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代의 互市와 張保皐의 對唐交易
鄭 炳 俊 (東國大)
Ⅰ. 머리말
Ⅱ. 당의 호시 관련 규정
Ⅲ. 호시의 운영
Ⅳ. 장보고의 대당교역과 그 성격
Ⅴ. 맺음말
Ⅰ. 머리말
互市란 중원 왕조와 주변 국가 또는 민족 사이에 이루어진 교역을 말하며, 關市․交市․胡市 등으로도 불렸다.
冊府元龜
에서는 호시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렸다.대저 천자가 사방 이적을 기르는 것에는 懷柔의 이치와 覊縻의 뜻이 있는데, 대체로 변경을 안정시키고 중국을 편안하게 하려는 까닭이다. 즉 호시의 설치는 그 회유와 기미의 의미이다. 이에 한 초에 처음으로 논의 를 시작한 후 이를 가지고 변경에 사람이 모이는 장소를 택하고 關市의 법을 시행하여 그 물자를 소통시키고 신의를 돈독하게 하였다. 역대 왕조 가 준수하니 이 또한 오랑캐와 잘 지내는 기술의 하나이다.1)
즉 호시는 안정된 대외관계를 위해 이민족을 회유하고 기미하기 위
*이 논문은 2010년도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의 지원비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1) 冊府元龜 권999, 外臣部, 互市의 머리말, “夫王子之牧四夷也, 有懷柔之道焉, 有覊縻之義焉, 蓋所以底寧邊鄙休息中夏者也. 則互市之設, 其懷柔覊縻之旨與. 爰 自漢初始建斯議, 繇是擇走集之地, 行關市之法, 通彼貨賄敦其信義. 歷代遵守斯亦 和戎之一術也”(中華書局, p.11725).
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실제 황제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 신이 허가한 경우에만 외국와의 교역을 허락하고, 그 외의 교역은 철 저하게 통제하였다. 만약 조공이나 복종하지 않고도 중국 문물을 획득 할 수 있다면 주변국에 대한 황제의 권위는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2) 호시는 시대에 따라 약간의 변화가 있었지만, 이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어느 정도 유지되었는가가 항상 중요한 관건이 되었 다. 특히 사무역에 대한 실질적 통제 여부는 매우 중요했다고 할 수 있다.
장보고의 대당교역이 어떤 절차와 규정에 따라 행해졌는가를 전하는 구체적 자료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크게 보아 그것이 당대 호 시의 범주에서 행해졌을 것은 분명하다. 호시에 관한 규정의 상당 부 분이 장보고의 대당교역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상호간의 교역을 규정하 였다는 말이다. 이에 당대 호시에 대한 고찰은 장보고가 행한 대당교 역의 양태를 더욱 풍부하게 알게 할 뿐 아니라 그 교역의 성격을 더욱 명료하게 규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당대의 호시에 대해서는 專論이 몇 편 발표되었지만,3) 호시와 장보고의 대당교역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고찰한 연구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먼저 당대 호시의 제도적 절차와 그 구체적 운영형태 를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장보고 선단의 대당교역을 둘러싼 몇 가지 문제들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당대의 호시는 官ㆍ私의 구별이 있었지 만, 원래 모두 황제의 인가가 필요했다. 이전 논문에서 필자는 장보고 가 행한 대당교역의 성격을 넓게 보아 ‘광의의 공무역’으로 규정한 적
2) 榎本淳一, 唐代의 조공과 무역 (해상왕장보고연구회 편, 장보고관계연구논 문선집 -중국편․일본편-, 해상왕장보고연구회, 2002; 원래는 古代文化 50-9, 1998에 게재), pp.646-651; 同, 唐王朝と古代日本 (吉川弘文館, 2008), pp.131-135 등(이하, 出典은 처음에만 적겠다).
3) 張澤咸, 唐朝與邊境諸族的互市貿易 (魏晉南北朝隋唐史 1993-1, K22; 원래 는 中國史硏究 1992-4에 게재); 張澤咸, 邊境互市貿易 (唐代工商業, 中國 社會科學出版社, 1995); 劉玉峰, 試論唐代民族貿易的管理 (山東大學學報 1999-2); 劉玉峰, 唐代工商業形態論稿 (齊魯書社, 2002) 등.
이 있다.4) 즉 장보고의 대당교역은 청해진대사라는 공적 신분을 활용 하여 진행된 공적 성격을 띤 교역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해당 논문에 서는 교역상의 구체적 형태에 대해서는 별로 다루지 못했다. 여기서 그 교역의 구체적 형태를 추적하면서 앞의 입론을 다시 한번 음미해 보겠다.
Ⅱ. 당의 호시 관련 규정
중국에서 호시가 법제화된 것은 漢代부터였다.
唐六典
권22, 少府 監ㆍ軍器監, 諸互市監 조의 原註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한․위 이래 緣邊 郡國에는 모두 호시를 두고 夷狄과 교역하여 그 物 産을 유치하였다. 모두 군현이 주관했고 별도로 官吏를 두지 않았다. 隋 에 이르러 諸緣邊州에 交市監을 설치했는데, 종8품에 해당하였다. 副監은 정9품에 해당하였다. 唐은 이를 따라 [교시감을] 두고 각각 관할 州․府 에 예속시켰다. 감은 품계가 높아져 종6품하에 이르렀다. 부감은 丞으로 바뀌고 정8품하가 되었다. 光宅 시기(684, 무측천)에 通市監으로 고쳤다가 나중에 互市監으로 복구하였다(中華書局, p.580).5)
즉 한대 변경의 郡․國에는 모두 호시를 설치하여 이민족과 교역을 행 하였는데, 당시에는 별도의 전문 관리를 두지 않았다.6) 그러다가 수대 에 처음으로 변경 주(즉 諸緣邊州)에 交市監과 副監을 두어 전문적으 로 호시를 관리․감독하게 하였다. 당은 이러한 수의 제도를 계승하면 서 교시감과 부감의 명칭을 각각 互市監과 丞 등으로 바꾸고 품계를 종6품하와 정8품하로 높였다.
신당서
권48, 百官志, 少府의 互市監 조에는 “蕃國交易의 일을 관장하였다”라고 하며 여기에 원주를 달아 4) 鄭炳俊, 押新羅渤海兩蕃使와 張保皐의 對唐交易 (중국고중세사연구 21,2009), pp.374-375.
5) 김택민 주편, 역주 당육전 하 (신서원, 2008), p.117.
6) 한대의 호시에 대해서는 余英時, 邊境貿易 (漢代貿易與擴張, 上海古籍出版 社, 2005) 등 참조.
隋는 호시감을 四方館에 예속시켰다. 당은 少府[監]에 예속시켰다.
