의 성격이 강하였다.24) 高明 士는 천하질서의 구조를 세 종류로 나누어 ① 內臣 : 중국 본토(개별 인신 통치 및 예와 율령 등이 행해짐), ② 外臣 : 羈縻府州, 有封有貢, 無封有貢地區(세 종류), ② 不臣 : 형제국, 敵國, 荒遠 지구가 있었다고 말한다. 이때 신라(통일 이전과 이후 모두)와 발해는 외신 안의 기미부 주와 유봉유공이 동시에 적용되는 범주에 속하였고, 이들 나라에 대해 서는 군장에 대한 인신 통치가 행해졌다고 말한다.25) 군장에 대한 ‘통 치’라는 말은 ‘지배’라는 말과도 통한다고 하겠는데, 이 개념이 과연 타 당한가라는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통치 또는 지배라는 표현을 사용하 기 위해서는 명분적․당위적이 아닌 실제성이 증명되어야 하지만, 이 에 대한 논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역시 신라․발해의 1국 1기 미주를 일반 기미주와 같은 범주로 본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馬馳는 기미부주 외에 ‘羈縻國’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그는 이와 함께 屬國이라는 용어도 사용하는데,26) 이로 미루어 볼 때 기미국은 기미부주와 속국의 중간형에 속하는 듯하다. 결국 馬는 당의 지배질서 를 기미부주, 기미국, 속국 등으로 분류한 것인데, 이 경우 신라는 기 미국에 속할 것이다. 그러면서 蕃州(즉 기미부주)는 당의 영토[唐土]에 속한다는 말도 하지만, 기미부주와 기미국을 명확하게 구별하고 있는
22) 李大龍, 漢唐藩屬體制硏究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6), pp.281∼290.
23) 李大龍, 漢唐藩屬體制硏究, pp.377∼378, pp.390∼425; 정병준, 중화인민공 화국의 藩屬理論과 고구려 귀속문제 , p.101.
24) 번국 구역에 대한 당의 지배력에 관해서는 李大龍 등과 한국 학자들 사이에 큰 견해 차이가 있지만,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25) 高明士, 東亞古代的政治與敎育 (樂學書局, 2003), p.22, p.45.
26) 馬馳, 試論唐代蕃州的管理體制 (黃永年 等 編, 中國古代史論集, 陝西師範 大學出版社, 1999), p.610, p.613, p.621, p.641 등.
만큼 기미국을 ‘당토’로 보지는 않는 것으로 일단 판단된다. 이는 高明 士의 견해와도 다른 것으로 그만큼 당을 중심으로 한 질서의 층차가 다양하고 복잡하다는 사실을 잘 알게 한다.
이에 대해 渡邊信一郞은 당의 제국적 질서 개념을 정리하여 ① 주현 : 貢賦(즉 調庸物, 貢獻物)와 版籍(즉 지도, 호적)을 정기적으로 중앙정 부에 납입하는 內地 지역, ② 기미부주 : 왕조에 복속된 蕃夷가 공부와 판적을 비정기적으로 납입하고 그 장관을 세습하는 지역, ③ 遠夷(入 蕃) : 공헌물만을 비정기적 혹은 정기적으로 공납하는 지역으로 나누 고, 그 바깥을 絶域이라 하였다.27) 그러면서 신라와 일본은 ‘원이’ 지역 에 포함된다고 하는데, 이 점은 앞의 李大龍이나 高明士의 관점과 다 르다. 다만 발해에 대해서는 명확한 지적을 하지 않지만, 발해와 신라 는 여러 가지 면에서 공통된 점이 많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다.28) 荒川正晴도 당의 제국적 질서를 삼중구조로 나누어 ① 內地 도 독부․주, ② 기미 도독부․주, ② 遠夷(入蕃)로 분류하고, 조공무역을 행한 조공국은 통상 ‘遠夷’ 즉 蕃國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의 견해에 서 흥미로운 것은 소그디아나의 오아시스 나라 등과 같이 기미부주의 측면과 조공국의 측면을 동시에 지닌 나라들이 있다고 하는 점이다.29) 신라와 발해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지만, 결국 기미주의 성격을 강조할 것인가 아니면 조공이나 책봉의 성격을 강조할 것인가에 따라
27) 와타나베 신이치로, 天空의 玉座 (문정희․임대희 역, 신서원, 2002), pp.204
∼206 ; 渡邊信一郞, 唐代前期律令制下の財政的物流と帝國編成 (中國古代の 財政と國家, 汲古書院, 2010), p.427. 渡邊의 견해에 대해서는 荒川正晴, ユー ラシアの交通․交易と唐帝國 (名古屋大學出版會, 2010)의 序言 , p.1213 등 참조.
28) 일본 학계에서는 대체로 고구려는 朝鮮半島(즉 한반도)의 국가로 간주하여 명확하게 한국사에 포함시키는 반면, 발해에 대해서는 한반도의 국가가 아닌 것으로 간주하며 다소 애매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는 앞에서 든 堀敏一의 저서나 金子修一, 隋唐の國際秩序と東アジア (名著刊行會, 2001)을 보아도 알 수 있다.
29) 荒川正晴, 唐帝國と胡漢の商人 (ユーラシアの交通․交易と唐帝國, 名古屋 大學出版會, 2010), p.346.
차이가 생길 것이다. 아마도 신라 등에 대한 荒川의 견해는 渡邊과 거 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이해된다.
