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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元末, 唐의 東北方政策의 變化와 國際的 背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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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際的 背景

- 732년, 渤海의 侵唐(登州) 원인과 관련하여 -

廉 景 伊 (全北大)

Ⅰ. 머리말

Ⅱ. 唐의 동북방정책의 변

Ⅲ. 당의 동북방정책 변화 의 국제적 배경

Ⅳ. 맺는말

Ⅰ. 머리말

732년(開元20) 9월, 발해가 장군 張文休를 보내 唐의 登州를 공격 하였다.1) 당시 唐은 현종의 통치하에 盛唐의 治世를 이룬 시기로, 북 방의 강국 돌궐2)도 ‘당의 군주(현종)가 英武하고 사람들은 화합하며 매년 풍년이니 (공격할) 틈이 없고 (군대를) 움직일 수 없다’3)고 평가 하고 있다. 그런데 신생국 발해가 당을 상대로 선제공격한 것이다. 이 는 얼마간 무모해 보이는 까닭에 이를 둘러싸고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

1) 舊唐書 卷199下 (北京: 中華書局, 1995), p.5361; 新唐書 卷8 (北京: 中 華書局, 1995), p.6181; 司馬光 編著, 胡三省 音註, 資治通鑑 卷213 (서울:

法仁文化史, 1988), p.1448. 이후로 당과 발해의 관계는 735년(開元23) 3월에 발해의 遣唐使가 내조하기까지 경색된 상태였다.

2) 당 현종대 돌궐은 일반적으로 제2돌궐이라 칭하지만, 본고에서는 이하 돌궐로 약칭한다.

3) 舊唐書 卷194上, p.5175.

(2)

다.4)

먼저 사건의 개요를 살피자면, 이 사건은 발해의 왕자 大門藝가 흑 수말갈을 토벌하라는 발해왕(大武藝)의 명령5)을 거역하고 당에 망명해 버린 것이 발단이 된다. 이에 발해는 사신을 보내 대문예의 주살을 요 구하지만 당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양국 간의 갈등은 증폭된다.

갈등은 발해가 당의 등주를 공격하면서 폭발되고, 양국의 분쟁은 이 사건을 계기로 표면화된 것이다.6)

唐渤紛爭에 관한 연구 결과, 분쟁은 당이 흑수말갈을 기미주로 삼은 것을 발단으로, 발해내 親唐ㆍ反唐의 대립과 계승분쟁, 동북방에 대한 돌궐-당의 알력과 각축전, 거란ㆍ해의 對唐강경책, 신라의 對唐정책의 변화와 발해견제 등 발해의 대내외적 정황과 함께 국제적 이해관계가 결합된 국제적 분쟁임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唐渤紛爭의 과정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발해가 당 을 공격한 이유와 배경에 관한 것이다. 먼저, 日野開三郞은 돌궐의 후

4) 이와 관련하여 발해가 흑수말갈을 토벌하고 대문예가 당에 망명한 시점, 발해 왕이 대문예 처벌을 요구하는 1ㆍ2차 견당사 파견 시점, 당이 발해에 보낸 1 차 조서의 전달 방식, 2차 조서(張九齡 작성)의 작성 시기 등에 대한 연구가 천착되었다. 古畑徹, 「大門藝の亡命年時につぃて -唐渤紛爭に至る渤海の情勢」

(集刊東洋學 51, 仙台: 東北大學中國文史哲硏究會, 1984); 「唐渤紛爭の展開 と國際情勢」 (集刊東洋學 55, 1986); 「張九齡作‘勅渤海王大武藝書’第一首の 作成年時につぃて」 (集刊東洋學 59, 1988); 「張九齡作‘勅渤海王大武藝書’と 唐渤紛爭の終結: 第二ㆍ三首の作成年時を中心として」 (東北大學 東洋史論集

3, 東洋史硏究室, 1988); 石井正敏, 「張九齡作勅渤海王大武藝書につぃて」 (朝 鮮學報 112, 奈良: 朝鮮學會, 1984); 日野開三郞, 小高句麗の硏究 (京都:

三一書房. 1984); 王承禮 著, 송기호 譯, 발해의 역사 (한림대학아시아문화 연구소, 1998); 劉建明 編, 黃約瑟, 「讀‘曲江集’所收唐與渤海及新羅勅書」 (黃 約瑟隋唐史論集, 中華書局, 1997); 王小甫 主編, 盛唐時代與東北亞政局 (上 海辭書出版社, 2003); 김종복, 「발해와 당의 사신 파견을 통해 본 大門藝 亡命 사건의 추이」 (역사와 경계 76, 부산경남사학회, 2010); 발해정치외교사

(서울: 일지사, 2009).

5) 발해는 당이 흑수말갈을 기미주로 삼자 이를 당과 흑수말갈이 발해를 협공하 려는 의도로 해석하여 흑수말갈 토벌을 명령한 것이다.

6) 이후 당은 신라와 연합한 발해 협공에 실패하였고, 경색된 양국관계는 734년 에 발해가 사죄의 견당사를 파견하면서 회복되었다.

(3)

원에 주목하였고,7) 三上次男은 발해 내부의 계승문제를 둘러싼 정치 갈등을 지적하였으며,8) 石井定敏은 이러한 대내외적인 요인을 취합하 면서 과거에 당이 신라에 취한 정략9)이 발해에 반복될지 모른다는 발 해의 위기의식에 주목하기도 하였다.10) 또 김종복은 발해 내부의 정치 갈등이 반당강경책으로 나타났고, 이는 돌궐에 귀부한 거란ㆍ해가 반 당강경책을 취하는 국제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11) 이와 달리 古畑徹은 강경책을 취하던 契丹이 唐軍에게 패하고 奚가 당에 항복하 는 등 주변 정세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발해가 큰 위기감을 느끼고 군 사전략적 측면에서 당의 등주를 선제공격하였다고 설명한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것은 발해가 당을 공략한 원인과 배경에 대한 분석이 대체로 발해와 발해를 둘러싼 국제관계에만 집중된다는 사실이다. 곧 또 다른 분쟁당사국인 당을 중심으로 분쟁의 원인을 규 명하는 연구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는 당이 공격을 받는 피동적 존재로 간주된 까닭이며, 당시 당이 거란을 외교적으로 회유했던 사실과 맞물려 발해와의 갈등도 외교적으 로 해결하려 했다는 전제를 암묵적으로 동의한 까닭으로 보인다. 하지 만 발해가 당을 공격하기 직전의 당의 동북방정책은 분명 그동안 취했

7) 日野開三郞은 발해가 후방을 염려하지 않고 당에 군대를 보낼 수 있었던 것 은 돌궐의 지지 하에 가능한 것이고, 이후 돌궐 毗伽可汗이 죽자 발해가 당에 사죄하며 친당 외교 노선을 택한 사실은 그 반증이라고 하였다. 日野開三郞, 小高句麗の硏究, pp.174-175.