···[속관으로는] 綠事參軍 1인, 府 1인, 史 4인, 價人 4인 掌固 8인이 있 었다(p.1272).
라고 하였다. 호시감 등의 품계가 높아진 것은 당대에 들어 호시가 더 욱 중시된 것을 나타낸다. 수대의 사방관은 東都 建國門 밖에 설치되 어 왕왕 동도 鴻臚寺를 대신하여 涉外事務를 처리한 임시관부였다.7)
당 후기에 장보고 등이 교역활동을 전개하는 登州를 포함한 ‘해안 주’8)에도 당대에 호시감이 설치되었을까? 호시감이 설치된 앞의 ‘緣邊 州’는 그 구체적 州 명칭이 법규로 정해져 있었다.
唐會要
권24, 諸 侯入朝, 玄宗 開元 18년 11월 조를 보면,勅을 내려서 靈, 勝, 涼, 相, 代, 嶲, 豊, 洮, 朔, 蔚, 嬀, 檀, 安東, 疊, 廓, 蘭, 鄯, 甘, 肅, 瓜, 沙, 嵐, 鹽, 翼, 戎, 愼, 威, 西, 牢, 當, 郞, 茂, 驩, 安, 北庭, 單于, 會, 河, 岷, 扶, 拓, 安西, 靜, 悉, 姚, 雅, 播, 容, 燕, 順, 忻, 平, 靈, 臨, 薊 등 59州를 邊州로 삼았다(上海古籍出版社, p.537).
즉 靈州, 勝州, 涼州 등 59주가 ‘內地州’ 또는 일반 주와 구별되는 ‘변 주’9)로 지정되었다. 이때의 변주는 앞의 ‘연변주’와 같은 것이 분명하 7) 隋書 권28하, 百官志, “初煬帝置四方館於建國門外, 以待四方使者, 後罷之, 有 事則置, 名隸鴻臚寺, 量事繁簡, 臨時損益. 東方曰東夷使者, 南方曰南蠻使者, 西 方曰西戎使者, 北方曰北狄使者, 各一人, 掌其方國及互市事. 每使者署, 典護錄事·
敍職·敍儀·監府·監置·互市監及副·參軍各一人. 錄事主綱紀. 敍職掌其貴賤立功合 敍者. 敍儀掌小大次序. 監府掌其貢獻財貨. 監置掌安置其駝馬船車, 幷糾察非違.
互市監及副, 掌互市. 參軍事出入交易”(p.798). 자세한 것은 石曉軍, 隋唐四方館 考略 (唐硏究 7, 2001), pp.312-315, p.322 참조.
8) 해안에 접한 州를 편의상 지칭한 것이다. 김종섭은 해안에 위치한 幽州, 橫海, 平盧淄靑 등 11개의 번진들을 ‘연안번진’이라 칭하며 그들 번진들의 정치적 동 향과 대외업무를 비롯한 몇 가지 특징을 고찰하였다( 唐代 중앙과 沿岸藩鎭의 관계 -대외업무를 중심으로- , 아세아해양사학회, 장보고 대사의 활동과 그 시대에 관한 문화사적 연구 1,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2007).
9) 敦煌에서 발견된 開元戶部格殘卷 에도 邊州란 명칭이 보인다. 즉 “勅, 諸蕃商 胡若有馳逐, 任於內地興易, 不得入蕃. 仍令邊州關津鎭戍嚴加捉搦. 其官屬西․
庭․伊等州府者, 驗有公文, 廳於本貫已東來往. 垂拱元年八月廿八日”(劉俊文, 敦煌吐魯番唐代法制文書考釋, 中華書局, 1989, p.278)라고 하는데, 이 역시 제
다. 다만, 이 기록에는 변주가 59개라고 적혀 있지만, 실제 그 숫자를 세어보면 56개이다. 게다가 靈州가 두 번 적혀 있기 때문에 실제 숫자 는 55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戶部式에서도 59개라는 숫자가 명기 되었던 것10)으로 보아 59개라는 것은 한때 제도화되었던 숫자로 보인 다. 한편,
당육전
에는 50개의 변주 명칭을 적고 있으며 주 명칭도 앞 의
당회요
에 보이는 것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11) 이러한 것은 국경 선의 신축에 따라 변주가 조금씩 바뀐 것을 나타낸다. 어쨌든 여기서 유의할 것은 이들 ‘변주’ 안에 해안에 위치한 주 명칭이 보이지 않는다 는 점이다. 즉 등주와 같은 이른바 ‘해안 주’들은 제도상의 ‘연변주’가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등주 등에는 호시감과 호시승이 설치되지 않 았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하지만 해안 주 역시 변주와 마찬가지로 외 국의 사신이나 상인이 입국하는 통로였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서는 언 제든 변주와 같은 기능을 수행해야 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살펴보겠다.당조는 외국에 대해 비교적 개방적이었지만, 당조의 허가를 받지 않 은 교역에 대해서는 여전히 엄격한 통제를 가하였다.
唐律疏議
권8, 衛禁律, ‘越度緣邊關塞’ 조를 보면,무릇 변경의 關塞을 넘는 자는 徒刑 2년에 처한다. 외국인[化外人]과의 사사로운 교역을 통해 주고받은 것이 비단 1자에 해당하면 도형 2년 반 에 처하고, 3필에 해당될 때마다 1등급을 더하며 15필에 해당되면 加役流 에 처한다. ···사행[使]을 이용하여 사사로이 교역한 자는 절도죄에 준 하여 처벌한다(中華書局, pp.669-672).
라고 규정하였다. 국가의 허가 없이 사사로이 외국인과 교역하는 것이 도적 명칭으로 생각된다.
10) 唐律疏議 권28, 捕亡律 28, 諸在官無故亡 조의 疏, “邊要之官, 戶部式, 靈·勝 等五十九州爲邊州”(中華書局, p.537).
11) 唐六典 권3, 尙書戶部, 戶部郞中 조, “安東, 平, 營, 壇, 嬀, 蔚, 朔, 忻, 安北, 單于, 代, 嵐, 雲, 勝, 豊, 鹽, 靈, 會, 涼, 肅, 甘, 瓜, 沙, 伊, 西, 北庭, 安西, 河, 蘭, 鄯, 廓, 疊, 洮, 岷, 扶, 柘, 維, 靜, 悉, 翼, 宋, 當, 戎, 茂, 嶲, 播, 黔, 驩, 容 爲邊州”(中華書局, p.73); 김택민 주편, 역주 당육전 상 (신서원, 2003), p.307.
일절 금지되었던 것이다.
당조가 교역을 허락한 경우에도 모든 교역은 관부의 통제와 정해진 절차에 따라야 했다.