石見淸裕는 당의 세계질서를 도식화하면서 먼저 化內와 化外로 나누 고, 전자는 내지 州와 邊州를 포괄하고, 후자는 蕃과 絶域을 포괄한다 고 말한다. 이때 ‘화외’란
唐律疏議
에 보이는 “聲敎의 바깥에 있는 四夷의 사람”, “천자의 가르침이나 德敎와 교화가 미치는 범위에 거주 하는 사방의 이민족으로 당과는 별도로 왕을 세운 자를 가리킨다”30)의 의미라고 한다.31) 그리고 한반도의 나라는 ‘번’에 속한다고 하는 것으 로 보아32) 신라 또는 통일신라는 ‘번’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크게 보면 이 역시 渡邊의 견해와 비슷하지만, 화내와 화내의 차이에 나름의 의미를 둔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西嶋의 책봉체제론과 크게 다른 점이다.이러한 층차적 질서는 당과 각국의 외교나 교역 등에도 반영되어 일 정한 차등이 존재하였을 것이다. 신라는 피책봉국이면서도 기미주라는 형식까지 가졌으므로 당과의 교류에 매우 유리했을 것이다.
Ⅲ. 신라와 당의 교류
당의 개방정책은 먼저 사신의 교류에서 잘 나타난다. 당대의 사신 교류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어느 시기보다도 성황을 이루었고, 이 상 황은 당대 내내 지속되었다.33) 그러면서 주변 국가․민족이 사신을 보 내면 당은 ‘조공무역’이라고 해도 좋은 정도로 공적․사적 교역을 허용 30) 唐律疏議 (中華書局) 권16, 擅興律, 征討告賊消息 조의 疏議, p.307; 同書 권
6, 名例律, 化外人相犯 조의 소의, p.133.
31) 石見淸裕, 唐の國際秩序と交易 (アジア遊學 26, 2001), pp.24∼27; 石見淸 裕, 唐の北方問題と國際秩序 (汲古書院, 1998), pp.136∼137 등.
32) 石見淸裕, 唐の國際秩序と交易 , p.25.
33) 李大龍, 唐朝和邊疆民族使者往來硏究 (黑龍江敎育出版社, 2001), pp.257∼
396 등 참조.
하였고,34) 아울러 宿衛, 유학생, 유학승 등을 받아들었다.
당대 민간 부분의 대외 개방정책을 잘 보여주는 것은 서역상인의 활 동이다. 당은 서역으로 영역을 크게 확장하여 오아시스 나라들을 기미 부주로 편성하고, 비록 직할 주현의 ‘百姓’과는 달랐다고 해도 그 인민 을 당의 법적 수취대상인 ‘백성’으로 취급하였다. 그리고 고종 현경 3 년(658)에 이르면 이러한 기미부주가 소그드지역에까지 설치되었는데, 이들의 경우에는 명목적 또는 이념적 성격이 강하였다고 보인다. 말하 자면 그들은 당 정부에 부역을 부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蕃國(즉 외 국)으로 독립한 상태에서 당에 조공하는 존재였다.35) 그럼에도 불구하 고 이 지역의 오아시스 나라 인민들 역시 율령에 기초한 제국적 지배 의 논리에서는 이념적으로나마 당의 기미부주 ‘백성’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소그드 상인은 당 내지로 들어와 상업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 으며,36) 玄宗 연간에는 당의 동북변경인 遼西의 營州에까지 거주지를 형성하였다.37) 그리고 8세기 중엽부터 波斯와 大食 상인이 남해를 통 해 중국으로 들어와 교역활동을 펼치기 시작하여 안사의 난 이후에는 남해로가 오아시스로를 능가하기에 이른다.38)
그런 가운데 다양한 서방종교도 당으로 유입되어 번성하였다. 波斯 의 국교였던 祅敎(또는 拜火敎)는 북위 시기에 중국으로 전래되어 당 대에 더욱 확산되었고, 기독교의 일파인 景敎는 당 태종 시기에 전래 되어 포교를 시작하였고, 摩尼敎도 7세기 말기에는 중국에 전래되어 回紇에까지 교세를 떨쳤다. 불교 역시 서역구법승의 활약 등에 힘입어 당대에 크게 번성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34) 마다정 등, 동북공정 고구려사 (서길수 역, 2006), pp.139∼143 등.
35) 荒川正晴, 唐帝國と胡漢の商人 , p.341, p.359, p.365.
36) 荒川正晴, 唐帝國と胡漢の商人 , pp.341∼342.
37) 榮新江, 北朝隋唐粟特聚落的內部形態 (中古中國與外來文明, 三聯書店, 2001), pp.105∼108.
38) 陳炎, 絲綢之路的興衰及其從陸路轉向海路的原因 (海商絲綢之路與中外文化 交流, 北京大學出版社, 2002), pp.18∼19; 張廣達, 海舶來天方 絲路通大食 ( 西域史地叢稿初編, 上海古籍出版社, 1995), p.427; 川正晴, 唐帝國と胡漢の商 人 , pp.339∼340 등.
신라는 당대 내내 사신을 자주 파견하고 아울러 숙위와 유학생․유 학승을 당에 보냈다.
唐會要
권35, 學校, 정관 5년 이후 조에는 신라 등 이 당에 파견한 國學 유학생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고구려, 백제, 신라, 고창, 토번 諸國의 部長이 또한 子弟를 파견하여 국학에 입학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따라 國學에는 8천여 인이나 있었는 데, 이렇게 국학이 번성한 것은 近古에 아직 없었다(上海古籍出版社, p.739).
한반도의 나라들이 특히 많은 국학 유학생을 보냈던 것인데, 이러한 상황은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39) 이렇게 신라 등이 많은 유학생을 보낸 것은 이들 나라와 당의 긴밀성을 잘 보여준 다.
하지만, 신라인의 사적 교류는 당 후기에 이르러서야 활발해진다. 당 전기에 사적 교류가 활발하지 못한 것은 일차적으로 당의 제도와 관련 이 있을 것이다. 당조는 외국에 대해 비교적 개방적 정책을 펼쳤지만, 국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사적 교류를 엄격히 통제하였다.