8) 728년 4월에 당에 숙위로 있던 발해 왕자 대도리행(대무예의 적자)의 죽음으 로 계승권을 갖는 대문예의 계승 가능성도 높아졌다. 이러한 중에 당이 대문 예를 보호한 것은 대문예가 당의 지지를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 분쟁을 격화시켰다고 보았다. 三上次男, 「渤海國の興亡」 (圖說 世界文化史大系 19, 東京: 角川書店, 1959), p.104.

9)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은 신라마저 기미지배에 편입시키고자 하고, 신라는 이에 대항하여 고구려 유민과 연합하였다. 당은 숙위로 머물던 신라 왕자 김인문을 앞세워 신라왕을 토벌하고자 하였다.

10) 石井正敏, 「作勅渤海王大武藝書につぃて」, p.92.

11) 김종복, 발해정치외교사, pp.121-128.

12) 古畑徹, 임상선 역, 발해사의 이해 (서울: 신서원, 1991), pp.208-213.

(4)

던 안정적인 외교정책과는 다르다.

이에 본고에서는 분쟁 당사국이었던 당에 주목하여 발해가 당을 공 격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를 고찰하고자 한다. 먼저 발해가 당을 공격 하기 직전까지 당의 동북방정책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를 살펴보 고, 나아가 정책의 변화 시점과 그러한 정책적 전환이 가능할 수 있었 던 국제적 배경에 대해서도 고찰하고자 한다.13)

Ⅱ. 唐의 東北方政策의 變化

1. 발해와의 관계

黃約瑟과 王小甫는 발해가 당을 공격한 이유에 대해 발해왕의 유목 민적 심리상태나 개인적 성격에 기인한다고 보았고,14) 당의 동북방 정 책이 尙德抑武의 정신에 입각하여 평화적이고 소극적 방어정책으로 일 관했다고 주장한다.15)

이러한 黃ㆍ王의 설명은 납득하기 어렵다. 국제적 분쟁으로 논의되 는 唐渤紛爭의 발발원인을 발해왕 개인의 성격으로 설명하는 것은 무

13) 金子修一은 「唐朝より見た渤海の名分的位置」 (隋唐の國際秩序と東アジア, 東京: 名著刊行會, 2001, pp.324-325)에서 발해가 당 현종의 국제질서 재편 에 위기감을 느꼈다고 지적하지만 당과 발해의 분쟁과 관련한 구체적 언급은 없다.

14) 劉建明 編, 黃約瑟, 「讀‘曲江集’所收唐與渤海及新羅勅書」 (黃約瑟隋唐史論集

, 北京: 中華書局, 1997), pp.90-91. 黃約瑟은 ‘돌궐이 아직 완전히 쇠약하지 않은 상황에서 발해로 당이 출병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이에 당은 평화적인 방법을 취해 외교상 양보하였는데 유목민적 심리상태를 가진 발해왕 대무예가 이를 거절하고 무력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고 해석한다.

15) 王小甫 主編, 盛唐時代與東北亞政局, p.5. pp.17-18. 王小甫는 ‘중국전통문 화는 주변국가나 민족과의 관계에서 尙德抑武ㆍ以德服人의 관점을 갖고 있고, 이는 수당대에도 예외가 아니었다’라고 전제하면서, 당은 동북방에 대해 소극 적 방어정책을 취하는 한편 가능한 정치수단을 이용하였는데, 그럼에도 분쟁 이 발발한 것은 발해왕 대무예의 개인적 성격과 관계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5)

리가 있다. 또 분쟁 발발 직전에 당의 동북방정책이 평화적 소극적 방 어정책으로 일관했다는 주장 역시 수긍하기 어렵다.

698년 건국된 발해는 713년(先天 2)에 당의 책봉을 받은16) 이후로 대체로 당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데, 이러한 양국관계는 726년(개 원14)에 당이 흑수말갈을 羈縻州로 삼으면서 갈등의 조짐이 시작된다.

이후 흑수말갈을 토벌하라는 발해왕의 명령을 아우 大門藝가 거역하고 당에 망명한 사건을 계기로 갈등이 점차 고조되었다. 이 과정에서 발 해와 당은 각기 2차례의 서신을 주고받았는데, 당의 두 차례 답서의 내용과 태도는 양국 관계의 갈등이 증폭되고 변화되는 양상을 잘 보여 준다.

먼저 첫 번째 서신 교류는 대문예 망명 직후 이루어진다. 발해는 馬 文軌와 蔥勿雅를 당에 보내 대문예의 죄상을 極言하며 그의 처벌(殺) 을 요구하고,17) 당은 발해의 사신을 당에 머물게 한 후 별도의 사신을 보내 ‘문예가 먼 곳에서 귀순해 왔으니 의리상 죽일 수 없으며, 이제 嶺南으로 유배하여 이미 보냈다’고 회답하였다.18)

회답과 달리 대문예는 安西로 보내졌다. 이를 숨기기 위해 당은 발 해사를 당에 머물게 한 후 회답의 칙서를 보낸 것이다. 이러한 당의 조처에 대해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다음과 같이 비난한다.

문예가 忠으로 죄를 얻어 스스로 천자에게 귀의했으니, 천자는 마땅히 枉直을 살펴 오히려 문예를 상주고 무예를 벌주어(야 하는데),,,지금 황제 의 위엄이 무예를 복종시키지 못하고 (황제의) 은혜가 문예를 감싸지 못 하니,.,19)

16) 舊唐書 卷199下, p.5360.

17) 舊唐書 卷199下, p.5361. 대문예 처벌을 요구하는 발해사의 파견시점에 대해 古畑徹(「大門藝の亡命年時につぃて -唐渤紛爭に至る渤海の情勢」, p.26)은 730년을 주장하고, 김종복(「발해와 당의 사신 파견을 통해 본 大門藝 亡命 사 건의 추이」, pp.6-10)은 726년을 주장한다.

18) 舊唐書 卷199下, p.5361; 新唐書卷219, p.6180, "門藝窮來歸我 誼不可 殺 已投之惡地."

19) 資治通鑑 卷213, p.1443.

(6)

이러한 사마광의 지적은 당시 당이 무엇보다 발해와의 관계를 안정 적으로 유지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당이 기미주로 삼은 흑수말갈을 발해가 토벌하였음에도 문책하거나 문제 삼 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발해는 대문예를 영남에 유배하였다는 당의 회답이 거짓임을 알고 재차 그 처벌을 촉구하였다. 이에 당이 다시 회답의 칙서를 보냈는데, 張九齡이 작성한 勅渤海王大武藝書 1首20)가 그것이다. 문제는 그 내 용과 태도가 앞서 당의 칙서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점이다.