白氏六帖事類集
권24, 市, ‘互市’ 조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영(즉 關市令)에 이르길 무릇 外蕃과의 緣邊 호시는 모두 互官司가 檢 校하도록 한다. 그 市는 서쪽 면에 해자를 파고 울타리를 세우며, 사람을 시켜 문을 지키게 한다. 市易하는 날은 묘시 이후에 각각 貨物과 畜産을 가지고 함께 시장으로 가는데, 官司가 먼저 蕃人과 물건의 가격을 정한 연후에 교역한다(
隋唐文明
38冊, 古吳軒出版社, 2005, p.736).12)즉 관부가 외부와 차단된 특정한 공간을 마련한 뒤 교역 당사자들이 정해진 시간에 모이면 먼저 호시관이 이민족과 협의하여 가격을 정한 후 이에 따라 교역을 진행하였다고 한다. 공간, 시간, 가격 등 제반에 걸쳐 호시관의 통제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사료에 적힌 互官司는 互市 官司를 가리킨다고 보인다.13) 그리고
당육전
권3, 尙書戶部, 金部郞 中․員外郞 조의 原註를 보면官․私 호시에서는 오직 帛練․蕃綵만을 사용할 수 있으며, 그 밖에는 일절 교역할 수 없다. 官市인 경우에는 백련과 번채의 비율을 2:1로 한다.
만약 蕃人이 糧食을 사들이는 경우에는 監司가 필요한 수량을 파악하여 州司에게 서로 알리고 백성이 물건을 가지고 호시로 가서 교역하도록 한 다(p.82).14)
라고 하여, 교환 화폐로 사용되는 비단의 종류와 교환 비율 등이 엄격 하게 규정되었고, 특히 이민족이 식량을 구입하려는 경우에는 호시감 이 관할 州와 상의하여 처리하게 하였다.15) 또 같은 책 권22, 소부감ㆍ 12) 仁井田陞, 唐令拾遺 (東京大學出版會, 1933), pp.715-716에서는 개원 25년의
‘關市令’으로 보았다.
13) 池田溫 等, 唐令拾遺補 (東京大學出版會, 1997), p.794; 石見淸裕, 唐の國際 交易と渤海 -朝貢․互市と貢獻制- (鈴木靖民 編, 古代日本異の文化交流, 勉 誠出版, 2008), p.644 등.
14) 김택민 주편, 역주 당육전 상, p.354 참조.
15) 榎本淳一, 唐代의 조공과 무역 , p.650에서는 “연변에서의 호시에서는 교역
군기감, 諸互市監 조에서는,
뭇 호시감은 각각 諸蕃과의 교역에 관한 일을 관장하며, 丞은 그 차관 이 된다. 무릇 호시에서 교역으로 얻은 말, 낙타, 나귀, 소 등에 대해서 각각 그 종류별로 나누고 나이와 등급을 상세히 갖추어 소속 州․府에 알리며, 주․부는 이를 [조정에] 申聞한다. 太僕[寺]은 관리를 파견하여 확인한 후 수령하고 낙인을 찍는다. 상급의 말은 경사로 보내고 나머지는 그 수량을 헤아려 모두 사자를 파견해서 [각 목감으로] 보내는데, 가는 길에서는 방목하도록 한다. 말 10필, 소 10두, 낙타․노새․나귀 6두, 양 70마리마다 牧人 1인을 붙인다. [原註 : 만약 이유 없이 가축을 상실하면 部使와 遞人에게 그 값을 배상하게 한다. 營州 관내에서 蕃馬가 매물로 나오면 젊고 건장한 것을 골라 官에서 매입한다](p.118).16)
라고 하여, 특히 유목민으로부터 말 등의 축산물을 매입한 경우에는 호시감이 그 상세한 내역을 먼저 해당 변주에 알리면, 변주가 다시 조 정에 보고하고 처분을 기다리도록 규정되었다. 상등의 말을 경사로 보 내거나 영주 관내에서 사들인 말 중 젊고 건장한 것을 관아에서 매입 하게 한 것은 국가에서 우선권을 행사하도록 한 것이다.17) 또한 호시 는 호시감과 주의 재량을 넘어서 중앙 정부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 운 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중앙에서 각지의 호시감을 총괄한 것은 소 부감이지만, 사안에 따라서는 태복시의 지시를 받기도 하였고, 또 그 위로는 戶部의 金部郞中과 員外郞이 내린 정책적 결정에 따라야 했 다.18) ‘우선권’은 호시가 이민족에게만 필요했던 것이 아니고 경우에 따라서는 중원 왕조에게도 이익이 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율령관제 하에서 호시감만이 호시를 감독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즉 품이 백련과 번채에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공사로서 당의 국내에서 교역하는 편이 더 많은 종류의 물품을 구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고 말한다.
16) 김택민 주편, 역주 당육전 하, p.118 참조.
17) 당조는 그 밖의 교역에 대해서도 ‘先買權’을 행사했다(榎本淳一, 唐王朝と古 代日本, p.100).
18) 唐六典 권3, 尚書戶部, 金部郞中員外郞 조, “凡有互市, 皆爲之節制”(p.82); 新唐書 권46, 戶部 조, “金部郎中․員外郎, 各一人, 掌天下庫藏出納․權衡度量 之數․兩京市․互市․和市․宮市交易之事, ···”(p.1193). 또한 이러한 것은 곧 이어 살펴볼 금부격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주의 일반 관리가 호시를 감독하는 경우도 있었다. 즉
백씨육첩사류 집
권24, 市, ‘姜互市格’ 조를 보면,金部格에 이르길 敕을 내려 松 當 悉 維 翼 등의 주에 있는 熟羌은 매 년 10월 이후 彭州에 와서 서로 교역하도록[互市易] 하였는데, 법에 따라 上佐 한 명을 蠶崖關19) 밖으로 보내어 市法에 의해 市場에서 교역하게 하고, 백성이 왕래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隋唐文明
38冊, p.736).라고 한다. 여기서 교역을 허가받은 5주 중 당주, 실주, 익주 3주는 앞 의
당회요
권24에 보이는 ‘변주’에 속하고, 유주는
당육전
에 적힌 50개의 변주 안에 들어 있다. 따라서 이들 4주에는 원래 호시감이 설 치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수한 사정에 의해 이들 3주의 강족을 포함한 5주의 강족들이 그 바로 동쪽에 위치한 팽주로 가서 호시를 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팽주자사가 상좌 1인을 파견하여 해당 5주 강족들의 호시를 감독하게 한 점이다. 팽주는 ‘변주’가 아니어서 별도로 호시감이 설치되지 않았 기 때문에 상좌를 파견하였던 것이라 하겠다. 이 경우에도, 교역의 절 차는 앞에서 살펴본 호시의 방식대로 행해졌을 것이 거의 분명하다.그렇다면 등주와 같은 ‘해안 주’에서도 외국과의 교역이 행해지는 경우 에는 상좌를 파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또 그 교역 방 식도 역시 변주에서의 호시와 거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상좌란 주의 副장관인 別駕, 長史, 司馬를 가리킨다.20)
당 후기에 들어 해안 주에서 외국과의 교역이 활발하게 행해지자, 이를 전문적으로 감독할 필요성이 생겨났다. 그때 당조가 선택한 방식 은 율령관직인 호시감의 확대 설치가 아니라, 使職의 발달에 수반한 새로운 관직의 설치였다. 현종 시기에 이미 영남의 廣州에는 市舶使를 설치하여 외국과의 교역을 전문적으로 감독하였다. 그때 감독의 기본 원칙은 호시 관련 규정에 의거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변주와는 19) 잠애관은 팽주 導江縣 서부에 있다(新唐書 권42, 地理志6, 彭州 조, p.1080).