당률소의
권8, 衛禁律, ‘越度緣邊關塞’ 조에 다음과 같은 규정이 보인다.무릇 緣邊의 關塞를 넘는 자는 도형 2년, 化外人과 사사로이 교역하거 나 주고받는 자는 [교역 또는 취여한 물품을 비단(絹)으로 환산하여] 1척 이면 도형 2년 반, ……사사로이 금지된 병기를 공여한 자는 교수형, 함 께 혼인한 자는 유형 2천리에 처한다(中華書局, p.177).
39) 권덕영, 고대한중외교사, p.289. 그리고 권덕영은 한국사의 관점에서 보아
“삼국통일 이전의 [신라] 견당사는 麗濟 侵略으로부터의 자구보전을 위한 請兵 과 나당관계의 수립과 유지․발전에 主力하는 政治․軍事外交가 중심이 되었 고, 經濟․文化外交는 비교적 소극적이었다. 반면 통일 이후가 되면 신라와 당 의 경제발전과 사회 안정 그리고 唐 文化의 滿開 등으로 인하여 종전에 力動 的으로 펼쳐지던 견당사들의 정치적 외교활동은 情態的․儀禮的으로 변모되고 대신 그들은 경제․문화적 활동에 주력하였다”(고대한중외교사, p.304)라고 말한다.
이러한 규제는 중국 왕조가 주변 국가․민족을 제어하거나 회유하는 방편으로 교역(즉 互市) 등을 활용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신라를 비롯한 주변국 역시 허가를 받지 않고 사적으로 당과 교역․교 류하는 것을 금지시켰는데, 이 또한 당과의 교류를 독점함으로써 왕권 을 확고히 하는 데 이용하기 위함이었다.40) 그러면서 율령제도가 비교 적 잘 시행되었던 당 전기에 있어서는 신라인이 사적으로 唐土에서 교 역을 영위한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에 비해 소그드인은 당 전기에 당에서 활발한 교역활동을 펼쳤는 데, 과연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소그드상인의 경우에도 당 에서 교역을 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허가(즉 過所)를 받아야 했지만, 당 은 그들을 대폭적으로 받아들였다.41) 이는 소그디아나 나라들이 형식 적이나마 기미부주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42) 뿐만 아니라 당은 서역 諸國에도 驛傳을 설치하고 공적 사신만이 아니라 사적인 行人도 이용 할 수 있는 여지를 두었는데, 실제 서역 상인들 역시 역전을 이용하였 다고 보인다.43) 또한 당은 상인들이 사적으로 상행위를 영위할 경우에 는 백성과는 다른 ‘行客’이라는 신분을 합법적으로 부여하여 통행증을 발급해 주었는데, 이들 역시 編戶상의 신분이다. 唐土의 소그드인 중에 도 행객이라는 명함을 가진 자가 敦煌文書에서 확인된다.44) 하지만 한 편으로 당이 소그디아나의 기미부주를 本貫으로 하는 상인들에게 入境 을 허가할 때는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조건을 전제로 하였고, 그들은 당에서 ‘投化(즉 귀화)한 胡家’ 등으로 불렸다.45) 하지만, 그들 40) 榎本淳一, 唐代の朝貢と貿易 (唐王朝と古代日本, 吉川弘文館, 2008), p.132 등. 토마스 바필드에 의하면 이러한 양상은 북방 유목제국과 중원국가 간에도 보인다(위태로운 변경, p.317, p.325, p.556 등).
41) 荒川正晴, 唐帝國と胡漢の商人 , pp.347∼348.
42) 荒川正晴, 唐帝國と胡漢の商人 , p.359.
43) 荒川正晴, 唐代公用交通システムの構造 ユーラシアの交通․交易と唐帝國, pp.180∼181.
44) 荒川正晴, 唐帝國と胡漢の商人 , pp.342∼344. ‘행객’의 범주에는 상인들만이 아니라 병사나 농업노동자 등도 포함되었다.
45) 荒川正晴, 唐帝國と胡漢の商人 , p.348, p.365. 앞에서 말한 ‘行客’은 직할 주
은 당의 법적 규제를 뛰어넘어 거의 일상적으로 당 내지를 왕래하였으 며, 당의 교역금지품에 대한 규정 역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고 보 인다.46)
반면, 신라는 고종 용삭 3년(663) 4월 계림주도독부가 설치되었음에 도 불구하고 사적 교류 상황은 그 전후에 거의 차이가 없었다. 물론 계림주가 설치된 직후 新唐戰爭이 일어났고 이후 한동안 군사적 긴장 과 외교적 냉각기가 있었던 점을 지적할 수 있다.47) 그러나 현종시기 에 양국의 외교가 재개된 이후에도 사적 교류상의 변화는 당분간 파악 되지 않는다. 따라서 소그드상인이 당에서 활발한 교역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의 정책 이외에도, 교역을 권장하고 후원하는 본국의 정책과 더불어 당 이전부터 구축되었던 서역인 또는 소그드인 교역망 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당 전기에 신라인이 조공무역을 제외한 對唐交易을 그다지 펼치지 못한 이유는 당의 법제적 규제에 더해, 교역을 통제하 는 신라의 정책 및 상업망의 부재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시간 이 지나 당 후기에 이르면 신라인 역시 소그드인처럼 당 내지에 자신 들의 교역망을 구축하고 활발한 교역활동을 펼치게 되는데,48) 여기에 는 특히 안사의 난을 거치면서 형성된 제반 조건의 변화가 있었다. 말 하자면 당 조정이 교역 통제권의 상당 부분을 변경 절도사에게 위임함 에 따라 해당 절도사들이 자율적으로 교역을 허락하였고,49) 또 신라에
현의 本貫을 벗어나 활동하는 客이나 客戶에게 주어진 명함이며, 반면, 외래 상인들에게는 ‘興胡’와 같은 명함이 부여되었다
46) 荒川正晴, 唐帝國と胡漢の商人 , p.359, p.376, p.379.