이 칙서의 내용은, 당이 대문예를 영남에 유배하였다고 거짓으로 회 신한 것은 발해 왕실의 ‘골육상쟁을 방지’하기 위함이고 ‘발해왕의 명 성과 행실을 아까워한’ 때문이라며 도리어 발해왕을 질책하는 것이다.

이는 신의를 잃은 大國이라 비난받으며21) 난처해진 당의 입장을 이론 적으로 역전시킬 만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칙서에는 ‘명령을 받들지 않으면 무슨 일이 언젠가 있을 것이며 잘못을 뉘우치고 충성한다면 전 화위복이 될 것이다’라는 위협적 문구를 싣고 있다.22)

첫 번째 칙서와 비교할 때, 두 번째 칙서는 노골적으로 발해왕을 비 난하고 정벌 가능성을 언급하며 발해를 도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古畑徹은 거란이 당에게 대패하고 奚도 당에 복속하는 주변 정황 에서 발해는 당의 협박이 현실화 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당

20) 張九齡의 唐丞相曲江張先生文集 (이하 曲江集, 上海: 中華書局, 1936)과

文苑英華, 全唐文에는 장구령이 작성한 勅渤海王大武藝書 4首가 실려 있

다. 古畑徹은 「大門藝の亡命年時につぃて」 (pp.23-24)에서 그 1首의 내용을 분석하여 이것이 대문예 처벌을 요구하는 발해의 2차 상서에 대한 회답의 칙 서라고 하였다.

21) 舊唐書 卷199下, p.5361.

22) 이에 대해 黃約瑟은 칙서 작성자인 장구령이 기본적으로 외교적인 대외방침 을 견지한 인물로 침공의 의사는 없었으며, 다만 발해왕 대무예의 성격상 조 서를 받고 부끄러운 나머지 도리어 노여워서 그렇게 반응한 것일 수도 있지 만, 사실 732년 8월 중반에 작성된 조서는 발해가 당 등주를 공격하기 전에 발해에 도달하지 못하였으니, 발해의 침공을 유발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黃約瑟, 「讀‘曲江集’所收唐與渤海及新羅勅書」, pp.8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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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등주를 공격하였다고 본 것이다.23)

두차례 칙서의 내용이 급변한 것은 당의 태도, 즉 발해에 대한 정책 의 변화를 포고하는 것으로 해석되며, 이러한 당의 정책 전환은 거란 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2. 거란과의 관계

현종 개원초, 돌궐

黙啜의 세력이 쇠퇴하자 거란(李失活)과 해(李大 酺)는 부락민을 이끌고 당에 내부하였고,

24) 당은 營州를 회복하고 영 주도독부를 復置하였다.25) 이와 함께 松漠都督府를 두고 李失活을 松 漠郡王 兼都督으로, 李大酺를 饒樂郡王 兼都督으로 임명하고, 각각 永 樂公主와 固安公主와 혼인하도록 하였다.26)

그러나 거란의 권신 可突于가 등장하면서 당과의 관계는 균열이 가 기 시작하였다. 可突于는 李失活 사후에 당의 책봉을 받은 娑固ㆍ鬱于 ㆍ吐于 등과 연이어 반목하다가, 급기야 730년(開元 18) 5월에는 거 란왕 李邵固를 살해하고 奚의 무리를 위협하여 돌궐에 항복해버렸 다.27)

놀랍게도 거란이 反唐한 730년에 당의 거란 토벌은 없었다. 당시 당은 幽州長史 趙含章에게 거란 토벌을 명령하고, 또 關內ㆍ河東ㆍ河 南ㆍ北分道 등에서 勇士를 모집하고, 單于大都護 忠王浚을 河北道行軍 元帥로 삼는 등 대대적인 거란 토벌을 준비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해 6월에 平盧를 공격하는 可突于를 烏承玼가 捺祿山에서 격퇴한 것 외에, 같은해 9월 기사에는 ‘竟不行’, 즉 토벌이 결국 행해지지 않 았다고 기록한다.28) 이러한 거란에 대한 당의 조치는 개원초 이래로

23) 임상선 역, 古畑徹, 「唐渤紛爭의 전개와 국제정세」, p.211.

24) 新唐書 卷219, p.6170; 舊唐書 卷199下, p.5351.

25) 舊唐書 卷8, 「玄宗本紀」, p.177.

26) 新唐書 卷219, p.6170; 新唐書 卷219, p.6174; 舊唐書 卷199下, p.5351; 舊唐書 卷199下, p.5355.

27) 資治通鑑 卷213, p.1446.

(8)

거란ㆍ해에 행했던 정책의 연장선에서 이해된다.

당은 거란과 해가 내부한 이후로 줄곧 책봉과 통혼29)을 반복하고 또 거란에 絹錦 8만단을 分賜하며 이들을 당의 질서를 구축하고자 하 였다. 이는 可突于가 당의 책봉을 받은 거란왕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 악한 이후에도 참을성 있게 지속되었다. 때문에 730년에 거란의 反唐 에도 불구하고 당이 결국 군사적으로 정벌하지 않은 것은 당의 거란정 책이 여전히 회유와 외교였음을 확인하게 한다.

당의 공격 명령은 거란이 反唐한 730년이 아닌 732년에 내려졌다.

732년(개원20) 정월에 朔方節度副大使 信安王 褘를 河東ㆍ河北行軍副 大總管으로 삼고 戶部侍郎 裴耀卿을 副總管으로 삼아 거란과 해를 치 도록 하였다. 그 결과 그해 3월에 信安王 褘가 거란과 해를 대파하고 사로잡은 무리를 참수하였으며, 奚가 당에 내항하였다.30) 다음해(733 년)에 정벌을 피해 달아난 可突于가 돌궐31)ㆍ발해32) 등과 연합하여 唐軍을 격파하며 반격을 가하였으나, 다시 734년 6월에 幽州節度使 張守珪가 거란을 대파하고 거란왕 屈烈과 可突干를 참수하였다.33)

이렇듯 당은 親唐과 反唐을 거듭하는 거란에 대해 줄곧 참을성 있 는 외교 정책을 취하고 있었으나 732년 정월에 대대적인 거란 정벌을 명령한 이후로 거란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여 결국 반당의 핵심인 可突 干를 참수하였다. 즉 당의 對거란 정책이 외교가 아닌 군사 공벌로 전

28) 資治通鑑 卷213, p.1446; 舊唐書 卷199下, p.5353.