20) 礪波護, 唐の官制と官職 , 唐代政治社會史硏究 (同朋舍, 1986), p.237 참조.
달리 사신이나 상인이 선박을 타고 왔기 때문에 이에 따른 감독 방식 에 차이가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 언급하겠다. 어쨌든 장보고 선단이 많이 내왕한 산동지역에는 사직인 押新羅渤海兩蕃使府가 설치 되어 외국과의 교역을 감독하였다. 압신라발해양번사가 교역을 감독하 였을 때도 일차적으로 호시의 규정에 의거하면서 동시에 지역적 특성 을 반영한 나름의 방식이 행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Ⅲ. 호시의 운영
당조는 호시의 교역 과정을 엄격하게 감독하였을 뿐 아니라, 교역 품목에 대해서도 통제를 가하였다.
당률소의
권8, 위금률, ‘齎禁物私 度關’ 조의 소의에는 ‘關市令’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錦, 綾, 羅, 榖, 紬, 綿, 絹, 絲, 布, 犛牛尾, 真珠, 金, 銀, 鐵은 모두 西邊 과 北邊 諸關으로 가지고 나가거나 緣邊諸州에서 興易할 수 없다 (pp.176-177).21)
즉 명기한 품목들은 ‘緣邊諸州’에서 교역할 수 없다는 규정이다. 이때
‘연변제주’는 앞에서 언급한 ‘諸緣邊州’, 즉 ‘변주’를 가리킴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 규정에서는 해당 품목에 대한 교역 금지가 변주에만 적용되는 듯이 적혀 있지만, ‘해안 주’에서 호시가 행해지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부언하면, 교역 금지품목에서 철과 이우의 꼬리 등은 군사용이고, 진주․금․은 등은 원재료가 아니라 고 도로 가공처리된 제품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22)
당조는 상황의 변화에 따라 호시에 대한 통제 방식이나 내용을 조 정하였다. 예를 들면, 현종 天寶 2년(743) 10월에 禁關西諸國興販敕
21) 仁井田陞, 唐令拾遺, p.715에서는 당율소의 권8의 해당 조문을 개원 25년 의 ‘關市令’으로 보았다.
22) 榎本淳一, 唐代의 조공과 무역 , p.652.
을 반포하여 서역 나라들의 내왕을 제한한 것이 보인다.
듣건대, 關 이서의 諸國이 교역을 위해 왕래하는 것이 끊이지 않는다 고 한다. 비록 이익을 구하는 것이라 하지만 끝내 外蕃과 交通하는 것이 며, 관행에 따른 것이 오래되었는데, 자못 온당치 못하다. 지금부터는 일 절 금단한다. 아울러 四鎭節度使 및 도중에 경유하는 군현들에게 엄히 감 독하게 하여 다시 왕래하지 못하게 하라(
당회요
권86, 市, p.1873).이 시기는 변주 등을 관할하는 절도사들이 변경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들에게 군사뿐 아니라 교역까지 통제하게 하는 것이다. 또 안사의 난 이후인 德宗 貞元 3년(787) 12월에는 토번의 平涼 침공으로 말미암 아 서쪽 지역에 긴장이 조성되었을 때 토번에 편입된 당항인들과의 교 역을 금지시켰다.
처음으로 상인들이 牛馬와 器械를 가지고 黨項 부락과 무역하는 것을 금지한다”(
구당서
권198, 黨項姜傳, p.5293).여기서 ‘처음’이라는 말로 미루어 볼 때, 그때까지 당조는 해당 당항인 에게 어느 정도 지속적 성격의 ‘무역’을 용인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만약 그렇다면 이와 같은 지속성을 지닌 교역을 용인한 것은 뒤에 장 보고의 대당교역을 살펴볼 때 참고가 될 것이다. 또한 宣宗 大中 5년 (851) 4월에 반포한 平黨項德音 에서는,
변경에서 兵器를 가지고 부락과 교역[博易]하는 것을 불허한다. 종전에 도 이러한 금지 제칙이 누차 반포되어 규정이 매우 명확하게 정해져 있 지만, 근년에 이르러 관행에 따라 모두 이를 준수하지 않고 있다. 지금부 터 해당 지역의 關․鎭․津․鋪에게 명하여 엄격히 단속하게 하여 소홀 히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唐大詔令集
권130, 鼎文書局, p.710).라는 조치를 취하였다. 당 후기에 당조의 권위가 크게 약화되면서 변 경 호시에 대한 통제력도 함께 약해지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당조 권위의 추락에 따른 통제력의 약화는 산동 해안지역도 예외가 아니었 을 것이다. 그리고 평당항덕음 을 조금 더 살펴보면,
通商의 法은 예부터 명확한 규정이 있었지만, 다만 곳곳에서 流行하여 자연히 饋運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邊鎮으로 하여금 마땅히 商旅를 招 引하여 모두 원래대로 하게 하라. 禁斷 병기를 제외한 다른 물건을 가지 고 部落과 왕래하여 교역[博易]하게 하라(상동).
라고 하여, 당조가 변경 藩鎭들로 하여금 상인들을 유치하여 부락과 교역하도록 하고 있다. 이는 당조의 통제력이 약화된 데 따른 불안정 을 보완하기 위한 조치로 변경 번진들에게 특정 금지 품목을 제외한 물자의 교역 관리권을 위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앙 권력을 지방 번진들에게 위임하는 것은 당 후기에 보편적으로 보이는 현상이며, 교 역 관리권도 그 중 하나였던 것이다.