47) 서영교, 羅唐戰爭史 硏究 (아세아문화사, 2006), pp.294∼337; 노태돈, 삼국 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9), pp.273∼296; 권덕영, 사절 왕래를 통 해 본 8세기 나당관계 (이기동 등, 8세기 동아시아의 역사상, 동북아역사재 단, 2011), pp.268∼273. 또 堀敏一, 中國と古代東アジア世界, p.241 등 참조 48) E.O. 라이샤워, 중국 중세사회로의 여행 (조성을 역, 한울, 1991), pp.276∼
282; 김문경, 해상활동 (한국사 9, 국사편찬위원회, 1998), pp.326∼332 등.
49) 정병준, 押新羅渤海兩蕃使와 張保皐의 對唐交易 (중국고중세사연구 21, 2009), pp.370∼372; 정병준, 唐代의 互市와 張保皐의 對唐交易 (대외문물교
서도 惠恭王 이후 ‘下代(780∼935)’의 혼란으로 자국 민간상인의 활동 력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50) 게다가 안사의 난 이후 平盧節度使 李正己 일가가 산동지역을 지배하면서 교역활동을 크게 권장하였고, 이런 가운데 장보고 이전 시기에 신라인이 이미 산동지역 등에 교역망 을 확보할 수 있었다.51) 이때 압신라발해양번사라는 관직은 당과 신라 의 ‘기미주관계’를 보다 긴밀하게 이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특 히 장보고는 신라왕이 임명한 淸海鎭大使라는 공적 직함까지 가졌기 때문에 더욱 유리한 조건에서 대당교역을 전개할 수 있었다.52)
荒川正晴에 의하면, 학계에서는 당 전기 外來 소그드상인의 활동상 황을 그대로 다른 주변 나라들의 교역(즉 조공무역과 호시교역 등)과 일괄하여 논하는 경향이 있지만, 외래 소그드인은 그 이외 나라들과는 전혀 별개로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53) 외래 소그드상인의 활동은 당 주변 다른 나라들의 그것과는 다른 특수한 범주에 속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타당하다면 당 전기와 후기에 전개되는 신라와 당의 교역상황은 어쩌면 당대의 일반적 양상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Ⅳ. 당 전기 신라구법승의 활동과 그 의미
신라인 입당구법승의 숫자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간에 몇 가지 견해
류연구 10, 2011), pp.64∼66.
50) 李基東, 張保皐와 그의 海上王國 (신라사회사연구, 일조각, 1997), pp.195
∼196; 李成市, 동아시아 왕권과 교역 (김창석 역, 청년사, 1999), pp.190∼
192 등.
51) 정병준, 李正己 一家의 交易活動과 張保皐 (동국사학 40, 2004), p.524, pp.552∼553 참조.
52) 정병준, 押新羅渤海兩蕃使와 張保皐의 對唐交易 , pp.374∼375; 정병준, 唐 代의 互市와 張保皐의 對唐交易 , pp.73∼77.
53) 荒川正晴, 唐帝國と胡漢の商人 , p.345. 아울러 荒川은 당이 거의 일상적으로 入境을 허용한 것은 외래 소그드상인에게만 공인한 특수한 상태였다고 말한다 (같은 글, p.359).
가 있다. 고병익은 90인,54) 嚴耕望은 138인 이상, 黃心川은 117인, 劉素 琴은 160여 인, 陳景富는 181인, 정수일은 400여 인, 拜根興은 157인으 로 추산하고, 루정호는 158인이라고 보았다.55) 이러한 차이는 사료에 대한 이해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56) 시간이 지나면서 정확한 명 단이 많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중 陳景富는 입당한 신라구법승에 대한 시기별 통계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에 의하면 唐 高祖-武則天 시기(618∼704)에 입당한 구법승 43인 중 40인이 신라승이고, 또 中宗-順宗 시기(705∼805)에 41인, 憲 宗-哀帝 시기(806∼907)에 98인이 입당하였다고 한다.57) 그런데 이들 을 당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보면, 중종-순종 시기의 41인 중에서 22 인은 현종 천보 이전에 입당하였던 것이 거의 확실하다. 즉 審祥, 無 相, 鎭州金禪師, 慧超, 不可思議, 宣師, 神行, 玄超, 義林, 均亮, 如海, 本 如, 玄晟, 無漏, 元表, 金地藏, 金大悲, 弘印, 無著, 安□國師, 金師, 通禪 師 등을 꼽을 수 있다.58) 여기에다 입당시기가 확인되지 않는 숫자를 감안한다면, 그 숫자는 더욱 증가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 전기에 입당 한 신라구법승은 적어도 62인이 넘는다. 이는 당 후기와 비교하면 상 대적으로 적은 숫자이다. 실제 ‘신라 하대’(780∼935)에 입당한 구법승 의 숫자만 해도 그 전에 입당한 숫자보다 2.5∼3배가 많다는 지적도 있다.59) 하지만, 당 전기에 입당한 구법승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며, 어떤 면에서 이들은 후기의 구법승보다 더욱 두드러진 활동을 하였다.
역경사업 등 국가적 佛事에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은 그 54) 高柄翊, 慧超의 往五天竺國傳 (東亞交涉史의 硏究, 서울대학교출판부,
1970), pp.65∼68. 이는 李能和, 朝鮮佛敎通史 (1918)에 의거한 것이다.
55) 이에 대해서는 拜根興, 入唐求法: 鑄造新羅僧侶佛敎人生的輝煌 [陝西師範大 學學報 (哲學社會科學版) 2008-3], pp.107∼108; 류정호, 새로 發見된 新羅 入唐求法僧 惠覺禪師의 碑銘 (사총 73, 2011), pp.1∼2 참조.
56) 그 중에는 근거를 제대로 제시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57) 陳景富, 中韓佛敎關係一千年, pp.22∼23.
58) 黃有福․陳景富, 한․중불교문화교류사, pp.501∼514에 부록된 한-중 불교 문화 교류 인물 일람표 에 보이는 신라구법승의 ‘在唐 연대’ 참조.