29) 王簿撰, 唐會要 卷6 (北京: 中華書局, 1998), p.75. 당은 돌궐의 계속되는 청혼에도 불구하고 한차례의 공주를 보내지 않았지만, 거란(4명)과 해(3명)에 는 도합 7명의 화번공주를 보냈다. 공주 出降 시점은 開元 5ㆍ10ㆍ14년, 그리 고 天寶4년이다.

30) 舊唐書 卷76, p.2652; 資治通鑑 卷213, pp.1447-1448; 舊唐書 199下, p.5353.

31) 新唐書 卷219, p.6171; 舊唐書 卷199下, p.5353.

32) 新唐書 卷136, p.4597; 임상선 편역, 古畑徹, 「唐渤紛爭의 전개와 국제정 세」, pp.204-208.

33) 舊唐書 卷103, p.3194; 資治通鑑 卷玄214, pp.1449-1450; 舊唐書

卷199下, p.5353.

(9)

환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정책 변화는 앞서 살펴본 對발해 정책의 변화상과 유사하며 변화시점 역시 거의 일치한다. 발해와 거란에 대한 당의 위협과 공세 는 개별적인 사건이 아닌 당의 대외정책의 변화에 따라 동시적으로 이 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이 발해와 거란에 대해 동시적으로 동일한 정책을 추진한 것은 당시 발해와 거란이 당에 대해 이해를 같이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 다.34) 이는 720년(開元8) 9월에 당이 발해에 張越을 파견하여 거란에 대한 협공을 요구하나 발해가 이를 거부한 사건,35) 또 733년(開元21) 에 거란이 당에 반격을 가할 때 발해가 이를 지원한 사실36)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3. 동북방정책의 변화 시점

앞서 살펴본 발해나 거란과의 관계 변화를 통해, 당의 동북방 정책 이 온건한 외교에서 군사적 공세로 전환된 시점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먼저, 당이 군사적인 공세를 펼쳤던 거란과의 관계를 통해 살펴보고 자 한다. 730년 5월에 거란이 反唐하고 그해 9월에 당은 거란 정벌을

34) 日野開三郞도 거란의 반당활동과 발해의 대당강경책이 시기적으로 일치하며, 발해의 등주 공격은 일련의 대당강경책의 정점에서 발발한 사건이라고 지적한 다. 日野開三郞, 小高句麗の硏究, p.174.

35) 冊府元龜 卷986, 「外臣部」, p.11584.

36) 新唐書 卷136, p.4597, “武藝遣客刺文藝於東都, 引兵至馬都山, 屠城邑.”;

董誥 等編, 全唐文 卷352, 「爲幽州長史薛楚玉破契丹露布」 (上海古籍出版社, 1995), p.1578, “西連匈奴東搆渤海收合餘燼窺我阿降奚我是以有盧龍之師.”; 新 唐書 卷219, p.6171, “可突于盜邊,幽州長史薛楚玉、副總管郭英杰、吳克勤、

烏知義、羅守忠率萬騎及奚擊之,戰都山下.”; 舊唐書 卷199下, p.5353, “可突 于又來抄掠. 幽州長史薛楚玉遣副將郭英杰、吳克勤、鄔知義、羅守忠率精騎萬 人,幷領降奚之衆追擊之. 軍至渝關都山之下,可突于領突厥兵以拒官軍.” 이와 관련하여 古畑徹은 「唐渤紛爭의 전개와 국제정세」, pp.204-208에서 馬都山과 都山이 동일지명이며, 발해가 거란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10)

명령하지만 정벌은 결국 진행되지는 않았다.37) 결과적으로 730년 9월 까지 당의 거란 정책은 기존의 정책이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이 거란을 정벌하라는 조서를 내린 것은 732년 정월이며,38) 河東 ㆍ河北行軍副大總管 信安王 褘는 그해 3월에 거란과 해를 대파한 후 사로잡은 무리를 참수하였으며, 이때에 奚가 당에 내항하였다.39) 이로 써 볼 때 당의 동북방정책은 적어도 732년 정월에는 공세적으로 변하 였음을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발해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당의 태도는 大門藝 처벌을 요 구하는 발해의 두 번째 상서에 대한 회답에서 달라졌다. 이 회답의 칙 서가 張九齡이 작성한「勅渤海王大武藝書」1首로, 그 작성시점은 당의 동북방정책이 전환되는 시기에 해당한다.

칙서의 작성ㆍ전달시점과 관련하여 石井正敏은 장구령이 이 칙서를 작성한 공으로 工部侍郞ㆍ知制誥에 발탁된 사실에 근거하여 칙서 작성 시점을 732년(개원20) 7ㆍ8월경으로 추정한다.40) 그러나 古畑徹은 칙 서말미의 ‘秋冷’이라는 계절적 인사가 가능한 시기가 중추절 이후의 8 ㆍ9월임을 考證하며 칙서 작성시점을 731년(開元19) 8ㆍ9월이라고 주 장한다.41)

이미 石井正敏이 지적한 바처럼 732년 9월 乙巳(5일)는 발해의 침 공소식을 접한 당 조정이 蓋福順에게 반격을 명령한 시점이다.42) 따라 서 발해의 침공은 이보다 앞서며, 뿐만 아니라 당이 발해로 칙서를 전 달하는 시간과 발해의 군대가 해로를 거쳐 등주에 도착하기까지의 소 요시간43)을 감안하면 적어도 7월에 칙서가 작성되어야 한다. 그런데

37) 資治通鑑 卷213, p.1446; 舊唐書 卷199下, p.5353.

38) 資治通鑑 卷213, p.1447; 舊唐書 卷8, p.1975; 新唐書 卷5, p.136.

39) 舊唐書 卷76, p.2652; 資治通鑑 卷213, pp.1447-1448; 舊唐書 199下, p.5353.

40) 石井正敏, 「張九齡作勅渤海王大武藝書につぃて」, pp.72-74; 「日本渤海關係史 の硏究」 (東京: 吉川弘文館, 2001), p.331.

41) 古畑徹, 「張九齡作‘勅渤海王大武藝書’第一首の作成年時につぃて」.

42) 石井正敏은 「張九齡作勅渤海王大武藝書につぃて」, p.87과 각주 49)에서 9월 乙巳(5일)은 당이 蓋福順에게 반격을 명령한 시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11)

7월을 ‘秋冷’으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張九齡의 칙서는 古畑 徹의 주장처럼 731년(開元19) 8ㆍ9월경에 작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결론적으로 당이 공격적인 동북방정책으로 전환하는 시점은 발해에 위협적인 칙서를 보낸 731년(開元19) 8ㆍ9월경이고 이러한 정책전환 의 결과 거란을 군사적으로 정벌한 것이 732년 정월이라 하겠다.

이상에서 당이 동북방에 그동안 추진하던 온건한 외교정책을 공격 적인 군사 정책으로 전환한 시점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왜 이 시점에 당의 정책 전환이 이루어졌는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하겠다.