호시의 운영이 당의 대외정책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음은 이전 시대 부터 보편적으로 보이는 현상이었다. 예를 들어
魏書
권100, 庫莫奚 國傳을 보면,[북위] 세종이 조서를 내려 말하길 “···[고막해는 태화] 22년(498)에 이르러 반역한 이래로 마침내 멀리 달아났다. 지금 비록 款附한다고 하나 여전히 변경 바깥[塞表]에 있으면서 매번 “새내로 들어와 백성들과 교역 하기”를 청한다. 만약 억누르고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 歸向하려는 마음을 어그러뜨릴 것이고, 허락하고 걱정하지 않는다면 혹여 만일의 동요가 생 길 것이다. 그 交易을 먼저 맡았던 자에게 의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일은 마땅히 부절[을 가진 자에게만] 한정할 것이며, 交市하는 날 州에서 上佐를 보내 감독하라”고 하였다(中華書局, p.2223).23)
즉, 북위 세종이 호시를 이용하여 고막해를 회유하려고 한 것이 잘 묘 사되어 있다. 자사가 상좌를 파견하여 교역을 감독하게 했는데, 이는 변경 지역의 州에 아직 호시감과 같은 전문 관직이 설치되지 않았을 때의 상황을 전한다. 또 같은 책 권94, 契丹國傳을 보면,
모두 和龍과 密雲의 사이에서 交市할 수 있게 되었고, 공헌이 끊이지 않았다. ···후에 기아를 알리자 고조가 이를 불쌍히 여기고, 入關하여 市糴하도록 허락하였다(pp.2223-2224).24)
23) 동북아역사재단 편, 위서 외국전 역주 (동북아역사재단, 2010), pp.40-41.
라고 하여, 북위가 거란인을 회유하기 위해 그들이 국경을 넘어와 식 량을 구입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식량 입수 방식은 앞의
당육전
권3, 금부랑중․원외랑 조의 原註에 보이는 것과 거의 같았을 것이다.이러한 것은 모두 중원 왕조가 필요한 경우 호시를 유연하게 운영하였 음을 엿보게 한다.
변주의 호시감 관하에는 속리들이 배치되어 실무를 처리하였던 것 은 앞의
신당서
권48, 百官志에서 보았지만,25)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관직의 명칭이 기록에 전한다. 즉 안록산은 군대에 투신하기 전에 營 州의 互市牙郞이 되었다고 한다.아홉 蕃의 언어를 이해하여 諸蕃 互市牙郞이 되었다(
安祿山事迹
卷 上, 上海古籍出版社, p.1).또 史思明도 영주에서 호시아랑이 되었다가 군대에 투신하였다.26) 元 代의 胡三省은 같은 내용을 기록한
자치통감
기사의 ‘아랑’에 주석을 달아 “아랑은 중개인이다. 쌍방[南北]의 물가가 그의 입에서 결정된 후 서로 무역을 하였다”27)라고 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胡族 출신으로 여 러 외국어에 능통하기 때문에 호시아랑의 임명되었을 것이다.28) 영주 는 ‘변주’에 속하였기 때문에, 호시랑과 호시승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호시아랑은 호시감의 속리였을까? 호시감 산하의 어느 속리의 다른 이 름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서는 아랑이
신당서
백 관지에 적힌 율령 관제에 보이지 않는 점을 중시하여 후자의 경우로 보겠다. 그렇다면 호시아랑은 기존의 호시제도가 변화하는 양상을 나 24) 동북아역사재단 편, 위서 외국전 역주, pp.43-44.25) 김택민 주편, 역주 당육전 상, p.745에 부록으로 실린 [표 25] ‘호시감’에는 속리들의 流外品 등의 직급이 표로 정리되어 있어 참고가 된다. 이에 의하면 綠事(1인) 유외3품, 府(3인) 유외4품, 史(4인) 유외5품, 掌固(8인) 유외7품이 설 치되었고, 또 그 아래에 잡임인 價人(4인)이 있었다.
26) 舊唐書 권200상, 史思明傳, p.5376; 新唐書 권225상, 史思明傳, p.6426.
27) 자치통감 권214, 개원 24년 4월 조, p.6817.
28) 黎虎, 漢唐外交制度史 (蘭州大學出版社, 1998), p.527.
타내는 것이 된다. 실제로 현종대에 이르러 변경 정세의 변화에 따라 호시제도에 변화가 생긴 것들이 확인된다. 즉 韓愈의 淸邊郡王楊燕奇 碑文 을 보면
天寶 중에 平盧衙前兵馬使에 임명되었으며 지위가 特進․檢校太子賓客 에 이르고 弘農郡開國伯에 봉해졌다. 世世로 諸蕃 互市를 관장하였는데, 恩信이 두드러져 夷人이 따랐다(
韓昌黎文集校注
권6, 碑誌, 上海古籍出 版社, p.356).라고 하여, 영주 등을 통괄하던 平盧節度使 예하의 군장 평로아전병마 사가 호시를 관장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에도 호시감이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였을 수는 있지만, 호시를 관장하는 주도권이 주 예하의 호시감 에서 절도사의 지휘를 받는 군장으로 변화하고 있었던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것은 당의 국가운영체제가 율령관제에서 使職(즉 令外官) 중심으로 옮겨가는 일반적 과정과 맞물려 있다. 당 후기에는 앞에서 말한 押新羅渤海兩蕃使府와 같은 ‘押蕃使’ 계열의 사직들이 대거 설치 되어 별도의 관부를 거느리고 교역을 포함한 외국에 대한 업무들을 관 장하게 된다. 압신라발해양번사는 목종 원화 15년(820)에 이르면 직인 을 사여받고 관하에 巡官이 설치되어29) 관련 업무에 대한 전문성이 크게 높아진다. 이렇게 본다면, 호시아랑은 절도사 관하에서 활동한 속 리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Ⅳ. 장보고의 대당교역과 그 성격
압신라발해양번사는 오랫동안 평로치청절도사가 겸임하였다. 평로치 청 번진은 초기에 산동지역의 13주를 다스렸지만, 절도사 지위를 세습 하던 이정기 일가가 헌종 원화 14년(819) 초에 패망한 뒤 세 개의 번 진으로 분할되었다. 즉 鄆州․曹州․濮州(3주), 淄州․靑州․齊州․登 29) 鄭炳俊, 押新羅渤海兩蕃使와 張保皐의 對唐交易 , pp.362-363.
州․萊州(5주), 兗州․海州․沂州․密州(4주)로 나누어져 각각 하나의 독립된 번진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이 중 평로의 軍號를 계승한 것은 小치청 번진이며, 그리하여 평로치청이란 명칭이 변함없이 그대로 사 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小평로치청 번진은 압신라발해양번사의 직책도 승계하여 관련 업무를 계속 관장하였다.
압신라발해양번사가 수행한 업무는 ‘해안 주’라는 점에서 앞에서 언 급한 영남의 시박사와 유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광주 시박사의 업무 와 관련된 것을 잠시 보면, 먼저 太和八年疾愈德音 에 다음과 같은 기술이 보인다.