59) 金炳坤, 新羅 下代 求法僧의 行蹟과 實狀 , p.109.
예의 하나이다.
이들 구법승을 국가교류의 일환으로 입당한 경우와 사적으로 입당한 경우로 나누어 보면, 전자는 직접․간접으로 신라국의 후원은 물론 당 의 지원도 받았다. 예를 들면
해동고승전
권2, 釋安含 조에 의하면, 당 이전의 예이지만, 안함이 신라왕의 명으로 陳으로 갔는데진평왕 23년(562)에 法器를 이룰 만한 자를 뽑아 중국에 파견하여 학 문을 익히게 하려 하여 법사(즉 安含)에게 명하게 가게 하였다. 이에 聘 國使와 함께 바다를 건너 중국에 이르니 왕(즉 陳 황제)이 만나보고 크게 기뻐하며 大興寺에 머물게 하였다(을유문화사, p.105, p.172).60)
라고 한다. 또
속고승전
권24, 護法下, 慈藏 조에는본국왕에게 啓를 올려 중국으로 가서 큰 가르침[大化]을 배우고 싶다 고 말하고 정관 12년(638)에 제자인 승려 實 등 10여 인을 데리고 장안에 이르니 당태종이 칙서를 내려 위무하게 하였으며, 勝光別院에서 후한 예 와 특별한 공양을 받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들고 재물이 쌓였는데
……(
續高僧傳
4책, 文殊出版社, p.790).라고 한다. 당시 자장이 황제로부터 후한 대우를 받은 것은 신라왕의
‘칙서’가 있었기 때문이며,61) 이는 안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 다. 황제의 지원을 받은 상황에서 그들의 구법활동은 여러 가지 면에 서 순탄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구법승의 입당에 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 분으로, 설령 입당에 관한 기록이 전한다고 해도 그 방식이 명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明郞의 입당구법에 대해
선덕왕 원년(632)에 입당하였다가 정관 9년(635)에 돌아왔다(
삼국유사
권5, 明郞神印 조, p.215).62)60) 장휘옥, 해동고승전연구 (민족사, 1991), p.205.
61) 三國遺事 권5, 義解5, 慈藏定律 조, 瑞文文化史, p.192; 이병도 역주, 삼국 유사 권4, 광조출판사, pp.397∼398.
라고 하고, 또 惠業에 대해서는
곧장 변방의 땅을 떠나 바로 中華로 들어갔다. 마침내 정관 연간에 서 역으로 여행하여 광활한 사막을 건넜다(
해동고승전
권2, 혜업전, 을유 문화사, p.113, pp.177∼178).63)라고 적혀 있을 뿐이다.64) 물론 그 중에는 입당 과정과 방식이 명확하 게 전하는 것도 있으며, 당 후기의 구법승에 대해서는 그 입당 방식에 대한 약간의 통계가 나와 있다. 즉 김병곤의 조사에 의하면 신라 하대 에 사신을 따라 입당한 구법승으로 郞慧, 眞鑑, 了悟, 大境, 法境, 先覺, 郞空, 靜眞, 無染65) 등이 있고, 상선을 타고 입당한 사례로 法境, 洞眞, 元宗 등이 확인된다.66) 또 김수태․조범환에 의하면 慧昭, 道允, 無染, 梵日은 사신을 따라 입당하였고, 慧徹 玄昱, 體澄은 상선을 타고 입당 하였을 것이라고 한다.67)
당 전기 신라구법승의 입당과 귀국 방식은 어떠했을까? 먼저 공적 입당의 예로 앞에서 언급한 慈藏은 신라 사신단과 함께 입당하였다가 정관 17년(643) 선덕왕의 요청에 따라 당태종이 詔書를 내려 귀국을 허락하자 신라 遣唐使 일행과 함께 귀국하였다.68) 또 順璟은 “乾封 연 62) “善德王元年入唐, 貞觀九年乙未來歸.”
63) “直辭邊壤, 遽入中華. 遊於貞觀年中, 往遊西域, 涉遊沙之廣漠”. 장휘옥, 해동 고승전연구, p.212.
64) 그 외의 예를 보면 宋高僧傳 권30, 唐高麗國元表傳, “天寶中來遊華土, 仍往 西域”(p.743), 삼국유사 권5, 郞智乘雲․普賢樹 조, “龍朔初, 有沙彌智通. 伊亮 公之家奴也. 出家年七歲, 時有鳥來鳴云, 靈鷲去投郞智爲弟子. …… 師嘗乘雲往 中國之淸凉山, 隨衆聽講, 俄頃卽還”(pp.165∼166, pp.448∼450) 등이 있다.
65) 崔致遠, 無染和尙碑銘 , 崔文昌侯全集, 成均館大學校 大同文化硏究院, p.99;
이상현 역, 고운집, 한국고전번역원, pp.324∼325에 의거하여 추가하였다.
66) 金炳坤, 新羅 下代 求法僧의 行蹟과 實狀 , p.114.
67) 김수태․조범환, 전라도 지역의 선종산문과 장보고 집단 (해상왕장보고기 념사업회, 2006), p.50.
68) 續高僧傳 4책, 文殊出版社, p.791. 권덕영, 고대한중외교사, pp.22∼24에 그 경과가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간에 使臣의 入貢을 따라 입당하였는데, 이때는 (玄)奘이 죽은 지 2년 째 되는 해이다”69)라고 한다. 즉 신라 文武王 6년(666)에 당으로 파견 된 金三光 등의 견당사에 동행하였던 것이다. 김삼광은 고종으로부터 左武衛翊府中郞將을 제수받아 숙위하다가 668년에 劉仁軌가 이끄는 당 의 고구려 공격군과 함께 귀국하였지만,70) 순경의 귀국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신라로 귀국한 것은 거의 확실하다.71) 이 렇게 공식 사신단과 동행한 신라구법승은 입당과 귀국 기록이 명확하 게 전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공적 사신단을 따라간 경우 이외에는 설령 그것이 사적 입당 이라고 해도 그 성격을 직접 확인하기 어려운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 서 사적 입당으로 간주하기 위해서는 관련 기록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먼저 당 초기에 입당한 慧輪의 예를 보자.