당과 발해의 관계는 대문예 처벌을 두고 갈등이 증폭되기 전까지는 적어도 표면적으로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거란과의 관계도 비 록 불안정하지만 732년의 정벌 이전까지 책봉ㆍ혼인ㆍ賜物 등을 통해 외교적 관계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당의 정책은 특히 거란과의 관계에서 이미 여러 차례 동요가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령 720년(開元8) 9월에 발해에 사신 장월을 보내 거란 협공을 요 구하거나,44) 730년(開元18)에 關內ㆍ河東ㆍ河南ㆍ北分道 등에서 勇士 를 모집하고 單于大都護 忠王浚을 河北道行軍元帥로 삼아 대대적인 거 란 토벌을 준비한 것45) 등이 그러하다. 즉 당이 이전부터 동북방에 대 한 정벌 의지를 가졌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당은 거란 정벌의 의지를 실현시키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발해가 당의 기미주인 흑수말갈을 정벌했음에도 어떠한 문책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발해와 거란의 對唐활동이 당의 정책 전 환의 직접적 계기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당의 의지

43) 權悳永은 발해와 당의 사행로와 路程의 소요시간을 추정하였다. 732년에 발 해가 바닷길을 통해 등주를 공격했다면 공격루트는 양국의 사행로인 登州路라 할 수 있는데, 권덕영은 발해의 수도 上京龍泉府에서 鴨綠江口를 거쳐 唐의 登州에 이르는 소요시간은 대략 40여일로 추정하였다. 權悳永, 古代韓中外交 史 -遣唐使硏究 (서울: 일조각, 1997), pp.209-214, pp.225-227.

44) 冊府元龜 卷986, 「外臣部」, p.11584.

45) 舊唐書 卷199下, pp.5352-5353; 新唐書 卷219, p.6171.

(12)

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 즉 당의 동북방정책이 공격적으로 전환될 수 있었던 것은 발해나 거란과의 관계가 아닌 제3의 변수에서 찾아보아 야 하겠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이 돌궐이다. 돌궐은 당과 직접 교전하지는 않 았지만 동북방을 두고 끊임없이 각축전을 벌인 존재이다. 이러한 견해 는 이미 日野開三郞이 제기하고 있으며,46) 흑수말갈이 발해의 허락을 받고 돌궐 吐屯을 요청한 것이나,47) 733년에 거란이 당에 반격을 가 할 때 발해와 함께 돌궐 역시 거란을 군사적으로 지원한 사실48)을 통 해서도 잘 드러난다.

Ⅲ. 당의 동북방정책 변화의 국제적 배경

1. 731년, 돌궐 闕特勤의 죽음

716년(개원4)에 당을 크게 압박하던 돌궐 默啜이 살해되고, 이후 돌 궐 부락을 장악한 이가 毗伽可汗이다.49) 毗伽可汗은 暾欲谷의 계책에 따라 당과 화친하여,50) 725년(개원13)에는 대신을 보내 당 현종의 東 巡에 참여하고, 727년에는 토번의 밀서를 당에 전하며 당과 互市를 통해 교역하였다.51) 이렇듯 당과 돌궐은 직접적인 군사 충돌이 없이

46) 日野開三郞, 小高句麗の硏究, pp.159-184.

47) 舊唐書 卷199下, p.5361; 新唐書 卷219, p.6180.

48) 舊唐書 卷199下, p.5353; 新唐書 卷219, p.6171; 全唐文 卷352, 「爲 幽州長史薛楚玉破契丹露布」, p.1578, “西連匈奴東搆渤海收合餘燼窺我阿降奚我 是以有盧龍之師.”

49) 舊唐書 卷194上, pp.5172-5173; 新唐書 卷215下, pp.6048-6051; 資 治通鑑 卷211, p.1431.

50)資治通鑑 (卷212, p.1434)에는 開元6년 정월에 돌궐이 화친을 청하자 이를 허락하였다고 하지만, 新唐書 卷215 突厥傳(p.6052)과 冊府元龜 卷 980 (pp.11510-11511)에는 돌궐이 화친을 청하였으나 당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기 록한다.

(13)

표면적으로는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양국관계는 당의 책봉이 이루어지지 않은 관계였고 돌궐의 구혼을 당이 줄곧 거절하는52) 상황이었다. 이러한 긴장 상태에도 불구 하고 양국은 모두 대내외적으로 상당히 안정된 상태를 이루고 있었던 까닭에 대등한 역학관계 속에 상호간에 직접 交戰을 피하는 정책을 취 하였다.53)

의외로 양국의 갈등은 거란과 발해에서 친당/친돌궐의 정치세력 다 툼으로 표출되었다. 앞서 발해왕 대무예는 친당적인 대문예와 갈등하 였고,54) 당의 책봉을 받은 거란왕과 이에 반목하고 돌궐에 귀의한 可 突于의 갈등이 또한 그러하다. 따라서 당의 발해ㆍ거란을 둘러싼 동북 방 정책은 발해나 거란의 친돌궐세력과 이들을 후원하는 돌궐을 염두 에 둔 것임은 재론할 것이 없다. 당의 동북방정책이 급변한 이유도 돌 궐과 관계되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전제하에 당의 동북방정책이 전환되는 시점을 중심으로 돌 궐 내부 형편을 살펴볼 때, 무엇보다 눈에 띄는 사건은 바로 731년(개 원19) 3월55)에 발생한 闕特勤의 죽음이다.

闕特勤은 毗伽可汗의 아우로, 默啜이 살해된 후 默啜 휘하의 세력을 모두 제거하고 형 默棘連을 가한으로 옹립한 군사실력자이다. 때문에

51) 舊唐書 卷194上, pp.5176-5177; 新唐書 卷215下, p.6053.

52) 舊唐書 卷194上, p.5175, “突厥前後請結和親, 獨不蒙許, 何也?”

53) 이러한 사실은 暾欲谷(돌궐)과 張說(당)이 각기 상대국을 평가하는 내용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舊唐書 卷194上, p.5174; 新唐書 卷215下, p.6052,

“不可,天子英武,人和歲豐,未有間,且我兵新集,不可動也.”; 舊唐書 194上, p.5175; 新唐書 卷215下, p.6053, “突厥雖請和,難以信結也。且其可 汗仁而愛人,下爲之用,闕特勒善戰,暾欲谷沈雄,愈老而智,李靖、世勣流也,

三虜方協,知我擧國東巡,有如乘間,何以御之?”

54) 김종복, 발해정치외교사, pp.112-128.