舶脚, 收市, 進奉을 제외하면, 내왕한 상황에 맡겨 스스로 교역하게 하 고, 거듭 세금을 거두지 않도록 하라(
全唐文
권75, 文宗, 中華書局, p.785).이때 ‘박각’은 선박세, ‘수시’는 시박사가 먼저 물건을 사들이는 것, ‘진 봉’은 황제에게 진상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절차가 끝나면 내왕한 상인들에게 교역을 허락하였는데, 이때도 시박사가 거래 구역과 가격 등에 대해 일정한 통제를 가하였을 것이다. 또 韓愈의 送鄭尙書序 에 는
동남쪽 아득한 곳에는 수만 개의 나라들이 있는데, 때때로 순조로운 조류를 이용하여 조공하고, 蠻胡 상인들은 해상에서 배로 교역한다[舶交 海中](
韓昌黎文集校注
권4, p.284).30)라고 하여, 상인들이 배 위에서 교역을 행하였다는 것도 보인다. 이러 한 교역 절차 또는 교역형태는 선박을 통한 입국이라는 점에서 장보고 선단에 대해서도 적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시박사와 압신라 발해양번사를 그대로 연결하여 동일하게 이해하는 데는 조금 신중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시박사의 경우에는 남해에서 들어오는 진귀한 물품을 황실에서 직접 입수하기 위해 환관을 해당 관직에 임명하기도 30) 이주해 역, 한유문집 1 (문학과지성사, 2009), pp.304-305.
하였던 점에서 명확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경우 시박사는 영남절도사와 협력하여 업무를 수행하였다. 이에 대해 압신라발해양번 사는 황제에 대한 진봉의 직무를 수행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결국 당의 대외교역 관리는 시기에 따라 차이만이 아니라 지역적 차이 까지 세세하게 고려하여 유연하게 운영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여기에는 각국에 대한 정치적 이해관계가 배려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31)
당 전기에는 주변국이 당에서 호시를 행하기 위해서는 황제의 허가 를 받아야 했지만, 당 후기에 이르면 황제의 허가를 받지 않고 현지 관아의 재량으로 호시가 행해지는 상황이 전개되었다.32) 이런 가운데 장보고 시대에 신라인과 발해인이 등주 등에서 교역을 할 때 압신라발 해양번사의 감독을 받았음을 알게 하는 기록이 있다. 즉
冊府元龜
권999, 外臣部, 互市, 文宗 開成 원년(836) 6월 조를 보면,淄靑節度使가 奏하여, 신라와 발해가 熟銅을 가지고 왔는데, 禁斷하지 않기를 청하였다(p.11727).
라고 하여, 신라인과 발해인이 치청지역에 熟銅을 가지고 와서 교역을 청하자 치청절도사가 조정에 허가를 구하는 내용이다. 이때 치청절도 사가 황제에게 숙동 교역을 청한 이유는 銅이 교역 금지품목이었기 때 문이라고 생각된다.33) 앞선 덕종 건중 원년(780) 10월의 칙령에서 교역 금지품목 속에 새롭게 동이 포함되었는데, 이들 교역 금지품목에 대해 서는 평로치정절도사 겸 압신라발해양번사일지라도 황제의 허가가 있
31) 후기 당조는 신라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태도로 많은 특혜를 주었을 것은 신 라와 발해의 쟁장사건에 대한 처리 등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장보고의 대당 교역은 이러한 국제적 조건 속에서 수행되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생 각된다.
32) 榎本淳一, 唐代의 조공과 무역 , p.647, pp.654-655, pp.657-658; 同, 唐王朝 と古代日本, p.84, p.275; 劉玉峰,唐代工商業形態論稿, p.208.
33) 鄭炳俊, 李正己 一家의 藩鎭과 渤海國 (중국사연구 50, 2007), p.153; 同, 押新羅渤海兩蕃使와 張保皐의 對唐交易 , p.372.
어야 교역을 허락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문종 개성 4년(839) 7월 신라 왕 김우징이 淄靑節度使 陳君賞에게 노비를 선물로 보냈을 때의 상황 도 이와 비슷했다. 즉 노비를 받은 진군상이 이를 황제에게 알리자 황 제는 조서를 내려 본국으로 돌려보내게 하였는데,34) 양자의 행동은 모 두 건중 원년 10월의 금령 안에 노비가 포함된 데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35)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신라인이나 발해인이 등주 등에서 교역을 행할 때, 압신라발해양번사의 관리․감독을 받은 것이 분명하 다는 점이다. 교역 금지품목 이외에는 압신라발해양번사가 자신의 재 량으로 교역을 허락하고 이를 감독하였으며, 그 기본 절차는 앞에서 살펴본 호시 규정과 함께 광주 시박사의 감독 방식이 혼합되어 운영되 었을 것으로 생각된다.36)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신라인의 대외무역 형태를 공무역과 사무역으 로 나눈 후 장보고의 교역활동을 ‘사무역’의 개념으로 규정한다. 즉 한 국의 윤재운, 김창석, 김문경 등의 견해가 그것이다.37) 권덕영의 예를 보면, 황해교역의 주체와 성격에 따라 그 무역의 형태를 다음과 같이 나누었다. 즉 ⓐ왕조와 왕조 사이에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이루어진 공무역, ⓑ영리를 추구하는 개인들이 교역의 주체가 된 사무역, ⓒ불법 적인 방법으로 재화를 획득하고 판매한 약탈무역 등으로 나누고 각각 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설명을 한다.38) 중국 학자들도 상황이 비슷하 다. 즉 拜根興은 평로치청 지역으로 숙동을 가지고 왔던 사람들이 ‘민 간 무역’을 한 것이라고 단언하고,39) 辛元歐은 장보고를 신라시대 최대 34) 冊府元龜 권980, 外臣部, 通好, 문종 개성 3년 7월 조, p.11517.
35) 鄭炳俊, 李正己 一家의 藩鎭과 渤海國 , p.372; 同, 押新羅渤海兩蕃使와 張 保皐의 對唐交易 , p.372.
36) 당 후기는 흔히 使職의 시대라고 하지만, 이는 사직이 율령관제를 지휘하는 형식이 많았던 데 따른 것이다. 당 후기에도 율령관제의 상당 부분은 그대로 기능하였다.
37) 鄭炳俊, 押新羅渤海兩蕃使와 張保皐의 對唐交易 , pp.373-374 참조.
38) 권덕영, 고대 동아시아의 황해와 황해무역 -8,9세기 신라를 중심으로 (대 외문물교류연구 7, 2007), pp.23-27.