본국(즉 신라)에서 출가한 후, 성스러운 유적을 둘러볼 뜻을 품고 배를 타고 閩越에 상륙하여 도보로 장안에 도착하였다. 칙명을 받들어 玄照 법 사의 侍者가 되어 서쪽으로 여행하였다. 인도로 가서는 유적지를 두루 둘 러보고 菴摩羅跋國으로 가서 信者寺에 10년을 머물렀다. 근래에는 覩貨羅 僧寺에 머물고 있는데, …… [의정이] 당으로 귀국할 때도 여전히 이 절 에 있었으며, 나이가 40세가 되려고 하였다(王邦維 校注,
大唐西域求法 高僧傳校注
, 中華書局, p.101).72)라고 하는데, 비록 당 황제의 명을 받들어 현조를 따라 서방으로 구법
69) 宋高僧傳 권4, 唐新羅國順璟傳, 中華書局, p.71.
70) 권덕영, 고대한중외교사, p.38.
71) 삼국사기 권47, 裂起傳을 보면 순경은 673년 김유신이 죽은 후의 시점에 신라에 있었다고 하고(원문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p.438), 또 宋高僧傳 권 4, 唐新羅國順璟傳에는 “新羅順璟法師者, 聲振唐蕃”, “旣而蘊藝西夏, 傳照東夷, 名道日新, 緇素欽揖”, “(順)璟在本國稍多著述, 亦有傳來中原者, 其所宗, 法相大 乘了義敎”(모두 p.72)이라고 한다.
72) “自本國出家, 翹心聖迹. 泛舶而陵閩越, 涉步而届長安. 奉勅隨玄照法師西行, 以 充侍者. 旣之西國, 遍禮聖蹤. 居菴摩羅跋國, 在信者寺, 住經十載. 近住次東邊北 方覩貨羅僧寺, …… 慧輪住此, …… 來日尙存, 年向四十矣.” 이용범 역, 大唐西 域求法高僧傳 (동국대학교역경원, 1980), p.54 참조.
을 떠났다고 해도 입당한 후 지금의 福建 지역에서 도보로 장안으로 갔고 또 인도에서 귀국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의 입당은 사적인 구 법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73) 또 義湘에 관해서는 총장 2년(669) 에 商船을 타고 바다를 건너 登州 해안에 도착하였다는 기록도 있 고,74) 영휘 초에 당으로 돌아가는 唐使의 배를 타고 揚州로 들어갔다 는 기록도 있다.75) 또한 그는 그 전에 元曉와 함께 사적으로 입당하기 위해 唐州에 이르러 巨艦을 구해 滄波를 넘으려 하였다고도 한다.76) 그리 고 당 玄宗 개원 연간에 입당한 金地藏의 경우에는
머리를 깎고 바다를 건넌 후 배를 버리고 걸어서 갔다.77)
라고 하는데, 그 후 그는 당의 九華山에서 오랫동안 수행하다가 德宗 貞元 19년(803)에 99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그가 배를 버리고 걸어서 갔고 또 장안과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오랫동안 머물다가 입적한 것으 로 보아 사적으로 구법에 나섰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無漏는 당 현종 天寶 연간에 당으로 갔다고 여겨지는데, 그의 입당 방식을 보 면
마침내 도망하여 海艦을 타고 華土에 이르렀다. 五竺을 여행하여 八塔 을 참배하려고 하여 사막을 건너 于闐 서쪽으로 가 葱嶺 땅에 이르러
…… [다시 당으로 돌아왔다].78)
73) 해동고승전 권2, 혜륜전에 “涉步而屆長安, 寒署備受, 艱危罄盡”(을유문화사, p.178)이라고 하는 것도 사적 구법을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74) 宋高僧傳 권4, 唐新羅國義湘傳, p.75.
75) 삼국유사 권4, 義湘傳敎 조, p.143, p.404.
76) 宋高僧傳 권4, 唐新羅國義湘傳, p.75. 한편 삼국유사 권4, 義湘傳敎 조에 는 원효와 함께 길을 나섰다가 遼東에서 도중에 돌아왔다고 한다(p.143, p.404).
77) 宋高僧傳 권20, 唐池州九華山化成寺地藏傳, “于時落髮涉海, 捨舟而徒. ……
”(pp.515∼516).
78) 宋高僧傳 권21, 唐朔方靈武下院無漏傳, “遂逃附海艦, 達于華土.……”(pp.545
∼546); 文苑英華 권816, 費冠卿, 九華山化成寺記 , 中華書局, p.4313.
라고 한다. 그가 在唐 중에 안사의 난이 일어났고 肅宗의 명으로 궁중 內寺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는 여러 차례 表를 올려 신라로 돌아가길 청하였으나 끝내 허가가 나지 않아 당에서 입적하였다. 무루는 입당을 위해 도망하여 海艦을 탔고 또 개인적으로 인도로 구법하려 한 것을 고려하면 그 역시 국가 교류의 일환으로 당으로 갔다고 보기는 어렵 다.
이렇게 보면 신라나 당의 사신단을 따라 입당하지 않은 신라승은 일 단 사적으로 구법에 나섰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입당한 후 자발적으로 당에 잔류하여 귀국하지 않거나 인도로 구법을 떠난 신 라승의 경우에는 그럴 가능성이 더욱 크다. 만약 그렇다면 당 전기에 사적으로 입당한 구법승의 숫자는 확인되는 것보다 훨씬 많고, 이들의 활동은 앞 절에서 서술한 唐代 한중관계사의 추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여러 가지 점에서 흥미를 끈다.