55) 闕特勤의 사망시기에 대해 新唐書 (卷215下, p.6053)ㆍ冊府元龜 (卷 975,褒異2, p.11453)ㆍ資治通鑑 (卷213, p.1447)에서는 731년(開元19)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舊唐書 (卷194, p.5177)에서는 732년(開元 20)으로 기록 한다. 岑仲勉(突厥集史 上, 北京: 中華書局, 1958, p.430)은 731년(開元19) 으로 보았다.

(14)

毗伽可汗 역시 자신이 나라를 얻은 것이 闕特勤의 공이라 하며 可汗의 자리를 闕特勤에게 양보하고자 하였고, 闕特勤은 이를 받지 않고 대신 左賢王에 임명되어 군사를 전담하였다.56) 그가 돌궐의 군사력을 장악 한 실력자임을 알 수 있다. 張說은 돌궐 내부의 핵심적인 세 인물에 대해 그 능력과 자질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小殺(毗伽可汗)이란 자는 인자해 사람을 아끼니 백성들이 (그를) 위해 일하고, 闕特勤은 날래고 용맹하며 싸움을 잘하니 (그가) 향하는 곳에는 대적할 자가 없으며, 暾欲谷은 매우 주도면밀하고 지모가 있어 늙었다고 하나 더욱 지혜로워 李靖과 徐勣과 같은 인물입니다”57)

돌궐의 내ㆍ외정은 毗伽可汗ㆍ闕特勤ㆍ暾欲谷의 세 사람이 주축이 되어 안정적으로 이끌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돌궐의 군사 역량이 闕 特勤에게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闕特勤의 죽음 은 당과의 역학관계에서 그 균형을 깨뜨릴 수 있는 중요한 사건으로 주목할 만하다.

闕特勤의 죽음에 당 현종은 직접 비문을 쓰며 애도하고 또 金吾將 軍 張去逸과 都官郎中 呂向을 파견하여 조문하였다.58) 이러한 예우는 당의 조문이 순수한 애도의 목적이었는가를 의심하게 한다.59) 이와 관 련하여 역시 책봉 없는 조문사60)를 3차례나 파견했던 토번의 예를 통

56) 舊唐書 卷194上, p.5173; 新唐書 卷215下, p.6051.

57) 舊唐書 卷194上, p.5175; 新唐書 卷215下, p.6053, “且其可汗仁而愛 人,下爲之用,闕特勒善戰,暾欲谷沈雄,愈老而智,李靖、世勣流也,三虜方 協,知我擧國東巡,有如乘間,何以御之?”

58) 新唐書 卷215下, pp.6053-6054; 舊唐書 卷194, p.5177.

59) 당이 파견한 조문사는 대개 內史舍人ㆍ祠部郎中ㆍ太常丞ㆍ司農丞ㆍ郎將ㆍ京 兆少尹ㆍ左淸道率ㆍ贊善大夫 등 주로 5-6품의 관직자이다.

60) 당 건국부터 현종대까지 책봉 없는 조문사가 파견된 것은 모두 9건이다. 이 중 건국초에 돌궐에 2차례의 조문사 파견이 있지만, 당이 돌궐에 칭신했던 상 황에서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밖에 건국초(武德2)에 고창, 그리고 642년에 고구려에 책봉 없는 조문사가 파견되었다. 고창의 예는 당이 아직 대내적인 통일도 이루지 못한 상황에서 대외적인 책봉에 관심을 둘 여력이 없는 상태였 고, 고구려의 예는 고구려를 견제하며 책봉을 보류하는 당의 정치적 선택에 따른 것임을 살펴볼 수 있다.

(15)

해 살펴볼 수 있다.61)

고종 즉위초(652년)에 토번 贊普 棄宗弄贊이 사망하자 당은 3품의 右武衛將軍 鮮于臣濟를 조문사로 파견하였다.62) 3품의 장군이 책봉 없는 조문사로 파견된 것이다. 의외로 그 이유는 679년(調露元年)에 토번 贊普 芒松芒贊의 죽음63)을 전해들은 고종의 계획을 통해 잘 드 러난다. 당 고종은 8세의 어린 器弩悉弄64)이 즉위하자 이를 기회로 토번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다.65) 그러나 裴行儉은 토번 內政이 論欽陵 에 의해 안정적으로 장악ㆍ유지되고 있으므로 불가능하다고 반대하였 고, 결국 당은 정5품상의 郞將 宋令文을 조문사로 파견하였을 뿐이 다.66)

이로써 볼 때, 당이 3품의 장군 鮮于臣濟를 토번에 조문사로 파견한 이유는 토번 贊普의 죽음으로 내부적인 동요가 발생할 가능성을 염두 에 두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토번을 중국적 질서에 편입시키고자 한 것으로 해석된다.

당이 闕特勤의 죽음에 金吾將軍 張去逸을 조문사로 파견한 목적도 같은 이유일 가능성이 크다. 즉 당은 돌궐 군사실력자의 죽음에 따라 내부적인 동요가 발생할 것을 염두에 두고 이를 기회로 돌궐을 중국적 질서에 편입시키고자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돌궐 闕特勤의 죽음에 얼 마 안 있어 毗伽可汗이 大臣 梅錄啜에게 독살되고 또 당이 그 아들 伊

61) 廉景伊, 「唐 高宗代 對外 政策의 性格과 意味」 (中國史硏究 57, 中國史學 會, 2011), pp.43-44.

62) 舊唐書 卷4「高宗本紀」, p.68; 舊唐書 卷196上, p.5222.

63) 劉立千은 西藏王臣記 각주272)에서 芒松芒贊(松贊干布의 손자)의 사망 시 점에 대해 芒松芒贊이 죽고 수일 후에 태어난 器弩悉弄이 704년에 29세로 사 망한 것을 역추적하면 芒松芒贊의 죽음은 676년이 된다고 언급하였다. 資治 通鑑과 新唐書 吐蕃傳에는 679년(儀鳳4)으로 기록하고 있다.

64) 五世達賴喇嘛의 西藏王臣記 (氏族出版社, p.33)에는 都松芒布吉으로 기록 하고 있다.

65) 資治通鑑 卷202, pp.1361-1362.

66) 舊唐書 卷196上, p.5224; 冊府元龜 卷979, p.11498; 資治通鑑 202, p.1362.

(16)

然可汗을 책봉한67) 사실로 보아 돌궐에 대한 당의 책략은 성공적이었 다고 하겠다.