39) 拜根興, 장보고의 해양활동과 중국학계의 연구동향 (아세아해양사학회, 장
의 해상 상인이며 황해 선단의 창립자였다고 말하며, 吳玲微 등도 장 보고를 신라 상인의 범주에서 설명한다.40) 또 일본의 榎本淳一도 비슷 한 견해를 제시하였다.41)
흥미로운 것은 田中史生의 견해이다. 즉 장보고가 淸海鎭大使에 임 명됨으로써 신라왕권의 공식 승인을 얻은 점을 주목하여, 이를 통해 그가 일본에서의 신라상인들을 재편․통합하여 안정적인 교역활동을 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다만 장보고가 신라왕권의 공적 승인을 얻었 다고 해도 그 교역은 국가교역 밖의 교역활동, 즉 국가 간 교역과 차 원을 달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42) 다른 연구자들과는 달리 장보고가 신라왕실의 공식 승인을 얻어 교역활동을 하였다고 하는 점이 주목되 는 것이다. 그런데 大使는 신라의 정규 관제에는 보이지 않는 官名으 로 당의 제도로 말하면 令外官(즉 사직)43)에 해당한다. 하지만, 사직 역시 엄연한 국가의 공식 기구이며, 당 후기에는 사직이 오히려 율령 관제를 능가하여 국가의 근간 역할을 수행하였다. 신라의 청해진대사 역시 국가 기구에 속하며, 그가 수행한 교역 역시 대외관계에서 볼 때 공적 성격을 지녔음을 완전 부정하기 어렵다. 실제 장보고 선단이 청 해진 대사라는 공적 직함을 공공연히 이용하였던 것이 여러 기록을 통 해 확인된다.44)
보고 대사의 활동과 그 시대에 관한 문화사적 연구 1,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 회, 2007), p.216.
40) 拜根興, 장보고의 해양활동과 중국학계의 연구동향 , pp.239-240에서 재인용.
王小甫, 8-9세기 당과 신라의 관계 (신형식 외, 신라인의 실크로드, 백산자 료원, 2002), p.50에서도 장보고를 해상무역 상인으로 간주한다.
41) 榎本淳一, 唐王朝と古代日本, p.141 등.
42) 井上直樹, 일본에서의 장보고 연구의 현황과 과제 (아세아해양사학회, 장 보고 대사의 활동과 그 시대에 관한 문화사적 연구 1,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 회, 2007), p.405에서 재인용.
43) 唐代 使職은 원래 그 직무가 어떤 관부의 관할도 받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柳宗元集 권26, 記, 諸使兼御史中丞壁記 , “古者, 交政於四方謂之使. 今之制, 受命臨戎, 職無所統屬者, 亦謂之使. 凡使之號, 蓋專焉而行其道者也. 開元以來, 其制愈重, 故取御史之名而加焉(中華書局, p.701); 오수형 등 역, 유종원집 2 (소명, 2009), p.423.
여기서 생각하고 싶은 것은 호시의 개념이다. 호시에 官․私의 구별 이 있었다는 것은 당대 법제 문헌에도 보인다.45) 법제상으로 관호시와 사호시라는 개념이 존재하였던 것이다. 관호시는 황실이나 관부가 행 한 교역을 말하고, 사호시는 백성들이 관부의 감독 하에 행한 교역을 말한다. 이와 같은 관․사호시의 구분에 따르면, 장보고의 대당교역은 광의의 의미에서 ‘관호시’의 범주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46) 이 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호시에 대한 石見淸裕의 개념 규정이다.
즉 石見는 사호시를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호시는 완전한 민간무역이라기보다는 官에 의한 엄중한 관리 하에서 용인된 이른바 일종의 半관영거래형태라고 할 수 있다”47)라고 하였다. 사호시 또는 민간무역을 ‘반관영거래형태’라고 한 것은 그것이 철저하게 관부의 통 제와 지휘 하에 진행되었던 점을 중시한 때문일 것이다.48) 이 경우, 관 부의 통제와 지휘라는 것은 언제나 국가의 정책적 판단을 고려할 수밖 에 없다. ‘반관영’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사용한 것은 기존의 연구가 공 무역이냐 사무역이냐는 양분법에 매몰되어 있는 한계를 넘어설 수 있 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하고 싶다.
장보고가 신무왕을 옹립한 몇 년 후인 840년 12월 太宰府를 통해 일 본 조정에 말 안장 등을 조공으로 바쳤다. 그러자 이듬해 2월 일본 조 정은 “다른 나라의 신하와는 국가 간의 교역을 할 수 없다[爲人臣無境 外之交]”49)라는 원칙을 천명하며 장보고의 조공을 인정하지 않고 그 헌상품을 돌려보냈다. 다만 적재 화물에 대해서는 민간과 교역하는 것 을 허락하고 사신에게는 전례에 준하는 양식을 지급할 것 등의 명을
44) 鄭炳俊, 押新羅渤海兩蕃使와 張保皐의 對唐交易 , pp.374-375 등.
45) 당육전 권3, 金部郞中 조의 原註, p.82; 구당서 권43, 職官志, 금부랑중 조, p.1828.
46) 鄭炳俊, 押新羅渤海兩蕃使와 張保皐의 對唐交易 , p.376.
47) 石見淸裕, 唐の國際交易と渤海 -朝貢․互市と貢獻制- , p.644.
48) 압신라발해양번사의 감독을 받지 않은 교역은 밀무역에 해당한다.
49) 延邊大學, 2006년 고구려 문제 학술대회 논문집 (동북아역사재단(내부자 료)), p.38, “人臣無外交” 참조.
太宰府에 내려보내는 조치를 취하였다.50) 이에 대해 濱田耕策은 장보 고가 상인 차원이 아니라 신라왕권의 외교권을 넘은 외교 전개를 목적 으로 한 것이라고 말한다.51) 당시 장보고는 개인 자격이 아니라 청해 진대사라는 직함을 내세웠을 것이 분명하다. 비록 일본 조정이 “爲人 臣無境外之交”의 원칙에 의거하여 헌상품을 돌려보낼 때 장보고의 사 신에게 전례에 준하는 양식의 지급 등을 명한 것52)은 장보고를 공적 존재로 인정한 때문으로 볼 수 있다.