당 전기에 사적으로 입당한 신라승이 배를 타고 당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은 많이 전한다. 앞에서 언급한 혜륜, 김지장, 무루 이외에도 玄太 가 “일찍이 선박을 타고 당으로 갔다”79)고 하고, 無相은 “개원 16년에 동 쪽 바다를 떠나 중국에 이르러 장안으로 갔다”80)는 기록 등이 있다.
도항 방식에 대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 경우에도 배를 타고 당으로 간 것은 거의 분명하다.
이렇게 보면 당 후기에 사적으로 입당한 신라 구법승이 상선을 종종 이용하였듯이 당 전기의 구법승들도 상선을 이용하였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의상이 상선을 이용하였다는 기록 외에, 景德王 시기(742∼762) 에 長春이라는 자가 海商을 따라 바다에 나갔다가 폭풍을 만나 남중국 에 표착하였다는 이야기81) 등은 그러한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하지만
79) 해동고승전 권2, 玄大傳, “嘗泛舶如唐”(p.120, p.181); 장휘옥, 해동고승전연 구, pp.219∼220. 현태는 고종 영휘 연간에 인도로 구법을 갔다.
80) 宋高僧傳 권19, 唐成都浮衆寺無相傳, “泛東溟至于中國, 到京”(p.486).
81) 삼국유사 권3, 敏藏寺 조, pp.146∼147.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당 전기에 있어서는 신라 상인이 대당교역을 한 구체적 실체가 거의 파악되지 않는다. 이는 당시에 사적 교역이 행해 졌다고 해도 아직 매우 제한적이었음을 나타낸다.82) 당․신라 간의 사 적 교역이 활발해지는 것은 역시 절도사 체제가 성립되는 안사의 난 이후이다. 당 전기에도 국가의 공인을 받지 않은 ‘밀무역’은 있었겠지 만, 이에 관한 기록은 거의 누락될 수밖에 없다. 당 전기의 입당구법승 중에는 어쩌면 이러한 ‘밀무역’을 이용하여 도항한 이들도 있었을 수 있다.
또한, 구법승은 개인적으로 도당을 위한 배를 구하였을 수 있다. 앞 에서 언급하였듯이 의상이 원효와 함께 사적으로 입당하려 할 때 唐州 에서 巨艦을 구해 滄波를 넘으려 했다는 기록이 전하는데, 어쩌면 개인적 으로 배를 구한 것일 수 있다. 또 의상이 당으로 돌아가는 唐使의 배를 타고 揚州로 들어갔다는 기록도 보이지만, 사적으로 당 사신의 배에 편승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다.
그런데 당 전기는 율령제를 기초로 한 국가질서가 비교적 잘 유지되 었고, 신라구법승 역시 이러한 질서를 따라야 했다. 율령제 질서가 크 게 이완된 당 후기에 있어서도 개별 구법승이 당에 체류하기 위해서는 官府로부터 정식 허가(즉 과소)를 받아야 했고 여기에는 일정한 절차 가 있었다. 일본승 엔닌이 재당신라인, 특히 장보고가 세운 사찰인 法 花院의 도움으로 과소를 얻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당 전기에 사적으로 입당한 신라구법승들 역시 당의 사찰로 들 어가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말하자면 구법승들은 승려라는 특수한 신분을 가졌기에 일반인에 비해 당 내지를 여행하기 에 훨씬 유리한 조건에 있었던 것이다.83) 이러한 특수한 조건이 곧 당 82) 權悳永은 의상이 상선을 이용했다는 기록과 長春 이야기를 근거로 “(당 전기 에도) 사무역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唐의 規制와 來往交通 의 불편함 등으로 사무역은 공무역에 비해 비교적 활발하지 못했고 소규모적 이 아니었을까 한다”고 말한다(古代韓中外交史, p.275).
83) 佛敎는 유교와 달리 종족적․문화적 차이나 차등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당 의 승려들이 異國僧인 신라승을 민족이나 국가보다 종교적 차원에서 받아들었
전기에 구법승들이 당과 신라의 사적 교류사의 영역에서 큰 역할을 수 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생각된다.
다만, 소그디아나에서 온 상인들에게 당이 入境을 허가할 때 본국으 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조건을 전제로 하였듯이, 신라구법승 역시 出境 의 제한을 받았을 것이다. 엔닌이 귀국할 때 황제의 허락이 내려오지 않아 오랫동안 청원한 이후에야 귀국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제도적 틀에 따른 것이며, 이러한 원칙은 숙위나 유학생의 경우에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신라구법승이 귀국을 위해 황제의 허락을 구한 사 례로는 앞에서 언급한 무루와 자장 등이 보인다.84) 전자는 사적으로 입당하였고, 후자는 공적으로 입당하였다. 귀국을 위해 황제의 허락이 필요했던 것은 공적 입당이나 사적 입당을 막론하고 원칙상 차이가 없 었을 것이다. 다만, 외래 소그드상인들이 당의 법적 규제를 넘어 당 내 지를 거의 일상적으로 왕래하였던 것을 감안하면 사적으로 입당한 신 라승들이 귀국을 위해 모두 황제의 허락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 하다.85) 특히 당과 신라의 사적 교역이 활발하게 행해지는 당 후기의 절도사체제 하에서는 사실상 많은 사적 구법승들이 매우 자유롭게 당 을 왕래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86)
통계적으로 볼 때 당 전기에 사적으로 입당한 구법승은 시간이 지나 면서 그 숫자가 점차 증가하였고, 또 김지장․무상․무루 등의 예에서 보이듯이 점차 장안 일대를 벗어나 활동 반경을 넓혀 나갔다. 그러면 서 그들은 불교만이 아니라 당의 정치, 지리, 상업 등에 관한 정보와 인적 관계망을 계속 축적해 나갔을 것이다.87)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당 전기에도 신라승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당 에서 활동할 수 있는 중요한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당대는 중국 불교 의 전성기로 도시건 시골이건 전국 각지에 많은 사찰과 승려들이 있었다.