당은 闕特勤의 죽음이 毗伽可汗 중심의 권력질서에 타격을 주는 사 건임을 파악하고 그의 죽음을 호기로 삼았으며, 이후로 당의 돌궐 정 책은 적극적으로 돌궐에 영향력을 강화시키며 돌궐 가한을 책봉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편으로 闕特勤의 죽음은 동북방의 질서를 당이 주도적 으로 재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즉 731년 3월에 돌궐 闕特勤이 죽자 당은 731년 가을에 발해에 위 협적인 칙서를 보내고 732년 정월에 거란을 정벌하는 등 동북방에 대 해 공격적인 정책을 실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闕特勤의 죽음은 당 이 동북방정책을 전환시킬 수 있는 국제적 요인이었음이 분명하다.68)

2. 730년, 唐과 吐蕃의 화친

당이 동북방에 대해 적극적인 공세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직접 적인 계기가 돌궐 闕特勤의 죽음이라면, 여기에서 한기지 더 상기해야 할 것은 강력한 토번의 존재이다.

토번은 당 고종대로부터 중종대에 이르기까지 당을 심각하게 압박 하였고,69) 이러한 당과 토번의 관계는 당의 동북방 정책이나 관계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다.70) 이와 관련하여 이미 진인각은 다음과 같이 지

67) 舊唐書 卷194, p.5177; 冊府元龜 卷964, 「外臣部」, p.11345.

68) 이후로 발해와 거란이 더욱 강경하게 반당정책을 취한 것은 아직 돌궐 毗伽 可汗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돌궐과 연합하여 동북방에 대한 당의 장악력을 저 지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러나 거란의 可突于도 참수되고 돌궐 毗伽 可汗마저 죽음에 이르자 전세는 당쪽으로 기울었고, 결국 발해와 거란은 곧 당에 사신을 보내며 관계를 회복시키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69) 廉景伊, 「唐 高宗代 對外 政策의 性格과 意味」.

70) 서영교는 羅唐戰爭의 개시와 종결이 당 서변에 위치한 토번과 유관함을 밝 히기도 하였다. 서영교, 「羅唐戰爭과 吐蕃」 (東洋史學硏究 79, 동양사학회, 2002); 「羅唐戰爭의 開始와 그 背景 -국제정세 변화와 관련하여」 (歷史學報

173, 역사학회, 2002).

(17)

적하고 있다.

“당은 宇文泰의 關中本位政策에 따라 국가적 중심이 서북방면에 있었 고, 토번의 강섬함이 이백여년이나 지속됨에 따라 당시 당이 極盛의 시기 였음에도 동북방면에 현상유지의 소극적인 政略을 취하였다. 국가의 군사 력과 재력을 적극적으로 동원하여 서쪽의 변경을 개척하며 중앙아시아를 통치하는 것이 관롱지역의 안전을 확보하는 국가정책이었다”71)

당의 동북방 정책이 토번의 압박으로 인해 크게 제한받았다면, 반대 로 당의 동북방정책이 강경책으로 전환되는 이유도 토번과 상관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즉 당이 서변의 토번에 군사력을 집중시킬 필요가 없는 상황, 예를 들면 우호적인 화친이 이루어지고 이것이 지속되는 상황이라면, 당의 동북방정책이 예전의 현상유지의 소극적인 政略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정벌로 전환될 수 있다는 논리가 되는 것이다. 논리 의 타당성을 당과 토번의 관계를 통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종으로부터 중종대에 이르기까지 당과 토번의 관계는 토번 우위 의 역학관계를 이루고72) 토번의 공세적인 요구를 당이 수용ㆍ화친하 는 형세였다. 710년에 이루어진 금성공주의 出降이73) 그 결정판이다.

그러나 양국관계는 현종이 절도사체제를 통해 변방을 강화하고 714년 (개원2) 10월에 武階 전투에서 토번에 대승을 거두면서 변하기 시작하 였다. 이후 토번은 敵國禮74)나 舅甥親署誓文75)을 요구하였으나 당이

71) 陳寅恪, 「外族盛衰之連環性及外患內政之關係」 (唐代政治史述論稿, 上海古 籍出版社, 1998), p.279.

72) 토번이 670년(咸亨元年)에 서역 18州와 당의 안서4진을 복속시키고 또 672 년(咸亨 3)에 吐谷渾의 영토를 모두 획득하면서 토번 우위의 역학관계가 형성 되었다.

73) 당시 토번 贊普 器弩悉弄(都松芒布吉)이 남조토벌 중에 죽고 금성공주는 器 弩悉弄의 아들 棄隸縮贊(赤德祖敦)과 혼인하였다.(五世達賴喇嘛 著, 劉立千 譯 註, 西藏王臣記, 北京: 民族出版社, p.34, p.183.)

74) 토번이 이때(714, 開元2)에야 敵國禮를 요구한 것은 군사적으로 당(고종-중 종대)을 압도하던 시기에는 敵國禮 등의 중국적 질서에 얽매이지 않았던 까닭 으로 보인다.

75) 資治通鑑 卷212, p.1435.

(18)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리어 河西隴右節度使 王君彘가 매년 토번 을 공격하고76) 이후로(727-729) 河西節度使 蕭嵩ㆍ瓜州都督 張守珪 등이 토번을 격퇴ㆍ대파하였으며, 729년(개원17)에는 朔方節度使 信安 王 褘가 石堡城을 탈환하여 토번의 공격로를 차단하는 큰 공을 세웠 다.77)

결국 730년(개원 18), 토번의 조건 없는 請和에 당은 皇甫惟明과 내시 張元方을 화친사로 파견하고, 토번 贊普 역시 기뻐하며 답례하였 다.78) 이로부터 737년(開元 25)에 河西節度使 崔希逸이 토번과의 盟 을 깨고 토번을 습격하기까지 당과 토번의 우호적인 通使는 거듭되었 다.79)

즉 당과 토번의 화친이 이루어지는 730년부터 737년까지는 당이 동북방에 대한 정책을 군사적 공세로 바꾸어 당이 주도하는 질서로 재 편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렇게 당과 토번의 화의는 당의 동북방정책이 강경책으로 전환될 수 있었던 또 다른 국제적 요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토번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張守珪와 信安王 褘 의 활동무대가 동북방으로 바뀌었다는 것도 그 반증이다. 730년 거란 의 反唐에 대해 침묵하였던 당은 732년 정월에 朔方節度副大使 信安 王 褘를 河東ㆍ河北行軍副大總管으로 삼아 거란과 해를 정벌하라는 조 서를 내렸다. 그리고 그해 3월, 信安王 褘는 거란과 해를 격파하고 사 로잡은 많은 무리를 참수하였다.80) 하지만 다음해(733년), 정벌을 피 해 달아난 可突于가 돌궐ㆍ발해 등과 연합하여 唐軍을 격파하자, 당은 734년에 張守珪를 幽州節度使로 삼았고, 그해 6월에 장수규는 거란을

76) 舊唐書 卷99, p.3094; 新唐書 卷216上, p.6083.

77) 資治通鑑 卷213, pp.1443-1445.

78) 冊府元龜 卷979, p.11502; 新唐書 卷216上, p.6084.