752년 김태렴 일행이 일본에서 대규모 교역을 행한 것에 대해 다양 한 논의가 있다. 크게 볼 때 조공의 범주 안에서 행해진 공무역으로 보는 견해와 사신과 함께 간 교역상인을 중심으로 한 통상교역으로 보 는 견해로 나눌 수 있다.53) 전자는 신라가 발해와의 대립관계 속에서 그 배후를 견제하려는 입장에서 조공 외교에 수반되었던 공무역이란 관점을 취한다. 후자는 일본 귀족들이 제출한 ‘買新羅物解’가 신라 문 물을 구입하기 위한 신청 문서였고, 신라 사절 내지는 그를 따라온 상 인들이 가져온 문물이 일본 귀족들에게 제공되었던 만큼 신라 사절이 통상무역을 위해 일본에 갔다고 하는 입장이다. 이에 더해 당-남해-서 아시아 등의 물품을 신라와 일본의 교역을 위해 신라 상인이 개재함으 로써 중개와 전매를 주로 한 중계무역을 했던 것이라는 견해가 제기되 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김태렴이 일본에서 수행한 교역의 성격에 대해 조공무역이라는 견해에서부터 교역을 위한 방문이라는 견해까지 다양 한 의견이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김태렴의 대일교역에 대한 견해가 다양한 것은 양분법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속성들이 거기에 내
50) 續日本後紀 권9, 仁明天皇, 承和 7년 12월 조, “大宰府言, 藩外新羅臣張寶 高, 遣使獻方物, 卽從鎭西追却焉, 爲人臣境外之交也”(吉川弘文館, p.113).
51) 井上直樹, 일본에서의 장보고 연구의 현황과 과제 , p.407에서 재인용.
52) 松波宏隆, 일본의 대외교역과 장보고 관련 유적 (아세아해양사학회, 장보 고 대사의 활동과 그 시대에 관한 문화사적 연구 1,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2007), p.531 등 참조.
53) 박남수, 통일신라의 대일교역과 애장왕대 ‘交聘結好’ (대외문물교류연구 6), pp.80-81 참조.
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장보고의 대당교역에서도 마찬가지 라고 생각된다. 기계적인 양분법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까지 넓 게 포괄할 수 있는 개념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데, ‘광의의 공무역’ 개 념은 앞으로 그러한 연구를 위한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다.
Ⅴ. 맺음말
중국은 수대부터 변경에 위치한 ‘변주’에 호시를 관리․감독하는 전 문 관리를 두었다. 당대 변주는 약 50여 개가 제도적으로 정해져 있었 으며, 그 조직과 운영은 일반 주(또는 내지주)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 다. 그런데 등주와 같이 해안에 위치한 ‘해안 주’는 제도적 범주의 ‘변 주’가 아니었다. 따라서 등주 등에는 호시감이 설치되지 않았다. 하지 만, 해안 주 역시 외국의 사신이나 상인이 입국하는 통로였기 때문에, 필요한 경우 언제든 변주와 같은 기능을 수행해야 했다. 이 경우에는 州의 상좌 1인이 그 직무을 수행하였으며, 원칙상 호시 규정에 따라 관리․감독하였다.
당 후기에 이르면 당조 권위의 추락과 함께 변경에 대한 통제력도 약화되었다. 동시에 호시에 대한 감독권의 상당 부분이 변경의 번진들 에게 위임되었다. 장보고 선단의 중요한 대당무역 거점이었던 등주에 는 평로치청절도사 겸 압신라발해양번사가 설치되어 이전에 상좌가 수 행하였던 것보다 더욱 전문적으로 관련 직무를 수행하였다. 등주는 해 안 주였기 때문에 ‘변주’의 호시 감독과는 달리 선박에 대한 감독이 아 울러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때 호시 관련 규정 및 광주에서의 교역 방 식이 혼합된 형태로 적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장보고의 대당교역은 사무역의 성격을 지녔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이다. 이는 한국, 중국, 일본 연구자들의 거의 공통된 견해이다. 그런데
田中史生의 경우에는 장보고의 교역을 국가교역 밖의 교역활동이라고 보면서도 장보고가 청해진대사에 임명되고 신라왕권의 공적 승인 하에 교역을 행하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장보고의 교역활동이 조금이 라도 공적 속성을 지녔다고 본 것이다. 또 石見淸裕는 호시를 ‘半관영 거래형태’로 규정한 것이 주목된다. 이는 기존의 연구가 공무역과 사무 역이라는 양분법에 매몰되어 더 이상의 논의를 진전시키기 어려운 한 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으로 주목된다.
앞으로 장보고의 대당교역 활동을 논의할 때 근대적 개념을 바탕으 로 한 기계적인 공ㆍ사무역론을 넘어설 필요가 있으며, 그때 ‘광의의 공무역’ 개념은 나름의 방편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 개념을 포함 한 대외교역에 대한 전반적 성격 분류는 이후 수행하겠다.
(中文提要)
唐代的互市以及張保皐的對唐交易
鄭 炳 俊
在唐代, 通过在‘邊州’设立互市监来管理和监督互市. 唐代的‘邊州’大约有 50多个, 通过一定的制度而构成, 其组织和运作与内地州有一些区别. 然而, 诸如登州等靠近海岸的‘海岸州’并不在‘邊州’的制度范畴内, 这样一来在‘海 岸州’不设立互市监. 但是因为海岸州是外国使臣或者商人入国的必经之路, 所以不论何时, 在需要的时候还是会履行与邊州一样的职能. 在这种情况 下, 州上佐一个人管理此职务, 原则上通过互市的规定来管理和监督.
到了唐后期, 随着唐朝势力的下落, 其对边境的统治力也日渐嬴弱. 在此 同时, 互市监督权的相当部分也被委任给边境的藩镇们. 在张保皋船队的重 要对唐贸易据点——登州, 专门设置了平盧淄靑節度使兼押新羅渤海兩蕃 使来管理相关事务. 登州因为属于海岸州的原因, 与邊州中的互市管理不 同, 需要对船舶监督管理. 个人认为, 当时应该是综合使用了互市的相关规 定以及广州的交易方式.
普遍认为张保皋的对唐交易带有私贸易的性质, 但是笔者认为可以理解 为‘广义的公贸易’. 理由就是考虑到张保皋灵活使用‘淸海鎭大使’这个官职 而进行交易的原因. 在这一点上, 日本的田中史生在说明张保皋的交易是在 国家交易之外的交易活动的基础上, 强调了张保皋被任命为淸海鎭大使后, 在新罗王权认可下而进行交易的情况. 而且石見淸裕对于互市是以‘半官營 去來形態’而规定的观点也值得注目. 对于现有研究中的所谓公贸易
、
私贸 易的两分法, 这些见解因为揭示了可以扩大讨论的范围、
超越现有界限的 可能性而值得注意. 个人认为, 以后在论述张保皋的对唐交易活动时, 需要超越以近代概念为基础的机械的公ㆍ私貿易論, 那时‘广义的公贸易’这一概 念也就自然而成立.
주제어: 호시, 장보고, 압신라발해양번사, 평로, 절도사, 대당교역 關鍵詞: 互市, 張保皐, 押新羅渤海兩蕃使, 平盧, 節度使, 對唐交易,
Keywords; Border Markets, Jang Bogo, Tang Superintendent of Silla-Balhae Affairs, Ping-lu, Military governors, Trade with Tang China
(원고접수: 2010년 10월 8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12월 6일, 수정원고 접 수: 12월 21일, 게재 확정: 12월 27일)