84) 또한 隋代의 사례이지만, 圓光도 신라 진평왕의 요청으로 수 문제가 귀국을 허락하여 朝聘使를 따라 돌아왔다. 즉 해동고승전 권2(玄大傳, 을유문화사), p.94, p.167; 장휘옥, 해동고승전연구, p.197.
85) 공적으로 입당한 구법승은 귀국할 때 반드시 황제의 허락을 받았을 것이다.
86) 圓仁이 귀국을 청원하였던 것은 어쩌면 폐불로 인해 승려에 대한 감시와 통 제가 엄격하였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당 후기에 신라인이 재당신라인사회를 형성하고 사적 교역을 전개하는 데 중요한 기초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소그드인이 당대에 활 발한 교역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전 시대부터 장기간에 걸쳐 축적된 인적․물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듯이, 당 후기에 전개되 는 신라인의 대당교역 활동 역시 한꺼번에 성취된 것이 아니라 그 이 전부터 사적 구법승 등에 의해 축적된 인적․물적 기반 위에 전개되었 다는 것이다. 물론 종교활동과 교역을 곧바로 연결시킬 수는 없지만, 종교와 교역이 밀접한 관련을 가진 경우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 다.88)
Ⅴ. 맺음말
당은 조공, 책봉, 기미주 설치, 혼인 등 다양한 방식으로 주변국과 관계를 맺었다. 이 중 가장 보편적인 것은 조공관계지만, 당과 거리가 가깝거나 특별한 관계에 있는 국가에 대해서는 책봉관계 등을 중복적 으로 맺었으며, 이런 관계가 중복될수록 양자는 더 긴밀해졌고 당은 더 많은 혜택을 부여하였다. 신라는 조공․책봉관계에 더해 ‘기미주관 계’까지 맺었으므로 당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고 할 수 있다. 책봉을 기준으로 본다면 이런 관점은 외면적으로 일본의 책봉체제론이나 중국의 번속이론과 비슷한 면도 있지만, 책봉의 의미를 상대적으로 평가한다는 점 에서 차이가 있다.
당은 서역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오아시스 나라들을 기미부주로 편성 하고 그 인민을 ‘백성’으로 간주하였다. 고종 현경 3년(658)에는 이러한 기미부주가 소그드지역에도 설치되는데, 이들 지역의 경우에는 실질보
87) 당 전기 입당구법승들의 활동 반경 확대와 활동의 다양화에 관해서는 다음 논문 에서 자세히 고찰하겠다.
88) 육상 실크로드를 통해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그곳에 불교가 크게 융성 하고, 또 장보고가 법화원을 창건한 것도 그 예이다.
다는 명목적 성격이 강하였다. 하지만 이 지역의 인민들 역시 기미부 주가 설치된 만큼 이념적으로나마 당의 기미부주 ‘백성’으로 편입되었 고, 이후 소그드 상인은 대거 당 내지로 들어와 활발하게 상행위를 영 위하였다. 당이 이들에게 入境을 허가할 때는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는 다는 조건을 전제로 하였지만, 그들은 당의 법적 규제를 넘어 거의 일 상적으로 당 내지를 왕래하였다. 이렇게 外來 소그드상인들이 당에서 활발한 교역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의 정책 이외에도, 교역 을 권장하고 후원하는 본국의 정책과 함께 당 이전부터 구축되었던 서 역인 또는 소그드인 교역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에 있어서는 고종 용삭 3년(663) 4월 계림주도독부가 설치되었 으나, 당과의 사적 교류 상황은 그 전후에 거의 차이가 없었다. 이는 당의 법제적 규제에 더해, 교역을 통제하는 신라의 정책 및 상업망의 부재에 따른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당 후기에 이르면 신라인 역시 제 반 조건의 변화에 따라 당 내지에 자신들의 교역망을 구축하고 활발한 교역활동을 펼치게 된다.
당 전기에 입당한 신라구법승은 적어도 62인이 넘는데, 그 다수는 사적 구법승이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상선을 이용하거나 개인적으 로 배를 구하여 입당하였다. 그런데 당 전기는 율령제를 기초로 한 국 가질서가 비교적 잘 유지되었고, 신라구법승 역시 過所 발급을 비롯한 규정을 따라야 했다. 일본승 엔닌은 율령제가 크게 이완된 당 후기에 있어서도 이러한 규정을 따라야 했지만, 재당신라인 특히 장보고가 세 운 法花院의 도움으로 과소를 얻었다. 이와 비슷하게 당 전기에 사적 으로 입당한 신라구법승들 역시 당의 사찰로 들어가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구법승들은 승려라는 특수한 신분을 가졌기 에 일반인에 비해 당 내지를 여행하기에 훨씬 유리하였던 것이다.
다만, 외래 소그드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신라구법승 역시 제도적으 로 出境의 제한을 받았다. 엔닌이 귀국할 때 황제의 허락이 내려오지 않아 오랫동안 청원한 이후에야 겨우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실제로 신라구법승이 귀국을 위해 황제의 허락을
청원한 기록도 보인다. 하지만, 사적으로 입당한 구법승이 귀국할 때 모두 황제의 허락을 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당 후기의 절도사 체제 하에서는 사실상 많은 사적 구법승들이 매우 자유롭게 당을 왕래 하였을 것이다.
통계적으로 볼 때 당 전기에 사적으로 입당한 구법승은 시간이 지나 면서 그 숫자가 점차 증가하였고, 또한 장안 일대를 벗어나 활동 반경 을 넓혀 나갔다. 그러면서 그들은 불교만이 아니라 당의 정치, 지리, 상업 등에 관한 정보와 인적 관계망을 계속 축적해 나갔고, 이러한 상 황은 당 후기에 신라인이 재당신라인사회를 형성하고 사적 교역을 전 개하는 데 중요한 기초가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