79) 廉景伊, 「唐 玄宗代 使臣派遣과 그 外交的 役割」 (中國史硏究 54, 중국사 학회, 2008), pp.43-47.

80) 舊唐書 卷76, p.2652; 資治通鑑 卷213, pp.1447-1448; 舊唐書 199下, p.5353.

(19)

대파한 후 거란왕 屈烈과 可突干를 참수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81) 이상에서 당과 토번의 관계가 당의 동북방정책과 밀접한 상관성을 갖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즉 당은 현종 즉위이래로 계속 토번과 군사 적으로 충돌하였으나 730년의 화의로 군사 충돌은 소강상태로 접어들 고 우호적인 通使가 지속되었으며, 바로 이러한 토번과의 화친은 그동 안 소극적이고 외교적 차원의 해법에 그쳐야 했던 동북방정책을 강력 한 군사정책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새로운 국제적 요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Ⅳ. 맺는말

732년(개원20)에 발해가 당 등주를 공격하면서 당과 발해의 분쟁이 폭발하였다. 당시 당과 발해는 발해 왕자 大門藝의 망명을 계기고 갈 등이 증폭되었고, 당이 기존의 소극적이고 외교적인 태도를 버리고 갑 자기 위협적인 칙서를 발해에 보내 발해를 격발시켰다.

당의 태도변화는 거란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당은 거란의 권신 可突于가 책봉을 받은 거란왕과 끊임없이 반목하며 친당/반당을 거듭 하고 있음에도 줄곧 참을성 있게 책봉ㆍ회유를 반복하였으나, 일순간 급변하여 732년 정월에는 대대적으로 거란을 정벌한 것이다.

당의 동북방정책이 군사적 공세로 전환된 시점은 발해가 당의 기미 주인 흑수말갈을 정벌하거나 거란이 반당한 시점(730년)이 아니다. 이 는 당의 정책 전환이 발해나 거란과의 관계를 직접적 계기로 하지 않 는 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당과 함께 동북방에 영향력을 행사하 고 당과 각축전을 펼치던 돌궐을 주목할 수 있다.

당의 동북방정책이 전환되는 시점(731년 가을 이후)에 주목할 만한

81) 舊唐書 卷103, p.3194; 資治通鑑 卷玄214, pp.1449-1450; 舊唐書卷 199下, p.5353.

(20)

것은 돌궐의 군사실력자인 闕特勤의 죽음이다.(731년 3월) 闕特勤은 당이 ‘그가 향하는 곳에 대적할 자가 없다’고 그 실력을 인정한 인물 이다. 그가 죽고 얼마 안 되어 돌궐 毗伽可汗이 독살되고 또 당이 그 아들(伊然可汗)을 책립한 사실로 보아, 闕特勤의 죽음은 당이 돌궐에 대해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나아가 당의 동북방정책이 공세적으로 전환되는 국제적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당의 동북방정책에 큰 영향을 미치는 국제적 요인으로 토번과의 관계를 간과할 수 없다. 당은 강성한 토번이 관중으로 진출 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군사ㆍ경제력을 총동원해야 했던 만큼 동북방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외교 정략을 취할 수밖에 없었는데, 730년(개원 18)에 당이 토번의 요청에 따라 화친하였고 이후로도 737년(개원25) 까지 양국은 우호적인 通使를 거듭하였다. 당의 동북방정책이 강경책 으로 전환될 수 있는 국제적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이에 따라 토번과 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張守珪와 信安王 褘가 이번에는 對거란전 에 투입되어 거란을 대파하고 反唐세력을 궤멸시키며 활약하게 된 것 이다.

결론적으로 당과 발해의 분쟁은 발해를 둘러싼 대내외적 요인과 함 께 그동안 외교정책으로 일관하던 당의 동북방정책이 공격적으로 전환 되면서 촉발되었다고 하겠다. 또한 당의 동북방 정책의 전환은 730년 에 토번과의 화친 그리고 731년에 돌궐의 군사실력자인 闕特勤의 죽 음이라는 국제적 요인으로 인해 가능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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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文提要)

唐开元末期东北地方政策的變化与国际背景

-关于732年渤海进攻唐(登州)的原因

廉 景 伊 (全北大)

732年9月(开元20年), 渤海进攻了唐的登州.

学界对有关渤海进攻唐登

州的国内外原因,从多角度进行了研究. 但是,渤海进攻唐之前,唐的东 北地方政策发生巨大变化的事实却被忽视了.

开元年间,唐同东北地方的契丹·奚以及渤海等维持着平稳的外交关系.

同渤海形成和平的册封-被册封关系的同时,采用册封·和亲·赐物等方法与 唐玄宗即位初期内附的契丹及奚维持着安定的外交关系.

当渤海进攻唐的 羁縻州或者契丹的叛唐降服于突厥的时候,唐政府仍旧耐心地维持其东北

地方政策.

但是,唐政府在731年秋季给渤海送去了具有威胁性质的敕书,并于 732年正月,对契丹发动了大规模的进攻. 即唐政府的东北地方政策向着 采取军事性攻势的方向发生了急变.

这可以看做是渤海通过进攻唐的登州 来实现积极防卫政策的直接理由.

关于为什么唐政府东北地方政策发生急变,比起唐与渤海及契丹的关

系,我们有必要探察一下唐与突厥的关系. 因为当时突厥为了确保东北地 方势力与唐展开了角逐战. 在这个时间点,值得注目的是作为突厥军事势 力者的阙特勤的死亡.

阙特勤是得到了唐“所到之处所向披靡”认证的人物.

他死后没多久,突厥的毗伽可汗被毒杀,唐朝册立他的儿子. 通过这一些 列的行动,我们可以说阙特勤的死亡成为唐对突厥行使影响力的契机,进 一步对唐的东北地方政策形成了巨大影响.

同时,唐与吐蕃的和亲成为一个国际重要因素. 唐与吐蕃军事冲突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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断,为了缓解这一局面,双方在730年(开元18年) 进行了和解. 而到737

年(开元25年)

为止一直持续的和亲政策成为唐政府能在东北地方集中军事

力量的重要原因.

总而言之,在关注渤海进攻唐成为唐东北地方政策向着军事进攻性转换

的更直接的原因这一事实的同时,我们可以知道唐政府东北地方政策的急

变是伴随着同吐蕃的和亲以及突厥阙特勤的死亡所展开的.

주제어 : 당, 발해, 거란, 동북방정책, 돌궐, 토번 關鍵詞 : 唐, 渤海, 契丹, 東北地方政策, 突厥, 吐蕃

Keywords: T'ang, Parhae, Ch'i-tan, the northeastern province policy, Turks, Tibet

(원고접수: 2015년 4월 29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5년 6월 15일, 수 정원고 접수: 6월 22일, 게재 확정: 6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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